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시계는
- 옥토가 되어
이 창 범
“헛되고 헛되며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잠언 1장 2절)
풋풋한 초록의 계절이 엊그제 같은데 어렴풋이 피어나는 그리움에 자맥질 하면서 추억을 더듬어 가로라 하니 어느새 칠십 성상이 수채화처럼 만감이 교차한다.
내가 지난날 어떻게 침잠에서 아픔이 있었듯 애잔하기도 하면서 상념에 젖어본다. 날씨가 후덥지근하고 속상하기도 하지만 산다고 생각하니 모두가 즐겁고 소망이 있다.
늘 누구나 속상해하면서 마음 다스리지 못하고 밤 지새우는 날들이 있겠지만, 이 모두가 부질없는 일이다.
어느 목사님의 설교에서 ‘밤에도 태양이 비친다.’라고 하던가. 독일의 이상주의 소설가 ‘장 파울’은 “인생은 한 권의 책이다.”라고 했다. 유명한 작가도 아니지만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쓰기로 늘 주님에게 지혜를 주시라고 기도한다.
인간의 깊은 고뇌를 앞에 놓고 신과의 관계에서 초연할 자 그 몇이나 있을까? 속담에 맏아들보다 낫다는 지팡이가 어느새 길동무가 될 때이고 보니 이제 나도 나이를 먹었구나 느껴진다. 집사람이 엉덩이도 주체 못하고 다리를 절며 계단을 따라오는 것을 보면서 세월에 장사가 없다고 되뇐다. 참 고운 아내였는데……. 덧없이 맑은 공기, 한여름을 추상하는 내 고향 방갓재 생각이 오늘따라 더 늪과 같이 외로움에 걷잡을 수 없이 파고든다. 세월이 무엇인지 대정동 고샅길을 한번 눈을 감고 그려본다.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힘들게 모은 재산을 한순간에 셋째 딸에게 다 주고 돌아가시어 노잣돈도 없이 힘들어 기다렸는지? 이 나이가 들어서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한평생 실수 한 번 하지 않고 살아오셨고 그 많은 재산을 그 얼마나 애지중지하셨는데……. 힘들어 재산 모은 찰나에 그 딸의 한입에 털어 넣고 저 멀리 가셨다.
그 셋째 딸은 뒤돌아보지 않고 호의호식하면서 궁궐 같은 기와집 그 당시 100석 주고 매입 한평생 잘 살 것 같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우환이 그 집에 깃들더군? 나는 그것을 생각하면 분통이 치밀지만, 나의 재산이 아니기에 그렇게 되었다고 편하게 자위해본다. 그런데 그놈의 남편이 자기 잘못도 느끼지 못하고 시도때도없이 처남을 할퀴고 못살게 굴어 도저히 인내할 수 없어 생이별하고 말았다.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가지만…….
속 편하게 그놈을 이해하면 될 것을 그 사위가 얼마나 재산이 탐이 나서 훔치기까지 했겠는가 하면서 잘 돌봐주고 이해했으면 될 것을, 어디 사람이 그렇게 안 되더구먼! 그러고 보면 나는 아직도 많이 수양이 덜 된 것 같다.
그렇다. 서운할 게 무엇이 있겠는가? 세상은 어차피 빈손으로 떠나는 것. 그 사람인들 수백 년 살 수 없을 터, 세월에 대해 그다지 생각 없이 무예이다. 세월이란 놈이 여기까지 성큼 다가왔구먼! 어쩌고 저쩌고 할 시간이 없다. 온 힘을 다해 살면서 이제라도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아름다운 삶을 보내야겠다.
서울에 살 땐 무엇이 좋고 나쁜지 모르다가 공직생활로 이곳저곳 이사를 하다가 이제는 꺼칠한 경기도 생활을 하다 보니 추억이 나그넷길과 함께 憂愁가 된다.
하여튼, 어찌하라 지나가버린 세월인데 그리고 아쉬움인 것을…. 내 곁을 떠나는 것들이 오늘도 나를 슬프게 한다.
엊그제 봄이었는데 夏至라니 내가 사는 아파트 건너편 시원한 들판에 파란 미나리꽝이 있어 마음에 푸름이 든다.
오늘따라 나는 이렇게 원 수다로 자신을 까칠하게 깊게 드리워지는가. 아마도 老境이 어쩔 수 없나보다. 그렇다고 필자가 가는 세월 붙잡을 수도 없는 것을…….
처세가 자기만을 위한 무기가 되겠지만 미워하다 보면 내 마음에 상처가 드리워지고 함부로 버린 유리조각을 자기가 밟을 수 있다.
화계사 주지 수경 스님은 이 세상과 이별하며 죽음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다. “어느 따뜻한 겨울, 바위 옆에서 졸다 죽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 복을 타고나야 한다고 옛 어른들의 말씀이 맞다. 한평생 남에게 상처주지 않고 미워하지 말고 살다가 가야 한다. 무릇 이런 생각이 난다. 어느 목사님이 강단에서 설교하면서 성도 여러분 한평생 살면서 남을 원망이나 미워하지 않고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손을 들어보라고 하였더니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 속에, 회중석에서 어느 할머님이 자신 있게 손을 들어 할머니 진정 미워해 본 일이 없는가요?라고 묻자, 예, 미워했던 사람이 다 죽어 미워할 사람이 없다는 대답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인간이 엮어가는 환경이나 생각들은 별반 특이하지는 않을 텐데 나 자신을 뒤돌아보면서 지금 내 시계는 몇 시쯤 왔는지 사뭇 철학가 같은 사고를 해본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1788-1824)이 자신의 애견 보우슨이 죽었을 때 쓴, 실제로 개의 묘비에 새겨진 이 제목 ‘어느 뉴펀들랜드 개의 묘비명’ 시에 사랑하는 개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지만, 개와는 달리 아름다운 허영심을 가지고, 힘을 가졌으면 거만하고, 용기가 있으면 잔인해질 수 있는 우리 인간들의 야비한 모습을 꼬집는 것이다.
고 장영희 서강대학교 교수님은 이 시를 읽고 나서 “기껏해야 ‘시간의 차용자’인 주제에 마치 영원히 살듯, 내일 좀 더 사람답게 살아야지 생각하고, 오늘은 달면 삼키고 스면 뱉으며 의리 없이 살아가는 저의 마음에 경종을 울립니다!”라고 소감을 적고 있다.
위 보우슨의 묘비에서 바이런이 우리 인간을 한갓 ‘시간차용자 時間借用者’라고 표현한 것이 나에게는 매우 신선한 충격을 준다.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고운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