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6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눈먼 자를 고치신 예수님
본문: 마가복음 8장 22절~26절
22 ○그리고 그들은 벳새다로 갔다. 사람들이 눈먼 사람 하나를 예수께 데려와서, 손을 대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23 예수께서 그 눈먼 사람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 두 눈에 침을 뱉고, 그에게 손을 얹으시고서 물으셨다. "무엇이 보이느냐?"
24 그 사람이 쳐다보고 말하였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는 것 같습니다."
25 그 때에 예수께서는 다시 그 사람의 두 눈에 손을 얹으셨다. 그 사람이 뚫어지듯이 바라보더니, 시력을 회복하여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26 예수께서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시며 말씀하셨다. "마을로 들어가지 말아라."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들일까요? 매주 일요일에 예배라는 행사에 참여해서 듣기 좋은 이야기를 듣고, 형식적인 얼굴로 사람들을 만나서, 일상적인 것과는 조금 색다른 인간관계를 맺어가는 사람들입니까? 이러한 시각은 아마도, 진정한 믿음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그래서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이며, 예수님의 치유 이적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계시는지 깨닫고 결단할 수 있는 시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벳새다에 도착하셨습니다. 벳새다는 예수님의 제자 중 베드로, 안드레, 빌립의 고향입니다. 또한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도 이 벳새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 벳새다에서 어떤 눈먼 사람을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서 안수하여 고쳐 주시길 바랬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전에 귀먹고 말이 어눌한 사람을 고치시던 것과 비슷하게 마을 밖으로 눈먼 사람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침을 뱉어(바르고), 손을 대시면서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물론 이전처럼 단 번에 장애가 치유된 것은 아닙니다. 한 번 안수하시고, 온전히 시력이 회복되지 않자, 다시 한 번 더 눈에 손을 대시고 온전히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사람에게 당부하시길 “마을로 들어 가지 말아라”하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두 가지 주제를 통해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의 마음 가짐과 태도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눈 먼 사람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침을 뱉고(바르고), 손을 얹어 주셨습니다. 이전에 귀먹고 말이 어눌한 사람을 고치실 때도 이와 비슷한 행동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에 넣고 입에 발라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이전에 침을 입에 발랐다는 표현과 오늘 눈먼 사람의 눈에 침을 뱉었다는 말은 원어로 같은 단어(프튀오)를 사용합니다. 침이라는 것을 당시 사람들이 질병을 치료할 때 사용된 중요한 촉매 중에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많은 역사문헌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침은 직접적인 치료의 효과를 나타내는 획기적인 치료약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실제로 침을 가지고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사용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사람의 침은 소화효소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살균효과를 가지고 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의 침이 우리의 영혼을 치료하는 촉매로서 우리에게 주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서의 기자와 이 책을 읽었던 첫 번째 독자들은 침을 치료제의 하나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치료제, 즉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치료하신다는 믿음에서 나온 고백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인 눈을 뜨기 전에는 우리는 하나님과 영적인 세계를 볼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으며,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눈먼 사람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있지 않고, 그 말씀을 올바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여전히 우리는 어둠가운에 있는 가련하고 연약한 영적 장애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과의 친밀한 만남이 필요합니다. 개인적인 만남이 필요합니다. 매우 근접한 만남이 필요합니다. 그 만남에서 필수적인 것이 바로 말씀을 듣는 것이고, 고백하는 것이고, 또한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태도는 말씀을 듣는 것을 달가워하고, 기뻐하고, 소중히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내 입에 바르고, 귀에 바르고, 눈에 바르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우선 매일 말씀을 듣고, 읽고, 고백하는 사람인 것을 믿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둘째로 주목할 것은 이전과는 다르게 눈먼 사람의 장애가 단 한 번에 치료되지 않았고, 처음에는 불완전하게 보이고, 다시 안수하시자 온전하게 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애에서 해방되는 데에도 과정과 절차가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리고, 입이 풀리는 데에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개인의 차가 있을 수 있지만, 빠르게 성장한다고 해서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해서 나쁜 것이 아닙니다. 어떤 꽃은 봄에 핍니다. 또 어떤 꽃은 여름에, 또 어떤 꽃은 가을과 겨울에 핍니다. 빨리 펴서 더 좋은 꽃이고, 늦게 펴서 더 열등한 꽃이 아닙니다. 각 계절에 맞게 그리고 시기에 맞게 하나님은 꽃피울 기회들을 주셨습니다. 마찬가지 우리에게도 각자의 인생 목적에 맞게 주어진 과정들이 있습니다. 그 주어진 과정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느냐 아니면, 어떻게 해서든지 내 고집으로 살 것인가를 우리는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후자를 선택하여 하나님이 주신 과정을 무시한다거나, 남과 비교를 하거나, 나 자신의 조건들을 우월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교만이라고 부릅니다. 영국의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인 C.S.루이스는 교만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형제 사도야고보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친다고 하셨습니다(약 4:6). 사도바울은 교만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롬 1:30). 또한 바울은 자신의 제자 디모데에게 편지하여 교회의 지도자를 세울 때에는 교만한 자를 걸러내라고 하였습니다(딤전 3:6). 그리고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께서도 우리 안에서 나와서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들 중에 교만을 빼지 않으셨습니다(막 7:22).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성장과 우리 신앙생활의 패턴이 나의 생각과 다르거나, 내 기분에 맞지 않으면 매우 불쾌해 하고 불편해 하며, 심지어 믿음생활을 포기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택과 우리 개인의 각자 의지에 잘 어울리는 과정들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예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도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모세는 80이라는 나이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히브리 민족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와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40년의 여정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 외에도 성경의 구약과 신약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믿음의 과정을 마치고 그 인생여정을 마무리했던 것을 우리는 배울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많은 간증들을 들을 수 있고, 많은 믿음의 결과들을 통해 정의 내릴 수 있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볼 때 믿음이란 ‘기다림’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글을 읽고 있으면 믿음이라는 것은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꾸준히 살아가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내 눈에 믿음의 열매가 기적적으로 금방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생각하고 예상하고 소망하던 열매의 흔적이나 증거가 당장에 내 눈앞에 보이지 않을 때가 더 많은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속해서 약속의 때를 기다릴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루실 그 때를 계속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도 천국을 이야기할 때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나,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이야기, 추수 때를 기다리는 밭의 주인 등… 하나님의 나라는 기다리다 이루어지는 나라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과정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약속의 성취가 점점 이루어져가는 기다림의 과정인 것입니다. 조금은 느리더라도, 조금은 답답하고, 조금은 한심스럽더라도 나 자신의 성숙과 이웃의 성숙과 형제자매의 성숙을 기다려 줄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주님과 맺어 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조금은 서툴고 조금은 어색할 지라도, 그리고 각 개인마다 체험은 달라도 그 치유의 과정에 있다면 복된 삶인 것이 믿어지시길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또한 빛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자신이 영적 장애를 가진 부족한 존재임을 아는 사람은 태초에 우리 안에 심겨진 자유로 예수님을 모셔 들일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교만한 자는 예수님을 만나 뵙지 못할 것입니다. 진심으로 믿고자 하는 자에게 주님은 반드시 그 빛을 비추시어 우리를 죄악의 어두움에서 해방하실 것입니다. 이 영적인 해방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과 그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이 우리에게 복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복음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을 믿을 수 있고 기다리는 자가 온전한 크리스천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나의 부족함, 그리고 이웃의 부족함을 수긍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 살기로 작정한 자를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복음을 믿고, 주를 기다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그리고 저에게 빛이 비추일 것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