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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r, Rosetta S. Hall 선교사 *평양기홀병원(좌측), 맹아학교(우측;어린이병원) |
한국 기독교의 최초 장애인 특수학교는 맹인학교로 1898년 평양에서 로져타 셔우드 홀(Dr, Mrs Rosetta Sherwood Hai) 선교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로제타 홀박사는 남편을 잃고 어린아들과 임신 7개월의 몸으로 1894년 12월에 해산키 위해 미국 방문 하였다. 그녀의 남편인 홀(Dr, W .J. Hall)박사는 콜레라 전염병을 진료하다 1894년 11월 24일에 별세한 것이다. 한강변 마포 양화진에 남편을 묻고, 이때 자신의 조수였던 박에스더 부부를 데리고 갔으며, 후에 박에스더는 한국 최초 여의사가 되었다. 로제타 셔우드 홀 박사는 남편이 못 다 이룬 복음선교의 사명을 이어나가는 것만이 그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이라 믿고 다시 한국선교를 준비하며 특히 맹인사역을 준비하였다.
▲ 한강변 마포 양화진의 남편 제임스 홀 선교사의 묘지(1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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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져타 셔우드 홀 선교사의 머리에는 한국의 맹인들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으며, 맹인교육에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프랑스 파리의 맹인교사인 루이스(Louis Braille) 선생이 개발하여 1829년에 출판한 점자책을 입수하였다. 또한 1860년 뉴욕 맹인교육학원 원장인 윌리엄 웨이트(William B. Wait)선생이 개발한 점자도 연구하였다. Dr R.S. 홀 선교사는 웨이트 원장을 찾아가 점자구조를 배웠다. 여기서 홀박사는 “뉴욕포인트”, 점자가 한국에 적당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Dr R.S.홀 선교사는 1897년 다시 내한하여, 1898년에 그가 원하던 평양으로 파송 받았다. 홀박사는 아들과 1895년 1월 18일에 태어난 딸 에리스 마거리트와 함께 1898년 5월 1일 평양에 도착하였으나 어린 딸 머거리트는 이질에 걸려 5월 21일에 별세하였다. 홀박사는 양화진 남편의 묘지 곁에 어린 딸을 안장하고 아픔을 딛고 일어서어 더 힘써 선교사역에 열중할 것을 하나님께 약속하였다.
홀박사는 1898년 딸 마가렛(E. Margaret)를 묻은 후 남편의 조사(Helper) 오석영의 맹인 딸 오봉래 어린이를 받아들이고 평양 부인병원 어린이 병동(Children's Ward)에서 “맹인교육”을 시작하였고, 마가렛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어린이 전문 병원을 세우기로 하였다. 1899년, 1년 후 이 병원은 “에리스 마가렛기념병원”(The Edith Margaret Wards)으로 한국 최초 어린이 전문 병원이며, 2층 건물에 물탱크 시설도 갖춘 병원이었다.
홀박사는 바로 이 병원에서 맹인교육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그는 우선 “뉴욕점자”를 한국말에 맞게 개조하여 조선어 점자교재를 만들었다. 또한 존스 선교사 부인(Mrs, George H. Jones)이 쓴 “기도서”와 “십계명”도 점자로 만들었다. 이 교재를 그의 첫 학생인 오봉래 양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교육진도가 느리고 지루했지만 한글 점자법을 익힌 후에는 진도가 빨라졌고, 오봉래 양은 일 년 만에 준비한 모든 교재를 읽을 수 있었다. 또한 점자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고 말하는 것을 자신이 직접 점자교습하기에 이르렀다. 1898년 그녀가 편찬한 현재 최초의 점자책은 대구대학교 점자도서관 2층에 전시되어 귀중한 자료로 보관되고 있다.
“미감리교 해외 여선교회 보고서“(Annual Report of the Womon's Foreingn Missionary Society of M.E.C 1885-1940, WFMS)에도 기록되어있다. 즉, ”우리의 매일학교에서 평양의 맹인 어린이들을 모아서 가르치는 것과 한 방을 만들어 공부하며 생활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 작은 맹인소녀가 일기를 익혔고, 곧 다른 맹인을 가르치는데 보조할 수 있도록 준비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WFMS1899,p92) 1900년도 보고서에 맹인학교가 진척되고 성장되고 있음을 보고하였고(WFMS, p82), 1905년 보고서에는 교사로 ”학생교사와 미쓰 로빈(Miss Robins)이 나를 돕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WFMS1905, p190)
▲ * 미감리교 해외 여성선교사회 보고서(WFMS, 189801899)-"맹인교육이 보고되고 있다." |
이러한 일을 본 한국인들이 홀박사에게 찾아와 자신들이 알고 있는 다른 맹인들도 맡아 가르쳐달라고 간청하였다. 맹인학교 학생수는 점차증가하게 되었고, 먼저 배운 오봉래 양은 특수교사가 되어 맹인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1898년에 시작된 “맹아학교”(12월)는 1903년에 평양여학교인 “정의여학교”(1899년)로 옮겼고, 1908년 맹인교육 전문가인 록웰(Mr. Rockwer)에 넘겨주었다. Dr R.S. Hall선교사는 한국 여성의학 교육의 선국자일 뿐만 아니라 한국의 특수학교인 맹인과 농아(聾啞)를 위한 교육을 시작한 분으로 정상인 학생들과 함께 교육시켜 차별 없이 평등교육을 시킨 분이다.
Dr 로져타.S.홀(1865-1951, 許乙) 선교사는 1890년 한국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Dr W.J. Hall선교사와 결혼하고(1892년) 평양으로 파송 받아 1935년 은퇴하기까지 43년 동안 사역하였으며, 귀국하여 1951년 4월 별세한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남편 제임스 홀 선교사와 딸 마가렛과 함께 안장되었고, 장남 셔우드 홀(Dr, Sherwood Hall, 賀樂;1893-1991) 박사도 양화진에 묻혀(별세1991년) 전 가족이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 땅에 묻혔다.
▲ 양회진 외국인 묘지-홀 부부 묘비 |
Dr R.S. 홀 의료선교사(사역기간 1890-1935)는 정동부인병원을 시작으로 “동대문부인병원”(현 梨花女大學病院)으로 확장이전 하여, 한국 첫 “간호사양성학교”(1903년, Supt. of Nurses' Tranining School 를 세웠으며, “경성여자의학교”(1928년, The Seoul Woman's Medical College)를 설립하여, 고려대학 의대부속 “우석병원(友石病院)”으로 운영되어 오다가 오늘날 고려대학교 의과대학(高麗大學敎 醫科大學), 고려대학병원(高麗大學病院)의 모체가 되었다.
Dr R.S. 홀 선교사는 남편과 딸을 잃은 슬픔을 딛고서 더욱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충성하였다. 여성의료 사역과 여성의료진 양성, 개척선교에 헌신한 열정적인 삶을 우리는 가슴 깊이 간직하고 민족 사랑과 구원에 헌신해야할 것이다. (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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