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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시인수첩》신인상 당선작 _ 석미화, 이병철
강인한|14.02.19|1,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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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시인수첩》신인상 당선작 _ 석미화, 이병철
타워 크레인 (외 4편)
석미화
차라리 기린 무리라고 부르고 싶어요 목을 빼 몸을 교차하면서 허공을 누벼요, 누벼놓아요
밤낮, 어슬렁 거닐며 구름 너머에 쌓아 올리는 거죠 허공의 십자로에서 바람이 편을 가르고 있어요
약정서상, 목뼈가 가장 취약하다죠, 허점을 밟아 올라갈수록 발아래는 더 아득해, 행복한 거니까요
누군가 길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일러줬어요, 웅성거리는 소리 들었어요
저 건너편 고공 초원,
동물의 왕국은 늘 재방송되죠, 낮달은 인각麟角에 걸리고, 길쭉한 몸통과 몸통, 부비며 부비며 애무하는 사이
밥상머리 쪽으로 천천히 조여들어오는 그림자
낯익은 하품 안쪽, 구멍 숭숭한 목뼈가 걸리고, 공중분해되는 새떼
빛의 잔해가 붉은 국물 속으로 끝없이 스며들어요
점층적으로, 서사적으로 쓰다
그녀가 설탕을 쓰는 법은 독특해요
그녀가 처녀 적엔요,
마를린 먼로의 피부빛, 그 감미로움 한 스푼만 떠내오고 싶었지요
그 여백의 색깔 운운한 것은요, 그때 즐겨 손댔던 가장 밝은 톤의 어둠,
백설탕이었을 테니까요
고백컨대, 그녀의 민낯이 누렇게 발효되었다는 걸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요
제 살결, 제 격에 맞는 맛,
그때부터 우울한 달무리, 먼 먼 色을 고집했어요
그녀는 나아가 매력적인 구릿빛, 슈거의 아린 맛도 알아냈어요
몸에 녹아드는 속도에 따라,
점차 과감해져 갔어요 황량한 맛도 취해봤어요
잉카, 그 까마득한 고원의 원주민을 영혼으로 불러들였어요 절절한 황하의 그 노랫소리도 간혹 귓속으로 녹여 먹고 싶었지요
이제껏 도정搗精의 나날이었던가요
그런데 말이지요
뒤늦게 한 사랑은 깜깜한 밤, 그 어둠의 살갗을 도톨도톨 만지고 싶은 거였어요 혓바늘이 돋도록,
끝없이 끝없이 맛보고 싶은 거였지요
아직도 바닥에 닿지 않는,
그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의 재즈는
위험한 무릎 위의 시간, 무릅쓰는 동작이었어요
밤의 거품 속 내 몸 남김없이 오르내리고 싶은 거였지요 하지만 끝내
그 뒷맛마저도 씁쓸한 일이었지만요
내 저녁의 양념통들,
내가 써 붙인 백설탕, 황설탕, 흑설탕,
점층적으로, 서사적으로 때론 퍽이나 낭패스럽게
확 쏟아져버려요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요
마구 섞여 구분이 되지 않는 나날은 왜 더 달콤해지는 거지요
———
* 전경린의 소설 제목.
뿔
엄마가 애인을 만나고 오는 날은 우우, 나는 뿔이 조금씩 올라오지
수염이 까뭇까뭇 돋은 길쭉한 그림자를 업고 엄마, 새벽녘에야 들어서면,
발꿈치 조심조심 내디디면, 저 천장까지 하늘로 번쩍 쳐들리는 것 같지
우우, 나는 그 소리 남김없이 엿들으며 한 켜씩 뿔을 키우지
내 속눈썹 위로 흔들어 보이던 엄마의 손바닥,
옷소매에 묻어 있던 엄마의 남자에게선 시큼한 버즘나무 잎 냄새가 나곤 했지
아, 가려운 이 뿔, 뿔뿔이 흩어진 우우,
뿌리까지 후벼 파내도 뾰족뾰족 올라오는
하루 종일 통화를 해대는 비의 일만은 아니지
버즘나무 사내 냄새는 우우,
가을 전의 일기보다는 겨울 후의 일, 아냐 그런 사시사철 시시각각이 아닐 거야
엄마 등 뒤로만 날아다니는 아홉 살 곤줄박이의 일은 더더욱 아니지
도대체 보이지도 않는 버즘나무 밑동은 언제 잘려나가는 거지
아, 이것마저 아닌
몸 뜨거워
다 튀어오르는 불, 불, 뿔, 뿔, 뿔뿔이, 뿔뿔이, 뿔뿔이, 뿌리
사촌들
우울한, 목 긴 물푸레를 키우고
적진으로 향하는 낡은 목선을 끌어요
오지 여행을 하고 돌아와 무너진 코 같은 산간오지가 되어버렸어요
아포여관에서 자살을 시도하다가 그 소읍 구급대원이 되기도 했어요
몰랐어요, 누이에게 간을 이식받아 족도리꽃처럼 숨어, 사력을 다해 산 보름이었대요
더 이상 풍문은 없어요
머리 위에 구름왕국을 만들고
왕관 속 앵무새를 숨겼다가 간혹 산책시키는 족속도 있어요
층층 아래, 분위기를 달리하는 부류들은요
제트기가 몸 비트는 방향을 꿈꾸고 빙벽을 타며 발아래 낙법을 단련시키기도 해요
비일비재해요 꿈이 바뀌는 건…… 몇 년간 소식 없다가 그림자를 발굴하러 다닌다고 했어요
돌무덤에 묻힌, 한 장의 캄캄한 그런 소식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잊히지 않는 일은요,
열병에 귀를 앓고 난 후 산 한 채가 달팽이관 속으로 빨려들어 갔어요
가끔 모이면 펼쳐보는 사진이에요
그날엔, 전공 비전공을 북북 찢어 날렸어요 다 버리고 몸이 요구하는 소리를 따라다니며 아직 나비잠을 자고 있는 돌책상 앞의 무릎,
손바닥이 뚫리고 방아쇠를 당길 수 없어 신에겐 잠금장치를 풀었죠
자아, 오늘 밤만은 편안히 자고 떠나도록 해요
그러니, 그러니, 이곳 생과 혼숙을 하고 자란 사촌들
어느 혹성, 혼성 듀엣의 비밀을 가지고 있지요 제물과 재물의 불씨는 혈육지간
별이 돋는 밤마다 물을 긷고
야생의 말, 말들을 길들였다가 멀리 풀어주는 법을 잘들 배웠어요
우리는 여전히 골짜기를 움직이고 물살을 가로지르고 싶어해요 북극여우처럼 잠시 침묵했어요 모의처럼 둥근 테이블에 둘러 앉아 다들 잘 살아갈 듯 외로워요
이제 안녕,
결혼식을 끝내고 다들 싱글처럼 잠시 머물러요
아주 사소한 식탁
나는 매일 밤 늙는 꿈을 꿔
우리 집 식탁 위에는 때 낀
붉은 구름들 늘 올라와 있고
나는 눈물을 줄줄 흘려
빵은 곁에서 퉁퉁 부어 칭얼대고
아이는 몇 주째 부비동염을 앓고
나는 매일 밤 늙는 꿈을 꿔
반쯤 베어물고 외면해버린
멍투성이 사과알
잘못 본 것일 거야,
오늘은 식칼이 식탁 위에 서 있지
움찔움찔 구석으로 몰리는 겁 많은 벤자민은
순간 한 번 더 살기가 돌고
내 몸은 폭우 다음 날 치여 죽은 고양이마냥
깨어진 접시를 붙들고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
나는 꿈속에서조차 굳어가는 내 얼굴을 더듬거려
흉측한 꽃눈을 달고
여기저기 독을 키우는 유리컵들
내 꿈속으로 새어들고
도통 읽을거리가 없는 식탁은
기막힌 사연만 아무렇게나 다그치고 있어
나는 믿지 않아
어느 날 식탁 앞에서 늙어 죽은 나를
또 흔들어 깨우고 있는 나를
▲ 석미화 / 1969년 경북 경주 출생.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그녀의 골반」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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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노 놀이 (외 4편)
이병철
공사장에서 우리는 무슨 냄새를 맡고 있었다
개들이 짝짓기하는 냄새야 아니야 날지 못하는 새의 똥냄새야
죽은 사람 냄새야,
시멘트 먼지 속으로 우리는 코를 킁킁거렸다
죽은 사람 냄새는 슬프다
슬픈 게 뭔지 어떻게 알아? 그건 아직 배우지 않았잖아
철근 위로 어둠이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일어서자
우리는 냄새 쪽으로 자갈을 집어 던졌다
저기엔 아무도 없어, 여기서 자고 갈래?
무서워 너희들 등 뒤로 냄새가 따라오는 게 보여
겁쟁이, 우리는 안 죽어
냄새로부터 누구도 도망칠 수 없다는 걸 너희는 몰라
어둠이 냄새를 환하게 밝히는데
너희는 죽음의 냄새 같은 건 없다는 듯
벽돌로 도미노 놀이를 하며 웃고 있었어
그날 밤, 나는 공사장에 코를 두고 왔다
어떤 꿈에선 앞으로 나란히,
도미노처럼 넘어지는 너희를 본다
누가 너희를 밀었니?
아무도 웃지 않는다, 냄새가 난다
내가 마지막 블록이 될게
숨바꼭질 1
아무도 날 찾지 못했으면 좋겠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냄새가 되고 싶어
멀리서 가깝고 가까이서 먼 라일락처럼
환풍구는 어둡고 따뜻하다
세상은 오직 냄새와 소리다
술래가 숫자를 세는 소리
피혁 공장의 본드 냄새
그림자가 쏟아질까 봐 몸을 둥글게 만다
죽은 사람의 코와 귀는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가야의 순장을 배웠다
죽은 쥐와 깨진 진로 소주병이 내 부장품이다
술래는 유령처럼 어디든 다닐 수 있지만
환풍구는 유령도 들어오지 못하는 곳
여긴 내 무덤이고 나는 이 세상에 없다
나를 찾는 소리들이 잠잠해지고
날이 저문다
돌 뚜껑 같은 어둠을 열고 환풍구를 나선다
모두 사라졌다 어디로 갔을까
환풍구 밖 세상에서는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아
무덤에서 나와 골목을 헤매는,
내가 술래라고?
불 켜진 집으로 돌아가는 건 반칙이야
장마엔 카페인이 필요하고
장맛비처럼 여자들이 죽었다
비가 멈춘 날엔 커피가 많이 팔린다 도시엔 카페인이 필요하고 달콤한 불안은 덩어리져 녹을 줄 모른다 사건마다 가격이 매겨지고 휘핑크림 같은 소문이 뭉게뭉게 뜨는 오후
옷 속에 칼을 숨긴 사내를 찾아야 한다 철물점 망치의 개수를 세어봐야 한다 배수구 빈칸에 적힌 고양이의 목격담을 번역해야 한다 이웃과 인사를 나눠선 안 된다
여행 가방과 택배 상자와 냉장고엔 토막 난 여름이 담겨 있다 네모난 것들은 네모난 공포를 만드는 거푸집이다 옆집의 오랜 외출을 통째로 삼킨 벽걸이 티브이는 말이 없다
커피포트 끓는 테이블 위에 커피가 없다 장마엔 카페인이 필요하고 불면은 티브이의 묵비권을 견디는 힘이다 편의점은 이웃집과 배수구와 철물점이 있는 골목 끝에 있다
에스프레소 엎질러진 골목에 방범 카메라가 커피 찌꺼기로 붙어 있다 불 꺼진 창문이 당신의 짧은 외출을 꼬나본다 배수구 위에서 고양이들이 비둘기 시체를 밀매한다 철물점 셔터에 스민 누군가의 그림자가 불빛을 날카롭게 갈고 있다 안녕하세요 당신이 막 모퉁이를 돌 때
다시, 비가 내린다, 커피를 볶듯, 후드득 후드득, 고양이 눈에 찍히는, 바코드
겨울바람의 에튀드*
당신의 발가락은 오래된 건반의 연주를 매달고 있고 거기서 떨어진 각질들은 모두 음악이 되었다 악보를 읽을 줄도 모르면서 계속 걷는 말이 불쌍해, 발톱이 튕겨내는 겨울을 창백한 소리로 노래하며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내 입술은 당신의 언 발가락을 녹일 수가 없어, 햇빛을 날카롭게 갈아 굳은살을 베어내도 차가운 음계는 당신의 발끝을 떠나지 않았다 이 음악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자, 발가락이 유리잔처럼 깨져버릴 것만 같아
폭설은 이미 잘 짜여진 한 벌의 옷처럼 우리를 감쌌고 얼음의 숨소리가 귓가에 파란 브로치를 달았다 발톱에서 솟아오른 달이 하얗게 변할수록 우리가 걷는 길은 불협화음으로 부서져갔다 유리 바다를 걸어도 얼어붙은 발에선 피가 흐르지 않았다
따뜻한 바람이 발가락 사이에서 불어왔다 한 계절보다 긴 음악이 마침내 끝나가고 있었다 더는 걸을 수가 없어, 언 몸을 녹이려고 당신을 힘껏 끌어안았을 때, 당신은 맑은 파열음을 내며 수천 조각으로 깨졌다 내가 들은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
* 쇼팽의 연습곡 〈Etudes〉25번 중의 제11곡, A단조
키친 트래블러
두 개의 프라이팬을 나눠 들고 우리는 유통기한이 짧은 계절들을 조리했지 올리브유에 젖은 당근과 파프리카를 뒤집을 때마다 상큼함과 고소함 사이에는 마드리드의 폭염이 지글거렸고 배낭 여행자처럼 웅크린 버섯들이 브로콜리 그늘 아래로 줄지어 갔네
우리가 헤어질 겨울에서 헤엄쳐 온 메로 한 마리가 당신의 프라이팬을 사랑했고 그 위로 폭설이 내렸지 생선과 채소를 같이 구우면 안 되는 것은 달과 태양을 동시에 볼 수 없는 것만큼 자명해서 당신은 달을, 나는 태양을 이용하기로 합의했네
오레가노, 로즈마리, 바질, 페페로치노는 도시 이름이 아니지만 우리는 거기에 혀와 코를 번갈아 투숙시키며 짜고 매운 감정들을 낭비했어 밤의 그을음을 따라 왼쪽으로, 아침의 꽃잎들을 좇아 오른쪽으로 당신과 나는 각각 원을 그리며 접시 위에 노을을 쏟아부었네
두 개의 프라이팬이 하나의 요리를 완성하면 우리는 하나의 접시 위에서 몸을 포갰지 먹고 마시며 사라져버릴 것들을 사랑하느라 백설탕 엎질러진 선반에 우글거리는 개미들마저 음악으로 들렸네 접시에 담긴 개기일식 속으로 빛은 치즈처럼 늘어져 내렸고
요리는 일종의 여행이라고 당신이 말했고 나는 주방이 야간열차 같다고 대답했어 솥이 끓는 소리로 기차가 달리고 도마 위를 걸어오는 구두굽 소리가 점점 커지면 무뚝뚝한 검표원을 닮은 오븐이 고기와 채소들을 회수해 가니까
향신료들이 세운 도시를 지나 냉동육이 드라이아이스로 빛나는 겨울을 향해 우리는 떠났어 새로운 요리를 시작했다는 얘기지 당신의 혀가 가장 예민해질 때, 겨울은 이미 우리 앞에 와 있고 지난 계절은 싱크대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데, 이 맛있는 냄새를 어떡하지?
▲ 이병철 / 1984년 서울 출생.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서울과기대 문예창작과 졸업.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 수료. 2006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시「여행, 스무 살의 열차」가작 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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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시인수첩 신인상 심사평】
감각의 매혹, 새로운 시인을 만나다
심사위원 | 김종철, 구모룡, 문혜원, 최원식, 김병호
새해를 시작하면서 심사자들의 마음은 응모자들 못지않게 설레면서도 결코 가볍지는 않았다. 지난해에 비해 부쩍 늘어난 응모자의 수도 그렇지만, 작년에 당선된 두 시인(배수연, 오성인)이 시단의 뜨거운 관심과 응원을 받으며 커나가고 있어 심사자로서의 책임이 더 막중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일흔을 훌쩍 넘긴 응모자에서부터 채 스무 살이 되지 않은 응모자까지, 가까이는 파주에서 멀리는 아르헨티나에서 보내온 〈시인수첩 신인상〉에 대한 열기와 이들이 보여주는 다채로운 작품 세계는 과히 놀랄 만한 것이었다. 예선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은 대부분 일정 수준을 갖추고 있었으나 어슷비슷한 완성도에만 급급한 작품들이 많았다. 시적 사유가 기성 시단의 유행에 갇힌 듯 경직되었거나, 시적 탄력이 부족하여 생경하고 부적절한 표현으로 작품의 긴장을 떨어뜨렸거나, 사적인 감정을 절제 없이 토로한 지리한 작품들은 최종심에서 배제되었다. 이런 면에서 「무삭제판 연애도감」외 6편을 투고한 백윤경 씨와 「강물여관」외 6편 김생자 씨, 「후유증」외 9편 김지은 씨의 작품들은 안타까움을 안겨주었다.
결국 마지막 경합은 「도미노 놀이」외 6편을 투고한 이병철 씨와 「타워 크레인」외 10 편을 투고한 석미화 씨가 겨루게 되었다. 작년에 두 명의 신인을 배출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심사의 엄격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한 사람만을 당선시키자는 의견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실력이 쟁쟁하여 그 경중을 가름하기도 어려웠고, 한 명의 시인이 더 탄생하는 일은 비단 《시인수첩》뿐만이 아니라 우리 시단의 뿌리가 튼튼해지는 일이라 판단되어 심사위원들은 이번에도 기쁜 마음으로 두 명의 당선자를 배출하기로 결정했다. 새롭게 출발하는 두 시인의 정진을 바란다.
석미화의 시편에 대하여
넓이인가 깊이인가. 이것은 예비시인뿐만 아니라 그를 취택하는 심사자의 고민이기도 하다. 잘 표현된 시는 쓰기의 양이나 기교의 숙련에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다. 세계를 향한 열도와 대상에 관한 정밀한 관심, 그것을 개성적 시어와 표현으로 교직交織할 수 있는 능력, 거기서 배어나고 울려나오는 무늬의 복합성이 비로소 잘된 시의 탄생을 이끈다.
‘장민’이라는 필명으로 응모한 석미화의 시를 보며, 선자들은 그(그녀)가 여성일까 남성일까를 먼저 화제로 삼았다. 시의 표면에서는 남성의 목소리가 우세하지만, 그 심층에서는 여성성이 농후한 대상 이해와 언어 터치가 돋보였기 때문이다. 석미화의 개성은 따라서 아이러니컬한 세계 이해와 그 폭로의 의외성에서 더욱 부감될지도 모른다. 선자들은 그러나 낯선 세계를 향한 시의 건축과 돌파가 산문시 일변으로 흐르는 현재의 한국시의 경향에서 석미화 역시 멀지 않음을 잊지 않았다. 그 결과 우리의 선택은 언어의 압축과 정서의 배열이 촘촘한 「타워 크레인」과「뿔」, 일상의 한 단면을 감미롭되 그래서 조심스런 커피 잔의 ‘설탕’처럼 녹여낸 「점층적으로, 서사적으로 쓰다」로 자연스럽게 모아졌다.
현대적 바벨탑의 첨병 ‘타워 크레인’이 ‘기린’이라니(「타워 크레인」)……. 육식성과 초식성의 단순 대비로 ‘타워 크레인’과 ‘기린’의 대조는 성립되지 않는다. 양자의 굳건한 결합이 파생하는 아이러니컬한 정서, 이를테면 허점의 발견에서 아득함과 행복함을 동시에 느끼는 양가적 감정이 시적 건축의 핵심이다. 이쯤 되면 ‘엄마’의 사랑, 어쩌면 ‘불륜’도, 그것을 훔쳐보는 ‘나’의 오감(「뿔」)도 서로에게 축복이자 재앙이다. 왜냐하면 ‘불’과 ‘뿔’이 ‘뿔뿔이’ 흩어지고 ‘뿔뿔이’ 모여 엄마와 딸 서로의 ‘뿌리’가 되므로. 통합과 분열의 ‘뾰족함’은 그래서 불행이고 행복이다. 우리 삶의 ‘도정搗精의 나날’은 ‘백설탕’을 ‘황설탕’ ‘흑설탕’(「점층적으로, 서사적으로 쓰다」)으로 어김없이 착색하는 현기증의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이 현기증은 설탕들이 서로 뒤섞이고 넘나듦으로써 ‘달콤함’을 더해가는 당황스런 황홀과 도취이다. 석미화의 시를 “끝없이 끝없이 맛보고 싶은 거”라는 기대는 이 설탕—몰약沒藥의 대책 없는 모순과 매혹 때문이다.
이병철의 시편에 대하여
이병철의 시에는 죽음이 전체적인 배경이자 소재로 깔려 있다. 주로 어린 날의 기억들이 소재가 되면서도 거기에는 항상 죽음이 따라다닌다. 「도미노 놀이」에서 ‘나’는 또래 아이들과 달리 죽음의 냄새를 맡고 어느 누구도 죽음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조숙한 자아이다. 「숨바꼭질 1」에서, 환풍구에 숨은 ‘나’는 정작 숨바꼭질에는 관심이 없고 순장당한 사람처럼 무덤 안에 있는 흉내를 내본다. 화자가 성인인 「장마엔 카페인이 필요하고」에서 역시 마찬가지다. 지루한 장마철 어느 날의 풍경은 불길한 기운들과 엮여서 직조되어 있다. 불길한 소문들이 넘쳐나고 여행 가방이나 상자, 냉장고 같은 일상의 사물들에서 공포가 자라고, 고양이 울음과 비둘기 시체가 함께 있는 기묘하고 불길한 날이다.
이병철의 시는 이 불길한 죽음의 낌새를 ‘냄새’와 ‘소리’라는 구체적인 감각으로 형상화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나’가 감지하는 죽음, 장마철의 퀴퀴함, 그것을 상쇄시키는 커피 모두 ‘냄새’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추상적인 것들을 구체화하여 표현하는 것은 시 창작의 기본이지만, 실제로 대상을 감각적으로 적확하게 표현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이를 감안할 때 ‘냄새’로써 대상을 관찰하고 전달하려고 하는 일관된 시도는 사줄 만한 것이다.
군데군데 참신하고 재미있는 표현들도 눈에 띄었다. 예컨대 “다시, 비가 내린다, 커피를 볶듯, 후드득 후드득, 고양이 눈에 찍히는, 바코드”(「장마엔 카페인이 필요하고」)는 그쳤다가 다시 쏟아지는 장맛비의 모양을 커피를 볶는 것에 비유해서 참신했고, 빗줄기의 모양을 “고양이 눈에 찍히는 바코드”로 표현한 것도 재미있다. “멀리서 가깝고 가까이서 먼 라일락처럼”(「숨바꼭질 1」)이라는 표현 또한 적확하다. 라일락 향기는 멀리서는 강하게 감지되지만 가까이 있을 때는 후각이 무뎌져서 오히려 잘 감지되지 않는다. 이러한 표현들은 관념이 아닌 실제 경험과 관찰을 바탕으로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기본적인 신뢰감을 가지게 했다.
그러나 주제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나 독창적인 해석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예컨대 “장맛비처럼 여자들이 죽었다”(「장마엔 카페인이 필요하고」)와 같은 도전적인 진술은 진술 자체로 끝나버리고 아무런 설명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느낌으로 선취한 ‘죽음’의 문제를 좀더 오래 깊이 있게 들여다볼 것을 권한다. 아울러 소재나 주제 면에서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가 더 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함께 투고한 「키친 트래블러」는 경쾌한 산문시를 지향하는 듯하지만 지루하고, 「겨울바람의 에튀드」는 불투명한 기운이 시를 감싸면서도 정작 알맹이가 없었다. 시가 길어지면 언어의 낭비가 심해진다는 것도 지적해두어야 할 부분이다.
—《시인수첩》201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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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14.02.20
강인한 선생님 많은 글을 정리해서 올려 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한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조선미|14.02.20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시에 대한 설명이 있어 좋습니다~!
댓글 첨부 이미지
여우나무|14.02.26
선생님,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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