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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천년 선조를 찾아서
2014. 11. 4.
[제17대 내물왕(奈勿王)]
[내물왕(奈勿王)]
성은 김씨이다. 각간(角干) 말구(末仇)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휴례부인(休禮夫人) 김씨이며, 비(妃)는 미추왕(味鄒王)의 딸인 보반부인(保反夫人) 김씨이다. 흘해왕을 이어 즉위하였는데, 이로부터 김씨가 왕위를 세습하였으며 '마립간'이라는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364년 4월에 왜병의 큰 무리가 쳐들어오자 초우인(草偶人;풀로 만든 허수아비) 수천을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 토함산(吐含山) 기슭에 벌여 세우고, 병사 1000명을 따로 부현(斧峴) 동쪽에 매복시켰다가 왜병을 전멸시켰다. 373년에는 백제의 독산성주(禿山城主)가 남녀 300명을 이끌고 투항하자 이들을 받아들여 6부(部)에 분거(分居)하고, 이들을 돌려보내라는 백제왕의 요청을 일축하였다.381년 위두(衛頭)를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에게 보내어 우의(友誼)를 맺은 뒤 중국문물 수입에 힘써, 이때부터 고구려를 거쳐 중국문화가 들어왔고 한자(漢字)도 이때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392년에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위력에 눌려 사신과 함께 이찬(伊飡)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볼모로 보냈다. 다음해 왜적 침입으로 서울이 포위되었으나 이를 물리쳤고, 395년에는 말갈(靺鞨)이 침입하자 이를 실직(悉直)에서 격파하였다. 397년 흉년이 들자 백성의 세금을 1년 동안 면제하는 등 내외로 많은 치적을 남겼다.
[출처] 내물왕 [奈勿王, ?~402] 네이버 백과사전
[제22대 지증왕(智證王)]
[제38대 원성왕(元聖王)]
[원성왕(元聖王)]
괘릉(掛陵)
?~ 798(원성왕 14).
신라의 제38대 왕(785~798 재위).
이름은 경신(敬信). 내물왕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일길찬 효양(孝讓)이며, 어머니는 계오부인 박씨(繼烏夫人朴氏:또는 知烏夫人朴氏)이다. 비(妃)는 김씨로 각간 신술(神述)의 딸이다. 아들 인겸(仁謙)·의영(義英)·예영(禮英)과 딸 대룡부인(大龍夫人)·소룡부인(小龍夫人)을 두었다. 780년(혜공왕 16) 김양상(金良相)과 함께 김지정(金志貞)의 난을 평정하고 혜공왕을 죽인 뒤,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그뒤 선덕왕이 자식 없이 죽자 김주원(金周元)과 왕위다툼을 하게 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주원의 집은 서울 북쪽 20리에 있었고 그때 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불어서 주원이 건너오지 못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인군(人君)의 큰 자리는 본래 인모(人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폭우는 하늘이 혹시 주원을 내세우지 못하게 함이 아닌가? 지금 상대등 경신은 전왕의 동생으로 본래 덕망이 높고 인군의 자격이 있다"고 하여 만장일치로 그를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하니 얼마 안 있어 비가 그치고 백성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당시 김경신보다 서열이 높은 김주원이 왕위에 추대되었는데, 김경신이 복두를 벗고 흰 갓을 쓴 뒤 십이현금(十二絃琴)을 들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고, 아찬 여삼(餘三)의 해몽을 따라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를 올렸더니 알천의 물이 불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왕위에 오른 경신은 고조부 법선(法宣)을 현성대왕(玄聖大王), 증조부 의관(義寬)을 신영대왕(神英大王), 할아버지 위문(魏文)을 흥평대왕(興平大王), 아버지 효양을 명덕대왕(明德大王), 어머니를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추봉하고, 아들 인겸을 왕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성덕대왕(聖德大王)과 개성대왕(開聖大王:선덕왕의 생부)의 2묘(二廟)를 없애고, 시조대왕(始祖大王:味鄒尼師今)·태종대왕(太宗大王:武烈王)·문무대왕(文武大王)·흥평대왕·명덕대왕을 5묘(五廟)로 했다. 785년(원성왕 1) 총관(摠管)을 도독(都督)으로 바꾸었고, 788년 독서3품과(讀書三品科)를 설치해 관리를 등용했다. 790년 벽골제(碧骨堤)를 증축하고 발해와 통교했다. 원성왕 때 와서 신라 하대 권력구조의 특징인 왕실친족집단에 의한 권력장악의 틀이 확립되기 시작했다. 왕과 왕자를 중심으로 좁은 범위의 근친 왕족들이 상대등·병부령·재상 등의 요직을 장악했으며, 이들이 그뒤 왕위를 이어서 하대 원성왕계로 불린다. 불교에도 관심이 많아 785년 승관(僧官)을 두었으며, 795년에는 봉은사(奉恩寺:또는 報恩寺)를 창건하고 망덕루(望德樓)를 세웠다. 798년 12월 왕이 죽으니 시호를 원성(元聖)이라 하고, 유명(遺命)에 따라 시신을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했다.
“아랍인들이 왔을 때 이 석상을 보여주니 자기 선조들의 상이라고 하더라” 김참종 曰
김병호 숭혜원(崇惠殿) 전 참봉(殿參奉) 홀(笏)에 따라 예(禮)를 갖춘 4 배(拜) 올리고
오늘 꽉 짜인 행사 일정에도 멀리서 찾아 준 우리를 위해 손수 안내 해 주신 김병호 전 참봉(殿參奉)님의 분에 넘치는 해설도 있어 감격스러웠다.
괘릉(掛陵)에 대한 설명으로 능 옆에 우물을 보여 주신다.
능 바로 아래에서도 물이 솟아나는 곳을 발견할 수 있어 디카에 담았으니 물이 화면 상 보일지는 모르겠다.
사진으로는 판독이 되지 않지만 우물에는 물이 고였고 는 아래 잔디에는 물기가 흥건하게 비쳐 구두 밑창을 추긴다.
아래 우물에도 물기가 보이고 7~8여년 전에는 왕릉이 울타리로 쳐저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뜯어서 철조망 울타리로 대체하였다.
릉 보존 사업에 많은 공을 세우는 김참봉의 설명은 경주 토박이로서의 애향심이 넘쳐 흐른다,
이런 분들이 있어 고향은 발전되고 보존되어 감을 느낄 수 있다.
於牛 재교님이 설명을 듣는 사이 시간에 쫓긴 南齋는 설명을 들으면서 능(陵) 둘레석에 12지 상을 촬영하기 위해 능을 한 바퀴 둘러본다.
[12지 상]
북쪽 사자
괘릉의 또 다른 보물은 네 마리 사자상이다.
네 마리 사자상은 모두 사방(동,서,남,북)을 지킨다.
[제45대 신무왕(神武王)]
신무왕(神武王)
?~ 839(신무왕 1).
신라의 제45대 왕(839 재위).
이름은 김우징(金祐徵). 아버지는 상대등 균정(均貞)이며, 제43대 희강왕의 종제(從弟)이다. 어머니는 진교부인(眞矯夫人) 박씨이고, 비는 진종부인(眞從夫人)이다.
828년(흥덕왕 3) 대아찬(大阿飡)으로 시중(侍中)에 임명되었다. 831년 면직된 뒤 834년 다시 시중이 되었으나, 이듬해 아버지가 상대등에 임명되자 사임했다. 836년 흥덕왕이 죽은 뒤, 아버지인 균정과 제륭(悌隆:뒤에 희강왕) 사이에 왕위쟁탈전이 벌어졌을 때 제륭을 추대한 김명(金明:뒤에 민애왕)·이홍(利弘) 등과 싸웠으나 아버지가 전사하는 등 대패하자 김양(金陽)과 함께 청해진(淸海鎭)의 장보고(張保皐)에게 도망갔다. 희강왕이 자살하고 민애왕이 즉위하자 우징은 838년 장보고의 도움으로 군사 5,000여 명을 이끌고 진격하여 민애왕의 군사를 물리치고 839년 즉위했다. 즉위 후 할아버지를 혜강대왕(惠康大王), 아버지를 성덕대왕(成德大王), 어머니를 헌목태후(憲穆太后)로 각각 추봉했다. 또한 자신의 즉위에 공을 세운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에 임명했다. 그러나 즉위한 지 3개월 만에 죽었다.
[제46대 문성왕(文聖王)]
문성왕(文聖王)
?~ 857(문성왕 19).
신라 제46대 왕(839~857 재위).
이름은 경응(慶膺). 아버지는 제45대 신무왕이고, 어머니는 정계부인(貞繼夫人)이다. 비는 시중(侍中) 위흔(魏昕)의 딸 소명왕후(炤明王后)이다. 부왕인 신무왕이 왕위쟁탈 과정에서 승리해 즉위했지만 6개월도 안 되어 죽자, 왕위쟁탈 과정에서 발생한 많은 문제들을 안고 즉위했다. 즉위초 신무왕을 도운 귀족세력인 장보고(張保皐)를 진해장군(鎭海將軍), 예징(禮徵)을 상대등(上大等), 김양(金陽)을 병부령(兵部令)에 임명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귀족세력은 왕권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해 그의 재위기간중 모반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841년 일길찬(一吉飡) 홍필(弘弼)이 반란을 일으켰고, 846년에는 장보고가 자기 딸을 왕비로 삼게 하려다가 실패한 데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 또 847년에는 이찬(伊飡) 양순(良順)과 파진찬(波珍飡) 흥종(興宗)의 반란이 있었고, 849년에는 이찬 김식(金式)·대흔(大昕)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와 같은 소용돌이 속에서 재위한 문성왕은 857년 숙부인 의정(誼靖)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유조(遺詔)를 내리고 죽었다. 경주 공작지에 능이 있다.
[제56대 경순왕(敬順王)]
경순왕(敬順王)
신라 제56대 마지막 왕(927~935 재위).
성은 김(金)씨. 이름은 부(傅). 문성왕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이찬(伊飡) 효종(孝宗)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큰아들은 마의태자(麻衣太子)이고 막내아들은 범공(梵空)이다. 9세기말 신라는 국력이 약해져서 지방호족들이 독자세력을 형성하여 각 지방을 나누어 지배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견훤과 궁예의 세력이 가장 강성하여 후삼국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신라가 진골왕족의 권력 다툼에 휩싸여 경상도 일대로 지배권이 축소되었던 데 반해, 견훤과 궁예는 전라도 일대와 중부지방에서 커다란 세력을 형성했다. 927년 후백제의 침공으로 경애왕(景哀王)이 죽은 뒤 견훤에 의해 즉위했다. 재위 동안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으며 국토는 날로 줄어들고 민심은 고려로 기울었다. 이에 군신회의(君臣會議)를 소집하여 고려에 귀부(歸附)하기로 결정, 935년 김봉휴(金封休)를 시켜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는 국서를 전했다. 그뒤 왕건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맞고 정승(正承)에 봉해졌으며, 녹(祿) 1,000석을 받고 경주를 식읍(食邑)으로 받아 경주 사심관(事審官)에 임명되었다. 무덤은 장단에 있다.
8) 제 56대 경순왕릉(敬順王陵)
경순왕 대제때의 그림으로 이번 [찬란한 천년의 영광 신라문화복원] 책자 177면에
필자(高靈 南齋 金在鎬)의 그림이 영광스럽게도 올라가 있다.
9) 숭혜전(崇惠殿)
좌로부터 제 13대 미추왕과 제 30대 문무왕,
그리고 제 56대 경순왕의 신위를 모시고 우측에 경순왕 영정이 있다.
신라왕 56대 : 경순왕(敬順王)
서기 927년, 경순왕이 즉위하니 이름은 부(傅)이며 문성왕의 후손이다. 왕은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라 전 왕의 시신을 모시고 신하들과 함께 통곡한 후, 시호를 경애라 하고, 남산 해목령(蟹目嶺)에 장사 지냈다.
3년(서기 929년) 6월에 천축국(인도)의 삼장 마후라가 고려에 왔다.
7월에 견훤이 의성부성(지금의 의성)을 공격하자 고려 장군 홍술이 맞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순주 장군 원봉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했으나, 전날 원봉의 공을 생각하여 이를 용서하고 순주를 현으로 고치게 하였다.
4년(서기 930년) 태조가 고창군(古昌郡) 병산(甁山)에서 견훤(甄萱)과 싸워 크게 이기고 견훤군을 참살하였다.
5년(서기 931년) 2월에 고려 태조는 50여 병사를 이끌고 도성 가까이 와서 신라 왕을 만나자고 하였다. 왕은 신하들과 함께 교외로 나가서 맞이하고, 궁으로 모시고 와서 큰 잔치를 베풀며 술을 권하였다. 잔치가 무러익어 가자, 왕은 "나는 하늘의 도움을 입지 못하여 환난이 끊이지 않고, 견훤이 옳지 못한 일을 자행하며 우리 나라를 쳐서 빼앗으니 얼마나 통분할 일인지 모르겠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울었다. 태조 역시 눈물을 흘리며 왕을 위로하고 수십 일 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다.
9년(서기 935년) 10월, 왕은 사방의 강토가 모조리 남의 땅으로 빼앗기고 나라의 힘이 약하여 스스로 지킬 수 없슴을 알고, 신하들과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다. 신하들은 각기 옳다거니 그르다거니 의논이 분분하였다. 이 때 왕자(마의 태자)가 말하기를, "나라가 존재하거나 망하는 것은 반드시 하늘이 정하는 것이오. 그러니 마땅히 충신과 의로운 사람들을 모아 민심을 수습하고, 우리 힘으로 나라를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한 후이면 모르거니와, 어찌 천 년을 지켜온 국가를 하루 아침에 남에게 내줄 수가 있으리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외롭고 위태함이 이와 같으니 우리의 힘으로는 온전히 지킬 수가 없다. 이제 와서 더 강해질 수도 없고 더 약해질 수도 없을 만큼 약하게 되었으니, 죄 없는 백성들을 참혹하게 죽게 하는 일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
하고 시랑(侍郞) 김봉규(金封休)에게 국서를 주어 고려 태조에게 항복을 청하게 하였다.
왕자는 울며 하직하고, 곧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 바위 옆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그 곳에서 왕자는 베옷 차림에 풀뿌리, 나무 열매를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11월, 고려 태조는 국서를 받아보고, 대상 벼슬의 왕철 등을 신라까지 보내어 경순왕을 맞게 하였다. 마침내 경순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떠나 송도로 향하는데, 행렬이 30리에 뻗쳤다.
고려 태조 왕건이 송도 교외에 나와 경순왕을 맞아 위로하니, 이로써 신라는 나라를 세운 후 922년 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경순왕은 고려 태조에게 항복한 후 태조로부터 유화궁(柳花宮)을 하사받았으며,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맞고 정승공(政承公)에 봉해졌으며, 경주(慶州)를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한편,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에 임명됨으로써 고려시대 사심관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능은 경기 연천군 장남면(長南面)에 있다
경순왕(?-979)은 신라 56대 왕으로 927년 후백제 견훤의 침공으로 경애왕이 승하한 뒤 견훤에 의해 옹립되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정책과 신라의 민심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쪽으로 기울었다. 935년 후백제의 잦은 침공과 각처의 군웅 할거로 국가 기능이 마비되자 김봉휴로 하여금 항복하는 국서를 전하여 재위 8년의 신라 마지막 왕이 되었다.경순왕은 태조로부터 유화궁을 하사 받고 태조의 딸 낙랑 공주를 아내로 맞았으며 정승에 봉해지는 한편 경주를 식읍으로 받았으며 경주의 사심관으로 고려 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신라왕릉으로는 경주를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왕릉이다.백성들을 위해 천 년 사직을 고려 왕건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경순왕이 잠드신 능은 백학면 고랑포리에 있다. 봉분 주위에는 보호석이 둘러 있으며, 주변에 나지막하게 둘러 쌓아놓은 담이 있다. 능 앞에 '신라 경순왕지능'이라는 비석이 있으며, 그외에 장명등(長明燈)과 망주석(望柱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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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행은 용기의 문제라고봅니다 돈의 문제도 시간의 문제도 아닌 툭 털고 일어날줄 아는 용기가
있어야되며 많은 이유가 있지요 그러나 모두 내려놓고 그동안 돈의 노예가되었던 나자신을
다시 되돌려 볼 기회를 찾아봐야겠습니다. 여행은 일상 생활에서의 탈피나 그것은 다음 생활의
샘솟는 활력소를 계획하고 준비하는 동안의 설레임으로 낯선곳의 동경이나 또다른 여행자들과의
만남이 모든것이 좋은 추억이 되어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요.
세밑 한파가 찾아왔습니다.
중부 및 내륙지방을 중심으로
냉동실만큼의 체감온도라는데요,,,
A형 독감까지 유행하고 있다고
하니 특히 호흡기질환 등 건강에
유의하셔야 할듯 싶습니다.
건강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찬란하게 떠오르는 희망찬
붉은태양을 다 함께 맞이해야 할테니까요,,,
금년도 마지막 휴일 이네요
잘 보내시고 항상 건강하시고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