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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문헌
구곡유고(九曲遺稿)
조선 후기의 학자 이중륙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이중륙(李重穋)의 시문집. 2권 1책. 목활자본. 1892년(고종 29) 그의 손자인 장표(章彪)·기락(基洛) 등이 편집한 것을 현손 우구(宇九)가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상의(李相義)의 서문과 권말에 이만인(李晩寅)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273수, 서(書) 2편, 서(序)·지(識)·잠·축문 각 1편, 제문 3편, 권2는 부록으로 행장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시에는 〈몽배이소산옹 夢拜李小山翁〉·〈단오배소산옹 端午拜小山翁〉·〈상소산옹십육운 上小山翁十六韻〉등 이광정(李光靖)에게 보낸 것과 정종로(鄭宗魯)·김종덕(金宗德)·김굉(金0x994F) 등과 수창한 것이 수십 수 있다.
서 가운데 〈와유도서 臥遊圖序〉는 평소에 친구들과 명승지를 유람하며 지은 시를 모아 만든 시첩(詩帖)에 대한 서문이다. 지 중 〈제유관록후 題遊觀錄後〉는 비로봉(毗盧峰)·태백산 등을 유람하고 와서 기록한 〈유관록 遊觀錄〉의 지이다.
잠 가운데 〈자신잠 自新箴〉은 사람의 나이는 새로워질 수 없어도 덕은 새로워지는 것이므로 덕을 쌓아야 하는데, 그 방법은 배움만이 있을 뿐이라고 경계한 글이다. 그 밖에 이광정에게 보낸 편지와 권한표(權漢杓) 등의 제문이 있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곡집(龜谷集)
조선 후기의 여항시인 최기남의 시집
조선 후기의 여항시인 최기남(崔奇男)의 시집. 4권 2책. 목활자본. 1665년(현종 6) 문인들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권두에 신익성(申翊聖)과 이경석(李景奭)의 서문이 있다. 이 책은 권4를 제외하고는 각 권마다 상·하로 나누어져 있으며, 권말에 부록이 붙어 있어 모두 8개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권은 상·하로 구분되었다. 이에 따라서 시체별(詩體別)로 448수의 시가 실려 있다. 권1의 상에는 오언고시 40수, 하에는 칠언율시 149수가 실려있다. 권2의 상에는 칠언고시 16수, 하에는 오언절구 37수가 실려있다. 권3의 상에는 오언율시 121수, 하에는 칠언절구 79수가 실려있다. 권4의 상에 오언배율 6수가 실려있다. 문(文)은 〈졸옹전 拙翁傳〉만이 부록(附錄)되어 있을 뿐이다.
서문을 쓴 이경석은 “율(律)은 두보(杜甫)를 주로 했고 정성(正聲)은 맑고 갱연(鏗然)하여 읊을 만하다.”라고 평했고, 신익성은 “고체(古體)는 육조(六朝)의 것 같고 가행(歌行)은 당나라 제가(諸家)를 넘나들었으며 율조는 장경(長慶) 이전의 어투를 본받았다.”고 하였다. 이러한 평에 걸맞게 ≪구곡집≫에는 두보·도잠(陶潛)의 시에서 차운한 것이 매우 많다.
권1 하에는 작자의 시 이외에, 일본에 사신을 따라갔을 때 함께 갔던 이들과 수창한 다른 사람의 시도 같이 실려 있다. 이때 부사였던 조경(趙絅)은 “사랑하는 그대의 시는 율격이 매우 정화하여 고적(高適)과 잠삼(岑參), 왕유(王維)와 맹호연(孟浩然)을 출입했도다. ”라고 그를 칭송하였다.
최기남의 시는 서리 출신이었던 자신의 신세를 한탄조로 읊은 것이 많다. 그리고, 특히 여항의 문인들과 차운한 작품이 많다. 작자가 교유했던 당시의 여항시인으로 최대립(崔大立)·김충렬(金忠烈)·유찬홍(庾纘洪) 등이 있다. 이들과 수창하거나 그들과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작품이 많이 있다.
권1에는 63세 때 몸져누워 도잠을 흉내내어 지은 〈만시삼장 挽詩三章〉이 실려 있다. 〈구체온천의두공부동곡칠가 久滯溫泉擬杜工部同谷七歌〉는 두보의 〈건원중우거동곡현작가칠수 乾元中寓居同谷縣作家七首〉를 본떠서 지은 것으로서 자신의 신세와 어머니·동생·자식들, 그리고 그가 머물고 있는 곳의 참담한 현실 등을 차례로 읊은 것이다. 작자의 가정사의 일면을 읽을 수 있는 이 작품은 여항시인의 고뇌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그 밖에 부록되어 있는 〈졸옹전〉은 최기남 자신에 대한 전(傳)으로 작자의 인생관 및 생활태도가 드러나 있다. 서두에 ‘졸옹’이라고 자기의 처지를 묘사하고, 재덕이 모자라는 것도 아니면서 궁하게 사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 자위하였다. 성품이 명리(名利)를 좇지 않고 고요함을 좋아하며 책을 가까이하고 시 읊기를 즐겼으며, 평생 졸(拙)을 지키며 살았다고 술회한 것으로 보아 노자의 사상에 기울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74세 때의 작품이다.
≪구곡집≫은 ≪육가잡영 六家雜詠≫과 함께 여항문학의 태동기 연구에 크게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다.
<<참고문헌>>六家雜詠
<<참고문헌>>白軒集
<<참고문헌>>里鄕見聞錄
<<참고문헌>>李朝後期閭巷文學叢書(驪江出版社, 1986)
구담실기(龜潭實記)
조선 후기의 학자 정인준의 실기
조선 후기의 학자 정인준(鄭仁濬)의 실기. 2권 1책. 목활자본. 1907년 후손 재욱(在旭)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기우만(奇宇萬)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정면규(鄭冕圭)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14수, 부 1편, 서(書) 1편, 잡저 2편, 기 1편, 묘갈명 2편, 제문 1편, 권2는 부록으로 세계·신해생갑회도(辛亥生甲會圖)·지·후서 각 1편, 시 2수, 만사 9수, 제문 1편, 유사 1편, 유사후 1편, 묘갈명 1편, 봉안문 1편, 상향문 1편, 고유문 2편, 척록(摭錄) 16편, 종유록(從遊錄) 1편, 후지(後識) 2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시대적인 영향을 받아 울분과 강개한 심정을 읊고 있으며, 다양한 시재를 발휘하고 있다. 〈감우 感遇〉 12수와 〈술회 述懷〉 4수, 그리고 〈탄세 歎世〉는 임진왜란의 참혹상과 민중의 비참한 광경을 묘사한 것으로, 절망적인 상태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국민의 앞날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독맹자 讀孟子〉는 맹자의 정치이론과 같이 태평성대를 이룰 날을 고대하면서 어지러운 현실을 탄식한 것이며, 〈유거즉사 幽居卽事〉는 은둔생활을 하면서 당시에 일어난 사실들을 단편적으로 읊은 것이다.
〈가야록 伽倻錄〉은 1625년(인조 3) 가을에 가야산을 유람하고 쓴 것으로, 괘양사(掛陽寺)·홍류동(紅流洞)·촉석대(矗石臺)·회선암(會仙巖)·낙화담(落花潭)·해인사 등의 절경과 노정을 기록하였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구당집(久堂集)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박장원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박장원(朴長遠)의 시문집. 24권 18책. 목판본. 아들 빈(鑌)과 선(銑)이 편집한 것을 1730년(영조 6) 개간(開刊)했는데, 이 문집은 그 뒤 중간한 것으로 보인다. 서문·발문은 없고, 권말에 간기가 있다.
권두에 목록이 있고, 이어 권1∼8에 사부(詞賦) 11편, 시 1,708수, 권 9∼11에 소차(疏箚) 57편, 계사(啓辭) 12편, 전(箋) 8편, 교서 3편, 권12에 묘지명 7편, 묘갈명 1편, 행장 1편, 권13에 기사(記事) 1편, 전(傳) 2편, 제문 31편, 애사(哀辭) 2편, 권14에 서(書) 6편, 서(序) 15편, 권15에 기 14편, 설 11편, 권16에 논 4편, 책문(策問) 1편, 제발(題跋) 10편, 상량문 2편, 잠·명·찬 5편, 권17에 일중(一中), 권18·19에 차록(箚錄) 상·하편, 권20에 기문(記聞), 부록 권1∼4는 신도비명·시장(諡狀)·행장·언행록·치제문(致祭文)·제문·만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회안록 淮安錄〉·〈여강록 驪江錄〉·〈남찬록 南竄錄〉·〈송도록 松都錄〉·〈서행록 西行錄〉 등 그가 생활한 지역에 따라 편목을 붙이고 있는데, 그 중 〈남찬록〉은 1653년(효종 4) 흥해(興海)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시들이다.
소는 사직소가 대부분으로 특기할 만한 것은 없다. 〈병자기사 丙子記事〉는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그가 겪은 일들을 기록한 것이다. 기에는 기행문으로 〈유두류산기 遊頭流山記〉가 있다.
〈일중〉은 ≪근사록 近思錄≫ 등에서 성리학에 관한 요점을 뽑아 모은 것으로 ‘정일집중(精一執中)’에서 뜻을 취해 ‘일중’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차록〉은 평소 독서하다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기록한 것인데, 천문·역학을 비롯해 성리(性理)·사장(詞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수록하고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구당집(舊堂集)
조선 말기의 학자 조목수의 시문집
조선 말기의 학자 조목수(趙沐洙)의 시문집. 10권 5책. 목활자본. 아들 술지(述志)와 문인 유심춘(柳尋春)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간행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서와 발이 없다.
권1에 시 137수, 가(歌) 1편, 권2에 만장 32편, 뇌 1편, 권3∼5에 소 1편, 서(書) 85편, 권6에 제문 24편, 권7·8에 봉안문 6편, 상향문 4편, 행장 12편, 묘지명 1편, 권9에 전(傳) 2편, 사적(事蹟) 1편, 용학강의문답(庸學講義問答) 6조, 서(序) 4편, 기 1편, 발 4편, 명 1편, 상량문 4편, 자계(字戒) 1편, 권10에 부록으로 만사 11수, 제문 10편, 행장 1편, 묘갈명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자연경물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며, 벼슬할 뜻을 버리고 자기수양과 후진양성에 전념하는 생활을 보인다. 〈응지소 應旨疏〉에서는 정치는 문식(文飾)을 앞세우지 말고 실공(實功)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하고, 상하(上下)의 사치를 지적하였다.
〈용학강의〉는 ≪중용≫과 ≪대학≫의 요점과 차이를 잘 정리한 것으로, ≪대학≫은 심(心)에 관한 책이며 ≪중용≫은 성(性)에 관한 책이나, 두 책의 종지(宗旨)는 성(誠)과 경(敬)이라는 점에서 같다고 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과 규장각도서에 있다.
구래공정충직절기(寇萊公貞忠直節記)
작자·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작자·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31권 31책. 국문 필사본. 북송초의 명재상으로서 내국공(萊國公)의 벼슬을 지냈던 구준(寇準)을 주인공으로 삼은 조선시대의 창작소설이다. ‘구래공정충직절기’는 ‘寇萊公貞忠直節記’와 같이 한자로 표기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구래공(寇萊公)의 신도비(神道碑) 머리에 북송(北宋)의 인종(仁宗)이 ‘旌忠(정충)’이라는 글자를 전서(篆書)로 써 주었다는 ≪송사 宋史≫ 열전(列傳)의 기록을 참고한다면, ‘貞忠(정충)’은 ‘旌忠’일 수도 있다.
〈구래공정충직절기〉의 명칭은 홍희복(洪羲福)의 ≪제일기언≫ 서문에 ‘언문쇼설 구래공충렬기’로 표기되어 나타나므로, 이 소설은 그 서문이 쓰여진 1835년∼1848년 무렵에 민간에서 돈을 받고 빌려주는 세책본(貰冊本)으로 유통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낙선재본 〈구래공정충직절기〉에는 필사기가 없으나, 낙장(落張)과 낙자(落字)가 있고 나중에 보충하여 기록된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의 소설이 상당히 이른 시기에 전하였고, 낙선재본도 이른 시기에 수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소설은 19세기에 궁중과 서울 사대부가에서 두루 읽혔으리라 생각되며, 여러 이본들이 있다.
그 가운데 필사기(筆寫記)가 붙어 있는 서울대 소장본〔丙申丁酉筆寫本〕(57권 19책)에는 ‘안동서제소(安洞書題所)’에서 필사된 것으로 되어 있다.
‘안동(安洞)’은 근세조선 초기부터 있어온 서울 10방(坊)의 동명(洞名)에는 보이지 않고, 갑오경장 무렵에 발달한 ‘소안동계(小安洞契)’ 동명 가운데 ‘소안동(小安洞)’의 명칭으로 나타나는데, 이미 조선 후기에 동명으로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1902년에 ‘Royal Asiatic Society’가 작성한 서울 지도에 ‘안동(安洞)’이라는 명칭으로 표시되어 있다. 안동의 서제소는 늦어도 1896∼1897년 경에는 서울에 있었을 것이다.
이 소설이 〈명주옥연기합록〉에 그 이름(‘구공졍츙직졀긔’)과 일부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고 낙선재본 중국소설 번역물인 〈북송연의 北宋演義〉에 나오는 양가팔부자(楊家八父子)의 무용담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명주옥연기합록〉보다는 앞서 이루어졌으되, 〈북송연의〉의 번역보다는 뒤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 소설은 구준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작중인물로 설정하면서도 그를 인간 세계로 내려온 신선이라는 영웅적 인물로 허구화하였다.
다만 이야기 전개는 ≪송사열전(宋史列傳)≫·≪속자치통감(續資治通鑑)≫·≪십팔사략(十八史略)≫ 등의 역사서에 나타나는 구준의 실기(實記)·언행(言行)·관변기록(官邊記錄)·일화(逸話) 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 송나라 때 화주 현성촌에 사는 구영이라는 어진 선비에게 조씨, 석씨 두 부인이 있었다. 조씨는 두 딸을 낳은 뒤 나이 사십에야 아들 구준을 낳고, 구공은 서주자사로 승진한다. 석씨는 조씨를 시기하여, 구준이 문객(門客) 유한의 자식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구공은 조씨와 구준을 쫓아내고 조씨 소생의 두 딸은 석씨에게 양육케 한다. 금능에서 정착한 조씨는 방적으로 생계를 꾸려 구준을 가르치는데, 구준은 한 도사를 만나 신기를 배운다. 조씨는 구준과 함께 구공에게 가다가 위독한 병을 얻어 죽는다.
한편 석씨에게 농락당한 구공은 가혹한 정치를 하다가 벼슬과 품계를 박탈당하고 파면되어 고향 화주로 귀양보내진다. 석씨는 조씨 소생의 두 딸 소아와 영아를 몸을 파는 기생으로 팔려하는데, 두 딸은 도망하여 가다가 아우 구준을 만나고, 함께 부친에게로 간다.
석씨는 구준이 소아, 영아와 내통하여 창모 엄파의 삼백금을 가져갔다고 거짓으로 고하여 구준을 옥에 갇히게 하고 지니고 있던 월기탄을 옥리에게 빼앗긴다.
마침 예부시랑 정침이 화주자사로 부임하여 구준의 원한을 풀어준다. 구준은 외숙 조빈의 도움으로 구공과 합혈(合血 : 예전에 아버지와 아들의 피를 물에 떨어뜨리면 반드시 섞인다고 하여 부자지간을 판별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다)하여 부자지간임을 확인하고 석씨는 적소로 내쳐진다.
한편 참지정사 정현의 딸 정봉주는 부친이 준 명주 월기탄의 한쪽을 잊어버렸는데, 다른 한쪽을 가진 사람을 하늘이 정해준 배필로 알아왔다.
화주자사 최관의 아들 최차현이 옥리로부터 월기탄을 빼앗아, 자신이 정봉주의 천생배필임을 주장하나, 정봉주는 낭원도를 그려 자신의 배필이 아님을 밝히고, 이후 구준이 천정임을 알게 되어 혼인하기로 한다. 최차현은 정가와 구가 두 가문을 짓밟고자 절치부심한다.
한편 귀향지에 있던 석씨는 사면을 받아 풀려나고, 석장군의 중재로 구공과 다시 만난다. 구준은 최차현의 무리인 유양의 딸 유호영과 마지 못해 혼인을 하게 되는데, 구미호의 혼령인 유호영은 정봉주를 제거하려고 한다. 최차현은 석씨와 짜고 요녀 요지선을 구공에게 올려 현혹시킨다.
구공의 생일 잔치에 유호영의 독주를 마시고 구공이 피를 토하고 의식을 잃은 사건이 있자, 요지선은 정봉주의 짓이라고 참소한다. 정봉주는 옥중 고초를 겪다가 풀려나 남자 옷을 입고 유하산 봉영사에 은신한다.
구준은 요지선의 구애를 뿌리치다가 오히려 겁탈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후원에 갇힌다. 정봉주는 피신 중에 유호영 일당의 추격을 받고 강물에 몸을 던지는데, 마침 어선을 타고가던 구준이 정봉주를 구한다.
구준과 정봉주는 최차현, 유호영, 요지선의 죄를 밝혀 사형을 받게 하고, 정봉주는 석씨를 타이르고 봉양한다. 구준은 장원급제하여 시어사가 된다.
(2) 구영아가 시집간 연왕이 미희 진지란에게 미혹되었으나, 진지란의 간악함을 알게 되어 그녀를 참사한다. 구준은 승문관 태학사에 승직(昇職)되어 있다가, 귀주 파동현에 파견되어 도적을 잡고 선정을 베푼다. 이로써 태학사 이부시랑의 관직을 받고 상경한다.
그리고 황제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여자인 경미인의 오라비 경윤이 숙녀를 겁탈한 사실을 황제께 아뢰어 관직을 파면하게 하는데, 그 공으로 ‘정출직절’의 포장을 받는다.
구준은 형부의 옥사를 판결하고, 황제의 명으로 하북의 백성을 구제하고, 거란군을 격퇴시켜 병수상서의 관직을 받는다. 구준은 태평한 세상을 만나 촛불을 켜고 야회(夜會)를 즐긴다. 다시 구준은 청주자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평서대원수가 되어 서하왕 조덕명의 하북 침범을 막아내고 돌아온다.
황제는 건강이 좋지 않자 구준에게 누구에게 황제자리를 물려 줄 것인가를 묻는데, 구준은 수왕으로 결정하게 한다. 수왕이 진종황제로 즉위하여 건원을 함평이라고 한다.
형부 옥사에서 구준의 은혜를 입은 정위가 은혜를 잊고 구준을 모함하여, 구준은 남방에 나가 난을 진압한다. 부친 구영이 죽어 삼년상을 마친 뒤 구준은 참지정사로 다시 벼슬길에 오른다. 그리고 참지정사 여단의 청에 따라 장남 구경린을 여옥화와 혼인시킨다.
(3) 추밀사 경윤의 딸로 여옥화의 외종자매인 경혜란이 구경린에게 반하여, 경귀비와 모의하여 여옥화를 황제의 후궁으로 보내려고 한다. 여옥화는 황제의 앞에서 후궁이 되지않겠다고 자진한다.
경혜란은 소상궁을 시켜 궤속에 여옥화를 감춰 궁밖으로 내보내 죽이려고 하는데, 소상궁의 오라비 소양이 여옥화를 살리고 산동의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아들과 혼인케 하나, 여옥화는 혼인을 거부한다.
이때 경혜란은 계략을 써서 구경린과 혼인하게 되나, 구경린은 그녀를 박대한다. 이 때 구준의 장녀 구숙염은 평장 이항의 막내아들인 이청과 혼인한다. 구경린은 산동 순무어사로 산동에 갔다가, 허주자사 장백춘이 납치하여 황제에게 바쳤으나 스스로 물에 몸을 던진 여 소저를 구해내고 부부가 되어 행복하게 지낸다.
(4) 구준이 동평장사 겸 오위도총관 원수가 되어 거란왕의 침입을 격퇴하고, 거란과 평화조약을 맺은 뒤 내국공(萊國公)의 품계를 받는다. 한편, 이청의 애첩 계월이 구숙염을 모해하여 독살하지만 구경린이 구숙염을 구하고 모친께 청하여, 정부인은 구숙염을 정부에서 요양하게 한다.
경혜란은 여옥화의 조카 여명혜와 정혼한 정경연(정침의 막내아들)을 진종황제의 외동딸인 혜양공주와 혼인하도록 한다. 그리고 노복 취운을 혜양공주의 궁녀로 들어가게 하여 여옥화의 사주로 공주를 죽이려 하였다고 거짓으로 고한다. 여옥화는 귀양을 떠나면서, 구경린에게 악한 무리들의 얼굴을 그려준다.
이 때 왕흠약은 구준을 시기하여, 황제가 거란을 직접 정벌하게 된 것은 구준의 핍박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참소함으로써 구준은 총애를 잃는다. 구경린은 구숙염의 누명을 듣고 계월 등을 죽인다. 구준의 차남 구영린은 상서 양우의 딸 양혜림과 혼인한다.
경혜란은 양왕 세자를 따라 진국으로 가서 정비를 몰래 죽이고 세자빈에 즉위한다. 구준은 천응군에 부임하여 북방을 방어한다. 구경린은 황제께 글을 올려 경혜란 일당의 악한 일을 밝히고, 여옥화와 다시 부부가 되는 것을 허락 받는다.
그러나 진종은 방사들의 농간과 왕흠약 등 간신의 득세로 국정을 어지럽히는데, 이에 구경린은 황성을 떠나 암춘정에 칩거한다. 구준도 황제가 반포한 천서의 궤를 부수었다는 죄명으로 관진을 파면당하고 역시 암춘정에 머문다.
(4) 구준의 둘째딸 구화염이 병부상서 왕순의 아들 왕서와 혼인하는데, 왕서의 이종사촌 형교옥이 왕서를 흠모하여 외조모 주씨와 짜고 신부는 주씨와 동침케 하고 자신이 신부 복장으로 왕서와 동침한다. 더 나아가 형교옥은 구화염을 겁탈하고 독살하려 하지만 구화염은 위기를 벗어난다.
왕서가 황제께 이 사실을 아뢰고, 황제는 형교옥을 목베어 죽이는 형벌에 처하게 한다. 주씨는 다시 아버지의 첩에게서 태어난 동생인 환관 주희정을 통하여 형교옥을 구해내고, 황제에게 혼인을 허락해 줄 것을 청하니, 이로써 왕서는 형교옥과 혼인을 한다.
형교옥은 백낭과의 밀통 현장을 붙잡혀 왕서에게 목을 매어 죽임을 당하나, 부친의 도움으로 살아나고 향민에게 몰래 개가한다.
이 무렵 구준의 차남 구상린은 무승군 현사 장순의 딸 장섬경과 황금팔쇠를 정표로 교환하여 정혼하지만, 다시 전임상서 위공의 딸과 혼인하는데, 구상린은 위소저의 못생긴 얼굴을 보고 홀대한다.
한편 장섬경은 남장을 하고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구상린과 동료가 된다. 구상린은 위소저의 재능을 알게 되어 박대한 것을 사과하고 부부가 행복하게 지낸다. 구준의 아들 구경린은 이부총재 겸 병부상서 대사마, 구영린은 예부시랑, 구상린은 추밀원직학사를 제수받는다.
(5) 경혜란은 진왕을 몰래 죽이고 세자를 즉위시켜 진왕비가 된다. 구경린은 진왕 욱의 반역을 예견하고, 황제는 구경린에게 동평장사 동정대원수의 벼슬을 내려 진국을 평정하게 한다.
장섬경은 진국 도성을 급습하여 함락한다. 구경린은 진왕비의 정체가 경혜란임을 알고 그 죄상을 밝히고, 경혜란의 삼족을 멸하고 진왕은 목을 매어 죽인다. 장섬경의 상주로 구경린은 진국왕에 봉해진다.
장섬경은 자시에게 청혼이 쇄도하자 정체가 탄로날까 두려워 낙향하는데, 구경린은 그녀가 구상린의 정혼녀임을 알아내어 혼사를 추진한다. 구준은 다시 벼슬길에 오르지만 조이용의 참소로 한직인 경조윤으로 가게 된다. 정섬경은 위 소저와 혼인하고, 구경린의 설득으로 부부 화해하여 아들을 낳는다.
(6) 진종황제는 황후가 죽자 유귀인을 황후로 세운다. 유귀인은 이첩여의 아들 송왕을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구준은 이첩여를 황후로 세울 것을 아뢰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유황후 즉위식에 불참한다. 구준은 개봉부윤으로 폄출(貶黜 : 벼슬을 떨어뜨리고 물리침. 貶斥)된다.
구준의 셋째딸 구빙염은 왕가우와 혼인하고, 구준의 다섯째 아들 구봉린은 상서 한경의 딸 한화명과 혼인한다. 한화명은 오빠 한기와 함께 생모 화부인을 여희고 계모 교씨의 박대를 받고 자랐다.
계모 교씨는 조카 교생의 세 번째 부인으로 한화명을 보내려 하였으나, 한기가 한화명을 데리고 탈신하여 구준에게 혼사를 청하여 성사된다.
한화명은 음탕한 짓을 하고 도망쳤다는 죄로 부친과 교씨에게 모진 매를 맞고 실성하나, 구봉린이 구출하여 완합한다. 교생은 교씨와 함께 계략을 꾸며 한화명을 해치려 하였으나, 진왕이 그녀를 구하고, 한기는 교씨의 악한 행동을 알고 그녀를 내쫓는다.
이 때 정승 왕흠약이 탐욕스럽고 포학한 정치를 일삼고 있었는데, 참지정사 양억의 추천으로 진종은 구준을 정승에 임명한다.
진왕 구경린의 세자 구세필이 황자 설왕의 큰딸 명선공주 화옥과 혼인하는데,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정위는 구준의 수염에 묻은 국물을 닦아주려다가 도리어 구준의 질책을 받고 구준을 해칠 뜻을 품게 된다.
정위는 구준이 유후를 파면시킬 것을 상소하는 글을 훔쳐 유후에게 구준을 대역죄로 모해한다. 유후는 구준을 도주사마로 벼슬의 품계를 깎는 가짜 문서를 내려 바로 시행하게 한다.
(6) 구준은 소백이 묘당에서 마른 대를 살리는 정충의 영험을 일으키고, 근무지인 도주에서 선정을 베푼다. 정위는 유후와 작당하여 구준을 다시 뇌주사호로 벼슬을 내린다. 서북 오랑캐가 배반하려 하자 구준에게 민심이 쏠린다. 정위는 백지조서에 보검을 싸서 뇌주에 보내 자결을 독촉하는데, 구준은 그 뜻을 모르는 체 한다.
진종황제가 세상을 떠나고 인종황제가 즉위한 직후, 정위는 유환, 조이용과 함께 구준을 역모죄로 무고하려 하였으나, 진세자 구세필이 간사한 무리들을 먼저 제압한다. 이때 정위와 유환, 조이용이 내분이 일어나, 유환은 유후에게 정위를 남방에 폄출하게 한다.
구준은 다시 도주로 근무지를 옮겨 있다가, 유배가는 정위를 만나 사제의 의를 폄으로써 그의 잘못을 뉘우치게 한다. 이 무렵 구준은 병이 들어 천명이 다했음을 알고 가족과 잔치를 열고 죽는다. 도주 사람들은 ‘구공사’를 세워 제사를 지내고 구준의 장례를 치른다.
(7) 유후가 죽은 뒤 인종은 생모 이첩여를 황태후에 봉하고, 진왕의 뜻에 따라 유환·정위·조이용 등을 처형하게 한다. 정위는 이미 굶주림과 추위로 죽은 뒤였다.
진왕은 부친 구준을 왕으로, 모친을 현정왕후로 추존하고, 덕정을 베푼다. 진왕은 10남 5녀를 다 혼인시키고 황제의 자리를 물려준 뒤 정침(正寢 : 제사나 일을 잡아 하는 목채의 방)에서 죽는다. 그뒤로 영화가 계속된다.
이 소설은 역사적인 실재인물을 내세운 일대기라는 점에서 소재가 특이하다. 낙선재본 소설들은 북송의 원우(元祐) 당적(黨籍)과 관련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하거나 아니면 가공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허구적인 이야기를 꾸며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소설은 대구조와 소구조의 양면에서 낙선재본 장편소설이 공유하는 특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
전체 구조는 한 가문의 맡아들 혈통인 인물의 일대기를 핵심 부분으로 하면서 자손 및 인척의 단합(團合) 과정을 중첩적으로 서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또한, 그 가문이 번영하게 되는 과정의 하나로서 악인에 의한 고난을 배치시켜 두었다.
소구조 면에서는 입장(立長)에 얽힌 가정의 분규, 본부인과 둘째 부인 혹은 첩 사이의 사랑 다툼 이야기, 하늘이 정해 준 배필과의 결연담(結緣談), 입신(立身)의 과정으로 설정된 군공담(軍功談), 사건처리의 기발성을 노린 공안물(公案物) 등을 얽어 지속적인 흥미를 유발시켰다.
그리고 소설은 구래공의 실제 사적을 일부 참고하면서도, 사건 전개는 완전히 허구로 하였다. 구영-구준-구경린-구세필로 이어지는 가계도 모두 허구이다. 다만 구준은 북송 때 진종(眞宗)을 임금으로 받드는 데 공을 세웠고, 경덕(景德) 원년의 거란 침공 때는 친정(親征)을 주장하여 적을 물리친 공이 있다.
젊어서 부귀하게 되어 사치를 즐겨 기름등잔이 아니라 꼭 초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구래공촉법(寇萊公燭法)’이라는 일화가 있는데, 그러한 사실과 고사는 소설의 전개 과정 중에 적절히 삽입하여 두었다.
또 ≪송사열전 宋史列傳≫에 보면 구준이 섬주자사(陝州刺史)로 나갔을 때 성도(成都)에 사는 장영(張永)이 구준에게 ≪사기≫의 〈곽광전 霍光傳〉을 읽어보라고 하였고, 구준은 뒤에 〈곽광전〉을 읽다가 ‘불학무술(不學無術)’이란 어구를 발견하고, 장영이 자신에게 하려던 말뜻을 알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소설에서는 이 일화도 그대로 차용하여 왔다.
또한 〈구래공정충직절기〉는 야승(野乘)도 참고하여, 구준이 어려서 매사냥을 나가는 대목에 야승을 참고한 흔적이 있다.
〈구래공정충직절기〉의 작가는 이렇게 정사나 야승에 실린 관련 일화들을 이용하였으나, 실제 사실에 충실한 역사소설을 지은 것이 아니라, 일화들을 흥미 요소로 삽입하여 높은 수준의 구성을 이루어내었다.
또한 낙선재본 〈구래공정충직절기〉는 사건 구성에서 중국소설의 수법과 유사한 면이 많다. 권세가나 황실에 의한 탈혼(奪婚), 간사한 계획을 꾸며 상대방을 모해하는 계략, 변복(變服) 탈출하는 계략(이 소설에 말하는 ‘배암이 허물벗는’ 계략), 간적(姦賊)의 눈을 속이기 위하여 남자로 변장하는 일, 여성이 강에 몸을 던졌다가 구원을 받는 일 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수법들은 낙선재본 한글 장편소설에서는 하나의 유형을 이루다시피 공통적으로 나타나, 한글 장편소설들 사이에 수법의 모방과 전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래공정충직절기〉의 창작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1780년 이전에 창작된 것이 분명한 〈유씨삼대록〉의 내용과 비교하여 볼 때, 수법 면에서 비슷한 점이 발견된다.
구래공을 제1주인공으로 삼으면서도 제9권 이하는 구래공의 아들인 구경린을 제2주인공으로 삼아 여러 세대에 걸친 가난 극복사(家難 克服事)를 중첩시키는 방식을 취한 것은 〈유씨삼대록〉의 대구조와 유사하다. 또한 〈구래공정충직절기〉는 남녀결연에서 천정(天定)을 강조하여, 1780년대 이전에 창작된 〈옥원재합기연〉의 사건전개 방식과 통하는 면이 있다.
<<참고문헌>>樂善齋本 소설 〈구래공정충직절기〉에 관하여(沈慶昊, 정신문화연구 44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참고문헌>>〈寇萊公貞忠直節記〉 硏究(최길용, 전주교육대학논문집 제27집, 1991.4.). 〈구래공정충직절기〉의 서사구조(최길용, 한글문화 제5집, 한글학회 전라북도지회, 1991.5.)
구룡재문집(九龍齋文集)
조선 후기의 학자 백봉래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백봉래(白鳳來)의 시문집. 23권 10책. 목활자본. 1893년(고종 30) 그의 증손 치진(致鎭), 종현손 관수(寬洙)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헌영(李0x9C97永)·박치복(朴致馥)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백영수(白英洙)·백필진(白弼鎭) 등 5인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348수, 권2에 중화대인도(中和大人圖) 및 설(說)·운명(運命)·운리(運理) 각 1편, 권3은 부록으로 행장·묘갈 각 1편, 제문, 잡저로 권4∼11에 역대통운(歷代通運), 권12∼15에 사서통리(四書通理), 권16∼21에 삼경통의(三經通義), 권22·23에 서역(序易)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대부분 철학이 담긴 내용들이다. 〈중화대인도〉와 〈중화대인도설〉은 천지자연의 이치와 역대 성현의 용심(用心)·사업을 대비시켜서 연역한 것으로, 동양철학의 골자가 체계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내용은 서설로 시작해 선인(善人)·신인(信人)·철인(哲人)·성인(聖人)·혼돈세(混沌世)·홍황세(洪荒世)·통태세(通泰世), 그리고 천사백려(千思百慮) 등 11개항의 철학사상으로 전개해 철학적인 체계를 확립한 것이다. 〈역대통운〉은 중국 역대 국가의 운기를 음양학적인 견지에서 풀이한 것이다.
태극이 부판(剖判)된 뒤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그림을 첨가해가면서 운세의 흐름을 설명하였다. 〈삼경통의〉는 유교 경전에 대한 대략적인 의의를 그림으로 그려서 설명한 것이다. 〈사서통리〉는 사서의 기본적인 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심성과 인의에 대해 그림을 그려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이따금 제현(諸賢)의 설을 인용해 자기의 설을 보충하고 있다. 〈서역〉은 64괘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그의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다. 연세대학교 도서관과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