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하는 감리교회와 복흥파 강태희 감독, 재건파 장석영 감독
재건파에 소속된 회원들은 대부분 일제 말기 친일파 교회 지도력에서 휴직, 파면 조치 당한 교역자들이었다. 그러나 재건파에 속하지 못한 교역자들은 재건파 연회 조직 후 일제강점기에 친일파라는 오명을 쓰게 되어 자신들의 입지가 불안했다. 재건파 연회가 조직되자 당시 주로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강태희, 방훈, 박창현, 김응태, 박연서, 박만춘, 김희운 목사는 재건파 연회 조직은 불법적인 행위로 비판했다. 1946년 4월 7일에 수표교교회에서 개최된 기독교조선감리회 복흥신도대회에서 기독교조선감리회 수습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교회 복흥 방침’을 발표했다. 이때 ‘복흥’(復興)이란 용어가 나온 것이다. 평신도 수습대책위원회 책임자 장세환, 조민형 명의로 발표된 성명은 복흥 재건을 바라되 재건파의 독선적 혁명적 연회 창설을 배제, 거부하였다. 복흥파는 재건파에 대항하여 조직되었으므로 이들은 남부대회가 잘못된 것이므로 각 교파대로 활동해야 한다고 인정하고 당회, 구역회, 지방회를 복흥 시킬 것을 내용으로 하는 통첩을 각 교회에 발송하였다. 즉 교회 복구 작업은 당회, 구역회, 지방회, 연회, 총회 순으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재건파는 그 순서를 무시하고 연회부터 조직했다는 것이다. 이는 일제 말기에 교회 밖으로 추방당했던 재건파와 달리 해방 당시 지역 교회를 갖고 있던 복흥파 목회자들에게는 유리한 논리였다. 복흥파 목사들은 자신들의 제시한 합법적인 순서에 따라 구역회와 지방회를 복구한 후 1946년 6월 11일 중앙교회에서 기독교조선감리회 제9회 중부연회를 복구하고 연회장에 강태희 목사를, 서기에 박창현 김희운 목사를 선임했다. 이어서 6월 13일에는 제9회 동부연회를 중앙교회에서 개최하여 연회장에 신공숙 목사를, 서기에 김경환(金慶煥) 목사를 선임하여 연회 조직을 완료하였다. 곧바로 9월 6일에는 중앙교회에서 기독교 조선감리회 특별총회를 개회하여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본 총회는 과거 1941년 10월 특별총회에서 헌장 변경 폐지를 의결한 결정을 무효로 선언하며 당해 헌장을 준봉하여 기독교 조선감리회가 복흥 됨을 선언함.”
모든 회원들은 기립하여 이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계속 임원 선거에 들어가 강태희 목사가 20표를 얻어 감독에 당선되었고 김희운 목사를 서기로, 박만춘(朴萬春) 목사를 부서기로 선임하였다. 이로써 복흥파에서도 조직을 마무리했다. 이에 복흥파에서는 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함을 알리는 “敎友諸位에 檄함”이라는 장문의 문건을 1946년 9월 11일에 총무부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강태희(姜泰熙) 감독은 1889년 7월 23일에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남양리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남양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일찍이 기독교를 접하고 1920년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에 3월에 제12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의 목회는 1923년 1월부터 1927년 6월까지 창천교회를 담임함으로 시작되었다. 1923년 6월에 제16회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학습인으로 허입되었고 1927년 6월까지 시무하면서 교세를 크게 성장시켰고 새 예배당도 건축하였다. 1928년 10월에 서울 중곡교회를 담임하고 1929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드류신학교에서 신학과 종교교육을 공부하였고 1932년에는 하와이 호놀룰루 한인교회를 담임하였다.
귀국 후에는 서울 중앙교회(1933~1934), 상동교회(1934~1937), 정사정교회(1937~1944), 종교교회(1944~1948), 인천내리교회(1948~1950)를 담임했다. 그가 정사정교회를 담임할 때부터 연회 부흥사업을 담당하는 부흥목사가 되어 전국을 돌며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일제 말기 어려운 시기에도 회개와 중생의 은혜가 나타났고 많은 수의 새 신자를 얻었다. 그리고 그는 주일 설교에 인상적인 모습을 지녔다. 홍안백발(紅顔白髮)의 인상적인 풍모에다가 모닝코트 정장에 흰 장갑을 끼고 주일 낮 예배에 임하는 그의 설교는 사자후(獅子吼) 그 자체였다. 쏟아지는 폭포수 같은 현하지변(懸河之辯)의 대 설교를 듣기 위하여 교인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해방 후에는 ‘하나의 교회’라는 명분을 내건 남부대회를 주동하여 1945년 11월에 조선기독교 남부대회 총무부장, 1946년 1월에 경기교구회장에 선임되고 기독교 조선감리회 복흥준비회장, 1946년 6월 11일에 중부연회장, 9월 6일에는 특별총회에서 감독으로 피선되어 복흥파를 이끌었다. 나중에 조선 기독교연합회(NCC) 회장도 역임했다.
강태희 감독은 6ㆍ25 한국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하여 영도중앙교회를 세우고 피난살이의 나그네 설움과 고달픔을 달래며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도의 한 객사(客舍)에서 지병인 고혈압으로 쓰러져 병든 몸으로 인천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투병생활 8년 만에 1958년 8월 5일 향년 69세로 인천의 자택에서 별세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재건파에서도 1948년 1월에 총회를 개최하여 장석영 목사를 감독에 선출했다. 이로써 한국감리교회는 역사상 처음으로 두 감독 시대를 열고야 말았다. 이때부터 양측 간의 치열한 성명 비난전이 난무했다. 목회자와 교회 쟁탈전이 전개되어 분열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재건파의 장석영(張錫英, 호 華泉) 감독은 1894년 8월 3일 경기도 강화읍에서 부친 장형래(張亨來, 본명 根宗)와 모친 박마르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1년 3월 최죽사(崔竹史) 학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였고 1902년 9월 전학하여 강화 잠두교회 학당에서 초보적인 종교교육을 받아 기독교에 입문했다. 1909년 데밍(Charles Scott Deming, 都伊明)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906년 3월 강화읍 보창고등소학교를 졸업하고 이동휘 교장의 주선으로 1907년 9월 서울 보성중학교에 입학 1911년 3월에 졸업했다. 그 후 밤에는 보성전문학교 법률과, 낮에는 종로 YMCA 영어과(2년제)에서 동시에 학업을 계속했다. 1913년 3월 영어과를 졸업한 뒤에 보성전문 법률과는 중단하고 감리교신학교 2년제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15년 3월 충남 논산읍교회 청년지도 전도사로 초빙을 받아 3년 동안 열심히 일했다. 1918년 봄, 서울로 올라와 수표교교회와 자교교회 주일학교교장 및 서울 지방 종교교육사업을 관장했다. 이때 감리교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피셔(James Earnest Fisher, 皮時阿) 교수의 어학선생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9월에 테네시 주 네쉬빌에 있는 스카릿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1927년 2월에 뉴욕 콜롬비아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였으며 1930년 B.S. 학위, 동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여 1932년 3월 M.A 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졸업했다.
1933년 3월 미감리교 뉴저지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5월에는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 겸 교목으로 취임하였다 1942년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 학무부에 의해 불온사상의 선동자요 배일(排日) 교육의 지도자라는 낙인을 받고 교수직에 해임되었다. 동년 12월부터 개성 중앙남부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며 목회자의 길에 들어섰다. 1945년 3월 강화 신문리교회에 부임한 후 해방을 맞이하였다.
1945년 10월 미군정장관 상임 최고고문 및 미소공동위원회 고문, 대한적십자사 중앙집행위원 겸 사무총장을 지냈다. 연희대학교 교수로 복귀하여 1948년 9월까지 교수 및 신학대학장을 역임했다. 이어 1948년 1월부터 1949년 5월까지 분열된 감리교회의 재건파 감독으로 추대되었다.
1949년 이후 감리교신학교 종교철학 및 조직신학 교수, 1950년 6월 대한기독교청년협의회 총무, 1951년 4월에 북미 YMCA 100주년 대회에 한국 YMCA 대표로 참석했다. 1951년 10월 23일에 미국 캘리포니아 주 스탁톤 태평양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D.D) 학위를 받았다.
1953년 9월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교회교육과 폐허된 교회를 복구하고 재건하는데 힘을 쏟았다. 1955년 4월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겸 교목, 1956년 기독교학교 교목회장. 1958년 2월에 대한기독교교육협회장을 지냈다. 1960년 3월에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충남 예산읍제일교회 담임목사, 1962년 2월 한국기독교협의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63년 1월 연세대학교 재단이사로 일했다. 1967년 1월에 은퇴했다.
장석영 목사는 은퇴 후 통일교가 주도하는 재단법인 기독교연합운동협회 총무 직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는 평소에 교파 통일을 염원하는 통일신학을 주장했었는데 이것이 통일교와 연결됨으로써 그의 귀중한 생애에 오점이 되고 말았다. 1982년 향년 88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협성신학교 전경 1949년 4월 30일 통합된 감리교회의 신학교육의 산실이다. 현재의 감리교신학대학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