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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지파의 씨를 끊는(끊을) 바알 추종자 이세벨과 아달랴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가 자기의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유다 집의 왕국의 씨를 모두 진멸하였으나 왕의 딸 여호사브앗이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몰래 빼내어 그와 그의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게 하였으므로 아달랴가 그를 죽이지 못하였더라 여호사브앗은 여호람 왕의 딸이요 아하시야의 누이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이더라(대하 22:10,11)
<바알의 전파> 시돈(페니키아)의 상업 신 -> 엣바알 -> 이세벨과 아합(북이스라엘) -> 아달랴와 여호람(남유다) -> 아하시아
<유다의 왕의 계보> ①여호람(요람)과 이세벨 딸 아달랴 -> ②아하시야 -> /(③여왕 아달랴)/ -> ④요아스 -> ⑤아마샤 -> 웃시야
<유다 지파의 족보> ①여호람(요람) -> 웃시야(마 1:8) ** (③은 아합의 딸, ② ④ ⑤는 족보에서 탈락)
북이스라엘을 패망하게 한 바알 신과 제도가 이제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퍼지며 남유다로 넘어옵니다. 아달랴는 북이스라엘 왕 아합과 왕비 이세벨에서 태어난 외동딸입니다. 이세벨은 페니키아 상업 신 바알을 추종하는 시돈 왕 엣바알의 딸입니다. 여호람은 아달랴의 남편이며, 이세벨의 사위입니다. 여호람(요람)은 주전 848년 남왕국 유다에서 5대 왕으로 8년을 통치했습니다. 가나안 토속신 바알보다 더 세련된 상업 신 바알을 이세벨이 아합 왕궁으로 들여와서 북이스라엘를 패망하게 했고, 이제는 그 신과 제도가 남유다까지 넘어오는 과정입니다. 이 바알 신을 오염시킨 진원지는 시돈의 엣바알이며,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그의 외동딸 아달랴입니다.
아달랴는 유다의 여호람 왕과 결혼하여 이제는 남유다 왕국에도 바알 신이 들여왔습니다. 이세벨은 나봇을 모함하여 돌로 쳐서 죽이고 포도원을 강탈한 여자입니다. 그런데 아달랴는 어머니 이세벨 못지않게 사악합니다. 남편 여호람이 바알을 섬겨서 병이 들어 죽자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는데 1년도 못하고 외할머니 이세벨에게 갔다가 예후의 바알 청소로 죽습니다(왕하 9:27).
아달랴가 남편도 아들도 바알 신을 섬겨서 죽었으면, 마음을 바알에서 여호와에게로 돌이켜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합니다. 바알을 마음에 품은 아달랴는 더 강퍅하여지고, 행동은 잔인해집니다.
아달랴는 유다 왕족의 씨를 없애려고 합니다. 남편이 병들고 아들까지 죽은 것이 유다가 바알을 배척하기 때문으로 보았습니다. 아달랴는 정변을 일으켜서 유다를 통치하는 여왕이 됩니다.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여성 신분으로 왕이 된 것은 고무적이지만, 이런 사악한 바알 숭배가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하고, 나라(북이스라엘과 남유다)까지 망하게 합니다. 이스라엘는 남북이 모두 여성이 섬기는 이방 신 바알로 인하여 이렇게 사회를 부패하고, 나라까지 망하게 합니다.
아달랴는 권력을 잡고 예후가 북이스라엘에서 바알을 청소한 것처럼 자기도 남유다에서 왕족을 멸하기 위해서 왕자들을 모두 죽입니다. 이때 아하시야의 누이, 요아스의 고모인 여호사밧(여호사브앗)이 첫돌이 갓 지난 요아스를 구해서 6년을 제사장 집에 숨겼습니다.
여호사밧은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입니다. 제사장 여호야다는 바알을 척결하고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며 숨겨둔 요아스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세웁니다(왕하 11:12,20). 일곱 살에 왕이 된 요아스의 통치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섭정을 하듯 하게 됩니다. 여호야다는 선을 행하여 130세까지 장수하였고, 죽어서도 레위 지파의 제사장이지만 유다 지파인 다윗의 묘역에 장사되는 예우를 받았습니다(대하 24:15,16). 요아스도 여호야다의 지도가 있을 때는 선한 정치로 유다 왕국을 40년간 통치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요아스가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는 우상을 섬겨서 여호와를 진노하게 합니다. 요아스는 우상숭배를 금하는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죽이기까지 합니다(대하 24:21,22).
이로써 아람 군대가 쳐들어오고, 뒤를 이은 왕들 역시 여호와보다는 바알을 섬기기 좋아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잠이 올 때 장수라도 내려오는 눈꺼풀을 이겨내지 못하듯이 왕과 백성들은 탐욕을 부추겨 주는 신 바알과 그 제도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남왕국에도 북왕국처럼 선지자를 보냅니다. 이때 활동한 선지자가 아모스와 미가입니다. 그 대신 남유다에 바알을 들여와서 섬기게 한 시대적 책임이 있는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사 3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이름이 빠지게 됩니다. 이처럼 바알 신을 섬기고 바알 제도를 도입하면, 살아서도 부끄럽고, 죽어서도 이름을 더럽히고 창피를 당합니다.
註) 남왕국(남유다) 여호람의 통치시대에는 왕의 이름들도 북왕국(북이스라엘)과 같은 이름이 3명이나 되어서 혼동을 하기 쉽다. 남유다 여호람(요람)은 남왕국 5대 왕이며, 북이스라엘 여호람(요람)은 9대 왕이고, 아합의 아들이며 아하시야의 동생으로 형을 이어 왕이 되었다(대 21:18~20). 남유다 여호람 아들 아하시야는 남왕국 6대 왕이며, 북이스라엘 아하시야는 아합의 아들이자 여호람의 형으로 북왕국 8대 왕이다. 그리고 남유다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는 남왕국 8대 왕이고, 북이스라엘 요아스는 북왕국 12대 왕으로 예후 왕조에 속한다.
왕들의 빗나감과 선지자의 세우심
유다의 왕들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미 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사 1:1)
이스라엘은 사사시대에 영적인 혼탁함이 계속되고 있었고, 룻기의 아무개처럼(룻 4:6) 개인적인 희년법 불순종자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여호수아로부터 토지를 분배받은 백성들은 자기 생업인 토지를 경작하고 있습니다. 백성들 대부분은 분배받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고, 신분이 자경농의 위치에 있으므로 희년법을 지키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이때를 백성들은 각기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에서 평안히 살았다고 합니다(왕상 4:25, 미 4:4). 또 이 시기를 성경은 “솔로몬이 사는 동안”이라고 하여 통치의 시기도 밝혀놓고 있습니다. 이때는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되지도 않았습니다. 앞에서도 말을 했지만, 솔로몬의 성전 건축과 왕궁의 왕성한 재력은 백성들의 경제가 그만큼 여력이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이든, 남유다이든 이방 신과 풍습이 들어오면서 부패해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페니키아의 상업 신 바알이 들어오면서 사회가 급격하게 부패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왕을 대신하여 백성들의 지도자로 선지자를 불러 세웁니다. 하나님이 바알 신과 바알 제도를 좋아하는 왕과 백성들에게 경고를 보내고, 여호와를 섬겨서 남은 백성들에게는 미래의 소망을 주고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에서 미가와 이사야는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가 왕이었을 때 남유다에서 부름을 받은 선지자입니다. 두 사람은 동시대에 활동한 선지자이며, 이사야가 미가보다 약 5~10년 앞서 활동을 시작 했습니다. 미가는 평민 출신으로 농촌에서 활동을 하고, 이사야는 상류층 출신으로 예루살렘 왕실에서 활동했습니다. 미가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해서도 예언을 했습니다(미 1:6). 두 사람 모두 활동 기간이 길며(미가 45년, 이사야는 60년) 같은 시기입니다.
여호람의 통치와 아달랴가 정략결혼으로 남유다에 바알 신이 들어온 시기가 대략 주전 848년 경이고, 미가와 이사야가 활동한 시기는 주전 740년 이후입니다. 따라서 선지자의 활동 시기는 약 100년 정도 차이가 나며, 남유다가 늦습니다. 세상을 오염시킨 바알의 농도가 그 100년의 기간만큼 차이가 난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이 100년 기간에는 바알을 척결한 제사장 여호야다와 여호야다의 지도를 따라 통치한 요아스의 초기 선정으로 인하여 남유다가 평안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야다가 죽은 후 요아스의 변심으로 남유다는 북이스라엘처럼 혼란에 빠집니다. 지도자는 이 세상의 현실 사회나 영적 공동체가 구분 없이 그토록 중요합니다. 그런데 지도자가 바알을 섬기고 백성들을 돌보지 않으니 하나님이 남유다에도 북이스라엘처럼 선지자를 세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오므리 왕조에서 디셉 사람 엘리야와 그 후계자 엘리사가, 예후 왕조에는 아모스와 호세아가 주로 활동을 했습니다. 남유다는 요담에서 히스기야 왕까지는 모레셋 사람 미가와 그의 동역자 이사야가 주된 활동을 했습니다. 그다음 유다가 패망하는 포로기 전후에는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이 활동을 했고, 포로기 이후부터 중세 암흑기까지는 학개, 스갸랴, 말라기가 활동을 합니다.
희년법을 파기하는 왕들과 상류층, 불을 뿜는 미가와 이사야
<미가의 경고>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미 2:1,2)
너희가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예법을 지키고 그들의 전통을 따르니 내가 너희를 황폐하게 하며 그의 주민을 사람의 조소거리로 만들리라 너희가 내 백성의 수욕을 담당하리라(미 6:12)
<이사야의 경고> :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8)
앞에서 호세아의 활동에서 살펴본 대로 바알 신은 육체적 음행으로부터 시작하여 종교적 음행으로 커지고 다시 경제적 음행으로 그 사악함이 절정에 이르고, 그런 공동체는 결국 파국을 맞게 됩니다.
이스라엘을 보셔요. 이세벨을 통하여 바알 신이 들어오니 이스라엘 사회가 어떠했습니까? 그 바알 신을 따라서 세상은 육체적 음란은 물론 종교적 음란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디셉 사람 엘리야를 불러세워서 갈멜산에서 영적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여호와의 신을 믿는 엘리야가 이겼습니다. 이것은 아마 오늘날의 신앙 공동체에서 기도의 강력한 힘으로 악령을 퇴치한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영적 전투의 승리에도 이 바알이란 놈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 공동체에서 이런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귀신이 물러가도 더 악한 귀신이 다시 들어올 수가 있고(눅 11:26),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있어도 사람이 삶에서 변화가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임하지 않습니다(마 7:22,23).
아내를 통해 들여온 바알을 추종한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을 냅니다. 포도원이 탐이 나니 아합은 희년법, 곧 하나님의 계명도 잊어먹습니다. 아합은 대뜸 나봇을 찾아가서 그 포도원을 사겠다고 제안을 합니다(왕상 21:2). 백성들이 계명을 어겨도 바로잡아 주어야 할 왕이 먼저 희년법을 무시하고, 금지된 토지의 소유권 거래를 제안합니다.
아합은 나봇에게 한 제안이 일거에 거부를 당하자 마음이 편하지 못했고, 이를 본 이세벨이 나서서 나봇이 여호와와 왕을 저주했다는 모함으로 죽여버립니다. 그리고 아합은 나봇의 죽음 소식을 듣자마자 이스르엘로 달려가서 포도원을 취합니다(왕상 21:16). 이렇게 아버지 오므리는 희년법을 어기면서 세멜산을 영구 매입하여 성을 지었고, 그 아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아서 나물 밭으로 삼았습니다. 이세벨은 예후의 바알 청소부들에 의해 비참하게 죽어서 자기가 빼앗아 취한 나물 밭에 거름처럼 뿌려졌습니다. 그래서 아모리 왕조의 족보는 이름마저 소멸합니다.
이러한 북이스라엘의 바알 신이 역시 왕실을 통하여 남왕국으로 들어왔습니다. 남왕국 왕실에도 피비린내가 나는 살상이 벌어지고, 바알 추종자 아달랴가 남왕국 왕족들의 씨를 말리려고 합니다(대하 22:10). 바알 추종자들의 잔악함은 이렇습니다.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짓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남왕국에서는 신실한 지도자 여호야다와 아내 여호사밧이 있어서 왕족의 씨를 구해내고, 왕의 선한 통치가 북이스라엘보다는 약 100년을 더 지켜옵니다(대하 24:2). 그런데 여호야다가 죽은 후는 유다의 왕과 백성들 역시 북이스라엘 못지않습니다.
위 본문을 보면 남왕국에서도 침상에서 악을 꾀하고 밭들을 탐하여 취합니다. 미가는 그런 자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하면서 그들을 경고합니다. 이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더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취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이세벨과 아합과 같이 잔인함은 덜할지 몰라도, 상류층이 남의 토지, 빈곤층의 기업을 취하고 또 취하는 탐욕은 비슷합니다.
이것은 남왕국에서도 북이스라엘처럼 희년법을 정면으로 어긴 행동입니다. 희년법에는 이렇게 토지를 많이 사들이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본 북이스라엘의 예는 왕들이 희년법은 위반한 경우이었지만, 지금 미가와 이사야는 남유다 전역에 걸쳐서 자행되고 있는 희년법의 위반 사례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강한 어조와 저주의 문구로, 신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이처럼 유다의 백성들, 곧 유다의 지도자나 부자들이 백성들의 생활 터전인 기업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룻기에서 본 바와 같이 백성들 중에 가난으로 팔려나간 기업이 있으면, 부자들은 보아스처럼 무르기를 해서 되찾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유다의 부자들은 무르기는커녕 가난한 자의 밭들을 탐하고 취하고 있고, 주택에 주택을, 농토에 농토를 사들여서 이 땅 위에 홀로 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도 미가처럼 이들에게 화를 부르짖습니다. 이사야는 이들에게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를 여섯 번이나 거듭하면서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사 5:9,11,18,20,21,22).
이처럼 선지자들은 지도자와 백성들이 희년법을 어기고 생존의 터전인 기업을 취한 것에 대하여 불을 뿜으며 성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희생되기 직전 곧 고난 주간 화요일에 성전강론을 통하여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일곱 가지 화로 저주한 것과 비슷합니다(마 23:13,15,16,23,25,27,29).
한 사회, 그곳이 신앙 공동체이든, 생활 공동체이든, 바알이 들어오면, 육체적으로 음란하며, 종교계를 비롯한 정신계도 혼탁하여 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경제계에까지 깊숙하게 들어와서 이렇게 희년법는 파기되고 토지를 취하게 됩니다. 토지를 상품처럼 팔고 사면 생산 없는 부를 직접 취할 수 있고, 거액의 목돈이 내 손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부를 쉽게 축적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바알 신은 이렇게 희년법을 파기하고, 희년법이 금지한 토지의 소유권 거래를 부추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알 신의 육체적 음란은 잘 알고 있고, 종교적 음란은 절반 정도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절반 정도란 이단 종파가 가진 종교적 타락(음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식이 있지만, 전통 종교 내에 침투해 있는 종교적 음란성은 생각하지 못하는 정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경제적 음란에 대해서는 이러한 종교적 음란만큼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경제생활에서 우리가 세속 경제법을 수용하여 음란에 빠진 것을 거의 모르고 산다는 뜻입니다. 땅값이 올라가는 부동산 급등기에는 백성들이 부동산 매입과 투자로 사람들의 마음이 그곳으로 쏠리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주식과 가상화폐도 덩달아 뛰어오릅니다. 사람들은 이를 따라 영혼도 들뜨고 부풀어 오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이른바 “빚투”와 “영끌”로 소중한 영혼을 빼앗기고, 마침내는 가산까지 탕진(파산)합니다. 그래서 이런 상태를 견뎌내지 못하면 자살도 합니다. 그러함에도 토지를 금융 수단으로 거래하는 방식을 가르쳐놓은 희년법을 경전으로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이에 대해서 한마디 말을 하지 못합니다. 희년법을 가지고도 부동산가격 상승과 금융자산과 거래에 대한 “빚투”와 “영끌”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바알 신과 바알 제도의 교활함과 사특함의 심각성을 모릅니다. 아주 둔하고, 무디다는 말을 덧붙여야 할 것입니다. 그만큼 필자는 이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물론 필자도 형편에 따라서 부동산, 주식 등 금융거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거래는 행위 하나하나를 정죄하는 표현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제도가 하나님이 격노했던 바알 제도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동산과 금융에서 “빚투”와 “영끌”과 같이 이성을 잃은 거래나 일확천금을 노리는 탐욕적 거래는, 이런 금융거래의 방식을 가르쳐 준 희년법으로 지적을 하거나 바로잡는 노력을 해야 함을 알리고 있습니다.
희년법 통치자 메시아의 출생과 사역을 예고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미가와 이사야는 유다 왕국에서 왕들이 희년법을 파기하는 것에 대하여 강하게 질타를 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이렇게 잘못에 대한 비판만 하지는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을 말합니다. 바로 이 세상을 다스리실 진정한 왕, 메시아가 온다는 예고입니다. 선지자는 이처럼 잘못은 꾸짖고, 다시 대안을 제시하며, 과거와 현재를 진단하여 미래의 소망을 보여줍니다. 이런 메시아를 소망하는 선지자의 예언에는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과 같은 이스라엘의 당면한 문제 회복도 들어있습니다.
미가와 이사야의 이 말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기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탄생하실 것이요,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이 땅에 오시기 약 700년(730여년) 전의 예언입니다. 메시아는 이 현실 세상을 실제로 다스릴 정사를 메었고, 사람의 능력을 초월하는 기묘자(奇妙者)이며, 사람보다 빼어난 지혜를 가진 자이기에 모사(謀士)입니다. 그분은 하나님 자신이시며, 영원하신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평화를 주실 왕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미가는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라고 합니다. 이사야는 메시아가 어깨에 정사(政事)를 메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메시아의 현실 통치를 포함합니다. 미가는 메시아가 베들레헴으로 오신다고 합니다. 이 예언은 700년 후에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서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눅 2:4,11).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십니까?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적인 조상 유다 지파, 그중에서도 다윗 가문의 기업이 있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진입하여 여호수아가 토지를 분배할 때, 베들레헴 땅은 라합과 살몬에게 기업으로 분배가 돼야 했을 곳입니다. 룻과 보아스가 어렵게 어렵게 기업 무르기를 하여서 기업을 되찾은 곳입니다(룻 4:1~10). 그 땅은 성경에서 “베들레헴의 아버지(조상) 살마(대상 2:51)"와 처음 관련된 곳이며, “베들레헴 토박이 보아스(룻 4:11)”에 의해 상속권이 정상적으로 회복되었고, “베들레헴 사람 이새(삼상 16:1)”에 의해 평화롭게 경작되어 온 기업입니다. 다윗이 그 기업이 있는 베들레헴에서 왕으로 선택을 받고,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삼상 16:12,13).
아기 예수가 출생할 당시는 마리아와 요셉이 30리(120km) 길을, 그것도 만삭의 몸으로 험한 길을 이동하여 찾아온 다윗의 동네입니다(눅 2:4). 아기 예수가 자라서 베들레헴 기업의 상속자가 된 30세에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공생애를 시작합니다(눅 3:23). 베들레헴 기업은 여호수아의 토지분배에서부터 한 가계로 분배되었고, 그 기업은 희년법을 따라서 상속권이 헬리와 마리아에게로 상속되어 왔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넘어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희년법 계승자로, 기업 상속자로서 메시아의 사역을 시작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 정치이고, 통치입니다.
미가는 700여년 전에 이런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사야는 또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이처럼 미가와 이사야의 예언에서 베들레헴으로 오실 메시아의 정사와 평강, 왕좌와 나라, 정의와 공의는 막연한 상상의 세상이나, 시적 또는 추상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것은 더욱 아닙니다. 모두 현실 정치에서, 경제 실무에서 실제로 이루어질 사회입니다. 곧 이것은 이스라엘 왕들이 파기한 희년법이 회복되고 실현되는 사회를 뜻합니다. 물론 메시아가 직접 통치하실 700년 후를 말하므로 미가와 이사야의 생존 당시보다는 질적, 양적으로 더 좋은 모습이 될 나라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미가와 이사야가 내다보는 대안과 소망은 그때나 미래나 생활 공동체에서 필요한 현실적인 삶의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셔서 현실 정치나 경제 실무를 어떻게 하실지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습니다. 태어나실 메시아가 왕으로 오신다는데 우리는 메시아를 현실 정치와 분리하여 생각합니다. 메시아는 초림이나 재림이나 현실 정치나 희년에는 관심이 없고, 지금의 종교인들이 추구하는 것가 같이 신앙 공동체에서 필요한 종교 문제만을 말하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일부 행동주의자들에 의해 인간적인 유토피아를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그들의 유토피아는 바로 인권의 평등과 노동자나 사회적 약자의 해방입니다. 그들에게는 희년법이 말하는 기업과 토지가 없습니다. 있어도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원리인 속량(고엘)과 값을 치르는 시장원리는 너나 없이 너무 무딥니다. 그들은 희년법이 정해놓은 시장원리를 곡해합니다. 그래서 토지는 국유나 공유화를 내세우고, 강도 높은 규제나 고율의 세금 부과를 제창합니다. 그런데 이런 제안은 속량의 원리나 시장원리가 아니므로 이를 정책에 반영해야 하는 정치는 늘 계층 갈등을 부추깁니다. 그리하여 경제는 비효율적이어서 혼란을 주고, 사회는 소모적 논쟁을 반복하게 됩니다.
희년에 관련된 이사야의 세 가지 사역
이사야는 아모스의 아들이며 상류 계급의 출신으로, 학식이 풍부하며, 외교에도 밝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왕들의 외교 자문을 많이 하는데 외교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외국과의 무분별한 동맹을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바알 신은 섬겨서 타락한 사회를 개혁하는 데 온 힘을 쏟아부은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이런 사역은 우리가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사야의 사역 중에 우리가 잘 모르거나 간과하고 있는 희년법 관련 사역만 간추려보겠습니다. 이사야의 희년 사역은 다음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희년법 파기를 성토하며 메시아를 대망
이사야는 앞서 본 바와 같이 유다가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바알 신과 제도를 도입한 것에 대하여 질타를 했습니다. 경제법을 어긴 것에 대해서는 가옥에 가옥을,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한다고 했습니다(사 5:8). 미가는 이에 대해 밭들을 탐하여 빼앗는다고 했습니다(미 2:2). 이것은 희년법을 어긴 것을 지적하고 경고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범죄에는 여호와의 징계가 있을 것을 예고하고, 백성들에게는 나라의 회복과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도 예언했습니다. 이런 내용은 앞에서 언급했습니다.
2) 히스기야 왕에 대한 희년법의 안내와 앗수르 침략의 예언
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징조가 되리니 올해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둘째 해에는 또 거기에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셋째 해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니이다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사 37:30,31)
이사야는 희년을 예로 들어서 나라에 닥칠 문제를 징조로 보여주었습니다. 징조란 히브리어 “오트”로 신호나 표적과 의미가 비슷한 말입니다. 흔히, 청개구리가 울면 비가 올 징조라고 합니다. 이사야(또는 아하스 왕)에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은(사 7:14), 미래에 메시아가 동정녀에게 탄생할 것을 징조로 보여 준 것입니다.
이처럼 이사야는 희년에 “스스로 난 것”을 예를 들어서 당면한 앗수르의 침입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산헤립의 예루살렘 침입으로 2년간 정상적인 농사나 경제활동을 하지는 못하지만, 이 전쟁 중에도 하나님이 보호하여 주실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스스로 난 것”은 희년이 되어 토지 휴경에 들어가면 땅은 사람이 심고, 가꾸지 않아도 스스로 생산물을 낸다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레위기 희년법은 안식년에는 사람의 노동을 금하고 토지가 스스로 내는 산물은 이웃의 가난한 자와 들짐승들이 먹도록 했습니다(레 25:4~7). 그리고 레위기 희년법은 2년 휴경을 해도 땅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충분하게 내기 때문에 안전하게 살아갈 수가 있다고 합니다(레 25:19~21). 사람이 노동과 투자를 하게 되는 경작년에도 땅은 스스로(노동과 투자와 별개로) 양식을 낸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토지의 자생성입니다.
여기서 토지의 자생성이란 땅이 인간과는 별개로 또는 독립적으로 경제적 생산활동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사람이 노동을 정지한 안식년에 땅이 스스로 내는 산물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레 25:4~7). 또 희년법이 정해 놓은 토지 무르기에서도 입증할 수 있습니다. 내가 토지를 잡혀서 돈을 빌렸어도 희년이 되면 자동으로 그 토지가 내게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것은 빚은 내가 졌지만, 그 빚을 갚아주는 것은 땅이 스스로 생산물을 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희년이 되면 내가 진 빚은 속량이 완료되어 토지가 내게로 돌아옵니다. 이것이 토지의 자생성입니다.
지금 이사야는 희년법이 말하는 토지의 자생성(스스로 난 것)을 예로 들어서 유다가 앗수르의 공격해 와서 농사를 짓지 못할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2년간 앗수르의 예루살렘 침공으로 농사를 짓지 못해도 땅은 2년을 버틸 수 있는 양식을 낼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희년법이 알려주는 토지의 자생성을 들어서 하나님이 유다를 구원해 주실 것을 알렸습니다. 이 예언대로 예루살렘을 침입한 산헤립의 군대는 18만 5천명이 죽고 물러갔습니다(왕하 19:36).
여기서 이사야가 말한 2년 연속으로 “스스로 난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희년을 뜻합니다. 그래서 희년 관련 연구자**는 학자들은 이때가 바로 희년이었다고 말합니다. 희년은 원래 안식년 1년을 지난 다음 해가 되기 때문에 2년 연속 휴경을 하는 해입니다(레 25:8). 이때는 유다에서 선한 왕으로 평가를 받는 히스기야가 재임할 때입니다. 필자는 이때를 주전 710년으로, 희년 주기로 제15회 희년이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 註) 김명호, 희년연구, 1992, 새순출판사, 124쪽. 대천덕, 우리와 하나님, 도서출판 예수원, 1993, 296쪽. 반성호, 성경연대기, 밀알서원, 2013, 133쪽.
물론 앗수르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침공한 해를 주전 700년경으로 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학자들마다 이견이 많은 부분입니다. 필자는 『성경과 5대제국』의 저자, 조명호 박사의 견해를 따라 주전 710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히스기야 왕의 즉위 연도는 주전 725년입니다. 그렇다면, 산헤립의 침공 시기는 히스기야 왕 즉위 14년이므로(왕하 18:13) 이때가 주전 711년입니다. 주전 711년은 안식년이고, 주전 710년은 출애굽 이후 15회 째 맞는 희년이 됩니다. 이때 산헤립은 왕이 아니고 황태자의 신분이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갈그미스 전투에 참전한 느부가넷살은 신분이 황태자이었지만, 왕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왕하 24:1). 지금도 사우디아라비아는 왕을 두고 황태자인 모하마드 빈 살만이 외교 등에서 왕의 대역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징조로 보여준 “금년(올해)과 명년(둘째 해), ‘스스로 난 것’을 먹는다”는 시기는 연대기로 15회 희년과 일치합니다. 단, 이에 대한 상세한 검토는 필자의 다른 자료를 참조하시고, 필자의 오류나 이견이 있으면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바로 잡겠습니다.
註) 성경 연대기에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이 된 해, 주전 1010년부터 예루살렘 함락 연도인 주전 586년까지 424년의 기간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기간에 히스기야 왕의 즉위와 퇴임 연도, 앗수르의 산헤립 침공 회수와 시기, 포로기 70년의 기간 등은 확실하지 않고, 학자들의 의견도 서로 다르다.
이사야가 보여준 희년은 히스기야 왕에게 미리 징조로 보여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15회 희년인 주전 710년과 산헤립의 예루살렘 침입 연도가 반드시 일치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아무튼,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에게 희년법이 말하는 2년 연속 휴경하는 예를 징조로 보이면서 산헤립의 예루살렘 침입을 미리 알리고, 전쟁에 대처할 준비를 하게 했습니다.
3) 희년법 준수의 촉구와 궁극적 희년 선포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함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 61:1)
이사야는 실제로 희년을 촉구하고, 희년의 궁극적 선포자로 오실 메시아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사야의 예언을 따라 나사렛 회당에서 희년을 선포했습니다(눅 4:19). 그런데 우리는 희년에 대하여 관심이 없으므로 이사야가 희년법 준수를 촉구한 사실과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희년을 선포한 역사적 사실을 잘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희년을 선포한 해는 주후 26년 7월 10일 “속하는 날(속죄일+속전일)”입니다(눅 4:18,19). 이 시기와 날짜에 대해서는 이미 검토를 한 바가 있어서 다음 기회로 미룹니다.
이사야가 희년법 준수를 촉구한 사실은 이사야서 58장에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금식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금식은 원래 매년 7월 10일 속하는 날, 백성들이 하나님께 함께 속죄하며, 금식의 의식을 행하는 것입니다(레 16:29, 23:27). 금식은 수시 또는 포로기 이후는 연간 4회로 나누어 정기적으로도 합니다. 그러나 7월 10일 하는 금식은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백성들의 죄를 사하는 의식을 치르는 행사일입니다.
7월 10일, 이날은 매년 기업 무르기를 하여 개별적인 희년이 돌아오는 날이며, 그렇지 못하면 7안식년 다음 해 이날은 희년이 선포되어 자동으로 희년이 돌아오는 날입니다. 이사야는 금식일에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을 이사야 58장 한 장의 내용으로, 강도 높은 어조로, 깊고도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먼저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베옷을 입고 재를 뿌리며, 금식의 의식만을 중시하는 백성들을 신랄하게 꾸짖습니다(사 58:5).
그리고 이사야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를 풀어주고,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빈민을 내 집에, 벗은 자는 입혀주어야 합니다. 또 어려운 골육지친을 피하여 숨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골육지친은 바로 레위기 희년법이나 신명기 면제년에 따른 친족간의 속량(고엘)이나 이웃에 대한 의무를 뜻합니다(레 25:1~28, 39:55장, 신 15:1~3). 부채를 갚아주는 부채 탕감, 몸값 치르기(종의 속량), 기업 무르기 등입니다. 이런 일은 7월 10일 속하는 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7월 10일은 죄를 속하는 속죄일이기도 하지만, 경제적으로 몸과 땅이 빚 담보로 묶여 있을 때, 값을 치른 속량으로 풀어주어야 하는 날입니다. 이것이 희년법의 준행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희년법을 준행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속하는 날은 속죄와 금식으로 죄를 먼저 회개하여 영혼의 자유함을 얻습니다. 그리고, 다시 성전을 나와서 친족과 이웃에게도 속전을 치러서 사람들 간에 묶여 있는 결박과 압제를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성경이 말하는 영과 육의 자유함을 동시에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식하며 속하는 날 해야 하는 속죄의 절차이며(레 25:8,910,15,16, 24~28, 39~55), 예수 그리스도가 주기도를 통하여 가르쳐 준 빚의 사함과 죄를 사함의 역할입니다(마 6:12, 눅 11:4).
이사야는 이렇게 속하는 날의 속죄 의식만 하지 말고, 속전까지 치러서 사람을 자유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금식이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이스라엘은 황폐한 땅을 다시 고르며,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다시 놓아, 무너진 집을 리모델링(수보)하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사 58:12). 그리고 이사야 61장에서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주는 희년을 선포하게 됩니다(사 61:1,2). 예수 그리스도는 이날 성령이 임하여 나사렛 회당에서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이때 읽은 성경이 이사야 58장, 42장, 그리고 61장에서 찾아서 읽은 희년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 때 맞은 희년은 15회 희년으로 주전 710년 7월 10일 금식일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희년은 30회 희년으로 주후 26년 7월 10일 금식일입니다.
이 속하는 날, 이렇게 경제적 속량까지 해야 하나님이 우리를 열납(수용)하시는 "열납의 날"이 되며(사 58:5), 이 열납의 날, 7월 10일, 희년법 의무를 준행해야 하나님이 우리를 수용하고 인정하시는 "열납의 해(눅 4:19, acceptable year)"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바알법 추종자와 희년법 순종자
미가와 이사야 선지자는 남유다가 북이스라엘이 섬긴 바알 신과 제도를 추종하여 사회가 부패하게 된 주전 750년 전후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계명을 어긴 왕과 백성들에게 경고하고, 잘못을 돌이키라고 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에는 어두움의 역사에서 다시 회복하는 나라의 미래를 알려주고, 오실 구세주 메시아를 예언하여 소망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남유다 왕들도 북이스라엘 왕처럼 그들의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남유다에 바알 신을 처음 도입하여 오염시킨 통치와 관련이 큰 세 왕의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제외합니다. 이 왕들이 남왕국 여호람의 직계 아들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스입니다. 여호람은 바알 신의 광적인 추종자 이세벨의 사위이며, 아달랴의 남편입니다. 여호람의 아들인 아하시야는 왕이 되어 1년도 못 되어 예후의 혁명으로 죽습니다.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 지도 아래에서 선정을 펼쳤으나 그 이후는 스가랴 제사장 말을 듣지 않고 악한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왕이 자기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는 제동이 걸려있는 희년법보다 왕이 자유 의지로 할 수 있는 바알 제도가 훨씬 더 낫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전체 역사에서 남유다는 바알 신과 제도에 오염이 되기는 했어도 북이스라엘보다는 좀 낫습니다. 남유다에서 바알 도입의 초기에는 제사장 여호야다, 중간기에는 히스기야와 웃시야의 종교개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개혁은 종교개혁으로만 그치고, 희년법을 어겨서 부패한 경제는 개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남유다는 북이스라엘보다 136년 늦은 주전 586년 패망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종교에서 이방 신을 섬기고, 생활에서는 여호와의 계명을 어겨서 희년법을 지키지 않으면 족보에서 이름을 빼버리십니다. 왕들의 계보인 마태복음 족보는 ⑥아하시야, ⑧요아스, ⑨아마사가 이름이 빠졌습니다. ⑤여호람(요람)도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아달랴를 통하여 바알 신을 들여온 악한 왕이므로 족보에 이름이 빠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람은 여호와가 다윗가 세운 언약으로 인하여 족보에 이름이 빠지지는 않았습니다(대하 21:7, 삼하 7:12). 여호람이 빠지면 유다 지파는 왕통이 끊어지게 되어서 하나님이 특별한 배려(주권적 개입)로 족보를 이어준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데, 이것이 누가복음이 소개하는 족보입니다. 마태복음에 오른 왕들의 계보와 누가복음의 계보를 같은 시기로 비교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유다 왕들의 족보> 다윗 솔로몬 ①르호보암 ②아비얌 ③아사 ④여호사밧 -> ⑤여호람(요람) -> //⑥아하시야 ⑦아달랴 ⑧요아스 -> ⑨아마사// ->⑩웃시야 ** ⑦은 아합의 딸, ⑥, ⑧, ⑨는 바알법 도입과 추종자로 족보 탈락 (마 1:8)
<누가복음 족보> 다윗 나단 ①맛다다 ②멘나 ③말레아 ④엘리야김 ⑤요남 ⑥요셉 ⑦ 유다 ⑧시므온 ⑨레위 ⑩맛닷
** ①~⑩은 희년법 준행으로 상속권을 이어서 족보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짐(눅 3:29~31)
다만, 누가복음 족보에 들어있는 이름들은 성경 다른 곳에서 행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누가복음 족보를 이어온 사람들은 왕이나 제사장과 같은 직분을 감당하지는 않았고,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경작하며 살아왔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도 족보를 잇는 데에는 그 계보가 중간에 끊어질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족보에도 포로기에 스룹바벨의 법통상의 부친이었던 스알디엘, 요셉의 장인이자, 마리아의 아버지인 헬리처럼 대가 끊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족보에 이름이 오른 자들은 이러한 위기에서도 레위기 희년법, 민수기 상속법, 그리고 신명기 계대결혼법을 따라서 여호와의 계명을 준수했습니다. 이들은 기업의 상속권을 이어왔기 때문에 누가복음 족보에 이름이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족보에 이름이 들어있으나 행적이 없는 그 시대, 그 기간의 역사는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불러서 일을 맡기십니다. 그래서 왕정시대의 역사, 곧 이 시대의 주도적 활동은 선지자를 세워서, 그리고 기업을 지키고 있는 누가복음 족보의 계승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겉보기로 보면, 왕정시대는 왕들이 역사를 이끌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구속사는 희년법 준행을 촉구하는 선지자들과 이 선지자들의 요청을 따라 희년법과 기업을 지키고 있는 누가복음 족보의 이름을 따라 역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실 때, 계명을 지키지 않거나 다른 신을 섬기면 그 죄가 3, 4대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면 천 대까지 은혜를 베풀겠다고 하셨습니다(출 20:5,6, 신 5:9,10).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보면, 이 말씀 그대로 실제로 그렇게 역사가 흘러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희년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이어가는 하나님의 구속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