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배운다
"친일영화 찍느니 배우를 그만둔다" - 1930년대 중국 영화 황제 <진옌>이 한국인?
중국 영화황제가 한국인
“영화를 찍지 않을지언정 아무 의미 없는 반진보적 친일 영화를 찍어 관중에게 독이 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1930년대 중국 국민들에게
가장 잘 생긴 남자배우 1위
가장 친구로 사귀고 싶은 배우 1위
중국 영화사상 가장 인기 있는 배우 1위를 차지해 유일하게 중국 영화황제 칭호를 받은 <진옌>의 말이다.
그런데 이 진옌(김염)은 본명이 김덕린, 서울 출생 한국인이다.
독립운동가 집안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염의 집안은 독립운동가로 가득하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의형인 아버지 김필순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의사다. 구한말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의 주요 인물이었던 그는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고향을 떠나 만주에서 독립군 주치의로 활동하며 의술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1919년 일본 밀정의 소행으로 의심되는 의문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9살 김염은 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봤다.
아버지를 여읜 김염은 상하이로 이동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총장 등을 지낸 김규식에게 의탁하는데 김염의 고모부다.
여성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김마리아도 김염의 사촌이고, 둘째 고모부 서병호는 신한청년당과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다.
그 외에 한국 YWCA의 창설자이며 민족교육자였던 김필례도 넷째 고모였다.
김염의 기자회견 "기관총도 나를 협박 못해"
인기가 절정에 오른 1930년대 중반 김염은 돌연 기자회견을 연다.
그리고는 폭탄선언을 한다.
"지금부터 항일•독립영화 외에는 영화를 찍지 않겠습니다. 이런 시기에 의미 없는 사랑 이야기는 그만 찍겠습니다."
그리고 친일 영화를 찍으라는 일제의 압박에 대해서는
"기관총으로 겨눈다 해도 나는 친일 영화를 찍을 수 없습니다.
라고 선언한다.
실제로 그는 기자회견 후 항일 영화만 찍었다.
9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영화로 진출
김염은 불과 9살 때 일제의 만행으로 추정되는 아버지의 의문사를 지켜본 후 일제에 대한 반감이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었다.
고모부의 만류에도 영화배우가 되기 위해 가출까지 한 김염은 자수성가했다.
공산당 가입 거부해 고초, 독립과 이념은 다르다.
일제가 망하고 일본이 중국에서 물러난 1945년 이후 김염은 중국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순수 예술가의 길을 고집하여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수용소에 갇히는 등 중국 정부로부터 고통을 받기도 했다.
출연작픔
•애창여가(愛廠如家) (1958년) 공업부장
•해상홍기(海上紅旗) (1958년) 당서기
•폭풍우중적웅응(暴風雨中的雄鷹) (1957년) 노파이
•모친(母親) (1956년) 老鄧
•위대적기점(偉大的起點) (1954년) 섭부장
•대지중광(大地重光) (1950년) 노침
•실거적애정(失去的愛情) (1949년)
•영춘곡(迎春曲) (1947년)
•승룡쾌서(乘龍快婿) (1947년)
•임충설야섬구기(林沖雪夜殲仇記) (1939년)
•무송여반금련(武松與潘金蓮) (1938년)
•정천혈루(情天血淚) (1938년)
•장지릉운(壯志凌云) (1936년) 순아청년
•도자연거(到自然去) (1936년)
•낭도사(浪淘沙) (1936년)
•신도화선(新桃花扇) (1935년)
•대로(大路) (1934년)
•황금시대(黃金時代) (1934년)
•모성지광(母性之光) (1933년) 가호
•성시지야(城市之夜) (1933년)
•공부국난(共赴國難) (1932년)
•속고도춘몽(續故都春夢) (1932년)
•야매괴(野玫瑰) (1932년) 강파
•해외견혼(海外鵑魂) (1932년)
•인도(人道) (1932년)
•삼개마등녀성(三個摩登女性) (1932년)
•은한쌍성(銀漢雙星) (1931년) 양의운
•연애여의무(戀愛與義務) (1931년) 이조의
•도화읍혈기(桃花泣血記) (1931년) 김덕은
•일전매(一剪梅) (1931년)
•야초한화(野草閑花) (1930년) 황운
•풍류검객(風流劍客) (1929년) 용비
•왕씨사협-속집(王氏四俠-續集) (1929년) 왕장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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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V6hPmQe-zx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