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당(以堂) 김은호가 약관의 나이에 어진(御眞·임금의 초상화)을 그리는 어용 화가가 된 것은 우연이었다. 조선 서화학교에 입학한 지 3주밖에 안 됐을 때 스승인 소림(小琳) 조석진과 심전(心田) 안중식을 대신해 친일 세도가 송병준 초상화를 그린 게 계기였다. 이당의 기량을 발견한 고종의 주치의가 그를 왕실에 소개했다. 새파란 신인이었지만 일단 어진을 그리고 나자 하루아침에 대접이 달라졌다. 쌀 한 가마니 값이 4원일 때, 고종은 자기에게 4000원을 하사했다고 이당은 회고록에 썼다.
▶어진이란 그런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어진을 그릴 때마다 특별 기구가 설치되고 거국적 지원이 뒤따랐다. 최고 화가의 선발, 스케치 완성, 채색, 봉안(奉安)…. 하나 할 때마다 길일(吉日)을 택해 엄숙하게 의식을 거행했다. 조선 초의 석경(石敬)이나 조선 후기의 조영석 같은 이는 어진을 그린 공로로 단숨에 6품의 벼슬을 받았다.
▶첫 임금 태조부터 마지막 순종까지 엄청난 양의 어진이 제작됐다. 임금들은 5년이나 10년에 한 번씩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했다. 신하들은 예전의 임금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하며 용안(龍顔)의 변화를 살피고 임금의 장수를 빌었다. 그러나 잦은 전쟁에 시달렸던 조선 왕조의 운명탓에, 어진들도 그때마다 불타 없어졌다. 6·25 전쟁 중 부산 용두동 창고에 옮겼던 창덕궁 유물들이 불탔을 때 그나마 남아있던 어진들도 대부분 사라졌다. 지금 완형에 가깝게 남아있는 조선시대 어진은 태조(太祖)와 영조(英祖)의 것 2점뿐이다.
▶태조는 무려 26점의 어진을 남겼다. 창업 임금의 초상화인 만큼 평양 개성 전주 등 6곳에 건물을 지어 특별 관리했다. 하지만 이 역시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 대부분 불탔다. 창덕궁 영희전에 하나 남아있던 태조 어진을 고종 9년(1872년) 백은배 등 당대 최고 화가들이 모사(模寫)한 뒤부터 전주 경기전에 보관해 왔다.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에 대여 전시되고 있는 경기전 소장 태조의 어진에서 얼굴 부분이 찢어졌다가 수리한 흔적이 발견됐다. 태조 어진은 보물(931호)이므로 훼손돼 수리할 경우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야 하지만 문화재청은 훼손된 사실도 몰랐다고 한다. 전쟁이 난 것도 아니고 난리가 난 것도 아니다. 지난 600여년 온갖 풍상을 겪으며 이 땅의 역사를 지켜봐온 태조의 어진이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에서 얼굴을 꿰맨 것 같은 모습으로 걸려있는 모습이 안쓰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