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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영화는 워낙 정적이어서 관객들을 장중하고 기품 있는 영화의 관찰자로만 머물게 만든다. 전개상의 많은 부분은 스크린 밖 화자에 의해 해설된다. 세 시간 분량의 영화에 적합하게 충분히 많은 사건들을 담은 소설의 이야기를 전하는 내레이터에 의해 주인공이 비운의 숙명을 맞게 된다는 걸 인지하고 들어가지만, 이렇게 정적인 인물을 둘러싸고 회오리치는 그러한 동난(動亂)들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는 다른 모든 것들을 잃고도 대수롭게 생각지 않을 만큼 냉정하다. 자신의 분신인 아들의 죽음만이 그를 황폐화시킬 뿐이다. 주인공 “배리 린든”(Barry Lyndon)으로 분한 라이언 오닐(Ryan O'Neal)은 자기중심적 인물로서, 또 다른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후에도 섬뜩하리라만치 차가운 인상을 투영한다. 도박, 신용사기, 복 받은 결혼과 귀족신분을 획득하기까지, 자신이 이룩한 것들에 대해서도 기쁜 내색을 하기보다 특유의 냉정함을 잃지 않는다.
다른 등장인물들은 외형적으로 관심을 끈다. 퀸 대위로 분한 리오나드 로시터(Leonard Rossiter)의 냉소적인 입 꼬리는 배리의 불륜을 불식시킬 만큼 사악하고, 귀부인 린든으로 분한 마리사 베렌슨(Marisa Berenson)은 표정연구의 가치를 지닌다. 도박장 테이블에서 촛불을 사이에 두고 배리와 나누는, 심히 정적이지만 그 자체로 강렬한 위력을 표출하는 인상적 장면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아들에 대한 극명한 애정 외에 베일에 가린 감정연기는 실로 압권이다.
영화의 예산규모나 300일 간의 촬영일정 등, 완벽주의는 큐브릭이 아니면 그 어떤 감독이 궁극적으로 한 남자의 흥망성쇠에 관한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다루면서, 이와 같은 호기를 부릴 수 있을지 자문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가 역설하는 심상 안에서 영화를 보도록 이끈다. 관객들은 단지 큐브릭의 영상을 보는 것만이 아니다. 감독이 지향하는 양식적 관념에 근접하지 않는다면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은 단지 아름다운 사치나 방종처럼 보일 것이다.
공상과학걸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에서 가장 “인간적인” 캐릭터는 의외로 컴퓨터였고, <시계태엽 오렌지>(1971)는 폭력에 대한 객관적 타당성에 관해 특히 본질적으로 불온한 인간성을 투영했다. 앤서니 버지스(Anthony Burgess)의 소설에서 딴 <시계태엽 오렌지>(A Clockwork Orange)의 제목은 큐브릭의 유물론에 대한 태도를 예증했다. 그는 근본이 있는 계통적 주제를 다루면서 그것들을 마치 무감정한 기계처럼 해체하고자 했다. 단지 자신의 영화를 통해 관객들의 반응을 보려는 게 아니라, 모두가 일정한 반응을 보이는 걸 증명코자 한 것이다. 1960년 <스파르타쿠스>(Spartacus) 이후 이상주의나 감정에 의해 가동되고 성립되는 주인공을 절대 재창출하지 않은 이유도 그래서였다.
<배리 린든>에서 역사 속의 사건들은 모험과 스릴에 찬 로맨스를 제공할 수 있지만, 큐브릭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미시적인 안목에서 배리의 삶을 명확하게 진단한다. 그는 앤서니 트롤럽(Anthony Trollope)나 조지 엘리엇(George Eliot)과 같은 19세기 영국문필가들의 태도를 사유한다. 전지한 시점에서 능숙한 솜씨로 연출하고 그 재재들 상에서 전적으로 냉정한 지적탐구를 꾀한다.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유머나 인간적 캐릭터의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다. 희비가 엇갈리는 사랑과 성공의 그림자 속에서 배리 린든 자신은 모를 불변의 이기주의적 경향들을 사건들을 통해 관객들의 의식에 이입시킨다.
<배리 린든>에서 큐브릭 감독은 두 가지의 거리를 둔 장치들에 의해 이야기전개로부터 초연한 자세를 취한다. 해설자(마이클 호던)는 열쇠가 될 모든 전개사실들을 미리 관객들에게 알려줌으로써, 서스펜스와 절박함을 의도적으로 소멸시킨다. 그리고 촬영기술은 매우 세심하고 거의 냉담하게 구성된 이미지의 연속이다. 영화가 거머쥔 네 개 부문 오스카상 중 세 개의 트로피가 촬영상(존 알콧), 미술감독상(켄 애덤) 그리고 의상상(울라-브릿과 밀레나 칸노네로)에 집중된 이유다. 다수의 풍광들은 원경촬영이 잦다. 들판, 언덕, 구름을 포함한 전경은 18세기 영국의 풍경화가 토머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의 풍경화를, 그리고 실내장식은 18세기 영국의 초상화가 조슈아 레이놀즈(Joshua Reynolds)의 화풍을 투영한다.
이 영화는 역대 가장 아름다운 영화들 중 하나임에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 그 미감은 감성적 서비스가 아니다. 장려한 시대적 배경을 거울삼아 등장인물들은 음모와 추문들과 놀아난다. 그들은 카드에서 속임수를 쓰고 사기결혼을 한다. 엉뚱한 결투까지 일삼는다. 이 영화는 유럽을 휩쓴 7년 전쟁에 관한 시대적 배경을 가진 영화다. 배리 린든과 관련해 연속되는 도전적 자세 외에는 그러나 전쟁에 주목할 만한 생각을 갖기 어렵다. 그렇게 큰 무대에 그렇게 작은 특징적 인물들을 배치하고 그들로부터 관객들을 강제 분리함으로써 큐브릭은 그가 자신의 캐릭터들을 통해 전언한 것처럼 아주 명확히 철학적 견해를 대신한다.
영상은 사건들 속에서도 기품을 유지한다. 슬픈 장례식에 어울리는 헨델(Handel)의 '사라방드'(Sarabande)의 화음진행을 비롯해 영화전반을 장식하는 다양한 클래식명곡들을 수반하면서 말이다. 18세기와 19세기 초 클래식명곡들로 채워진 사운드트랙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스트라우스의 'Also Sprach Zarathustra'(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시계태엽오렌지>에서 베토벤의 'Symphony No. 9'(9번 교향곡)에 필적한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The Concerto for violin and oboe in C minor'(C단조 바이올린과 오보에를 위한 협주곡) 편곡, 비발디(Vivaldi)의 'Cello Concerto In E Minor'(E 단조 첼로 협주곡), 슈베르트(Schubert)의 피아노삼중주 E Flat Major의 안단테(Andante) 그리고 모차르트(Mozart)의 'Idomeneo'에서 행진곡(March)과 독일 춤곡(German Dance) 'No. 1 In C Major'(C 장조 1번) 등의 고전음악이 영화에서 시대적 배경과 지적 낭만을 보강하고, 내러티브의 일부로서 얽혀 절묘하게 작용한다. 아일랜드 켈틱(celtic)음악의 대표주자 치프턴스(The Chieftains)의 연주도 배경에 녹아든다.
특히 슈베르트의 곡은 배리가 린든을 만난 자리,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뜨겁게 응시하는 촛불장면에 사용되어 비장한 긴장감을 팽팽하게 주입한다. 행진곡 풍의 지속적인 피아노 리듬과 트릴주법에 의해 전율하는 현의 울림이 신경계를 깊이 파고든다. 불륜을 위한 서곡(?) 메인타이틀음악으로 사용된 헨델(George Frideric Handel)의 장중한 'Sarabande'(사라방드), <The Suite in D minor HWV 437>(D단조 HWV 437의 조곡)에서 발췌한 곡은 원래 하프시코드 독주를 위한 곡이지만, 메인과 엔드타이틀에 적합하게 편곡, 스트링과 팀파니가 더해져 낭만적으로 협주되었다. 영화상에서 다양한 관점에 맞게 다양한 편곡으로 사용되어 주인공의 비정한 운명을 암시한다.
한편 스코어는 레너드 로젠만(Leonard Rosenman)이 악상을 제공했다. <자이언트>(Giant), <환상적 여행>(Fantastic Voyage), <혹성탈출>(Beneath The Planet Of The Apes) 그리고 <말이라 불린 사나이>(A Man Called Horse)로 유명한 영화음악거장은 런던의 국립교향악단(National Philharmonic Orchestra)을 지휘, 완성한 스코어로 오스카음악상(Best Adaptation of Music)을 수상했다.
어떤 이들은 <배리 린든>에서 매혹을 만나게 될 것이고, 노련한 영화제작자의 습작이라고 냉정하게 본 다른 이들은 대단히 지루하다고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두 가지 의견 다 일말의 공감을 살 만하다. 이토록 담대한 영화에서 지루해하지 않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리 린든>은 흔한 오락영화가 아니다. 큐브릭이 세상을 보는 방식에 대한 도해로서 자신의 철학적 통찰력을 담아낸 또 하나의 예증이다.
배역 및 출연배우
배리 린든(Barry Lyndon): 라이언 오닐(Ryan O'Neal)
린든 여사(Lady Lyndon): 마리사 베렌슨(Marisa Berenson)
기사(The Chevalier): 패트릭 매기(Patrick Magee)
포츠도르프 대위(Capt. Potzdorf): 하디 크루거(Hardy Kruger)
퀸 대위(Capt. Quin): 레너드 로시터(Leonard Rossiter)
해설자(Narrator): 마이클 호던(Michael Hordern)
제공: 워너브라더스 영화사
감독: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William Makepeace Thackeray)의 소설에 근거
상영시간: 184분. 관람등급: PG등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