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의 모습이 어떠했는가? 아주 신비롭게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인도 문화이기도 하고 또 2600년 전 문화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에는 우리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신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렇게 사람들이 믿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상사까지도 신들과 결합되어서 얘기가 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저 인도대륙 북쪽 카필라바스투라는 작은 나라의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정반왕, 어머니는 마야부인이었습니다. 산월이 가까워오자 마야 부인은 정반왕에게 친정에 가서 애기를 낳고 돌아오겠다고 인사를 하고 아침 일찍 동쪽 문으로 출발했습니다. 정오 정도에 이르러서 카필라성과 데바다하의 중간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아주 아름다운 숲을 만났는데, 그 숲에는 아쇼카나무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마야 부인은 가마에서 내려서 꽃구경을 즐겼습니다. 그 때 많은 꽃나무 가운데 가장 탐스럽게 핀 왕자다운 꽃나무를 보고 가까이 가서 오른손을 들어 그 꽃가지를 잡는데 마침 산기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애기 낳을 준비를 해서 애기를 낳았다고 합니다. 경전의 기록에 의하면 그 때 범천왕은 황금그물로 애기를 받았고 인드라천은 일산으로 그늘을 만들어줬다. 그 때 용왕이 나타나서 더운물과 찬물로 애기를 씻기자 애기의 몸은 황금빛으로 빛났다. 애기는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었는데 그러자 걸음마다 연꽃이 피어났다. 애기는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이렇게 외쳤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도다. 삼계가 괴로움에 빠져 있으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
이것이 부처님이 태어난 모습을 묘사해 놓은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진짜 그랬을까? 믿는 사람은 그대로 믿으시면 되고, 뭘 그랬겠냐 의심이 드는 사람은 그럼 이것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이렇게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신들이 부처님 오심을 찬미하고 받들었다 하는 것은 붓다는 신들의 세계 보다 위에 있었다, 신들의 세계도 초월했다 이런 의미입니다.
일곱 발자국을 걸었다는 것은 인도 문화에서 유래했습니다. 인간은 그 지은 바에 따라서 가장 열악한 지옥부터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이렇게 육도를 윤회하게 되는데 인도 당시의 문화는 인간은 복을 지어서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은 윤회의 세계 안에 있는 좀 더 나은 세계가 아니라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해탈과 열반을 지향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천상의 세계가 아니라 천상의 세계도 벗어나 버린, 윤회를 벗어나 버린 해탈을 성취하신 분이다 하는 것을 말합니다.
'천상천하 아당안지'에서 '천상'이라는 것은 신들의 세계를 말합니다. '천하'라는 것은 인간의 세계를 말합니다. 인간의 세계는 첫째, 물질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둘째, 권력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셋째, 인기와 명예가 세상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질과 권력과 인기와 명예를 구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 세계에 묶여 있습니다.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되고 권력의 노예가 되고 명예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인간은 신들의 노예입니다. 여기서 신들이라는 것은 종교적인 믿음도 들어갈 것이고 사상과 이념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이념과 사상, 믿음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신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통틀어서 자신의 존재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이 무지에서 벗어난다면 바로 우리 자신이 이 우주의 주인이고 자기 운명의 주인입니다. 부처님은 신도 어쩌지 못하는 인간 존엄의 절대성을 선언한 것입니다. 천상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천하의 굴레에서 벗어난 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를 자아 상실의 시대라고 합니다. 스스로를 잃어버렸다. 돈에 정신이 팔려서, 쾌락에 정신이 팔려서, 권력에 눈이 멀어서, 인기에 영합하다 보니까 자기를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아상실의 시대에 자기를 되찾는 길, 자기의 존엄을 회복하는 길, 이것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의미입니다.
바로 그 길로 가려면 붓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행복은 밖에서 누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을 늘 밖으로부터 찾고 있습니다. 남편이 조금만 더 잘해주면, 아이들이 조금만 더 말을 잘 들으면, 돈이 조금만 더 있으면, 조금만 지위가 더 높아지면, 사람들이 자기를 조금만 더 알아주면 나는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불행하다며 자기를 잃어버리고 경계에 팔려서 우왕좌왕하며 방황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의 삶은 그 누구도 어쩌지 못합니다. 자신의 행복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진실로 그 행복과 불행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것 아니네."
내가 무엇을 믿느냐, 산신을 믿든, 칠성신을 믿든, 관세음보살님을 믿든, 하나님을 믿든, 부처님을 믿든, 믿음은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에 각자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면 됩니다. 여기서는 믿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우리가 행복해지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아닌 것을 자기로 착각하고, 영원하지 않을 것을 영원할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에 두렵고 불안하고 방황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항상 하지 못할 것 같은 이 몸뚱이를 항상 할 것처럼 생각하고, 젊음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이 몸이 늙어가는 것이 괴롭고, 죽음이 가까이 온다고 생각하면 괴롭습니다. 내가 가진 재물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는데 이 재물 또한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의지할 것이 못 됩니다. 내가 가진 지위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의 무엇에 의지하고 살겠는가?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너 자신에게 의지하라. 진리 아닌 것에 의지하지 말고 진리에 의지하라"
나의 무지와 잘못된 습관에 노예가 되어 인생이 고달픕니다. 삶이 본래부터 고달픈 게 아닙니다. 저 다람쥐도 삶을 고달프게 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왜 고달프게 사는가? 그래서 이 무지를 깨뜨려야 합니다. 자기가 경험한 일부분을 전체라고 단정하기 때문에 진실을 전혀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은 다만 나의 경험에 의해서 알아진 사물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나에게 그렇게 들렸고 나에게 그렇게 비춰졌을 뿐이지 그것이 실상은 아니다. 이렇게 집착하지 않고 고집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괴로움은 훨씬 적어집니다. 그래서 스스로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 즉 열반과 해탈을 성취하는 것이 붓다가 이 세상에 오신 뜻이고 우리가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어떤 이유를 붙이지 말고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행복을 유지시켜야 됩니다. 삶의 자유로움을 간직해야 한다. 비록 병이 나서 누워있을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지라도, 잠시 마음의 평정을 잃었더라도 빨리 평정심을 되찾아서 삶이 여일해야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삶에 충실할 때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이 불교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첫 번째 한 구절일 뿐입니다. 뒤에 나오는 '삼계개고 아당안지'가 있습니다. 나는 자유롭고 행복해졌는데, 내 주위를 둘러보니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괴로움 속에 헤매고 있다. 그러니 그들도 내가 얻은 이 행복의 세계로 그들을 인도하리라 라고 다짐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 또한 자유와 행복을 마음껏 누리도록 도와주리라. 이것이 '삼계개고 아당안지' 입니다. 먼저 자기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하고, 또한 나만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는 가족들 이웃들 주변 세상도 함께 이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뜻을, 태어나실 때의 모습으로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해서 북한주민들의 고통에 대해서 연민을 느끼고 한반도 평화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통일에 대한 발원을 했으면 합니다. 전 세계 사람들을 생각할 때 절대 빈곤은 우리가 함께 퇴치해 나가자. 환경을 파괴하는 삶의 방식은 공멸을 초래하기 때문에 우리가 좀 자제를 하자. 나 하나 변한다고 뭐가 변하겠느냐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우리들부터 작은 노력을 해나갈 때 우리 후손들까지 오래도록 행복한 삶의 터전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부처님께서 태어나실 때 일성으로 상징되는 이 인간 존엄의 선언,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원을 오늘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새기기를 바랍니다.
법륜(法輪, 1953년 ~ )은 한국의 승려 이자, 사회 운동가, 구호 운동가, 환경 운동가, 대북 전문가이다. 경주에서 고등학교 시절 불교학생회를 조직해 활동하며 조계종 원로의원 불심도문 스님으로부터 사미계를 받았다. 그 후, 1988년 불교수행공동체 정토회를 설립해 수행지도와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대중들의 고민을 듣고 대화를 통해 그 사람이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즉문즉설 강연으로 멘토로서 유명해졌고, 스님의 저서로는 《스님의 주례사》, 《엄마수업》, 《방황해도 괜찮아》 등이 있다. 또 다양한 구호활동으로 2002년에는 아시아의 노벨평화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