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각 전기철
시인은 감각이 예리해서 남들이 느끼지 못한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시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우선 감각을 예리하게 벼려야 한다. 칼처럼 갈고 닦으면 감각이 예리해진다. ‘나는 울고 싶어요’가 아니라 페소아처럼 ‘나는 눈물이고 싶어요’라고 할 줄 아는 게 시인이다. 이는 시인뿐 아니라 모든 예술가도 마찬가지다. 예술가는 개념보다는 형상적으로 사유하기 때문에 관념을 직접적인 감각이나 묘사로 표현한다. 시인은 모든 표현을 손에 접하고 눈에 보이고 귀로 들을 수 있으며 맛볼 수 있게 해야 한다. 시인은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지만 그 느낌이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지 않으므로 그 느낌을 손에 잡히고 귀고 듣고 맛볼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면 다음에서 어떻게 하면 감각을 예리하게 벼릴 수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오늘날 인간의 감각은 많이 무뎌졌다. 이제 인간의 감각은 기계나 도구가 대신해주고 있다. 생활의 편리는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의 원초적인 감각을 죽인다. 지진이 나거나 해일이 일어날 것 같으면 다른 동물들은 그걸 느끼고 미리 피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걸 알지 못한다. 이 모든 것들을 도구들이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각 활동가나 예술가는 문명을 탐닉하지 않아야 한다. 감각은 극히 원시적이며 동물적이다. 시인은 나무를 끌어안고 귀를 대보고 나무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나뭇가지에 앉아 울고 있는 새가 뭐라고 지껄이는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하며, 형광등 불빛의 맛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몸은 자연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신경이나 감각이 발달되어 있다. 인간은 본래 자연인이므로 자연과 소통할 수 있도록 신경이나 감각이 형성되어 있다. 우리는 본래 나무나 벌레, 혹은 바람과 신경이나 감각으로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이러한 감각은 퇴화하여 소수의 예술가에게만 남아버렸다. 현대 문명의 발달로 기계가 인간의 감각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시인이 되려는 이는 본래의 감각을 되살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감각을 예리하게 벼려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그 감각을 예리하게 만들 것인가.
영화 〈루시〉에서처럼 눈을 감고 양손으로 귀를 막고 자신의 몸속을 돌고 있는 피의 소리를 들어보자. 그리고 그것을 적어보자. 어떤 사람에게는 우당탕탕, 산에서 돌 구르는 소리가 들릴 것이고, 어떤 사람은 고요한 강물 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테다. 감각이 아주 예리한 사람은 루시처럼 지구가 자전하고 공전하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으리라. 감각은 자연의 일부인 우리 몸이 갖고 있는 지각 능력이다. 이 능력을 통해서 우리는 다른 자연과 소통할 수 있다.
감각은 다듬을수록 예리해진다. 보통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본다든가, 일반적이지 않은 엉뚱한 소리를 듣는다든가 하는 것들은 감각이 예리해서이다. 우리는 오감(五感)을 갖고 있다.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은 우리 몸이 외부와 소통할 때 필요한 신경세포의 담당 촉수이다. 이들 감각은 평소에 자주 활용할수록 발달한다. 그리고 이 오감이 발달하면 육감이 생긴다고 한다. 각각의 감각은 어떻게 발달하는가? 그것은 그동안 배운 논리적인 세계에서 떠나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논리적인 세계는 지적인 세계이며, 그 지적인 세계는 비자연적이다. 그러므로 논리적인 세계는 분별에 기초하고 있어서 과학적이다. 이는 문학적으로 본다면 산문의 세계이다.
산문에서는 말이 반드시 지시적인 대상을 갖는다. ‘산’은 하늘 아래 솟아 있는 뫼를 가리킨다. 그 뫼는 시간과 공감을 갖고 있고 그 시공간 속에서 의미가 만들어진다. 그런 지시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언어로는 감각은 예리해지지 않는다. 감각을 예리하게 다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논리적이고 지적인 근대적 이성의 판단을 내려놓아야 한다. 감각적 세계에서는 그때그때 주체의 느낌을 중시한다. 감각에 의존하는 예술가는 자신의 느낌을 자기만의 표현으로 적을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르게 느낀다는 걸 안다. 감각 활동가는 형상적 사유를 한다. 그는 주체의 감각으로 보고 귀 기울이며 맛을 느끼고 냄새 맡고 만져본다. 그리고 자신의 느낌이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그 다른 느낌, 자기만의 구체적 느낌을 기록하면 감각적 표현이 만들어진다. 시는 주체의 자기만의 감각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원래 우리는 문화나 문명에 자신을 맡기기 전에는 예리한 감각을 지녔다. 그러나 문화나 문명은 우리를 기계나 도구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편리한 도구로 인해 우리는 감각을 예리하게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본래 우리가 갖고 있었던 예리한 감각은 점점 죽어갔고, 그로 인해 우리는 자연과 소통이 끊어졌다. 감각에 의존하는 맹인의 귀가 얼마나 밝은지, 귀머거리의 눈이 얼마나 예리한지는 이미 밝혀진 바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아직 자신의 감각에 의존해야 하는 삶을 살아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고독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과의 만남은 늘 소통을 요구한다.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언어는 논리적인 도구이다. 소통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럴 경우 상호 간의 관계는 논리나 합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논리적이며 합리적인 대화는 감각적이지 않으며 창조적이지도 않다. 대화란 늘 상대방을 의식하고 배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화는 극히 상식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대화가 창조적일 리가 없다.
모든 장조적인 활동은 정신의 무한한 자유에서 나온다. 어떤 제한도 거스름도 없는 데에서 창조적인 상상력이 폭발한다. 모든 규제를 벗고 법을 넘어설 때, 나라고 하는 의식에서조차도 떠날 때 현재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내가 나와 대면했을 때, 다시 말하면 내가 인간 언어의 규범을 벗어났을 때 나는 가장 자유로워진다. 정진규가 자신의 시법(「어느 날의 나의 시법」)으로 언급한 “처절한 혼자일” 때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그 누군가를 의식할 필요도 없을 때 나는 합리적 소통에서 벗어난다. 그때 주체는 광대해져 나와 사물과 자연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나는 새가 말하는 소리도 내 맘대로 알아들을 수 있고, 강이 산속에 써놓은 문자를 해독할 수도 있다. 나의 마음이란 본래 없다. 사물이 내 마음을 읽기 전까지는. 사물이 주어가 되어 말을 하게 되면 그 말이 나의 말이 된다. 그때 내 안에서 울리는, 나무의 줄기를 따라 위쪽으로 물이 흐르는 소리나 지구가 도는 소리, 심지어 먼 별들이 반짝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수많은 물건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감각에 예리한 자는 백색소음,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침묵을 들을 수 있다. 영화 〈침묵〉이 있다. 그 영화 속은 침묵뿐이다. 하지만 침묵은 또 다른 소음이다. 묵언으로 하는 기도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고, 바람 소리, 종소리가 귓속에 가득하다. 내 입안에 삼켜버린 말들이 웅얼거리는 소리가 벌들이 웅웅거리는 것처럼 들린다. 〈침묵〉은 인간이 만들어낸 소음 속에서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려는 영화이다. 우리는 진정한 침묵 속에 든 적이 있는가. 우리는 인간의 언어 밖 언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나를 내려놓지 않고는, 다시 말하면 나라는 의식이 강하면 나는 사물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나라는 의식은 자신의 감옥에 갇히는 것과 같다. 나를 내려놓을 때 모든 생명체나 사물들이 나에게 다가온다. 나라고 하는 껍질을 벗어버릴 때 감각은 열린다. 우주의 소리를 듣고, 사물이 나를 만지는 촉감을 느끼며, 지구 반대쪽에서 굽는 파이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모든 감각은 구별이 없다. 눈으로 맛을 보고, 귀로 불빛을 들으며, 냄새가 나를 만지는 것을 느낄 때 감각은 예리해진다. 인간의 규범적인 틀에서 벗어나면 감각은 열린다. 손으로 목소리를 만질 수 있고, 귀로 맛을 볼 수 있으며, 눈으로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우리는 현상계를 감각으로 인지한다. 하지만 그 감각적 인식은 주관적이어서 참되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그 주관적인 단순한 감각 너머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감각과 감각의 틈새를 느끼는 것일 게다.
예리한 감각은 다양하게 섞이는 감각이다. 그것이 공감각이다. 공감각은 감각과 감각의 틈새에서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감각이다. 시인은 공감각을 통해서 감각을 디자인한다. 공감각은 여러 감각을 동시에 합성하는 시의 기법이다. 앞에서 언급한 합성이 말을 정서적으로 뒤섞는 것이라면 공감각은 여러 감각의 창조적인 되섞음이면서 틈새이다. 피아노 소리와 어느 여인의 눈빛을 합성하여 한마디로 말하면 어떻게 될까. 네 잠 속을 들락거리는 목소리는 누구의 외침일까. 네 눈이 걸어가는 길목에서 피자 맛이 딴지를 걸 때 어떻게 될까.
비둘기 우는 소리에서 가난한 사람의 얼굴을 본다든가, 어머니에게서 짠 맛을 느낀다거나, 우울한 하늘에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듣는다거나, 구름 떼에서 권태로운 여자의 목소리를 듣는다거나 하는 감각의 섞임, 혹은 틈새는 모두 공감각이다. ‘어머니의 눈이 나보다 먼저 대문을 연다’, 혹은 ‘피아노의 건반 위를 걷는 당신의 목소리에서 나오는 발자국이 파문을 낸다’라는 말들은 감각들이 섞이는 예이다. 소리를 보고, 빛을 들으며, 냄새를 만질 수 있다면 그는 공감각자이다. 위대한 예술가는 공감각자들이다. 모차르트는 위대한 공감각자였는데, 그의 음악을 들으면 풍경이 그려지고 그림이 보이고 시가 느껴진다. 드뷔시의 〈달빛〉에서는 달빛의 소리가 들리고, 〈바다〉에서는 파도의 얼굴이 보인다. 여러 색이나 도형으로 음악을 연주한 칸딘스키는 화가이면서 음악가였다. 색과 도형으로 음악을 연주한 칸딘스키는 화가이면서 음악가였다. 색과 도형으로 음악을 연주한 것이다. 색채와 음악의 결합, 혹은 틈새가 공감각이며, 누군가의 손길을 다른 감각으로 번역하는 것이 공감각이다. < ‘언어적 상상력으로 쓰는 시 창작의 실제(전기철, 푸른사상, 2020)’에서 옮겨 적음. (2020.11.15.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