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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희: 그럴 수도 있겠다. 뭐……. 하고 싶은 건 있어요?……. (재섭을 보며) 어이, 김씨, 어렸을 때 꿈이 뭐였는데?
재섭: (유쾌하게 웃으며) 꿈?……. 꿈이라……. 글쎄……. 꿈이라……. 꿈……. 그런 게 있었나?
-사이-
훌쩍 거리는 소리…….
소희, 침대에 걸터앉아 재섭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코만 훌쩍거리며 울고 있다.
점점 소희의 울음이 커져 간다.
소희, 재섭이 깰까 자제하면서 울지만 이미 극도로 고조된 감정을 누르지 못한다.
재섭, 꿈쩍없이 눈만 뜨고 소희의 울음을 듣고만 있다.
씬 82. 커피숍 (낮)
재섭과 혜경, 커피를 마시고 있다.
재섭: (잔을 내려놓으며) 나……. 조금 있다가 학원 출근해야 되거든? 그런 말 말고……. 하고 싶은 말 있는 거 같은데?
혜경: 어, 그래?……. 저……. 아니, 그냥 오랜 만에, 그때 그냥 그렇게 가고해서……. 나는 너가 정말 잘 살았으면 좋겠는데……. 정말로.
재섭, 시계를 본다.
재섭: 그만 가봐야겠다.
혜경, 일어난다.
혜경: 데려다 줄게.
씬 83. 학원 앞
잘 빠진 승용차가 선다.
재섭이 내린다.
혜경도 내린다.
혜경, 차 등위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둘, 악수한다.
혜경: 너한테 축하 받고 싶어……. 그래야 될 거 같아…….
재섭: 축하해, 진심으로.
혜경: 윤수가 연락했는지 모르겠는데……. 동기들 부르는 집들이 때 신랑도 있으니까 너 오지 않았으면 하는데……. 나, 잘 살고 싶거든.
재섭: (잠시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몰라 망설이다가 씩, 웃으며) 나 학원 그만 두고 다른 거 할려구……. 요새 시간이 좀 없어서……. 갈께……. (혜경을 빤히 쳐다보며) 우리 이제 다시 보는 일 없었으면 좋겠다.
씬 84. 강의실 (저녁)
칠판 한 가운데에는 ‘詩’ 라고 크게 쓰여 있다.
재섭, 교재를 뒤집어 아무렇게나 내려놓는다.
재섭: 시를 강의할 때마다 양심에 걸리는 거지만 사실 나는 시에 대해서 잘 몰라……. 니네 학교 선생님들은 나보다 더 모르고……. 참고서에 시를 해설해 놓은 늙은이들도 개뿔도 몰라……. 지금 니네가 배우는 거는 진짜 시를 배우는 게 아니고 정답 찍는 방법을 배우는 거야……. 누가 시험 문제를 내느냐에 따라 답은 달라져……. 수학도 아닌 문학에 정답이 있다는 거는 애초 코미디지……. 하지만 별 수 없어……. 힘 있는 놈들 생각대로 사는거야……. 하긴, 니네한테 아직도 교복을 입히는 거 보면……. 어이가 없지…….
느닷없는 재섭의 강의에. 학생들, 문자 메시지를 보내다 말고 재섭을 빤히 쳐다보기도 하고. 조그만 빗으로 머리를 빗던 여학생은 그냥 또 헛소리 하나보다 하고 무시하기도 하고. 잠을 자려고 자세를 잡던 남학생은 딴소리에 집중해서 듣기도 한다.
씬 85. 버스 안 (밤)
재섭, 맨 뒤에 앉아 있다.
창문 밖으로 개봉동 버스 정류장을 유심히 살핀다.
씬 86. 개봉동, 버스 정류장
버스에서 내리는 재섭.
앞에 벤치에 한 여학생과 한 남학생이 주체할 수 없이 깔깔거린다. 그들을 무심히 보고 있는 재섭…….
씬 87. 운전면허 시험장 (아침)
어둑어둑한 날씨.
재섭, 기능시험을 기다리고 있다. 따분한 얼굴. 반복적으로 목과 어깨를 움츠린다.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고 있다.
-몽타주-
시계를 반복적으로 보는 재섭. 컵에는 담배가 하나씩 쌓여가고……. 수북이……. 기다리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줄어든다. 마침내 시험을 보게 되는 재섭. 차에 탄다.
재섭이 탄 차가 떨어졌다는 방송이 나온다.
씬 88. 거리, 자판기 앞 (밤)
재섭, 유난히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자판기 앞으로 걸어온다.
멈춰 선다. 가방을 손으로 쥔다. 주위를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본다.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다.
지갑을 꺼내 지폐를 넣고 캔 커피를 뽑는다.
가던 길을 계속 걷는다.
있는 힘껏 캔 커피를 바닥에 집어던진다. 경찰차 사이렌 소리…….
씬 89. 학원 건너, 신호등 앞
소희, 신호등에 서 있다. 옆에는 남학생3 이 힐끗힐끗 소희를 보고 있다.
희, 학원 쪽을 본다.
승용차에서 내리는 재섭. 혜경과 악수하는 재섭.
파란불. 남학생1 천천히 건넌다.
소희, 혜경과 재섭을 계속 보다가 신호등을 건너지 않고 뒤돌아 간다.
씬 90. 노래방 앞 - 거리 (밤)
소희, 지하 노래방에서 나온다.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갈 곳이 없는 듯 미적 미적댄다.
씬7의 여학생처럼 고개를 떨군 채 터벅터벅 걷는다.
앞에서 두 남자가 치고받고 싸우고 있다. 사람들이 웅성대며 구경을 하고 있다. 남자4가 일방적으로 남자5한테 맞는다. 남자5는 남자4의 뒷덜미를 잡고서 신나게 두들겨 팬다. 남자4의 여자 친구인 듯한 여자1이 옆에서 어쩔 줄 몰라한다. 남자5의 팔을 때려보기도 하지만 소용이 없다. 주변을 둘러보던 여자1이 벽돌을 주워와서 남자5의 머리를 세게 친다. 남자5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넘어진다. 여자1이 다시 떨어진 벽돌을 주어서 남자5의 머리를 가격한다. 남자5가 쓰러진다. 바닥에 피가 떨어진다. 사람들이 물러난다. 소희는 싸움 때문에 막힌 길을 지나가지 못하고 서 있다.
소희, 문득 건너편을 바라본다. 건너편에는 소희와 재섭이 캔 커피를 뽑아먹던 자판기.
사이렌을 울리며 지나가는 경찰차.
버스정류장 10
씬 91. 강의실
소희, 강의실에 앉아 있다.
수업이 시작됐지만 소란스런 교실 안.
수학강사가 들어온다. 프린트를 돌린다.
수학강사: 조용히 풀어. 아니면 딴 거 하든지……. 떠들지만 마.
여학생1: 국어 아직 안 왔어요?
수학강사: 국어?! 국어가 니 친구야?
여학생 1, 난감한 얼굴
소희: 국어 시간 아닌가요?
수학강사: 아직 국어 선생님이 새로 안 오셔서.
씬 92. 개봉동, 버스 정류장 (이른 아침)
많은 사람들의 출근길에 재섭도 동참하고 있다.
씬 93. ** 잡지사 (낮)
재섭, 컴퓨터 앞에 앉아 옆에 쌓아 놓은 서류를 바쁘게 정리하고 있다.
여기저기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
기자1, 재섭에게 다가오며 서류를 하나 건넨다.
기자1: 거기 적힌 대로 인터넷 들어가서 자료 뽑고 도표 좀 만들어놔. (상냥한 웃음으로) 부탁해. 필요하면 내 이름 대고 여성문제연구소에 전화하면 자료 보내 줄어야.
기자 1, 간다.
재섭,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서류를 쳐다본다.
떫은 얼굴.
다시 컴퓨터를 두들기기 시작한다.
책상 건너편.
윤수, 전화를 받으며 재섭을 본다.
씬 94. 창녀의 방
침대에 앉아 있는 재섭. 바닥에 앉아 있는 창녀. 둘 다 담배를 피우고 있다
창녀: 왜 아무 말도 안 해? 오랜만에 오고서?
재섭: …….
창녀: 무슨 일 있어?
재섭: 그냥……. 좀 꿀꿀해서.
창녀: 우리는 사람들이랑 잠깐 지나치는 거지만 눈치는 빠르거든.
재섭: …….
창녀: 내가 한번 맞춰볼까?
재섭: 자기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창녀: 사랑?
재섭: 그런 게 있을까?
씬 95. 개봉동, 버스 정류장 (늦은 밤)
버스가 선다.
재섭, 피곤한지 인상을 잔뜩 쓰면서 버스에서 내린다.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얼굴까지 문지르며 걷는다.
멈춰 선다. 벤치를 돌아본다.
벤치에 소희가 앉아서 재섭을 보고 있다.
소희, 일어나서 천천히 재섭에게 온다.
소희: 배고파요……. 많이 늦네요……. 많이 기다렸어요.
재섭, 아무 말도 못하고 소희를 보고만 있다
씬 96. 편의점
소희, 컵라면을 먹는다.
재섭은 소희를 바로 보지 못하고, 편의점 유리에 반사된 소희의 모습을 본다.
씬 97. 편의점 앞
소희: 왜 연락 안했어요? 학원도 그만 두고.
재섭: 기다렸어.
침묵…….
소희: 한번이라도 연락할 수 있었잖아요.
재섭: 난 계속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어……. 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면 이해할 수 있겠니?
소희: 선생님은 너무 미지근해.
침묵…….
재섭: 안 믿어도 할 수 없지만……. 나, 많이 기다렸어. 너가 기다렸다면, 너가 누군가 붙잡아 주기를 바란 거라면 내가 먼저 연락하는 게 옳았을 지도 모르겠다……. 근데 나는 너가 충분히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나는 그때까지 기다린 거고……. 글쎄, 어떤 게 맞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냥 그래……. 내가 그런 사람이야……. 뭐든지……. 괴로워하면서도…….
재섭, 자리에 멈춘다.
시종일관 침착한 목소리.
소희도 따라 멈춘다.
소희: 많이 힘들었어요……. 선생님이라도 나한테 연락을 해서 아무 말이라도 해 주면 좋을 텐데……. 아무리 기다려도 선생님은 나 없이도 허전한 거 없이 잘 살고 있구나…….
재섭, 갑자기 돌아선다. 감당할 수 없는 기침을 한다.
소희가 깜짝 놀라서 재섭의 얼굴을 살피려 하지만 재섭은 소희가 접근해 오지 못하도록 자꾸 고개를 돌린다.
소희: 왜 그래요?
재섭, 옆에 있던 우체통을 잡고 주저앉는다. 감당할 수 없이 서럽게 운다.
놀란 소희…….
재섭, 눈물 가득 머금은 채 소희를 돌아보며
재섭: 왜 연락 안했냐고……. 많이 기다렸다고……. 내가……. 얼마나 너를…….
재섭,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돌아서 운다.
소희, 눈물을 글썽이며 재섭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다.
씬 98. 버스 정류장 (낮)
어딘지 알 수 없는 버스 정류장.
화창한 날씨.
재섭과 소희, 버스를 기다린다. 소희는 캔 커피를 들고 있다
씬 99. 버스 안 (낮)
사람이 별로 없다.
재섭과 소희가 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다. 소희는 재섭의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다. 소희의 손에서 캔 커피가 떨어져 바닥을 구른다. 사람들의 시선. 굴러가는 캔 커피를 바라보는 재섭, 사람들과 소희를 번갈아 보다가 소희를 깨우지 않으려고 구르는 캔 커피를 그대로 둔다.
끝
와니와 준하 1
씬 1. PROLOGUE. 애니메이션
맑은 하늘엔 군데군데 흰 구름이 떠 있고 꽃잎들이 바람에 날린다.
아담한 주택가 동네의 전경이 보이고 그 중 어떤 골목길을 보면 키 작은 사내아이 하나가 노오란 운동모자에 큼직한 책가방을 등에 지고 담장이 이어진 골목을 따라 학교로 걷고 있다. 노란 모자의 꼬마아이는 지나는 다른 애들에 비해 유난히 가방이 무거워 보인다.
이때 뒤에서 개구쟁이처럼 생긴 애 둘이서 자전거를 타고 오더니, 한 아이가 꼬마 아이의 노란 모자를 잽싸게 낚아챈다. 모자를 뺏긴 꼬마아이가 뒤뚱대며 자전거의 뒤를 쫓는다. 모자를 쥐고 있던 녀석이 옆에서 달리는 다른 친구에게 모자를 넘긴다.
모자를 건네받은 아이가 자전거에서 몸을 일으켜 자세를 높이고 달리더니, 담장 밖으로 넘어온 나뭇가지에 모자를 걸어놓고 도망간다.
나뭇가지 아래로 힘겹게 달려와 서는 꼬마. 까치발을 하고 팔을 뻗어보지만 손이 닿질 않는다. 힘껏 뛰어 보다가 등에 맨 가방이 무거워 뒤로 벌러덩 넘어지고 만다. 지나가는 또래의 애들이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웃는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꼬마.
골목에는 이제 학교로 가는 애들도 보이지 않는다. 텅 빈 골목에 혼자 서 있는 꼬마, 나뭇가지에는 노란 모자가 바람에 살랑거린다. 하늘에서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한다. 황급히 어떤 집 대문의 처마 밑으로 몸을 피하는 꼬마. 나뭇가지에 매달린 모자가 빗물에 젖어든다. 어느새 길바닥을 흥건히 적시는 빗줄기.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꼬마…….
DISSOLVE
바닥에 고인 빗물을 누군가의 발이 찰랑거리며 달린다.
화면 커지면, 한 여자가 입고 있는 재킷을 머리 위로 치켜세우고 뛰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꽃잎들은 빗물에 하늘거리다 뛰어가는 여자의 발밑으로 넘실거린다.
여자는 멀리 뒤쪽으로 기차가 지나가는 것이 보이는 거리를 뛰어 아담한 건물로 들어간다. 일렁이던 물결의 파장이 방금 여자가 들어간 건물의 창으로 바뀐다.
카메라, 서서히 창으로 다가가면 창가에는 작은 화분들에 심어진 포도 넝쿨이 가느다란 실을 따라 오르고 있다. 빗물이 일렁이는 창안에는 방금 들어온 여자가 수건으로 머리를 가볍게 닦아내고 있다. 창밖을 바라보는 여자의 모습이 흐르는 빗물과 함께 일렁이더니 서서히 실사로 변해간다. 약간 보이쉬한 느낌의 단정하고 단단해 보이는 26살의 여자. 이름은 와니. 일렁이는 유리창으로 메인 타이틀 ‘Cool'이 살며시 떴다 사라진다.
F. O
F. I
씬 2. EXT. 와니의 집 외경. 낮
70년대식 2층 단독 주택. 베란다가 있고 담쟁이 넝쿨이 벽을 덮고 있고 제법 울창한 유실수들이 있고 청포도가 영글어 가고 꽃들이 활짝 핀, 하지만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정원. 바쁘게 오가는 새들의 날개 짓에 물기를 머금은 나뭇가지가 빗물을 한껏 털어 낸다. 비가 그친 직후의 싱그러움이 느껴진다.
씬 3. INT. 와니집 거실/ 현관. 낮
꽤 오래돼 보이는 집 거실이 보인다. 넓은 공간에 커다란 TV와 그 맞은편에는 앉은뱅이책상과 천을 두른 소파가 있고 벽면을 둘러서 오래되고 운치 있어 보이는 진열장들이 보이는 공간. 화초와 장식용 소품들이 빽빽하지 않게 놓여 있다. 그 중에는 제법 커다랗고 멋있는 프라모델 범선도 있고 몽당연필들이 반쯤 채워진 둥그런 유리 항아리병도 있다. 그 공간으로 한 남자의 목소리가 저음으로 울린다.
준하: 이제 시간이 됐어……. 잊은 건 아니겠지? 내게 진 빚을(고개를 가로젓고는) ……. 이상하지, 난 뭔가 잊은 것 같은데, 넌 어때?…….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 반듯한 느낌을 주는 환한 인상의 남자, 준하다.(27살) 그러다가 씨익 웃더니 고개를 숙여 앞에 놓인 노트북 자판을 독수리 타법으로 두들긴다.
JUMP CUT
좀 더운 모양이다. 한 손으로 티셔츠의 옷깃을 잡고 손바람을 펄럭여 보는 준하.
CUT TO
현관 앞 베란다에 의자를 놓고 세숫대야의 찬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무릎 위에 노트북을 놓은 채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준하.
준하: 키보드 자판을 치고 나서 분위기 있게 한 번 읽어본다) 돌아보지 마. 눈물을 말리는 건 앞에서 오는 바람이라구……. (몸을 부르르 떨며 익살스럽게) 으~~. 닭살이다.
씬 4. INSERT. EXT. 하늘. 노을
구름이 좌우로 빠르게 비껴가는 하늘에선 선홍색 노을이 빗살처럼 쏟아지고 있다.
씬 5. EXT. 버스 정류소. 해 걸음
해 걸음의 버스 정류소. 정류소 바로 뒤에는 밝은 빛을 내뿜는 체인점이 있다.(패스트푸드점, 편의점 같은) 그리고 액세서리 가게, 옷가게, 꽃가게 등 화려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도시의 동네 분위기가 풍기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버스가 들어오고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 와니도 내린다.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여고생들, 시장에 다녀오는지 양손 가득 비닐봉지를 든 아줌마들 등.
씬 6. INT. 동네 슈퍼마켓 안. 황혼녘
구운 김과 시금치, 무, 자반고등어, 휴지를 고른 와니, 과일 진열대의 딸기를 본다.
와니: 딸기 얼마예요?
아줌마: 우리 아저씨가 지금 막 가져온 거예요.
와니: 얼만데요?
아줌마: 아유~ 아주 싱싱하고 맜있어.
와니, 잠시 아줌마를 쳐다보더니 다른 것만 계산대에 올려놓는다.
아줌마: 아유~ 요즘은 하우스 딸기가 훨씬 달고 맜있다니까아.
와니: 디스 한 갑 주세요.
아줌마: 딸기 안 해?
와니: (아줌마가 한 갑을 꺼내는 걸 보다가) ……. 아니 한 보루 주세요.
아줌마: (담배를 내주고 딸기 하나를 집어 와니 입 쪽으로 가져간다) 한번 먹어봐. 아주 달어.
와니: (손으로 살짝 막으며) 됐어요.
아줌마: 그냥 먹어보라니까.
와니: (거북한 미소를 지으며) 안 살건데요, 뭐.
와니, 무안해진 아줌마에게 한번 웃어 보이고는 담배를 들고 가게를 나온다.
(슈퍼의 한쪽 구석에서 와니를 몰래 보고 있었던 듯 고개를 스윽 내미는 준하)
씬 7. EXT. 와니의 집 앞 골목. 해걸음
와니가 집을 향해 골목을 걸어오고 있다. 한 손에는 비닐봉지를 들고 있다.
무표정한 얼굴로 발밑을 보며 성큼성큼 걸어오던 와니가 고개를 들면, 와니의 집이 보이고 반대편에서 한 손은 호주머니에 찌른 채 한 손을 들어 보이며 걸어오는 준하가 보인다. 그런데, 일순간 와니의 눈에 준하의 영상이 이중으로 겹쳐지며 아릿한 이미지로 변한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모습인 것 같기도 한데 어쨌든 준하가 한 손을 스윽 들어 올리는 자세가 아주 인상적인 느낌의 영상으로 변했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멍해지는 와니……. 다시, 원래의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온 준하가 다가오며
준하: 어!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어떻게 오셨어요?
와니: ……. 왜~에…….?
준하: 아~아. 6년차 애니메이터 동화부 작감 이와니씨 아니세요? 이상한데 이렇게 일찍? 회사에서 짤렸어요?
와니: (장난스럽게) 그래. 짤렸다.
준하: (과장되고 장난스럽게) 히엑~!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와니가 들고 있는 봉지를 가리키며) 그렇다면 이것은 퇴직금으로 왕창 산 식량?
와니: 어~유, 어서 받기나 해.
준하: (봉지를 받아서 들여다보며) 근데 뭘 산거야? 일용할 양식은 별로 안 보이는데?
와니: 걱정 마. 여기 있는 동안은 절대 굶기지 않을 테니까. 오늘은 자반 한 토막.
씬 8. EXT. 와니집 현관. 황혼녘
현관문을 지나다 보면 맑은 종소리가 들리고, 올려다보면 지붕 밑에 쇠로 만든 풍경이 매달려 있다.
와니: 웬 거야?
준하: 너, 몰래 들어오는 거 잡을려구.
와니, 풍경을 올려다보며 씨익 웃는다. 살짝 부는 바람에 맑게 울리고 있는 풍경소리.
씬 9. INT. 와니집 거실. 황혼녘
와니가 거실로 올라서며 가방에서 종이봉투를 꺼내더니 진열대로 다가가 둥그런 유리병에 봉투를 기울인다. 후드득 몽당연필들이 잔뜩 쏟아져 항아리를 거의 채운다.
그런 와니의 모습을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준하.
씬 10. INT 와니의 집 주방. 저녁
싱크대에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와니와 준하. 준하,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준하: 아 참.
와니: ?
준하: 짓물렀겠다.
와니: 뭐가?
CUT TO
준하가 싱크대에 서서 딸기를 씻고 있고 와니는 식탁에 앉아 턱을 괴고 행복한 얼굴로 준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와니: 아직은 비싼 거 같던데.
준하: 아까 종 갖고 오는데 딸기 리어카가 있더라. 그래서 딸기 구경하면서 그냥 종을 흔들었거든?
와니: 두부 장사처럼?
준하: 그렇지. (과장된 손짓으로 허풍을 떨며) 근데 사람들이 막 몰려와서는 그 자리에서 바닥이 난거 아냐?
와니: 어…….
준하: 그래서 그냥 받아온 거야. 고맙다고.
와니: 재수 좋네.
그 말을 그대로 믿는 와니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 준하.
JUMP CUT
딸기를 식탁 위에 놓고 와니의 곁에 앉는 준하.
와니: (식탁 의자 위에 있는 시나리오 뭉치를 보며) 다 썼어?
준하: (자기 거면서 아닌 척 능청스럽게) 어……. 아니, 친구거야……. 네가 한번 볼래? 난 아는 얘기라서 재미있는지 모르겠더라.
와니: (시나리오 뭉치를 집으며) 음…….
준하: (은근하게) 내거 보고 싶어?
와니: 응.
준하: 근데 왜 보자고 안 해?
와니: (의외의 질문이란 표정으로) 그냥……. 보여주면 볼려구.
준하: 안 보여주면 안 보구? 관심이 없는 거 아니야?
와니: (당황하는 표정으로) 아니야…….
준하: 너란 애는 하여튼…….
JUMP CUT
왼손으로 딸기를 먹는 와니. 오른손은 아픈지 손목을 돌리기도 하고 손을 쥐었다 폈다 하고 있다. 준하, 와니의 손이 왜 아픈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준하: 정말 직업병이다. 이리 줘봐.
와니의 손을 잡아 주물러 준다. 그리고는 와니의 두 손을 자신의 옷 속으로 집어넣으려 한다.
와니: (손을 당기며) 차~
준하: 가만있어 봐아. 손이 차면 더 아픈 거야.
준하, 와니 손을 더 세게 끌어 당겨 자신의 무릎 위에 와니를 앉히고 자신의 겨드랑이에 와니의 손을 넣고 자신의 손은 교차해서 옷 위로 와니 손위에 포개 놓는다. 와니의 손이 닿자 준하는 ‘으~’ 하며 몸을 떨고 와니 역시 정말 차갑겠다. 하는 표정으로 같이 몸을 떠는 시늉을 한다.
준하: (얼굴을 장난스레 찌푸리며 마치 추운 듯이 과장되게 말을 떨며) 시원~하~다~
와니, 그런 준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다가 손을 준하의 등 뒤로 움직여 준하를 포옹하며 적극적으로 키스한다. 준하도 ‘어~ 어~’ 하다가 자연스럽게 키스를 하며 둘은 사랑에 빠져든다……. 밖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야옹거리며 들려온다.
버스정류장 버스정류장
와니와 준하 2
씬 11. INSERT. EXT. 동네 전경. 밤
와니집 담벼락에서는 고양이가 생선을 맛있게 먹고 있고 아늑한 느낌의 동네 위로 달이 휘영청 떠 있다.
씬 12. INT. 와니의 방. 아침
아침 햇살이 비쳐 들어오는 와니의 방. 매트리스 위에 요를 깔고 자는 와니와 준하.
땡강땡강 두부장수 소리에 이어 어디선가 ‘꼬끼오~’ 닭 울음소리가 들린다.
눈을 뜨는 와니. 그 옆에 깊이 잠들어 있는 준하. 준하의 팔이 와니의 목과 가슴께에 얹혀 있다. 다리 하나도 와니의 다리에 얹혀 있다. 살며시 준하의 팔을 치우고 다리도 치우며 일어나는 와니, 하지만 옷자락까지 준하의 몸에 깔려 있다. 빼내기에는 좀 많이 깔려있는 와니의 잠옷. 준하를 잠시 바라보던 와니는 살며시 단추를 끄르고 잠옷을 벗고는 몸에 딱 붙는 흰 런닝 속옷차림으로 살며시 일어난다. 준하가 깨지 않도록.
씬 13. INT. 와니의 집 주방/ 거실. 아침
뚝배기 그릇에 쌀을 씻어서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와니는 가슴께를 손으로 문지른다. 밤새 놓여 있던 준하 팔의 느낌이 남아있어서다. 약간 저릿하다는 느낌이 있는지 손으로 문지르고, 다리도 톡톡 가볍게 쳐보는 와니
JUMP CUT
식탁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하품을 이기지 못하는 와니.
‘따르릉, 따르릉’ 방안에서 새까만 구식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CUT TO
방에서 전화기를 통째로 들고 나오며 통화를 하는 와니. 거실 소파에 앉으며 전화기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와니: 아침부터 웬일이야?
엄마(전화 목소리): 지금 아니면 언제 너랑 통화할 수 있기나 하니?
와니: 무슨 일 있어?
엄마(전화 목소리): 너는 모녀지간에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전화 해?
CUT TO
엄마와 와니가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눈다.
엄마는 이제 갓 오십이 되었을까 싶게 젊어 보이고 다소곳하고 단정하다.
와니: 몸은 괜찮아?
엄마: 공기가 너무 좋아. 과수원 일도 재밌구.
와니: (혼잣말처럼 작은 소리로) ……. 공기는 여기도 괜찮은 데 뭐.
엄마: (거실을 둘러보고 있다가 잘 못 들은 듯) 응? 뭐라구?
와니: 아, 아냐. 잘 갔다구.
준하가 부시시한 몰골에 런닝 차림으로 방에서 나와 화장실로 간다.
엄마는 준하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지만 와니는 흘깃 준하 쪽을 한 번 본다.
엄마: 참, 영민이 전화 받았니?
와니: 응?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는 얼굴) 영민이?
엄마: 가을에 들어온대더라.
와니: 가을?
엄마: 그래. 나한테만 한 모양이구나?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건네며) 너라도 전화 한 통 해 줘라.
와니: (쪽지를 건네받는 와니)……. 잘 지낸대?
엄마: 걔가 언제 그런 말이나 하는 애니? 유학도 혼자 결정하고, 가서도 지금까지 딱 전화 두통이 전부다. 세상에 어쩜 그렇게 하는 짓이 지 아버지하고 똑같니? 도무지 속을 모르겠다…….
CUT TO
부엌에서는 밥이 끓기 시작하는지 수증기를 내뿜으며 요란하게 달구어지고 있다.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준하가 나와 가스레인지의 불을 줄인다.
거실의 와니 쪽을 보면, 와니는 다시 원래대로 수화기를 들고 앉아있고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메모지에 적힌 전화번호를 보며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와니.
엄마(전화 속 목소리): 듣고 있는 거니?
와니: 어? 으응…….
준하, 어머니가 앉았던 자리로 와 소파에 등을 기대앉는다.
엄마(전화 속 목소리): 길 막히는데 추석 때 오지 말고 미리 아빠 제사 지내버리자. 이번 주말 어떠니?
와니: 아니야. 바빠. 내가 다음에 전화하고 내려갈게. 늦었어, 끊어.
다급하게 전화를 끊고 메모지를 감추는 와니. 그런 와니를 보고,
준하: 누가 들으면 지겹게 따라 다니는 남잔 줄 알겠다. 왜 그렇게 무뚝뚝하냐?
와니: ……. 그렇게 들렸어? (왜 그렇지? 사실은 되게 반가운데.)
준하: 빨리 인사 드려야지 걸려오는 전화 안 받는 것도 고역이네.
와니: (큰소리로) 안 돼.
갑작스런 와니의 큰소리에 눈이 동그래지는 준하. 와니도 스스로 당황스러운 듯.
와니: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 엄만 마음이 너무 약하셔서 네가 와 있는 거 알면……. (많이 놀라실거야.) 어차피 나한테 오는 전화 별루 없고 또……. 앗! 밥 타겠다…….
허둥거리며 부엌으로 달려가는 와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준하.
씬 14. INT. 와니의 집 현관/ 대문. 아침
가방을 들고 나서는 와니. 어정쩡하게 서서 배웅하는 준하.
와니: 오늘 집에 있을 거지?
준하: 아니, 서울에 좀 갔다 와야 돼.
와니: 늦게 들어와?
준하: 글쎄, 가봐야 알겠는데?
와니: (약간 힘이 빠진 듯)……. 그래?
준하: 넌?
와니: 다음분량이 아직 안 넘어와서……. 늦을 일은 없어.
준하: 그래, 맞아. 너 원화부로 옮기는 문제는 어쩌기로 했어?
와니: (조금 자신 없는 어조로) ……. 생각해 봐야지.
준하: 에이 너무 고민하지 말라니까. 하고 싶었던 일은 해 봐야지. 나중에 후회 안하게……. (와니의 엉덩이를 툭툭 치며) 우리 와니는 원화도 잘할 거야. (그러다 와니의 바지를 보고) 어! 이거 내 바지 아냐?
와니: (많이 남는 허리를 돌려보더니) 그런가 보네.
준하: 그런가 보네? 뻔뻔스럽긴 왜 자꾸 내 옷 입어?
와니: (^^) 이거 편하더라구. 국 끓여놨으니까 먹어. 간다.
도망치듯 재빨리 대문을 나서는 와니의 뒤에 대고
준하: (큰소리로) 조심해서 다녀와~!
준하의 큰소리에 당황하는 와니, 뒤돌아서서 빨리 들어가라고 손짓한다.
순간, 한 손을 들고 인사하는 준하의 모습이 또다시 아릿한 이미지의 영상으로 보인다.
멍해 있는 와니에게 정상적인 모습의 준하가 다가오며
준하: 왜 그래?
와니: 응……. 왠지 예전에도 이랬던 것 같아서. 네가 그렇게 손을 들고…….
준하: 아! 그거 누구한테나 있는 거야. 기시감 같은 거잖아. ……. 머리가 아프고 그러니?
와니: 조금.
준하: 잠을 잘 못 자서 그런가?
와니: 앗! 늦었다. 나, 갈게.
급하게 대문을 나서는 와니.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 해 보는 준하.
씬 15. INT. 버스 안 . 아침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와니. 버스 안의 라디오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흔히 듣는 라디오 방송이나 트로트 음악과 달리 지금 버스 안에서는 클래식 음악이나 트럼펫 솔로 연주 같은 분위기 있는 음악이 나오고 있다. 한산한 시 외곽의 풍경들이 차창 밖으로 스치고 작렬하는 태양 빛이 창가에 앉은 와니에게 풍성하게 쏟아져 들어온다. 점점 상승하며 꽉 차 오르는 음악 소리……. 서서히 호흡이 가빠오는 와니.
씬 16. INSERT. EXT. 외곽 도로. 아침
승용차 한 대가 버스를 추월하려는 듯 와니의 옆을 나란히 달린다. (와니의 시점으로는 승용차 안의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승용차를 내려다보던 무표정한 와니의 표정이 한 순간 움찔한다. 그리고는 답답한지 머리 위의 에어컨을 뒤로 젖혀버리고 창문을 조금 여는 와니. 창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와니의 머리칼을 날린다. 가쁜 호흡을 내쉬며 뭔가 솟아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려 노력하는 와니. 손바닥을 창 틈에 대고 들어오는 바람을 느낀다…….
씬 17. EXT. 국도. 낮 (과거)
창밖으로 쑤욱 나오는 와니의 손. 지나는 차가 거의 없는 국도를 달리는 승용차.
그러니까 그 손은 버스에서 나온 게 아니라 승용차에서 나온 것이다. (과거 와니의 손)
앞 씬과 같은 음악이 계속 흐르고 있다. 강렬한 햇빛은 가로수 사이로 칼날처럼 쏟아진다. 온통 출렁이는 물결 같은 가로수 그림자. 손을 내민 과거의 와니가 승용차 뒤 좌석 창 너머로 비로소 보인다. (23살의 와니)
씬 18. EXT. 승용차 안. 낮 (과거)
승용차 안에는 아빠가 운전을 하고 그 옆에는 영민이 앉고 뒤쪽에는 와니가 앉았다.
손을 내민 채 손가락을 벌려 바람을 느끼고 있는 와니.
앞좌석의 아빠와 영민은 약간 진지한 분위기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아빠: 영민아! 나도 유학을 반대하진 않지만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잖니? 여기서 졸업이라도 하고…….
영민: 어차피 전공을 바꿔야 하니까 졸업 하는 게 의미가 없을 거 같아요.
아빠: 군대는 나중에 가고?
영민: ……. 네…….
아빠: ……. 무슨 일 있니?
영민: …….
아빠: ……. 영민아!
영민: 아뇨. 아무 일도 없어요. ……. 아무 일도…….
썰렁해진 차 안. 무표정하게 창밖만 내다보는 와니. 영민과 아빠도 말없이 앞만 쳐다본다. 그런데 승용차가 지나간 도로위로 뭔가 액체가 새어나온 자국이 길게 남아 있다.
와니의 손이 차안으로 들어가고 유리창이 찌이익 올라오면서 닫힌다. 국도 변에는 아이들이 굴렁쇠를 굴리며 달려오고 있다. 와니의 시점으로 아이들이 승용차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슬로우모션) 상승부로 치닫는 음악. 멀리 승용차가 끼이~익 굉음을 내며 커브 길을 비정상적으로 가로질러 화면에서 빠져나간다. 아이들, 승용차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돌아보고 서 있다. 아이들이 실루엣으로 보인다…….
씬 19. EXT. 애니메이션 회사 앞길. 아침
성큼성큼 걸어오는 와니. 마치 화가 난 사람 같다. 와니의 뒤쪽 멀리로 기차가 지나가고 있다.
씬 20. INT. 애니메이션 회사 동화부실. 아침
넓은 작업실. 각기 자신의 취향에 따라 아기자기하고 개성 있게 꾸며진 애니메이션 작업대들. 벽에는 영화나 애니메이션 포스터가 있고, 창문턱에는 앞에서 소개된 넝쿨이 있는 미니 화분들이 있다. 일을 하고 있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춤 연습을 하는 팀도 있고, 웃으며 얘기를 나누기도 하는 애니메이터들. 자연스럽고 자유스런 분위기다. 그 중엔 긴 머리를 뒤로 묶은 남자 성재도 있고 조그맣고 귀여운 얼굴의 수경이와 색깔 있는 안경테 와 물들인 헤어스타일이 인상적인 수미도 있고 수화로 대화를 나누는 예쁜 얼굴의 영숙도 있다. 와니가 출근하자 인사들을 한다. 와니도 고개 숙여 인사를 하지만 약간 무뚝뚝하다. 자신의 자리로 가면 제대로 보여지는 와니의 책상.
많은 책들과(사진집, 화집, 애니메이션 작품집, 시집, 소설등) 비디오테이프, 책상에 잔뜩 붙인 이미지 사진들, 작업 중인 그림 뭉치들, 음악 CD……. 옷도 몇 벌 걸려있다. 복잡하면서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와니, 자리에 앉자마자 이어폰을 끼고 소형 오디오를 튼다. 라디오 아침 방송 중 하나가 들린다. 그런데, 라디오에 이어폰 잭이 빠져 있어 소리가 아주 크게 울린다. 애니메이터들이 스윽 돌아보는데 와니는 미처 의식을 못하는 것 같다. 문을 열고 정우(30살의 핸섬한 남자)가 들어오며 애니메이터들과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와니 옆에 의자를 끌어다 앉는다.
정우: 야, 너 뭐하는 거야?
와니: 응? 아~! (그제서야 황급히 잭을 라디오에 꼽는다)
정우: (약간 허둥대는 와니를 보다가) 아주 넋을 놓고 다니는구나. (누가 들을까봐 넌지시 작은 목소리로) 싸웠냐? 하긴……. 같이 산다는 거 장난 아니지. 매일 같은 얼굴보고 부대끼고 한다는 게….
와니: (말을 끊으며) 현수씨 잘 있지? 인제 살림 난지……. 6개월쯤 됐나?
정우: 은근슬쩍 넘어가긴……. 말도 마라. 경찰 애인 모시고 사는 거 장난 아니다. 아무래도 현수 어머님이 눈치도 채신 거 같구.
와니: ?…….
정우: (주위의 눈치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어디서 들은 말씀이 있나봐. 한번은 갑자기 오셔서 날 착 째려보시더니 그냥 휙 가시는 거야. 소름이 싹 돋더라. 현수한테 그러시더래. (나이들만큼 든 놈이 남자끼리 자취하면 남들한테 오해 산다고, 빨리 선 보라구. 그게 싫으면) 돈 마련해 줄 테니까 결혼할 때까지 혼자 살라구.
와니: (장래 시어머닌데) 어떡해서든 좀 잘 보이지 그랬어?
정우: 장난 아냐. (장난스럽게 고개를 푹 꺾으며) 심각하다.
와니: (^^) ……. 왜 왔어?
정우: 어, 참! 저번에 말한 거 내가 한 번 해보께. C. G 팀에서 도와준다니까…….
와니: 정말?
정우: 캐릭터는 너두 그려봐.
와니: 응. 고마워.
정우: 고맙다는 정도 갖구는 안 돼.
와니: 그럼?
정우: 이번 마감 끝나면 원화부로 옮길 것.
와니: ……. 생각해 본다고 했었잖아.
정우: 또~? 생각? (목소리가 커진다) 참, 너 이상한 애다. 남들은 서로 빨리 하고 싶어 안달인데 도대체 넌 뭐가 문제냐? 그리고, 왜 니 생각만 해? 니가 그러고 있으면 후배들은 뭐가 돼냐구? 니가 빨리빨리 발전해 줘야 따라가는 맛도 있고…….
와니: (목소리가 커지는 정우를 말리려하며) 알았어. 좀 조용히 얘기 해.
정우의 큰 목소리를 듣고 수경이가 수미에게 물어본다.
수경: 우리 작가님은 왜 원화부 안 간대요? 나 같으면 얼른 가겠다. 움직임을 창조하는 거……. 애니메이터라면 다 꿈 아닌가?
수미: (어이없다는 듯) 야! 2주밖에 안된 게 뭐? 원화부?……. 아니지. (대단한 어른인 척 타이르는 투로) 수경아~. 니가 아직 맛을 몰라서 그러는데 물론 우리 동화는 원화가 정해준 기준에 따르기야 하지. 하지만, 그리는 동화맨에 따라 느낌은 판이하다구. 걷기 하나만 봐도 빠르게 느리게 팔자걸음, 오리걸음 등등 다 우리가 잘 쪼개야 비로소 제대로 살아 움직인다니까?
수경: 에이~ 그래두 애니의 꽃은 원화죠.
수미: 얘가~?
수경: 근데 와니 언니가 원화부 가면 누가 작감을 해요?
수미: (벌컥) 그걸 왜 니가 걱정하니? 이 방엔 사람도 없냐?
수경이 고개를 돌려 방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쭈욱 훑어본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돌리면 수미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민망해진 수경, 조용히 자신의 작업대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수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다시, 와니 쪽을 보면
정우: (책상 앞에 와니가 붙여 놓은 캐릭터 얼굴을 유심히 보며) ……. 으~음. 역시……. 괜찮은데? 잘 나오겠어.
정우와 와니가 책상 앞에 압정으로 붙여놓은 귀여운 캐릭터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와니와 준하 3
씬 21. INT. 영화사 사장실/ 사무실. 낮
사장실의 응접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는 준하. 고개를 돌려 사장의 말을 기다린다.
여전히 해 맑은 얼굴. 맞은편에 사장, 준하의 옆에는 프로듀서가 앉아 있다.
사장: (고개를 끄덕이며) 음~. (준하에게) 필요 이상으로 무겁다는 우려가 있으니까 신경 좀 써 주시고……. 근데 이거 장르는 뭐라고 해야 되나? 사랑, 우정, 배신의 느와르. 그냥 그러기엔 판타지 성격도 꽤 강하잖아?
프로듀서: 하드보일드 판타지. 어떠세요? 이 영화는 로맨스에 판타지의 맛이 잘 섞이는 게 꼭 필요한 거 같은데. 준하씨 생각은 어때?
준하: (당당하고 자신 있는 어투로) 전 그냥 ‘사람의 진심은 참 알기 어렵다.’ 뭐, 그런 걸 재밌게 써 볼려고 했는데요?
약간 썰렁해지는 사장과 프로듀서.
CUT TO
벽에는 영화 포스터들이 즐비하게 걸려있고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 파티션 사이로 오가는 사람들, 수화기를 들고 열심히 통화하는 사람들. 사장실에서 나와 프로듀서와 둘이서 얘기하는 준하.
프로듀서: 계약은 다음 고 나오면 하고 크게 바뀔 게 있으면 전화로 자주 하자고. 참, 연락은 어디로 하지? 집에 잘 없던데.
준하: (쪽지에 전화번호를 적어주며) 이 번호로 메시지 남겨 주세요. 자주 전화 드릴게요.
프로듀서: 참, 요즘 세상에……. 핸드폰 하나 해라. 해줄까?
준하: (웃으며) 해주시면 고맙게 받겠지만……. 그냥 없으면 안 될까요?
프로듀서: 뭐……. 안 될거야……. 그리고, 감독 확정되면 그때는 콘도 하나 잡아서 하자고. 의사소통도 그렇고 아무래도 집중력이 필요하니까.
준하: 신 감독님하고 또…….
프로듀서: 민병수라고 해외 유학판데 단편 만든 것만 보고는 아직 판단이 안서네.
고개를 끄덕이는 준하.
준하: 근데, 전 그냥 집에서 쓰는 게 제일 좋거든요?
프로듀서: (피식 웃으며) 김준하씨. 은근히 까다롭네. 순한 척 하면서 할 얘긴 다 하는구만.
씬 22. INT. 준하의 옥탑방. 낮
준하가 창문턱에 걸터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다.
준하의 작은 옥탑방은 책들이 빼곡하고 제법 그럴듯한 오디오와 수많은 L. P.가 특징적이다. 벽에는 한 장소에서 시간을 달리해서 찍은 풍경사진이며, 시장사람들, 운동하는 사람들(무술)의 사진들이 빼곡하게 붙여져 있다.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할 즈음에 붙여 놓았던 포스트잇들도 가득하다. 턴테이블 위에선 L. P.가 돌아가고 오디오에선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밖으로는 서울의 빌딩들이 보이고 도시의 소음들이 들려온다.
불쑥 일어나서 자신의 응답 전화기를 쑥 빼더니 둘둘 말아 가방에 넣는다.
CUT TO
책꽂이에서 소설책들을 골라 가방에 챙겨 넣는 준하. 어느 책에선가 사진 한 장이 그의 발밑으로 떨어진다. 와니가 회사 작업대에 앉아 일하고 있는 모습인데 몰래 찍은 듯 하다. 준하,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책상 앞 벽면에 사진을 붙인다.
씬 23. INT. 대형 할인매장. 낮
카트를 밀며 장을 보는 준하. 카트에는 이미 뭔가 담겨져 있다. (스파게티 재료)
주류코너에 서서 맥주 서 너 병을 싣고 가더니 ‘이게 아니지’ 하는 얼굴로 돌아서서 도로 내려놓고는 와인을 한 병 꺼낸다.
JUMP CUT
준하의 옆에서 네 살쯤 된 어떤 꼬마가 엄마에게 카트에 태워 달라고 떼를 쓰고 있다. 엄마의 카트에는 라면이나 휴지 등이 박스 째 빼곡히 들어차 있어서 자리가 없다.
준하가 자신의 카트에 담겨진 물건들을 주섬주섬 밀치더니 아이를 달랑 들어 태워서 속력을 내어 빠르게 밀어준다. 그리고는 자신도 뛰어가다가 팔걸이를 짚고 카트를 타고 있다. 활짝 웃는 아이와 준하.
씬 24. INT. 와니의 집 거실 / 부엌. 황혼녘.
거실 노트북에서는 계속 음악이 흐르고 주방에서 준하가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면서 저녁식탁을 준비한다. 움직이는 동안 준하는 계속 기분 좋은 듯이 고개로 리듬을 맞춰 흔들고 있다. 가스레인지 위 냄비에는 물이 끓고 있다. 소금을 한 줌 집어넣고 스파게티 몇 가락도 넣는다. 잠시 후 면을 젓가락으로 집어 올려 천장으로 던진다.
천장에 철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스파게티.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 때 거실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 뚜루루루. 뚜루루루루……. 준하, 슬쩍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지만 이내 무시한다. 전화벨은 계속 울린다. 방안의 구식 벨소리도 함께. 따르르릉. 따르르르릉……. 거실의 자동 응답기가 돌아간다.
‘지금은 부재중이오니 용건을 남겨주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삐익.
전화 속 목소리: %^&**%#$#@$^&*@&^%% (알아들을 수 없는 여자아이의 목소리)
준하, 다가와서 수화기를 든다.
준하: (장난스럽게) 아하! 니가 자꾸 전화한다는 문제의 아가씨구나?
여자아이 목소리: &^$#$#@$%^&*(**&&^%$#
준하: (혼잣말로) 음……. 아직 말도 못하는 녀석이 전화를.
여자아이 목소리: 엄마!
준하: 앗! 너, 엄마는 할 줄 아는구나? 이름이 뭐야아?
전화 속 목소리: #$%^&. (멀리서 전화기 쪽으로 다가오는 애기엄마 목소리) 소원아! 소원이 어디 전화하는거야아? 아유, 어쩜 그렇게 전화기를 좋아해? (딸깍 끊기는 전화)
준하: (머쓱해서 혼자 씨익 웃는다) ……. 소원이. 예쁜 이름이네.
수화기를 내려놓자 다시 울리는 전화벨.
준하: (수화기를 들며 상냥하게) 여보세요?
전화 속 목소리: …….
준하: 여보세요? 소원이니?
영민(전화 속 목소리): 저, 거기 이와니씨댁 아닌가요?
준하: (순간, 당황하며) 아, 죄송합니다. 맞는데요? 아직 퇴근 전입니다.
영민(전화 속 목소리): 누구……. 시죠?
준하: 네? (난처한 듯) 어-, 저는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인데요?
영민(전화 속 목소리): …….
준하: 말씀 남겨주시면 전해드리겠습니다.
영민(전화 속 목소리): ……. 동생입니다.
준하: 아! 유럽에 있는?…….
영민(전화 속 목소리): 다시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으려 한다)
준하: 잠깐만.
영민(전화 속 목소리): …….
준하: 난, 김준하라고 합니다.
영민(전화 속 목소리): ……. 네.
저쪽에서 먼저 전화가 ‘뚜우’ 끊기고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어깨를 으쓱 해 보는 준하.
씬 25. EXT. 와니의 집 앞. 어스름한 저녁 (현재->과거->현재)
집으로 걸어오는 와니. 대문을 밀어 보지만 잠겨있다. 열쇠를 찾아보지만 없다. 가방을 뒤져봐도……. 없다. 난감해지는 와니. 어떻게 해야 되나 싶은 얼굴로 멀뚱히 서 있다.
그 때 어디선가 아름다운 여자목소리로 잔잔한 동요가 들려온다. 약간 언덕진 골목 끝에서 마치 땅에서 솟아오르듯 서서히 모습이 드러나는 건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어떤 여자이다. 조용히 동요를 읊조리는 여자의 모습은 아무래도 약간 기이하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하다. 멍하니 서서 바라보고 있는 와니. 여자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날 때쯤 여자의 뒤로 꼬마의 모습이 조금씩 솟아오른다. 일곱 살쯤으로 보이는 귀여운 여자아이. 왼쪽 뺨에 긁힌 상처가 있는 전체적으로 장난꾸러기 같은 인상이다. 엄마의 뒤를 따르고 있었고 엄마는 아이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고 있었던가 보다. 여자와 아이는 점점 와니 쪽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아빠~'를 부르며 달려온다. 와니, 뒤를 돌아본다. 와니의 뒤쪽에서 어떤 신사가 걸어오다 아이를 발견하고는 팔을 활짝 벌린다.
그리고 신사는 여자아이를 향해 '와니야' 라고 부르며 번쩍 안아 올린다. (와니의 시점으로 보이는 과거의 장면인데 과거의 사람들과 현재의 와니가 한 공간에 있다) 현재의 와니는 얼어붙은 듯 서서 그 광경을 본다. 신사의 뒤에는 여섯 살의 사내아이가 호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다. 낯선 사내아이를 발견한 어린 와니는 엄마의 뒤 쪽 편으로 숨듯이 뛰어가서 빼 꼼이 내다본다.
엄마: (사내아이에게 다가가 무릎을 굽혀 얼굴을 바라보며 복잡한 심정인 듯한 눈빛으로) 너……. 기차 타고 왔니?
고개를 끄덕이는 어린 영민.
……. 이제부턴 내가 네 엄마다. 알겠니?
어린 영민 이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다. 엄마의 말을 듣고 놀란 눈이 되는 어린 와니.
어린 와니와 영민의 눈이 마주 친다. 어느새 엄마, 아빠는 사라진 공간에서 서로 쳐다보고 있는 어린 와니와 영민. 그 모습을 보고 있는 현재의 와니. 아무 표정도 없다.
하늘에서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고 서 있는 와니. 그녀의 머리위로 우산이 씌어진다. 와니,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보면 대문을 열고 나온 준하가 우산을 들고 서 있다. 골목에는 와니와 준하뿐 아무도 없다.
준하: (놀라며) 뭐해?
와니: 어! 없는 줄 알고. 벌써 온 거야?
준하: 벨이라도 눌러보지?
와니: 젖어버린 머리카락을 스윽 만지며) 비……. 오네…….
준하: 꼭 한 템포씩 느리다니까. 비 오네? 그럴 줄 알고 마중 가는 길이잖아. 제발 우산 좀 챙겨라.
와니, ‘헤’하는 표정으로 웃고는 집으로 들어간다. 준하, 집으로 들어가면서 고개를 돌려 골목을 보면 아무도 없다. 텅 빈 골목. 고개를 갸웃거려보는 준하.
씬 26. INT. 와니의 집 주방. 저녁
거실, 준하의 노트북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부엌 식탁에 마주앉아 식사를 하는 와니와 준하. 와니의 어깨에는 하얀 수건이 걸쳐져있고 머리가 아직 젖은 채다. 준하가 와인을 따라준다. 와니, 스파게티를 한 입 먹어본다.
준하: 괜찮아?
와니: 음. 맛있어. 언제 이런 걸 다 배웠어?
준하: 뭘, 기본이지.
와니: 그 동안은 왜 안 한 거야?
준하: 아무 때나 하는 게 아니라구.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와니: !?…….
준하: 일 년전 오늘, 너희 회사 취재 가서 처음 너 봤잖아.
와니: (^^) 기억하고 있었어?
CUT TO
준하가 선물을 했는지 포장을 뜯어보고 있는 와니. 내용물은 여성용 모자이다.
준하: 너, 우산 잘 잊어먹으니까 아예 흐린 날은 쓰고 다녀라. 머리라도 덜 젖게.
와니: (모자를 써 보며) 좀 웃기지 않을까?
준하: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 아~니.
와니: (민망하지만 기분 좋은 듯이 모자를 벗었다 다시 한 번 써 보고한다) …….
준하: (흐뭇한 얼굴로 쳐다보다가) ……. 아 참! 동생이 전화했었어. 이름이 영민이라 그랬나?
눈이 동그래지는 와니. 썼던 모자를 벗어 옆 의자에 내려놓고 고개를 푹 숙여 눈을 피한다. 준하는 마음대로 전화를 받은 자기 때문에 와니가 화난 것이라고 오해한다.
(와니의 눈치를 보고 변명하듯) 아니, 내가 응답 전화기를 가져 왔거든. 애기가 장난전화 한 거 받다가…….
와니: 아마 돌아온다고 연락 한 걸거야.
준하: 돌아온대? 언제?
와니: 가을에.
준하: 그래? 야~ 아. 오랜만에 보는 거지? 3년 됐다 그랬나? ……. 아, 근데 동생 오기 전에 나, 가야 되는 거 아닌가?
와니: (약간 돌출적으로 보일 만큼 목소리가 커지며) 아냐……. 여기 안 있을지도 몰라. 서울에 있고 싶어 할 거야. 친구들도 모두 거기 있고 또…….
와니, 말을 하다말고 고개를 숙이고 스파게티를 포크로 둘둘 만다. 와니의 반응에 약간 당황한 준하도 괜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접시에 두고 있다. 둘 사이에 침묵의 시간이 잠시 흐른다……. 순간, 부엌 천장에 붙어 있던 스파게티 국수 한 가락이 가스레인지 위에 비스듬히 걸쳐있던 냄비 뚜껑에 ‘척’ 떨어지며 뚜껑이 미끄러지면서 ‘챙그르르르’ 요란한 소리를 낸다. 동시에 괘종시계의 종소리도 댕. 울리기 시작한다. 깜짝 놀라 서로를 마주보는 두 사람.
카메라, 거실로 이동하면 거실의 한 쪽에서는 과거의 영민(18살)이 의자를 가져다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괘종시계의 태엽을 감고 있다.
씬 27. INT. 와니의 방. 밤 (과거)
거실에서 괘종시계가 댕……. 댕……. 울리는 소리 이어진다. 19살의 와니는 양발을 개고 의자에 앉아 만화책의 그림을 베껴보고 있다가 쿵쿵거리며 나무 계단을 올라오는 영민(18살)의 발소리와 괘종시계 소리를 듣는다. 소리는 조금씩 고조되고 가만히 듣고 있던 와니는 조용히 미소 짓는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영민. 깜짝 놀라며 만화책을 가리는 와니. 와니의 방안엔 심야 라디오 방송이 나직이 흘러나오고 있다.(1993년도쯤의 방송 내용이…….)
와니: 야아! 엄만줄 알았잖아! (짐짓 화난 척) 그리고, 꼭 그렇게 쿵쿵거리며 다녀야겠어?
영민: 소리 들었으면, 뭘 놀래?
와니: 너 또, 마루시계 1시간 앞당겼지?
영민: (^^) 알았었어?
와니: 왜 그러는 건데?
영민: 왠지 하루에 한 시간씩 더 빨리 사는 것 같지 않아? ……. 빨리 스무 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되고 그랬으면 좋겠어. 근데 태엽이 풀려서 좀만 지나면 정상으로 돌아 가버려.
와니: (이해가 안 간다는 투로) 너, 빨리 어른 되고 싶니?
영민: 당연하지. 지금이 좋아?
와니: (^^;) 그, 글쎄…….
잠시 동안 어색한 침묵.
영민: 흠! 흠! 이상하네…….
와니: 뭐가?
영민: 왜 내방이랑 냄새가 다르지. 향수 뿌렸어?
와니: 아~니. 무슨 냄새 나는데?
영민, 성큼 와니에게 다가와 자연스레 어깨에 손을 얹는다. 영민의 손이 닿자 와니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움찔한다. 영민도 약간 어색함을 느끼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고개를 숙여 와니의 목덜미 근처에 코를 대고 한껏 숨을 들이쉰다. 영민의 얼굴이 다가오자 어깨를 움츠리며 살구를 깨물었을 때 같은 표정을 짓는 와니.
와니: 무슨 냄새 나?
영민: (고개를 갸웃하며 어색함을 감추고) 그냥……. 여자냄샌가?
와니: 여자냄새? (도망치듯 방을 나가려던 영민을 보고) 어디 가?
영민: 응? 내 방.
와니: (마치 그제서야 깨달았다는 듯 고개까지 끄덕이며) 아…….
영민, 방을 나가고 눈을 말똥말똥 뜨고 가만히 있던 와니, 왼손을 들어 영민의 손이 닿았던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만져보고 고개를 숙여 자신의 품에서 냄새를 맡아본다.(‘아무 냄새도 안 나네 뭘’ 하는 표정이 되더니 ‘후아~’)
씬 28. INSERT. EXT. 와니집 외경. 밤
현관 위 지붕 밑에 매달린 풍경이 나직이 흔들리며 소리를 낸다……. 댕그랑……. 댕그랑…….
씬 29. EXT. 와니의 학교 앞. 밤 (과거)
깜깜한 밤. 교문을 나오는 여학생들. 그 틈에 친구들과 함께 나오는 와니가 보인다.
교문 앞에는 엄마들이 혹은 아빠들이 마중을 나와 있고 자가용으로 부모님과 함께 가기 위해 와니네 일행,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간다. 언덕을 걸어 내려오는데 학교 앞 환하게 불 켜진 문방구 앞에 와니를 기다리는 영민이 자전거를 잡고 서있다. 영민은 와니를 찾을 생각은 안하고 밀려드는 여학생들의 눈을 피해 뒤돌아 서서 가게 유리창 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서 있다. 친구들 영민을 보고
친구들: 쟤 뭐냐? 여고 앞에서.
와니, 친구들의 시선을 따라 문방구 앞을 바라보면 영민이 있다. 와니 얼굴에 슬그머니 미소가 퍼진다. 영민, 돌아보면서 와니를 발견하고 한 손을 스윽 들어 인사를 한다.
와니가 아릿한 이미지로 보던 준하의 포즈와 동일하다.
와니: (친구들에게) 나 먼저 갈게.
친구들: 야! 어디 가?
단숨에 영민에게로 뛰어 가는 와니. 영민도 와니를 보고 웃는다.
친구들: 우와아~! 이와니!
와니: (돌아보며) 내일 봐.
와니가 자전거의 뒷자리에 올라타자 영민이 출발한다.
CUT TO
자전거가 언덕을 따라 내려간다.
와니의 친구들 서넛이 맞은편 계단으로 우르르 뛰어 내려간다.(우스꽝스런 걸음으로)
CUT TO
가로등이 서있는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자전거. 계단을 뛰어 내려온 친구들이 와니와 영민이 탄 자전거가 지나가자 소리를 질러댄다. 와니가 뒤돌아보며 손까지 흔들어 댄다.
영민은 말없이 웃기만 하며 페달을 밟는다. 와니는 영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슬며시 영민의 등에 얼굴을 기대어 보는 와니. 깨끗하고 단정한 와니의 얼굴은 영민의 등에 기댄 채 멍하게 생각에 잠긴다. 아니, 아무 생각도 안하려는 듯하다.
씬 30. EXT. 와니 집 앞 골목. 밤 (과거)
부감으로 위에서 내려다보면, 와니집 앞 골목을 천천히 다가오는 영민과 와니가 탄 자전거. 집에 다 왔지만 두 사람은 멈추지 않고 대문 앞을 지나쳐 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그렇게 집 앞을 왔다 갔다 하고 있다. 마치 둘만의 시간을 연장하려는 듯이. 두 사람과 자전거는 가로등 불빛 때문에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