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칭하는 표현들
2022년 9월 19일 새벽예배가 끝나고 6시경에 낯선 전화가 걸려왔다. 박기자 원로권사의 딸이 한 전화다. 어젯밤 10시 30분경에 엄마의 별세를 알리는 부음이었다. 그날 저녁 식사까지 하고 갑자기 가슴의 답답함을 호소하여 병원으로 후송하던 도중에 심정지로 인하여 돌연사한 것이다. 문득 이해인(李海仁) 수녀의 시(詩) ‘부고’(訃告)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죽었어요. 죽었어요. 며칠 내내 이 말이 떠나지 않네. 한 사람의 일생이 이렇게 한 문장으로 끝나다니. 이젠 지상에서 다시 그를 볼 수 없다니.’ 박 권사의 장례를 마치고 난 목자의 마음과 똑같다. 죽음은 인류의 최대 관심사요 엄중한 사항이다. 죽음을 뜻하는 단어가 매우 다양한 것을 보면 우리 선조들은 특히 그렇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 죽음을 뜻하는 단어는 사망(死亡), 임종(臨終), 별세(別世)가 대세지만 이외에도 타계(他界), 하직(下直), 서거(逝去), 작고(作故), 선서(仙逝), 기세(棄世), 하세(下世), 귀천(歸天), 영면(永眠), 영서(永逝), 영결(永訣), 운명(殞命), 절명(絶命) 붕어(崩御), 안가(晏駕), 선어(仙馭), 불록(不祿), 훙(薨) 등이 있으며 ‘돌아가다, 숟가락 놓다, 곡(穀)을 끊다, 숨지다, 호흡이 멎다, 목숨이 끊기다, 목이 떨어지다’ 등 여러 표현이 있다. 이런 말 중에 ‘운명(運命)을 달리했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으로 ‘유명(幽明)을 달리했다’라고 해야 한다. 幽는 어둠, 밤, 죽음, 저승, 악, 무형, 어리석음을 의미한다. 明은 밝음, 낮, 삶, 이승, 선, 유형, 지혜로움 등을 뜻한다. 이는 ‘생사(生死)를 달리했다’는 의미다. ‘운명(殞命)했다’라고 해야 맞다.
종교마다 죽음의 표현이 다르다. 불가(佛家)에서는 열반(涅槃), 입적(入寂), 입멸(入滅), 멸도(滅度) 등이 있다. 유가(儒家)에서는 역책(易簀), 결영(結纓), 불록(不祿) 등으로 표현한다. 역책(易簀)은 ≪예기(禮記)≫의 <단궁편(檀弓篇)>에 있으며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이나 임종을 이르는 말이다. 결영(結纓)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오며 갓끈을 고쳐 맨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위(衛)나라 난리에 싸우다가 적의 창에 맞아 갓끈이 끊어졌는데, ‘군자는 죽을 때에도 갓을 벗지 않는다’하고 갓끈을 고쳐 매고서 죽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불록(不祿)은 신분에 따른 죽음의 다섯 가지 등급 가운데 하나이다. 즉 천자(天子)는 붕(崩), 제후는 훙(薨), 대부(大夫)는 졸(卒), 선비는 불록(不祿), 서인(庶人)은 사(死)라고 한다. 또한 《예기》 <곡례(曲禮)>에는 장수하다가 죽은 것을 졸(卒)이라 하고, 젊어서 죽은 것을 불록(不祿)이라 했다. 이는 선비가 국가로부터 녹봉(祿俸)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천주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선종(善終)이라 하는데, 이는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준말로서 ‘착하게 살다 복되게 생을 마쳤다’라는 뜻이며 ‘믿음대로 살다 천국에 갔다’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개신교에서는 ‘소천(召天)’이라고 한다. 소천은 ‘하늘에서 부른다’는 뜻으로 사용하지만 정확한 뜻은 ‘하늘을 부른다’이므로 문법상 잘못된 표현이다. 소명(召命), 소집(召集)이란 단어가 능동형으로 쓰일 때 그 주체는 부르는 존재를 말한다. 그래서 ‘소명했다’는 ‘소명 받았다’라고 해야 하고 ‘소집했다’는 ‘소집을 당했다’라고 해야 맞다. 굳이 ‘소천했다’표현을 사용한다면 ‘소천을 받았다’고 해야 맞다. ‘소천(召天) 하였다’라는 말은 내가 ‘하늘을 불렀다’라는 뜻이니까 이 말은 ‘이제 때가 되어 내가 죽으려 하니 나를 죽여달라’라는 말이다. 인간이 자신의 수명을 위해 하늘(하나님)을 불러낸다? 결국 죽을 권리가 내게 있다는 뜻이니 얼마나 망령된 표현인가?
또한 망자의 유족들과 나누는 상례(喪禮) 인사말도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흔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한다. 명복(冥福)이란 죽은 뒤에 저승에서 받는 복이라는 의미로 죽은 사람의 사후(死後) 행복을 비는 말이며, 서방 정토(西方淨土)에 가서 극락왕생(極樂往生)하도록 기원하는 불사(佛事)의 행위다. 무간나락(無間奈落)에 떨어진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地上菩薩)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에게 기도하는 천도(薦度)의 발원(發願)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에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인사는 매우 큰 결례(缺禮)이며 진정성과 의미가 반감되는 매우 무성의한 상례 인사다. 대신 영면 기원, 별세 애도, 영원한 안식, 영생 복락 등으로 하면 좋다. 언어는 세(勢)를 따른다. 모순된 말도 오랜 기간 많은 사람이 사용하다 보면 표준어로 굳어진다. 그래서 더욱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죽음을 뜻하는 한자 死(사)는 죽음의 의미를 알려준다. 이 글자는 一(한 일), 夕(저녁 석), 匕(비수 비)의 합성어다. 즉 죽음이란 어느 한(一) 날 저녁(夕)에 칼(匕)에 맞는 것이다. 저녁은 대부분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내일의 소망을 품고 편히 쉬는 시간이다. 그런 시간에 칼을 맞았으니 죽음이란 생각지 않은 때에 찾아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항상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구나 예외없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길을 걸어간다. 生은 死로 귀결된다. 그런 死 앞에 있는 病은 죽음에 대비하라는 사인이다. 病없이 死를 맞이할 경우는 속수무책(束手無策)이다. 그리스도인의 종말적 삶은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는 자세다. 늘 주 안에서 죽음을 염두에 두라는 뜻이다. 죽음 이후 영원한 삶이 있기 때문이다. 영생을 준비한다면 그는 진정 지혜롭고 복된 사람이다. 그리스도인만이 예수님 안에서 받는 하늘의 은혜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 심판이 있으리라”(히브리서 9:27).
고 박기자 권사 영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