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9 (금)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있다. 병산도 아침형 인간이다. 병산은 아침 일찍 일어나 어제 일정을 되돌아보며 생명탈핵 실크로드 카페에 순례일지를 쓴다. 어제 찍은 사진을 올리고 중간 중간에 사진 설명, 여러 가지 소식, 그날 만난 사람과 들러본 경치에 대한 느낌 등등을 간단히 기록한다. 병산이 순례일지를 쓰면 내가 영어로 번역한다.
오늘도 새벽 3시쯤 일어나 어제 병산이 쓴 순례일지를 번역하였다. 내가 번역을 끝내면 순례단을 지원하는 이승은 간사가 번역문을 사진과 함께 실크로드 영문 카페에 올린다. 간사는 제주도에 살고 있지만,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거의 실시간으로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다. 세계는 인터넷과 휴대폰을 통하여 실시간으로 그리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불과 30년 전과 비교하면 참으로 놀라운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순례일지 번역을 끝내고도 시간이 남아서 안사리의 이슬람 역사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는 다음과 같은 그림을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그림11가> 오늘날의 이슬람 세계
위 지도에서 까만 색 부분은 이슬람 인구가 50%를 넘는 이슬람 국가를 나타낸다. 지리적으로 보면 이슬람 국가들은 유럽과 미국을 합친 것보다 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과거에 이슬람 세계는 단일 정치 독립체였으며 지금도 이슬람 세계가 하나이며 정치적으로 통합되어 있다고 느끼는 무슬림 지도자들이 있다. 이슬람을 믿는 인구는 16억 명으로서 기독교(신도수 22억 명)에 이어서 세계 제2위의 종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사리의 표현에 의하면 이슬람은 세계사 무대의 주요 선수로 대접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2001년 뉴욕에서 일어난 9.11 사건 이후 세계인의 인식이 달라졌다. 서구의 비 무슬림들은 이슬람이 어떤 종교이며 무슬림은 어떤 사람들이며 이슬람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묻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안사리의 책은 이러한 세계인의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슬람이 등장하기 1000년 전인 기원 전 550년부터 페르시아가 중동지방의 패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페르시아의 종교는 조로아스터교이었는데 그 이름은 창시자인 자라투스트라에게서 유래한다. 자라투스트라가 라틴어를 거쳐서 영어로 조로아스터(Zoroaster)가 되었다. 창시자 자라투스트라가 태어난 연도는 확실치 않으나, 기원전 660년이 정설이다. 조로아스터교는 동부 이란을 중심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는데, 사산 왕조(226~651)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사산 왕조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국가 권력 강화와 사회 통합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사산 왕조가 몰락하면서 조로아스터교도 함께 몰락하고 대신 이슬람교가 등장하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는 세상을 선신(아후라 마즈다)과 악신(아리만)의 투쟁으로 보았다. 아후라 마즈다의 상징은 불이었는데, 그것 때문에 조로아스터교를 불을 숭배하는 종교 즉 배화교(拜火敎)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조로아스터 교도들은 종교의 조각상이나 상징물을 모두 거부하였는데, 이러한 전통은 이후에 이슬람의 종교 미술에서 구상화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성향으로 이어졌다. 이슬람 사원에 특별한 상징물이나 조각상이 없는 것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사제를 마구스(magus)라고 불렀으며 이 단어의 복수형은 매이자이(magi)였다. 신약성경에는 마구간에 태어난 아기 예수에게 세 가지 선물 즉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하는 동방박사 세 사람이 나오는데, 안사리에 의하면 이들 동방박사는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이었다고 한다. 영어 사전을 찾아보면 magi는 동방박사 세 사람이라는 뜻도 있다. (지난번에 연재한 다람살라 방문기에서는 동방박사들이 인도에서 왔다는 설을 소개하였다.)
아침 식사로 우즈벡산 김치 라면을 끓여 먹었는데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오늘은 타슈켄트 시내에 있는 티무르 박물관과 타슈켄트 역사 박물관을 구경하기로 했다. 우리는 깃발을 들고서 숙소를 나서서 먼저 티무르 박물관으로 걸어갔다. 박물관까지의 코스는 병산이 정하고 나는 그저 병산을 따라서 걷기만 하면 된다. 일반 관광객이라면 가이드 따라서 관광버스를 타고 가겠지만 우리는 명색이 순례자이므로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가는 것이 원칙이다.
마침 출근 시간과 겹쳐서 거리는 차와 사람들로 붐볐다. 타슈켄트 인구가 240만 명이나 되기 때문에 출근 시간에 붐비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이 깃발 들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가는데 한 젊은 여성이 병산에게 “안녕하세요!”라고 반갑게 인사를 한다. 병산이 깜짝 놀라서 쳐다 보니 한국 사람이 아니고 출근 중인 우즈벡 아가씨였다. 우즈벡에서 한국은 잘 사는 선진국으로 인식되고 있다. 한국으로 노동자로 일하러 가는 사람도 많고 한국인과의 국제 결혼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한국의 대학에 유학 가는 젊은이도 있다. 짧게 이야기를 해 보니 이 아가씨는 한국 관련 무역 회사에 다니고 있고 한국말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차를 마시며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출근시간 때문에 그럴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점심을 같이 먹자고 제안하니 다른 약속이 있다고 한다. 병산이 셀피를 찍어 아쉬운 만남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림11나> 출근길에서 만난 우즈벡 여성
한참을 걸은 후에 우리는 티무르 박물관에 도착하였다.
<그림11다> 티무르 박물관
아미르 티무르(Amir Timur)는 1336년에 사마르칸트 부근에서 몽골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름인 '티무르'는 투르크어로 '철'이란 뜻이다. 중국에서는 鐵木兒(철목아)라고 표기한다. 그는 큰 키와 건장한 체격과 준수한 용모를 가지고 있었으나 한쪽 다리를 약간 절었다. 어린 시절 양을 훔치다 무릎에 화살을 맞아 다친 결과였다. 그는 ‘절름발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그의 서구식 명칭은 태멀레인(Tamerlane)이다. 그는 여러 유목 부족을 통합하여 1370년에 티무르 제국을 세우고 35년간 통치하였다. 그는 1405년에 죽을 때까지 칭기즈칸 이후 중앙아시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하였다.
티무르의 군대는 월급이 없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수입은 약탈에 의존해야 했다. 칭기즈칸은 대체로 항복하거나 투항하는 적은 살려준 반면 티무르는 항복자도 모조리 학살했다. 티무르는 1398년에 인도 델리의 투글루그 왕국을 공격하였는데, 그의 공격은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잔혹했다. 티무르가 병사들에게 최소한 두 명의 적을 죽여야 한다고 명령했기 때문에 병사들은 초반 전투에서 신속하게 할당량을 채우고 나서 노예로 팔기 위해 포로를 사로잡았다. 그 결과 델리에 도착했을 때에 티무르의 병사들은 10만 명이 넘는 포로들을 잡아 군사 작전에 지장을 줄 정도가 되었다. 그러자 티무르는 병사들에게 포로들 가운데 무슬림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목을 베라고 명령했다. 그는 참수된 인도인들의 머리로 거대한 피라미드를 쌓게 했다. 그리고는 델리를 완전히 파괴해 황무지로 만들어버렸다. 티무르의 침략을 받은 중동이나 인도에서 그는 잔인한 학살자로 악명이 높았다.
전쟁에서는 잔인했지만 티무르는 야만인은 아니었다. 티무르는 문맹이었지만 세 가지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였으며 어디를 가든지 그곳의 학자들과 종교, 철학, 역사를 논했다. 무슬림으로서 신심도 깊었다. 전장에서도 그를 수행하는 시인들이 낭송하는 페르시아 문학에 심취하곤 했다. 그가 이러한 지적 유희를 즐기는 동안에도 그의 병사들은 사람들을 계속 죽였다.
타무르는 평생 진두에서 싸우며 정복 전쟁을 계속했는데, 외국과의 전쟁에서 단 한 번도 지지않았다고 한다. 티무르는 몽골 제국 옛 영토의 서쪽 절반을 지배하는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였는데 당시 유럽 국가들은 분열되어 있어서 티무르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는 68세가 되던 1404년에 중국을 이슬람 국가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으로 명나라를 치기 위하여 진군하다가 1405년 행군 도중에 갑자기 병사하였다. 전쟁 역사가들은 그가 평생 전쟁을 하는 동안에 무려 1,70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한다. 그가 죽고 난 뒤 티무르 제국은 혼란기에 빠져 들지만 바로 붕괴하지 않고 백 년 이상을 지탱했다.
<그림11라> 티무르 동상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