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주의 국가 쿠바
남을 돕거나 내가 속하지 않은 집단을 돕는 일은 여유가 있을 때나 가능하다고들 생각한다. 당장 내가 먹고살 만해야 남을 돕는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간혹 이런 ‘당연함’을 넘어서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근검절약해 어렵사리 모든 돈을 이웃돕기 성금이나 장학금으로 쾌척하는 사례들이 심심치 않게 보도되곤 한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남 돕기에 앞장서는 국가도 있다. 바로 쿠바이다. 모든 사람의 건강을 보장하고자 하는 쿠바 정부의 노력은 국경을 넘어서까지 이루어지고 있다. 한 저자는 국경을 뛰어넘는 쿠바의 원조 활동을 성경에 등장하는 ‘과부의 동전 한 닢’에 비유했다.
의료 전문가 해외 파견
쿠바에는 ‘헨리 리브 국제구조대’라는 조직이 있다. 2005년 9월 결성된 구조대는 세계 어디든 재해로 의료 서비스가 필요한 곳이 생기면 달려가 지원한다. 조직의 목적이 이러한 만큼 참여 조건도 독특하다. 의학 지식뿐만 아니라 역학 지식을 갖춰야 하고, 적어도 두 가지 언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하며, 건강해야 한다. 선발되고 나면 두메산골에 들어가기 위한 낙하산 훈련도 받는다.
구조대가 결성된 배경은 이러하다. 2005년 8월 29일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루이지애나주와 미시시피주를 덮쳐 1,702명이 사망했다. 긴급 피난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동 수단이 없었던 저소득층이 주로 피해를 당했다. 재해 이후 미국과 쿠바의 대응은 매우 대조적이었다. 미국 의회는 피해 복구와 긴급 대책을 위해 예산을 편성했지만 당시 부시 대통령은 군사 예산을 삭감해가면서 재해 복구 예산을 쓸 수 없다며 복구 책임을 지방정부에 떠넘겼다.
반면 어찌 보면 적대국이라 할 수 있는 쿠바는 허리케인 피해 소식을 접하고는 곧바로 1,586명의 의료진을 구성해 미국에 파견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쿠바는 이때 구성한 조직을 해산하지 않고 추가로 신청을 받아 3,000명 규모의 의료구조단을 결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헨리 리브 국제구조대이다.
쿠바는 구조대가 결성되기 전부터 의료 지원 활동을 펼쳤는데, 그 시초는 혁명 정부 수립 직후인 196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칠레, 알제리, 니카라과, 가이아나, 앙골라, 스리랑카 등 어려움에 처한 곳이면 어디든 의료팀을 파견했다. 혁명에 반대한 의사들이 대부분 해외로 빠져나간 상황에서도, 소련 해체로 지원이 끊겨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도 쿠바는 해외 원조 활동을 지속했다.
2005년 파키스탄과 2006년 인도네시아에서 헨리 리브 국제구조대는 결성 이후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쿠바 의료진의 활동은 몇 가지 점에서 다른 국가의 원조 활동과 달랐다. 먼저 다른 국가의 지원팀은 단기간 활동에 그친 반면 쿠바 의료진은 장기간 활동했다. 재해 피해자에 대한 응급 치료에 그치지 않고, 평소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없었던 지역 주민들을 치료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예방 활동과 교육, 심리적 지원도 병행했다. 둘째, 파견된 의료 인력 중 상당수가 여성이었다. 종교적 이유로 남자 의사에게 치료받을 수 없는 여성 환자들이 자칫 방치될 수도 있었는데 쿠바 여성 의료진 덕에 여성 환자에 대한 치료도 가능했다. 셋째, 단순히 도움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떠난 이후에도 치료가 지속되도록 조치했다. 쿠바 의료진은 활동 마지막 단계에 자신들이 떠난 뒤 그 자리를 대체할 의료진을 양성했는데, 그 나라의 의대생과 군의관 들을 교육했다. 그리고 치료가 가능하도록 의료 기기와 의약품을 기부하고 본국으로 돌아왔다.110
쿠바 의료진의 투철한 활동을 짐작하게 하는 미담들이 있다. 쿠바 의사들의 활동에 대해 파키스탄 작가 탈리크는 “파키스탄 국민은 사랑을 가리키는 새로운 단어 하나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쿠바라는 단어입니다”라고 기록했다. 인도네시아 지진 후 파견된 쿠바 구조대는 3개월 체류 기간에 산모 34명의 출산을 도왔는데, 그중 한 부부는 감사의 마음으로 아이 이름을 ‘쿠바’라고 지었다.110
현재 베네수엘라 등에 파견한 의료 인력이 쿠바의 주요 외화 수입원인 것은 맞지만, 재난 지역에 대한 의료진 파견은 모두 무상으로 이루어졌다. 재난으로 수천 명이 사망하고 부상당한 상황에서 국교도 수립하지 않은 나라의 의료진이 돈 한 푼 받지 않고 오랫동안 머물며 치료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언어도 통하지 않고 기후도 맞지 않는 곳에서 혹독한 날씨를 견뎌내고 현지어를 배워가며 환자를 정성으로 보살펴주는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쿠바의 의료 지원을 받은 국가는 자연스럽게 쿠바의 우방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피델 카스트로는 이 모든 것을 미리 계산했을까? 의료 인력 파견에 적과 동지, 지역을 가리지 않았다. 계산된 결과이든 아니든 인도적 원조 활동은 쿠바의 외교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UN 인권위원회는 매년 미국의 쿠바 경제 봉쇄 해제를 두고 투표를 하는데, 쿠바의 지원을 받은 국가들이 계속해서 쿠바에 대한 경제제재에 찬성하는 표를 던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2004년 미국 부시 대통령은 파라과이를 방문해 쿠바 경제 봉쇄 해제에 반대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니카노르 두아르테 대통령은 기권을 선택했다. 이런 결과를 예상했는지 파키스탄이 재난을 당했을 때 미국은 파키스탄 정부에 쿠바의 지원을 받지 말라고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1960년 지진 피해를 입은 칠레에 의료팀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쿠바가 타국에 파견한 의료 인력은 10만 명을 넘어섰고, 쿠바 의료 인력의 도움을 받은 국가는 무려 110개국에 달한다. 처음에 수혜국들은 쿠바의 의료 원조를 곱게 보지 않았다. 사회주의 혁명 활동을 하려는 것은 아닌지,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그래서 쿠바의 의료 지원 활동은 언론의 조명을 받지 못했다.
정기웅 박사는 미국과 일본이 오랜 기간 막대한 자원을 해외 원조에 쏟아부어 왔지만 제3세계 국가들로부터 지지를 못 받는 반면 쿠바는 강한 국가가 아님에도 국제 정치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성경 구절을 인용해 쿠바 의료 외교의 성과를 평가했다. “과부의 동전 한 닢은 부자의 금화 열 닢보다 가치 있는 것이다.”
전 세계 학생을 위한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
1999년 개교한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은 쿠바에 있지만 쿠바인이 아닌 외국인을 위한 의과대학이다. 1998년 중미와 카리브해 주변에 호르헤, 미치 같은 대형 허리케인이 덮쳐서 온두라스, 니카라과, 과테말라, 엘살바도르에서 1만8,000명 넘게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언제나처럼 쿠바는 의료진을 파견했지만 현지 사정이 너무 열악해 피해자들을 치료하는 데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쿠바 정부는 의료 인력을 파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지 의사를 양성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마침 이베로아메리카 정상회의가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개최되었을 때 의과대학 설립을 제안했다. 쿠바에 쿠바인이 아닌 가난한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의학 교육을 하기 위한 대학을 설립하는 계획이었다. 정상회의에서 논의된 후 바로 설립이 추진되었으며, 대학 건물은 해군학교가 있던 곳을 개축해 사용했다. 그래서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은 해변에 자리 잡고 있다.
한국에서 이런 일이 계획되었다면 언제쯤 실현될 수 있었을까? 관련 법 검토, 예산 확보, 부지 마련, 시설 건축, 인력 채용 등 거쳐야 할 과정이 많아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주요 정책 결정자와 이해 관계자의 동의를 얻지 못해 영영 실현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입학 자격은 25세 미만의 고졸 이상 학력자로 의사 업무를 수행할 신체적·정신적 건강 상태를 갖춘 빈곤 계층이어야 한다. 총6년의 교육 과정 중 2년은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에서 배우고 나머지 4년은 쿠바 학생들과 각 지역의 의과대학에서 공부한다. 6년 동안의 등록금, 식비, 책값 모두 쿠바 정부가 부담하며 얼마간의 용돈도 지급한다. 이런 교육을 받고 나서 수혜 학생이 지켜야 하는 의무는 단 하나로 본국으로 돌아가 일정 기간 의료 봉사 활동을 해야 한다. 국가에 따라 쿠바의 의사 면허를 가지고 바로 의사로 활동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자국에서 다시 시험을 봐야 하는 경우도 있다.
기적의 안과 수술
피델 카스트로의 통 큰 계획 중 하나인 ‘기적의 안과 수술Programa de Milagro’은 2004년 7월 1일 시작되었다. 백내장, 녹내장, 당뇨병 등으로 시력을 잃은 사람들을 치료해주겠다는 계획으로, 의학 기술의 발달로 치료가 가능함에도 돈이 없거나 의료 서비스에 접근할 수 없어 실명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치료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더욱 놀랍게도 쿠바 국민만이 아니라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450만 명을 치료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국적에 상관없이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치료 기회를 주겠다는 말이다.
다소 황당해 보이는 개획이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2014년까지 34개국 260만 명의 환자가 수술을 받고 시력을 되찾았으며, 2016년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다. 계획 자체도 통 큰 결단이었지만 그 과정도 남다르다.
이 계획의 커다란 수혜국인 파나마는 당시 쿠바와의 관계가 편치만은 않은 상황이었다. 2000년 파나마에서 이베로아메리카 정상회의가 개최되었는데, 회의에 참석한 피델 카스트로를 CIA가 고용한 루이스 포사다가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파나마 대통령이었던 미레야 모스코소는 암살자 포사다를 체포했으나 미국의 압력에 석방해버렸다. 물론 그사이 대통령이 바뀌긴 했지만 쿠바는 이런 사건이 있었던 파나마와 국교를 회복하고 매년 1만 명이 넘는 파나마인에게 안과 수술을 받도록 했다.
요시다 타로는 쿠바 방문 중 취재를 돕던 사람이 호텔에서 퇴거 명령을 받았던 일을 저서에서 소개한 바 있다. 이유인즉 안과 수술을 받으러 온 외국인과 그 가족들이 호텔에 묵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손님들은 호텔에서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치료비는 물론 안과 수술을 받으러 오는 환자와 가족의 호텔 숙박비, 식사비, 입국 경비도 모두 무료였다. 또한 의학적 치료 외에도 사회복지사들이 환자와 가족을 돌보는 역할을 맡았다.
끝나지 않은 고통, 타라라 진료소의 아이들
1986년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했다. 당시 집계된 피해도 컸지만 더 심각한 사실은 참사의 영향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아이들이 갑상샘암, 백혈병, 심상성 백반, 건선, 측만증, 근위축증 등 온갖 질병과 장애에 시달리고 있었다.
1990년 이 아이들을 위해 쿠바가 나섰다 아이들을 쿠바로 데려와 상태에 따라 3개월 정도 치료해주기도 하고 4년 넘게 쿠바에 머무르게 하며 치료해주기도 했다. 골수 이식, 신장 이식, 백혈병 치료, 심상성 백반이나 탈모증 치료 등 다양한 치료가 이루어졌다. 사람 태반과 상어 연골을 이용해 개발한 로션은 머리카락과 눈썹을 다시 나게 하고 피부 장애에 효과가 있어 당시 치료에 활용되었다. 총2만 명 이상이 쿠바 타라라 진료소에서 치료를 받았다.
의학적 치료만이 아니었다. 치료를 받으러 온 아이들은 질병과 장애, 다른 사람과 다른 외모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고 위축되어 있었다. 이런 아이들의 마음이 카리브해의 햇살 아래에서 음악과 춤, 놀이를 통해 치유되도록 했다. 물론 이 역시 무료로 이루어졌다.
서사하라 학생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서사하라는 아프리카 북서부 대서양 연안에 있는 곳이다. 1969년까지 스페인령이었으나 탈식민지 운동이 일어나자 모로코와 모리타니가 역사적 연고성을 내세우며 서사하라 영토 소유권을 주장했다. 이와 동시에 원주민들은 ‘폴리사리오’라는 독립 단체를 조직해 해방 운동을 전개했다.
1975년 국제사법재판소가 ‘서사하라인들은 민족 자결의 권리가 있다’는 의견을 발표했음에도 스페인, 모로코, 모리타니는 이를 무시하고 영토권 분할 협상을 했다. 영토의 3분의 2는 모로코가 차지하고, 나머지는 모리타니가 차지했다. 이에 반발해 서사하라 주민들은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했다.
모로코는 독립을 선포한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에 공세를 가했고, 공화국은 알제리의 지원을 받아 모로코와 모리타니를 공격했다. 모리타니는 영유권을 포기했으나 모로코는 모리타니령 서사하라도 모로코 영토로 선포하며 지금까지도 서사하라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모로코 정부는 서사하라의 무역과 경제권을 쥐고 가격을 통제하며 이권에 개입하고 있다. 또 영토를 지킬 목적으로 지뢰나 레이저로 서사하라 주민들을 감시한다. 독립을 선포한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을 남미와 아프리카는 국가로 인정하지만 그 외 대부분 국가는 인정하지 않아 UN 개입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서사하라에는 자원의 거의 없고, 강수가 부족해 농사를 짓기도 힘들다. 그래서 대부분이 유목과 어획 등을 하며 살거나 알제리 영내에 있는 난민 보호 구역에서 지낸다. 보호 구역에는 다른 나라에서 보내오는 구호 물품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교육을 받기도 어렵다. 스페인을 비롯해 몇몇 국가가 서사하라 난민을 지원하고 있는데, 쿠바도 그중 하나이다.
쿠바가 서사하라 난민을 돕는 방법은 서사하라의 청소년을 쿠바로 데려와 교육하는 것이다. 서사하라 청소년은 쿠바에서 무상으로 공동생활을 하면서 고등학교까지 교육받을 수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쿠바의 대학에 진학할 수도 있고 자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으며 다른 나라에 가서 일할 수도 있다.
한국은 1987년 공적개발원조ODA 활동을 시작해 원조 규모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10년에는 OECD 산하 개발원조위원회DAC 회원국이 되었다. 한국이 1945년 해방 이후 55년간 국제사회로부터 받은 도움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600억 달러가 넘는데, 받은 만큼 되돌려주려면 20년 넘게 걸릴 것이라 한다. 개발원조위원회 회원국 중 한때 원조 수혜국이었던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수혜국에서 제공국으로 지위를 전환한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긴 하지만, 아직 다른 개발원조위원회 회원국에 비해 원조의 절대 규모나 국민소득 대비 비율이 낮은 편이다.
저개발 국가를 돕기 위한 예산을 확대하는 데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에 비해 국제 원조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부족하므로 확대 개선할 필요가 있지만, 일각에서는 한국의 경제 사정을 고려해 원조 규모 확대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쿠바의 국제 원조 활동을 보면 돕는 데 적당한 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108~119)
[출처] 거꾸로 가는 쿠바는 행복하다 - 저성장 고복지, 쿠바 패러독스의 비밀을 찾다
배진희, 시대의창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