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송(海松) 陳玉洙추천 0조회 025.12.08 17:49
여양진씨 상대사 재구 - 연구자료
(전) 연세대학교 교수 양권승 박사 논문 일부인용 [출처:다음] 진씨사랑방 지기 ㅣ공동연구자 해송(海松) 진옥수(陳玉洙)
다음의 자료를 보자. 진총후 시조공 문성공 시호 해송(海松) 陳玉洙추천 0조회 025.11.29 17:49댓글 0
위에서 진규방은 여양군이며 시호가 문성공인 진총후의 22세손이다. 진규방은 조선후기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송사 기우만의 문생으로 성리학의 대가였고 성리휘안 등 많은 저술을 남긴 인물이다.
이 기록에 진총후의 시호가 문성공으로 나와 있다. 문관에게 내리는 최고의 시호이다. 여양진씨의 족보에서는 오직 대장군으로만 적혀 있어 문관과는 거리가 먼 인물인 듯 하지만 그 이후 참지정사 진준 과 어사공 諱휘 식, 예빈경공 휘 온, 매호공 휘 화 등 여양진씨 상대인물중에는 무관보다는 오히려 문관으로 명성을 남긴 인물이 많다. 이러한 특징에서 비추어 진총후가 받은 문성공이라는 시호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며 이는 진총후가 진숙과 동일인물이라는 가설에 더욱 무게를 두는 기록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여양진씨 족보에는 1080년경에 출생한 진숙을 입록하고 있는가?
족보의 상대사를 검토해 보니 같은 諱휘를 가진 인물이 족보에서 몇 군데 발견되지만 대부분 조선조의 인물이다.
그런데 을해보(1865년) 등에 독특한 기록이 있다.
진광현 陳光賢 1子 -숙淑 1子 -重仁 2子 중의 2子 -양瀁 여양진씨 3세 광현의 아들로 진숙淑 과 진양이 입록되어 있는 것이다. 전후기축보는 물론 여타의 여양진씨 족보에는 진광현의 아들이 없으며 진숙淑 과 진양이 입록된 족보는 전혀 없다.
을해보 편찬자들이 어떤 문헌적 근거로 이와 같은 족보를 제작했는지는 속단하기 어려우나 병자보(1936)에서 다시 한번 동일한 계보의 족보가 제작된 사례로 보아 무시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이를 인정한다면 이미 여양진씨 가문에서는 진숙이 시대편년의 오류는 있으나 호부상서로 관직마저 동일한 진숙을 선조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근거가 된다.
2) 송나라인 동래설
위에서 진수陳琇 가 진총후의 선대라는 주장은 문헌상 부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양진씨 구보 서문에서는 가승으로 전해오는 중국 동래설에 대해 무게를 두고 있다. 여양진씨는 중국에서 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국 송나라의 진씨 중 고려에 귀화 또는 내왕한 인물에 대해 살펴보자
고려 현종조(1010) 송의 천추추신으로 토산물을 바친 진문궤, 송나라 도강(공무역선단의 대표)인 진수陳守 가 흰꿩을 고려에 바친 사례가 있으나 이들은 귀화하지 않았다.
다만 선종8년(1091)에 진양陳養 이 송나라에서 고려에 귀화하였는데 무예가 출중했으며 고려 왕실에서 벼슬을 받기도 했다. 특히 진양은 1060년 전후에 출생한 중국 송나라 출신 고려 귀화인이며 그가 진총후보다 20년전에 출생한 인물이므로 아버지 항렬에 가능성이 있다.
다음으로 문종 15년(1061)에 송나라에서 진사인 진위陳渭가 고려에 왔는데 고려왕실에서 글재주가 뛰어나 비서교서랑을 삼았으며 고려에 귀화하였다. 기록으로 보아 그의 후손이 고려에서 벼슬도 하고 번창한 것으로 보이는데 진위는 생몰시기로 보아 여양진씨 기세조인 진총후의 조부祖父항렬로 볼 수도 있다.
즉 여양진씨가문에서 그 가문의 선대가 중국 송나라에서 동래한 것이라고 단정한다면 진총후와 진준의 공훈사실과 관직사실에서 확인되듯이 진총후의 선대는 일반 평민가문은 아니며 적어도 송나라에서 명족의 후예여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위의 가설은 설득력이 있다. 이후 중국 문헌과의 비교대조 작업을 통해 이동루트가 조명될 것이다.
3)화산이씨(花山李氏)와 함께 동래설
화산이씨 족보에 의하면 시조 이용상은 송나라가 망할 것을 예견하고 고려 고종조에 바다를 건너 동래하여 황해도 옹진 화산에 정착,세거하였다고 한다. 화산군 이용상의 본전에 의하면 당시 함께 동래한 이건문이 홍주 신평에 정착세거하여 그가 신평이씨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이용상가문의 맏사위가 진일조인데 그도 함께 동래하였다고 적고 있다. 즉 이용상,이건문,진일조 가문이 각각 웅진,홍주 등 서해안에 정착한 것이다. 이로 보면 충청도 서해안에 위치한 여양진씨도 진일조陳日照의 후손이라는 가설이 성립하는데 이 시기가 1213년 후이므로 이미 여양현에 세거하고 있던 진준보다도 후대이다. 따라서 여양진씨가 화산이씨 사위인 진일조의 후예라는 가설은 타당성이 적다.
4) 당나라에서 동래설 앞서 언급했듯이 충청도 진천,청주세력과 함께 대호족으로 성장하고 있던 진원陳原 이 고려건국 6일에 단행된 첫 관료인사에서 서열 5위의 창부령(지금 재무부 장관격)에 임명되었다.
태조 원년(918) 무인년 원년 여름 6월
병진일. 태조가 포정전(布政殿)1)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2)라 하고 연호를 고쳐 천수(天授)라고 했다. 정사일.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전 임금은 사군(四郡)3)이 흙 무너지듯 붕괴할 때에 도적의 무리들을 제거하고 점차로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나 천하를 아우르기도 전에 갑자기 잔혹한 폭정으로 백성들을 다스렸으며 간사함을 가장 옳은 것으로 여기고 위협과 모욕을 가하는 것을 주된 통치수단으로 삼았다. 요역과 부세가 번거롭고 과중하여 인구는 줄어들고 농토는 텅 비게 되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궁실만은 크고 으리으리하며 옛 제도를 준수하지 않고 힘든 부역은 그칠 날이 없으니 결국 원망과 비난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함부로 연호를 정하고 황제를 칭했으며 처자를 살육한 죄는 천지간에 용납되지 못할 일이며 귀신과 사람이 함께 노할 일로서 왕업의 기반을 송두리째 추락시켰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으랴? 짐은 공들이 추대하는 마음에 힘입어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낡은 풍속을 고쳐 모든 것을 다함께 새롭게 만들려 한다. 마땅히 법도와 규범을 혁신하는 길4)을 쫓을 것이며 가까운 데서 얻는 원칙[伐柯之則5)]을 감계로 삼으리라. 임금과 신하는 물과 물고기처럼 서로 어울려 즐거움[魚水之歡6)]을 같이 할 것이며 온 천하는 태평시대의 경사[晏淸之慶7)]를 함께 누릴지니 나라의 모든 백성들은 다 짐의 뜻을 잘 알도록 하라.”
이에 신하들이 절을 올리고 사례했다. “전 임금의 통치 기간에는 선량한 사람들이 악독한 피해를 입고 죄 없는 사람들이 잔혹한 학대를 받는 통에 남녀노소가 모두 불만에 싸여 원한을 품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이제 다행히 목숨을 보전하여 성스럽고 현명한 임금을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힘을 다하여 성은에 보답하지 않겠습니까?” 무오일. 왕이 한찬(韓粲) 총일(聰逸)에게 지시했다. “전 임금이 참소를 믿고 함부로 사람을 죽였는데, 경의 고향 청주(靑州)는 땅이 기름지고 호걸이 많았기 때문에 변란을 일으킬까 우려한 나머지 그 곳 사람들의 씨를 말리려 했다. 그리고는 군인 윤전(尹全)과 애견(愛堅) 등 80여 명을 소환했는데 이들은 아무 죄가 없는데도 형구를 찬 채 끌려오고 있으니 경은 빨리 가서 그들8)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도록 하라.” 경신일. 마군장군(馬軍將軍) 환선길(桓宣吉)이 역모를 꾀하다가 처형당했다. 신유일.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관직을 설치하고 직책을 분담하는 일에는 유능한 사람을 임명하는 것이 중요하며, 세상을 이롭게 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일에는 어진 이를 가려 뽑는 것이 우선이다. 관리들이 직무에 소홀하지만 않는다면 정치가 문란해질 까닭이 없는 것이다. 짐이 외람되게도 천명[景命9)]을 받아 큰 계획을 통어하려니,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 편안하기 어렵고 재능이 부족함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오직 사람의 재능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관리를 선발함에 실수가 많아 어진 사람을 누락시켰다는 탄식을 야기시키고 선비를 얻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을까 걱정이다. 자나 깨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이것뿐이다. 조정 안팎의 여러 신료들이 모두 그 임무를 잘 감당할 수 있으면 현재 훌륭한 치적을 이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후대의 칭송까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마땅히 관리[列壁10)]를 등용하고 사람들을 시험함에 있어 반드시 힘써 잘 가려 뽑아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할 것이다. 온 나라 사람들은 모두 짐의 뜻을 헤아릴지어다.”
이에 따라 한찬(韓粲) 김행도(金行濤)11)를 광평시중(廣評侍中)으로, 한찬 금강(黔剛)을 내봉령(內奉令)으로, 한찬 임명필(林明弼)12)을 순군부령(徇軍部令)으로, 파진찬(波珍粲) 임희(林曦)13)를 병부령(兵部令)으로, ▶소판(蘇判) 진원(陳原)을 창부령(倉部令)으로, 한찬 염장(閻萇)을 의형대령(義形臺令)으로, 한찬 귀평(歸評)을 도항사령(都航司令)으로, 한찬 손형(孫逈)을 물장성령(物藏省令)으로, 소판 진경(秦勁)을 내천부령(內泉部令)으로, 파진찬 진정(秦靖)을 진각성령(珍閣省令)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이들은 모두가 품성이 단정하고 일을 공정하고 성실하게 처리했으며, 개국 초창기부터 왕을 잘 보좌하여 공훈을 세운 사람들이었다.
진원은 태조왕건의 재정을 총괄했던 측근중의 측근인 것이다. 그동안 학술연구에서 태조 왕건이 한강,금강,영산강을 중심으로 중국과 무역을 하던 해상세력의 후원을 받아 고려를 건국했다는 사실은 이미 입증되었다.
그런데 개국공신인 복지겸이 면천복씨인데 그는 중국 당나라 말기에 오계의 난을 피해 동래하여 충청도 당진에 정착한 복학사의 손자로 태조 왕건을 보좌하여 개국일등공신에 올랐으며 면천복씨 시조이다.
면천복씨 외에도 서기 870년을 전후하여 중국 절강성, 산동성일대의 유민들이 무수히 고려에 동래하여 고려건국에 일조를 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들의 출신에 관하여 순수 중국인이 아니라 환국교민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이는 원래 충청도일원에 세거하고 있던 백제의 귀족들이 백제멸망(660)과 함께 유민이 되어 수만명이 중국으로 탈출망명하였는데 200년 정도 중국에서 살다가 다시 당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할아버지의 나라로 환국한 교포라는 것이다. 매우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한반도에 살고 있는 토성과 환국한 이들이 의사소통을 하는데있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함께 중앙고위관직을 역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또한 서해안에 정착하자마자 해적을 소탕하고 충청도유민을 보호하고 있다.
즉 언어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위와 같은 사실을 통해 유추해보면 백제망족들이 일단 중국으로 탈출망명 하였으나 완전히 중국에 동화되지 않은 체 생활하다가 통일신라시기에 장보고세력을 등에 업고 국제무역에 종사하였으며 고려건국에 일조하였다. 여양진씨의 경우도 백제의 귀족가문중 중국의 대성이며 복건,절강성 일원에서 해상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진씨가문과 혼인관계를 맺은 후 이들이 당나라 말기에 한반도로 건너왔으며 그 중 진원이 태조왕건의 재무담당 총 책임자로 창부령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고려전기에 중국 송나라에서 고려에 온 공무역선단의 대표가 거의 대부분 진씨라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고려초인 900년 경부터 최고위직에 있었던 진원과 같은 무수한 진씨姓을 가진 인물이 실록에 분명히 존재하는 한 한반도에 존재하는 모든 진씨의 동래시기를 1100년-1200년경으로 이해하고 이를 마치 진실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가문사의 크나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진준, 진광순, 진광수, 진광경, 진식, 진온, 진화와 같은 인물 들이 활약한 시기가 1100년 부터 1200년 전후임을 고려한다면 귀화성씨이던 토성이든 이보다 훨씬 전부터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고려사 열전 진준편에 진준을 청주 여양현인이라고 명기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양진씨 2세조 진준편- 고려사 원본 권100, 20쪽 좌 1~2열 ▼陳俊淸州(呂)驪陽縣人 2세조 진준편 고려사 원본 권100, 20쪽 좌2~ 21 우1~9열▼
이런 이유로 필자는 여양진씨의 최초 동래시기를 송나라 멸망전후가 아닌 당나라 말기인 860년 전후에 중국에서 집단으로 한반도 서해안에 환국한 해상세력으로 추정하는 견해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처럼 여양진씨 전기축보(1709년 발간)나 후 기축보(1769년) 등에 언급이 없던 진총후 이전의 선대사적에 관하여 갑인보(1914년 발간) 등에서 진수의 동래 사실을 기술하고 그가 진총후의 선대라고 별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양진씨 집안에 전승 또는 가승으로 동래조 진수에 대한 전승이 있었다는 반증이 된다.
다만 고증할 수 있는 문헌이 없어 고려사열전에 등재된 진준의 부친인 진총후 조차도 기록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씨족원류등에 진총후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이다.
연구자는 이상의 전고로 볼 때 진원을 여양진씨 원조로 계대되는 계보표를 여양진씨 상대 계보도로 제시하고자 한다.
遠祖- 진원陳原 918년 6월- 고려개국 서열6위 소판(蘇判) 창부령(倉部令) -진적陳頔 1009년 내사시랑평장사 內史侍郎平章事 (陳原- 손자,증손항렬?) -진숙陳淑 1123년 호부시랑戶部侍郞 지광주사知廣州事(陳頔- 증손,고손항렬)
한편 진숙의 관직이 장관격인 호부상서인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는 무신들이 득세하기 이전으로 주로 과거제도에 의해 관료가 임명되었고 문벌가문에서 천거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즉 외교책임자인 진숙의 가문은 고려전기의 문벌가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고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진숙의 선대는 누구인가?
동국여지승람 충청도 홍주목조에 고려조 인물로 진준이 있다. 고려사 열전에는 진준이 홍주여양현이 아닌 청주목산하 여양현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홍주가 강등되어 전의,연기, 여양등이 모두 청주목 관할 이었다. 포괄적으로 정리하더라도 여양진씨 진준의 선대는 적어도 충청도 지역에 기반을 둔 성씨로 단정할 수 있다.
그런데 고려 태조 왕건은 고려 태조로 즉위한지 6일만에 관리들에 대한 인사를 단행하였다. 황해도 평산을 중심으로 한 예성강세력과 충청도 충주,청주일대의 호족가문들이 각부서의 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여기에 서열 5위의 시중격인 창부령에 진원이 임명되었다.
서열8위인 물장성령에는 손형이 임명되었는데 손형은 고려 개국공신인 손긍훈의 아들로 밀양손씨 2세조이다. 공교롭게도 태조부터 목종조까지 7대실록이 거란족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졌기 때문에 정확한 기록이 사료에 전하지 않으나 당시 창부령에 임명된 진원은 여양군 등에 봉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여양진씨 비조鼻祖일 개연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그러한 공신가문이었기에 이후 진숙과 같은 인물이 관직에 등용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진씨는 동래한 성씨가 아니고 토성이란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동래한 성씨라고 판단된다.
다만 동래시기가 송나라 휘종년간이 아니라 당나라 말기 오계의 난을 전후한 시기이며 이 때 중국에서 동래하여 충청도 면천에 정착한 면천복씨가문이 고려 태조왕건을 보좌하여 개국공신의 반열에 오른 사실에서 입증되듯이 건국초기 왕건의 측근에는 중국에서 동래한 해상무력세력이 많았다. 특히 여양현이 면천에서 근거리에 있으며 중국과의 교역로상 최근거리에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교류시 최단 전진기지 였다. 신라 최치원이 중국에 유학을 간 항구도 혜성(홍주)였던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여양진씨의 선계는 중국 절강성,복건성의 세족인 진씨였는데 당나라 말기 오계의 난으로 인해 동래하였으며 이들은 태조 왕건을 보좌하여 고려를 건국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들 중 진원은 왕건의 최측근으로 지금의 재무부장관인 창부령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고려조에 후손들이 번창하여 대를 이어 오고 있다.
여양군 진총후에 관한 문헌자료를 통해 본 상대사 재구
성씨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는 관찬서인 증보문헌비고 제계고에는 진씨에 관하여 주나라 무왕이 순임금의 후손인 호공 만을 진의 땅에 제후로 봉하였는데 그 후손이 이로 인하여 진을 성씨로 삼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한편 이 책에는 삼척, 여양, 임피, 흥덕, 덕창, 복주, 양주, 남해, 나주 외 등 110여 본관의 진씨가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조선씨족통보에는 진씨는 모두 131本이 있는데 여양진씨의 시조는 준이며 고려 명종시 참지정사를 지냈는데 판병부사로 용력이 있으며 행오에서 시작하여 공덕을 쌓아 장군에 이르렇고 경인계사년간의 무신란에 수많은 문신들이 공의 도움으로 살아난 사람이 많았다고 적고 있다. 계속해서 준의 손자 식, 온, 화가 문과에 급제하였다고 서술하며 어떤 책에는 대장군 진총후를 시조로 한 책도 있다고 적고 있다.
위는 여양진씨 시조는 진준 또는 진총후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양진씨 대동보에는 진총후를 시조로 하고 그의 아들이 참지정사를 지낸 진준이다. 즉 양자간은 부자지간으로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양진씨 족보외에 진총후와 진준이 부자간이라는 문헌이 있는가?
여양진씨 대동보에서 시조 진총후는 고려 예종조(1106-1122)에 신호위대장군으로 적신 이자겸의 난(1126)을 토평한 공으로 여양군에 봉군되었다고 적고 있다. 족보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진총후는 1080년 전후에 출생한 인물이다. 그러나 고려사,고려사절요 등 사서에는 진총후에 관한 기록이 없으며 당시 난에 관하여 상세히 서술하고 있는 이자겸 열전에도 아무런 기록이 없다.
한편 참지정사 진준은 고려 명종조에 활약한 분으로 1179년 6월4일에 졸하였으며 당시 관직이 참지정사겸 판병부사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1120년 전후에 출생한 인물이다.
즉, 진총후의 나이 40세 전후에 진준이 출생한 것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진총후가 여양군의 봉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씨족원류, 만성보에 진총후에 관한 서술이 없는 것은 이례적이다.
3. 여양진씨 3세의 위차관계- 조선과환보
여양진씨 대동보는 3세의 위차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광순- 광수- 광경- 광의- 광현 그러나 후대의 기록이긴 하지만 조선과환보는 광의- 광수- 광순- 광경- 광현 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형제간의 위차관계는 물론 식, 화, 온의 부父가 광수와 광현으로 각각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광수와 광현은 동일인물인가? 이에 대하여 광수의 관직은 병부상서이며 광현은 대장군이다. 동일인물로 보기에는 무리인 것 같다. 한편 매호공소전에는 매호 진화에 관하여 성은 진이며 이름은 화, 호는 매호이다. 증조의 이름은 총후인데 고려 인종조에 대장군을 지냈으며 적신 이자겸의 난을 토평하여 여양군에 봉해졌다. 조의 이름은 준인데 참지정사이며 중략--아버지는 광현인데 추밀부사이며 공은 광현의 둘째 아들이다. 아들이 넷이 있는데 장남은 석이며 문하시중이고 다음이 경, 다음은 호부상서 번이고 넷째는 소감인 보이다. 라고 적고 있다. 즉 진화의 부친은 진광수가 아닌 진광현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양진씨 대동보 등에서 진화를 진광수의 셋째 아들로 정리한 것은 근거가 무엇인가?
일단 3세인 진광경이 고려 명종23년(1193) 11월에 장군으로 최인,고용지 등과 함께 민란을 평정한 기록이 있다. 여양진씨 3世 장군將軍 진광경陳光卿 ▼ 한편 진광순은 명종 8년(1178) 6월에 문과에 장원급제한 인물이다. 광순과 광경이 실존인물임에는 확인이 되지만 실록을 통해 이들의 위차관계는 단정 할 수 없다.
여양진씨 3世 진 광 순(陳光恂↔譜名:光純→ 一作恂) 陳光恂(진광순)은 고려 명종 8년(1178)에 실시된 과거(진사시)에서 1등(장원壯元)으로 급제한 인물로, 당시 37명 중 1위를 차지한 뛰어난 인재였습니다.
주요 이력 및 급제 정보
- 급제 연도: 1178년(명종 8년), 무술방(戊戌榜)에서 1등(壯元)으로 급제.
- 급제 과정: 추밀원부사 한문준, 우간의대부 이응초가 지공거(과거 주관관)로, 진광순 등 30명이 진사시에 급제.
- 관련 기록: 『등과록전편』(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에 등재되어 있음.
다만 매호공 소전에서 분명히 진화의 부가 추밀부사 진광현으로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족보에는 진광현의 후사가 없이 절손되고 식,온,화 등이 같은 항렬(형제) 진광수의 아들로 표기하는 기현상이 발견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진광순의 이름이 족보에는 진광순(光純) 으로 적고, 진광순(光恂) 으로도 쓴다 라고 한 반면 고려사등과 문과방목에는 진광순(光恂) 으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단 동일인물로 상정하고 그의 장원급제시기가 1178년이 명확하므로 출생시기는 1150년 전후라고 추정할 수 있다. 부친 참지정사 진준의 1120년 전후에 출생한 인물로 추정하면 진준의 나이 30세 전후에 진광순이 출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진광순을 장자로 계대하게 된 근거가 무엇인지는 여양진씨 족보 서문등에 명기하지 않아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등 실록에 장원급제기록이 명백하고 이후 아들 담과 손자 창덕 등 3대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기록이 명백히 전해지는 것과 관련이 있거나 조선초에 여양진씨 전기축보 이전의 가승에서 세거지가 다른 광순계열이 시중공계열 가승만을 보청에 제시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서로 상이한 기록 등을 종합하여 진광현의 초휘를 진광수로 상정하거나 을해보의 기록을 참고하여 경상도 합천에 세거하는 진광현의 후손인 상서공파의 존재를 인정하는 결단이 필요한 것 같다.
왜냐하면 족보에서는 진광현의 아들이 없는 것처럼 표기하면서도 매호공 소전등에서 분명히 매호 진화를 진광현의 둘째 아들이라고 단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광현과 진광수를 동일인물로 설정할 경우 ▶ 문헌상의 모순점은 쉽게 정리될 수 있다. 내시소경 內侍少卿 진현광陳玄光 ▼
2, 3세조 동시대인물 진현광陳玄光이 고려사에 실려 전한다. 정중부의 난에서 무신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인물이다. 이후 100여 년간 이어지는 무인시대에서 살아 남기위해 후손들이 선조의 휘자를 진광현陳光賢으로 개명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매호소전 기록에 오류는 없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것 같다. 그러나 고려사 진준편에서 손자 식, 화, 온이 모두급제하여 문명을 떨쳤다고 적고 있다. 모두 진준 의 손자임은 분명하며 이 순서를 형제의 서차로 보는것은 무리다. 여말선초 고려사 집필진이 형제의 서차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병부상서 진광수의 행적- 서하집
그렇다면 진온의 부친은 누구인가? 전후기축보나 매호공 소전에 진온이 진화의 동생이며 아버지가 진광현으로 기록되어 있었음에도 훗날 진온의 부친은 진광수로 변경한데는 분명히 근거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양진씨 집안에서 간행한 모든 족보자료와 문헌에 진광수가 단지 병부상서를 지낸 것으로 만 적혀 있을 뿐 더 이상의 기록이 전혀 없다. 실제로 실존성마저 의심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서지분과에서 매우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을 발굴하였다. 바로 서하 임춘의 유고집에서 상안서대판진낭중광수계 라는 계문을 발견한 것이다.
上 安西大判 陳(郎中) 光脩 啓 ▼
동문선
상 안서대판 진(낭중) 광수 계(上 安西大判 陳(郎中) 光脩 啓)
황곡(黃鵠)이 허공에 나르매, 구소(九宵)에 올라갈 만한 날개가 있지만, 흰 망아지 골짜기에 있는데 "한 다발 생추(生蒭)없는 것이 한입니다. 감히 긴 부리로 슬피 우니 혹 마음이 감동 되시어 살펴 주실런지요? 모(西河先生)는 운명이 고생을 많게 타고 났으며, 성품은 지극히 어리석게 태어났습니다. 안회(顔回 ) 현인(賢人)의 낙을 흠모하여 물 마시고 팔베게를 베고 눕는것을 달게 여기는 사람이요, 진등(陳登 )과 같이 국사(國士)가 될 마음은 없고, 한갓 밭과 집이나 구하고자 물으려 하였습니다. 옛날 우리 선조가 태조(왕건)께서 고려를 창업하던 때를 만나 숫대를 장막안에서 놀렸으니 정말 장량(長良)과 같은 인걸(人傑)이 셨으며 형상(形像)이 능연각(凌煙閣)에 그려졌사오니 당나라 공신에 참예되었습니다. 이에 철권(鐵券)을 내리고 영원히 토전(土田)을 주셨는데 후세 자손에게 내려오다가 남에게 빼앗기게 되어, 그만 충의(忠義)의 혼으로 하여금 오래도록 해마다 모셔오던 제향(祭享)을 끊기게 되었습니다. 이러므로 탄식하며 매번 원통함을 송사(訟事)하려 하나, 외롭고 졸연한 마음에 진실로 위태하기 쉽다하여 스스로 움츠렸고,떠돌아 다니는 종적이 바야흐로 멀리 물러나 깊이 숨으려합니다. 입을 숭상하면 마음이 궁해지는 법이요, 또한 말 많은것이 두려운 것이오니, 그 때문에 울울히 맺힌 마음을 펴지 못하고 앉아서 기한(飢寒)에 떠는 것입니다.이제 지극한 정성을 피력하여 고명하게 살펴주심을 바라오며, 비록 몸소 나아가 청하지는 못하오나 실은 가련한 것을알아주십사 하는 데 뜻이 있는 것입니다. 용납해 주어야 공정한 것이니, 바라는 바를 어기게 말아 주소서! 한형주(韓荊州)와의 일면식(一面識)이 만호(萬戶)의 봉후(封侯)보다 더 귀한것을 바라고자 하며, 유홍(劉弘)의 한 장 편지를 얻는것이, 십부종사(十部從事)보다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금장(金張) 후원이 모자라 오히려 우(虞) 예(芮)의 판결을 늦추었습니다. 법을 잘 따르는 관원의 착한 정치는 오직 어진 이천석(2000石)이요, 노는 백성으로 하여금 농사를 짓지 않고 먹게 한다면 어찌 벼 삼백석(300石)의 노적가리가 있겠습니까? 어진 사람이 계시지 않는다면 누가 언 백성을 입김으로 불어주겠습니까? 공손히 생각하건데 모(陳光脩:大都護府使公)관께서는 천인(天人)의 이치를 정통한 지식인이시고,세상을 지도할 만한 현명한 재주와 덕을 갖추셨습니다. 이태백(李太白)이 홀로 가사(歌詞)를 잘 하니 국수(國手)라 일컬었고, 진자앙(陳子昻)이 다시 시풍(詩風)을 일으키니 세상 사람들은 그를 문종(文宗)이라 하였습니다. 천자(황제,임금)가 한 세상에 만난 것을 기뻐하고, 조정 신하가 공(진광수 선조)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아름다운 계책을 가지고 임금에게 고(告)하니 이윤(伊尹)의 충성에 힘썼으며, 대각(大閣:대궐)에 바람이 일어나니 일찍 진함(陳咸)의 기절을 떨쳤습니다. 엄조(嚴助)의 승명전(承明殿) 숙직을 마다하고 장창(張廠)처럼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海州) 맡기를 청하였습니다. 과연 임금의 마음에 들어,서해(황해도 해주)의 대판(大判)으로 나오셨습니다. 멀리 왕의 교화를 퍼뜨려 크게 민심을 위로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방의 토호(土豪)들을 덕으로 꺽어 스스로 복종하게 하고, 우아(優雅)한 선비들을 예우(禮遇)하여 사방에서 맞아 들였습니다. 선비들은 품평(品評)받기를 원하였고 사람들은 즐겨 공을 흠모 하였는데 하물며 망용(妄庸)한 이 사람은 더욱 우러러 존경합니다.뜻이 산수(山水)에 있다하던 종자기(鐘子期)의 지음(知音)을 만난 것과도 같고 가죽 속에 춘추(春秋)가 있다는 저부의 고상한 인품에 접하지 못하였습니다.바라건데 사람을 구하는 데는 한 사람도 버리지 마시고, 일을 결단하는 데는 귀신같이 하여 옛 장수(將帥)의 후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내려온 조그마한 땅을 짓도록 하시면 온 집안이 배부르고 등이 따스하겠습니다. 만약 유말(濡沫)의 은택을 입는다면 만(萬)번 죽어 가루가 되더라도,몸에 옻칠하여 은혜에 보답하기를 감히 맹세하겠습니다.
위 계문은 서하 임춘(1150년 전후 출생)이 안서대도호부사(황해도 해주)로 부임한 진광수에게 올린 것으로 자신 가문이 억울하게 빼앗긴 토지를 찾아달라는 일종의 민원요청서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임춘은 정중부의 난에 참지정사 진준에 의해 목숨을 보전한 인물로 여양진씨 가문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은혜를 입었으며 당시 세상에 전해지는 진광수라는 인물의 됨됨이에 대해 있는 그대로 상세히 열거하고 있다. 다시 말해 기록이 없었던 진광수는 안서대도호부사를 역임할 정도로 실재 고위직에 있었던 현달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기존의 문헌에서 진광수를 1190년 전후에 출생한 인물로 상정하였는데 위의 계문과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이규보문집)을 고찰한바 ☞진한림 온상인(陳翰林溫上人) 제하(題下)의 글을 통해 진온이 매호 진화보다도 먼저 출생하였으며 진광수의 출생이 1150년 전후로 소급됨을 확인할 수 있다.
4. 예빈경 진온의 행적고 고려 신종조에 문과를 거쳐 시인이며 문장가로 명성을 날렸으며 한림학사, 예빈경 등 주로 외교, 교육분야의 행정가로 활약했던 공은 말년에 공주목사,나주목사 등 목민관으로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고려사, 동국통감 등 사서에는 조부인 참지정사 진준의 하단에 간략히 소개되어 있을 뿐 생애전반에 대한 업적과 발자취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조선초 서거정에 의해 편찬된 동문선 등에 공의 유작으로 전해지는 사시사 춘하추동 4수首 가 전해지고 있으며 이 사시사는 1769년(영조 45) 경상도 함양의 종인들에 의해 후기축보(1769)의 부록으로 편집된 매호유고 뒤에 부집 (1784) 되기도 하였고 현전하는 근세의 파보와 대동보에도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사시사 4수首만을 통해 대문장가이며 시인이라는 명성을 가늠하기란 쉽지 않으며 유독 형제지간인 매호 진화의 유고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품이 적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안항서열
예빈공 진온陳溫의 안항서열에 관하여
전기축보(1709), 후기축보(1769)에는 다음과 같이 여양진씨 4세로 기록하고 있다.
진총후 -진준- 진광의 진광수 진광순 진광경 진광현- 식, 화, 온
즉, 2세 참지정사 진준은 5남을 두었는데 그 다섯째 아들이 진광현이고 진광현의 아들은 식,화,온 순이다.
이러한 계보도는 조선과환보에도 동일하게 수록되어 있다.
또한 고려사 진준전에도 진준의 손자로 문과에 급제한 식,화,온 순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상기 자료에는 서로 차이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여양진씨 3번째 대동보인 을축보(순조5년,1805)에 이르러 족보체계상 대대적인 변화가 발생한다. 손록을 참고하면
3세 하단에 광순-대장군이다. 전후기축보에는 공이 참지정사 진준의 제3자로 기록되어 있으나 정시술의 제성보와 경상도 진주,함양에 종인이 소장하고 있는 가승에는 참지정사 진준의 하단에 기록하기를 1子- 광순, 2자- 광수, 3자 - 광경, 4자 -광의, 5자- 광현으로 되어 있어 바로 잡는다는 것이다.
즉, 공식적으로 을축보(1805)부터 여양진씨 4세의 위차는
광의- 광수- 광순- 광경- 광현에서▶ 광순- 광수- 광경- 광의- 광현으로 바뀐 것이다.
뿐만 아니라 4세 진식, 진화, 진온이 구보에는 모두 진광현의 아들이며 그 순서는 진식, 진화,진온 순이었는데 을축보에 이르러서는 진온의 부가 진광수로 바뀌고 순서 또한 진화의 동생에서 형으로 바뀌는 대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전후기축보와 을축보 이후의 족보사이에는 이상의 변화외에도 상대계보도와 손록내용에 있어서 대대적인 변화가 있었다.
후기축보가 발간된 1769년부터 을축보 발간기인 1805년 까지 불과 36년 만에 위와 같은 놀라운 변화가 있게 된 배경과 근거는 무엇인가 ?
을축보(1805)와 기유보(1849)는 문헌적 근거에 관하여 첫째, 정시술의 제성보를 참고한 것이라 적고 있다.
그렇다면 정시술의 제성보는 언제쯤 제작된 것인가? 정시술은 감역을 지낸 언규의 아들로 현종조에 과거가 아닌 천거제에 의해 교관이 되고 전한에 이르렀으며 보첩에 밝아 종친부전부로 있으면서 이씨왕가의 족보인 선원보를 교정한바도 있는 보학전문가였다.
1674년에 경상도 안동에서 발간한 예안이씨 을묘보에 의하면 당시 을묘보를 만든 고산 이유장이 쓴 서문에 직접 안동에서 한양에 사는 정시술이 지은 제성보를 참고하여 예안이씨 족보를 수정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당시 정시술의 제성보는 족보가 없거나 기록이 적은 가문에서 족보를 펴내면서 경쟁적으로 참고했던 즉, 매우 인기가 있던 만성보였다.
그러나 제성보는 훗날 수 많은 가문의 소송의 빌미가 되었으며 실재 고증해 본 결과 상당부분에 오류가 있는 족보로 확인되기도 하였다.
물론 제성보 보다 약 20년 앞서 조종운에 의해 만성보 성격의 씨족원류(1657)가 제작되었는데 씨족원류에는 이상의 상세한 기록은 없다.
조종운과 정시술은 주로 각 가문에 소장중인 가승보와 이미 발간된 여타가문의 구족보를 참고하여 제성보를 만들었는데 만약 정시술이 입수한 가승에 오류나 조작이 있더라도 이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중략- 지금까지 전개된 이러한 혼란의 배경에는 실제 예빈경 진온에 관한 기록과 부친인 3세 진광수에 관한 기록이 거의 전무한데서 기인한다.
즉 어사대부 진식이 매호 진화의 형이라는 사실은 진식과 동년배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의 기록에서 분명히 확인되므로 논란이 없었지만 진화와 진온의 위차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어 입장에 따라 여러 해석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중 내부의 기록상의 혼선과 차이는 현재 각 대학교에서 발간한 학위논문 등에 여실히 반영되어 심지어 시조 진총후마저도 문중에서 가상으로 만든 인물이라는 학설이 전개되고 있으며 이 논문을 참고한 이후의 논문도 앵무새 격으로 이를 원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위의 위차관계 정립은 현재 전개되고 있는 재논란을 종식시키는 의미에서도 재검토가 필요한 것이다.
재구가능성
진온陳溫의 생몰시기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규보의 문집 10권에는 온상인溫上人이 소장한 백로를 그린 그림을 보고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이 시의 내용을 요약하면 강가에 백로가 우두커니 서있는 그림이 있는데 이 그림을 온상인 溫上人 이라는 분이 소장하고 있으며 그 그림을 보고 여러 가지 담겨있는 의미를 유추하며 이규보가 시를 지은 것이다. 물론 이시는 온溫 상인上人 의 집에서 이 그림을 보고 직접 이규보가 지은 시이다.
문제는 이 온(溫)상인(上人) 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이를 규명하기 위해 이규보의 작품중 상인이라는 문구가 들어가는 모든 작품을 분석해 보았다.
희귀한 서화 명품 복제본 ‘독화로사도’는 남루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왔지만 명화임에 틀림없다. 고려 대문호 이규보(1168~1241)는 그림을 평가하는 데 자신만한 사람이 없다고 자부했다. 그는 자신의 안목이 높아 최상품 그림만을 좋아한다고 했다. ‘주간동아’ 879호에서 말한 것처럼 ‘독화로사도’는 바로 이규보가 ‘그림 같은 시’로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했던 옛 명화다. 고려시대에는 귀족가문의 아들 10명 가운데 한 명이 출가해 승려가 됐다. 귀족가문 서너 집에 한 집꼴로 승려 한 명씩 나온 것이다. 고려시대 귀족문화 중심에 승려가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백(李白·701~762) 시 ‘백로(白鷺)’를 그린 ‘독화로사도
온(溫)상인(上人)
결과 이규보의 작품에 등장하는 상인은 이규보 보다 나이가 많고 덕망있는 사람으로 자나 이름, 성에 붙이며 주로 승려들이 많다. 그런데 본문 내용에 스님의 경우에는 그 스님의 이름을 적고 있으며 이름이 없을 경우에는 그 인물의 관직을 적고 있다.
다행히 위의 온상인의 그림을 보고 지은시에 온상인의 관직이 한림이라고 적고 있다. 동 문집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한림翰林이며 이름에 온溫이 들어가는 인물은 예빈경 진온陳溫 밖에는 없다. 즉 진온은 이규보 보다도 나이가 많은 참지정사 진준의 손자인 것이다.
다시 여양진씨 족보 손록의 진온陳溫 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자.
예빈경공파의 파조로 강종계유년(1213)에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예빈경에 있다가 외직으로 지공주사로 나갔으며 이후 나주목사로 옮겼다. 또 다른 자료에서는 신종조(1197~1204년)에 문과급제 한것으로 전한다.
그렇다면 강종계유년에 문과시험이 있었는가? 강종계유년에 실시한 방목기록이 고려사 등에 전하는데 이 때에 급제한 사람은 진교陳璬 외 13인이다. 위 13인중에 진온이 포함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없으나 당시 장원급제한 진교는 공교롭게도 진온의 사촌동생인 전농시사 진택의 아들이다. 이 계파는 뒤에 삼척진씨로 분적한 것으로 여양진씨 신보는 기록하고 있다.
시중공5世 진창덕陳昌德시부시장원 ▼/진교陳璬 시부시장원▼ 고려사 74권 16쪽
즉, 진온의 과거급제기록은 5촌 조카 진교의 기록을 원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추후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자료검토자/ 25世 ☞ 해송(海松) 진옥수(陳玉洙) [출처:다음] 진씨사랑방 지기 ㅣ 공동연구자 해송(海松) 진옥수(陳玉洙)
진온陳溫 사적 재구가능성
진온의 생몰시기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규보의 문집 10권에는 온상인溫上人이 소장한 백로를 그린 그림을 보고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이 시의 내용을 요약하면 강가에 백로가 우두커니 서있는 그림이 있는데 이 그림을 온상인이라는 분이 소장하고 있으며 그 그림을 보고 여러 가지 담겨있는 의미를 유추하며 이규보가 시를 지은 것이다. 물론 이시는 온상인의 집에서 이 그림을 보고 직접 이규보가 지은 시이다. 문제는 이 온상인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이를 규명하기 위해 이규보의 작품중 상인 이라는 문구가 들어가는 모든 작품을 분석해 보았다.
결과 이규보의 작품에 등장하는 상인은 이규보 보다 나이가 많고 덕망있는 사람으로 자(字) 나 이름, 성에 붙이며 주로 승려들이 많다. 그런데 본문 내용에 스님의 경우에는 그 스님의 이름을 적고 있으며 이름이 없을 경우에는 그 인물의 관직을 적고 있다.
다행히 위의 온상인의 그림을 보고 지은시에 온상인의 관직이 한림이라고 적고 있다. 동 문집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한림이며 이름에 온溫 이 들어가는 인물은 예빈경 진온陳溫 밖에는 없다. 즉 진온은 이규보 보다도 나이가 많은 참지정사 진준의 손자인 것이다.
다음으로 금성지를 원용한 기록이다. 진온의 손록 하단에는 금성지에 의하면 진온은 기사년(1209) 나주목사로 부임하고 이듬해인 경오년(1210)에 체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주시청 홈페이지와 금성읍지, 나주목지 선생안을 보면 나주목사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최초의 등재자는 공민왕 7년 5월에 이임한 하즙이다. 이후 1~2년 간격으로 교체되다가 공양왕1년(1389) 12월 8일에 나주목사로 나왔다가 이듬해인 공양왕2년(1390) 4월 13일에 체직한 인물이 진원서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여양진씨 4세 진온陳溫 의 손록에 경오년 4월13일에 나주목사에서 체직되었다고 기록하여 간지대로 라면 진온과 진원서의 나주목사기록은 완전히 일치하고있다.
다만 두 기록간에는 3주갑인 180년의 오차가 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전고로 제시한 금성읍지에는 진온이 나주목사로 부임 했다는 기록이 없고 대신 근 200년 뒤의 인물인 진원서가 나주목사로 부임한 기록이 있을 뿐이며 실제 급성읍지에 수록된 기록상 전하는 최초의 나주목사는 1358년에 부임한 하즙이다. 즉 이전의 나주목사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 등의 정사에도 나와 있지 않다.
그렇다면 목사의 부임, 체직일자까지 정확히 기록되어 있는 금성읍지의 전고는 무엇인가? 이는 당시 나주목의 호장들에 의해 기록된 금성일기이다. 이책은 유일본이 일본으로 유출되었다가 동경대도서관에서 최근 다시 국내로 재소개된 문헌으로 향토사연구의 매우 소중한 자료이다.
금성일기 기사년(1389)기록에 병마도절제사겸 목사 진원서가 12월8일 부임하였다가 경오년(1390) 4월13일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부임하고 체직한 간지와 월일이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진원서는 나주목사로 부임하기 2년전에 일본 대마도 정벌 부원수로 나주 대굴포(지금의 함평군 대동리 1)의 수군처치영에서 활동한 기록이 있다. 주 1)함평군 대동리는- 9세 진흠 참판공을 모신 월계사소재지 함평군 대각리와 면 경계임) 즉 진온의 나주목사부분은 후대인물인 진원서의 기록을 고증 없이 전용한 것이다.
특히 족보에는 진온(陳溫) 이 나주목사에 부임한 연도를 1209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4년 후인 1213년에야 과거에 급제한 것으로 원용하는 등 여러 기록이 일관성도 없고 전고자체도 오류로 일관하여 신뢰하기 어렵다. 물론 여양진씨 신보의 상기기록은 기축보나 을축보 등 구보에는 전혀 없던 기록이다.
다시 진온의 기록을 살펴보자
포은 정몽주의 문집에 기록이 있는데 진온陳溫 이 최천로의 척불소와 비슷한 주장을 했다고 적혀 있다.
최천로는 고려조에 평장사를 지낸 인물로 삭녕최씨 시조이다. 불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그 행적에 대해서도 전해지는 것이 별로 없다. 물론 포은 정몽주의 문집에는 최천로에 관한 기록자체가 없다. 불교배척을 주장한 인물로 고려전기인 성종조의 최승로가 있는데 이 또한 포은집에는 기록이 없다. 포은집에 수록된 진씨성을 가진 인물은 진원서, 진을서 등인데 이는 정변과 연루되어 귀양을 보낸 기사이다. 진온에 관한 기사는 물론 진온에 관한 언급자체가 없다. 아마 진온의 손록기록에 정몽주와 관련지어 추록된 것은 나주목사를 지낸 진원서의 행적을 진온란에 삽입하면서 야기된 해프닝으로 판단된다.
다만 포은집에는 불교의 폐단에 관하여 언급한 기록이 있는데 진온과는 관련이 없다.
정몽주의 견해처럼 불교의 폐단을 거론하며 척불상소를 올린 인물이 있는데 진사성이라는 인물이다. 1390년 당시 정몽주는 찬성사로 있었으며 상소문을 왕과 함께 논의하고 검토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즉 여양진씨 족보에서 말하는 포은집에 수록된 것으로 주장하는 진온의 척불소는 실재 200년 뒤의 후대 인물인 사관 진사성의 척불소를 전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진사성은 고려 유학의 대가인 문정공 신은의 저술인 화해사전을 모조리 불살라 유학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는데 이로 인해 포은집과 고려사 등에 기록이 전하는 인물이다.
진온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 동국통감, 동국명현록, 매호유고, 동국이상국집, 소화시평, 동문선 등에서 확인된다.
진온- 동문선(東文選) 卷二十 11쪽. 이규보 문집 제3권 (第三) 고율시(古律詩)편에 수록 시제(詩題):대인서침병사시사(代人書寢屛四時詞) 4수
전라도지방에 여양진씨가 처음 입향한 계기와 관련하여 4세 진온이 나주목사 부임을 근거로 이로부터 세거한 것으로 족보에서는 기록하고 있으며 확실한 전고는 없다.
다만 원종11년에 삼별초의 난을 진얍하기 위해 제주도에 들어가 싸우다 순절한 인물이 있는데 진자화로 고려사에 그의 본관을 나주진씨라 적고 있다.
여양진씨의 견해처럼 예빈경 진온으로부터 나주입향이 시작되었다면 진자화가 1230년 전후에 출생한 인물이므로 예빈경공 진온의 손자항렬이 된다. 그러나 현존하는 여양진씨 족보에서 진자화로 기록된 휘가 보이지 않는다.
씨족원류 중中에서
청주한씨 한광윤의 배위는 나주진씨 진의(陳懿)이다 이와 관련하여 여양진씨종친회에서는 혼동하기 쉬운 나주진씨라 하여 나주진씨 진의나 그의 아버지인 진영략은 1030년경 고려 초의 인물이므로 여양진씨와는 관련이 없다고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청주한씨 한광윤은 고려 충렬왕조의 인물로 1260년 전후에 출생하고 부친인 한희유는 1230년경 출생하였다. 따라서 한광윤의 장인인 나주진씨 진의는 1260년경, 진영략은 1240년경 출생했다고 볼수 있다.
여양진씨 대종회의 주장과는 무려 200년 차이가 난다. 즉 나주진씨 진영략이나 진의가 모두 고려초가 아닌 고려중엽의 인물로 무조건 여양진씨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모순이다.
한편 여양진씨 족보중 매호공 진화의 아들인 진영헌의 다른 이름이 진자후로 기록한 문헌이 있으며 출생시기는 1220년경이다. 나주인물지와 고려사에 수록된 진자화 또한 1250년 출생으로 모두 예빈경 진온보다는 후대의 인물이다.
고려사 열전 진준전에 진온이 진준의 손자이며 문과에 급제하였고 문장에 조예가 있다고 하였으며 동국통감과 고려명현록, 고려왕조사, 동문선, 익재집 등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다. 조선조에 발간된 매호공 문집 초간본에 사시사(춘하추동 4수)가 부록으로 첨부된 적이 있다.
원문=동국이상국전집 제3권, 동문선 제20권 칠언절구(七言絶句) 사시사(四時詞) 고율시(古律詩) 대인서침병사시사(代人書寢屛四時詞)
남을 대신하여 침병(寢屛)에 사시사(四時詞)를 쓰다
봄 春 柳유撚연金금絲사颺양曉요風풍。 一일雙쌍閑한燕연語어玲영瓏롱。 美미人인睡수起기心심煩번悶민。 皓호腕완擎격花화吸흡露로紅1)홍。 여름 夏 銀은蒜산垂수簾렴白백日일長장。 烏오紗사半반岸안洒세風풍凉량。 碧벽筩통傳전酒주猶유嫌혐熱열。 敲고破파盤반氷빙嚼작玉옥漿장。
가을 秋 騎기省성初초驚경見견二이毛모。 西서風풍一일夜야碧벽天천高고。 夢몽魂혼盡진處처山산重중疊첩。 月월苦고霜상寒한斷단鴈안號호。
겨울 冬 淅석瀝력風풍輕경雪설驟취飄표。 王왕孫손不불憚탄捻념鸞란簫소。 綺기筵연熏훈暖난猶유敎교摺접。 不불用용剛강添첨獸수炭탄燒소。
사시사 춘하추동 四 時 詞 春夏秋冬
여양진씨 4세世 -진온陳 溫 [ 신종조(1197~1204) 문과급제 고려 문인文人, 자字 = 대방大邦 호號 = 죽헌竹軒
봄 春
玉옥帳장牙아床상 別별院원中중 -구슬장막 상아 평상의 별당 안에서
閑한吟음隨수意의 繞요花화叢총-한가히 읊조리며 마음따라 꽃떨기를 돌다가
忽홀聞문杏행杪초 鶯앵兒아囀전 -갑자기 살구나무끝의 꾀꼬리 소리 듣고
手수放방金금丸환 看간落락紅1)홍 -금가락지를 던져 떨어지는 꽃을 보네
繞 = 두를 요, 叢 = 모일 총, 杪 = 나무 끝 초, 囀 = 지저귈 전
여름 夏
金금盤반紅홍縷루 聳용氷빙峰봉 -금반의 붉은 실에 얼음 봉우리가 솟았는데
畵화閣각陰음陰음 樹수影영籠롱 -그림같은 집은 우거진 나무 그늘에 쌓였네
半반岸안烏오紗사 倚의玉옥枕침-반쯤 젖힌 검은 사모쓰고 옥베개에 기대어
互호敎교纖섬手수 扇선淸청風풍-고운손 번갈아가며 밝은 바람 부채질하네
聳 = 솟을 용, 籠 = 대그릇 롱, 紗 깁 사, 紗帽 = 깁으로 만든 모자
纖手 = 섬섬옥수
가을 秋 釦구砌체微미微미 着착淡담霜상 -섬돌위에 미미한 서리가 내리자
裌겹衣의新신護호 玉옥膚부凉량 -새로 만든 겹옷으로 옥살결을 감싸네
王왕孫손不불解해 悲비秋추賦부 -왕손[귀뚜라미]는 비추부를 알지 못하고
只지喜희深심閨규 夜야漸점長장 -다만 색시방이 깊어저 감만 좋다고 하네
釦 = 금테 두를 구, 砌 = 섬돌 체, 裌 = 겹옷 겹 王孫 = 왕족으로 귀한분 [귀뚜라미 별칭으로도 씀], 悲秋賦 = 宋玉 이 지은 슬픈 노래
겨울 冬
繡수幕막深심深심 畵화毯담重중 -수 놓은 장막 깊숙히 그림담요는 겹겹이고
龍용爐로鳳봉炭탄 發발春춘紅홍 -용로속 봉황같은 숫불은 봄꽃처럼 붉구나
酒주酣감蘭난麝사 熏훈人인面면 -술이얼근하여 난사향에 얼굴이 훈훈하기에
掛괘起기金금窓창 向향雪설風풍 -일어나 금창을 열어 걸고 눈바람 쏘이노라 毯 = 담요 담, 酣 = 술즐길 감 [술 취할 감 蘭麝香 = 난초와 사향노루 향, 金窓 = 금속 창문
이와는 별도로 한수재집과 우서 등 고문헌에 진온에 관한 기록이 있으나 현재 번역작업이 미완성이어서 본고에는 추록하지 못했다.
그런데 유고시로 전하는 사시사가 동문선에 전하는데 공교롭게도 이규보의 사시사 제목에 춘하추동 8수를 연속해서 기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앞의 4수는 이규보의 작품이며 뒤의 4수는 진온의 작품이라는 것인데 이와 관련하여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에는 본 사시사에 관하여 제목을 사시사라 하지 않고 代人書寢屛四時詞(남을 대신하여 침실병풍에 사시사를 쓰다)로 적고 있다.
다시 말해 이미 사시사가 있는데 그 사시사 내용을 어떤 사람의 침실병풍에 글씨를 대신해서 쓰다는 의미이다. 고시(古詩)에서 대필이 아닌 대작(글 자체를 대신해서 쓴 경우)은 제목에 대작代作이라고 분명히 적고 있다. 특히 이 사시사 8수(首)가 모두 진온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는 1수와 5수 春의 운韻이 모두 홍(紅 1)이라는 점이다. 이 경우 진온의 사시사에 차운하여 이규보가 같은 운(홍)으로 사시사를 적었다고 볼 수도 있으나 동국이상국집에는 차운하여 시를 쓴 경우에는 모두 제목에 次韻이라는 어귀를 적고 있다. 이는 동서同書에서 매호 진화와 차운한 10편의 시에서도 극명하게 확인된다.
즉, 동문선에 소개한 사시사 8수는 모두 진온의 작품이라고 판단되며 향후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자료검토자/ 25世 ☞ 해송(海松) 진옥수(陳玉洙 [출처:다음] 진씨사랑방 지기 ㅣ 공동연구자 해송(海松) 진옥수(陳玉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