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 동인 문학 토론 자료11
2023. 7. 12.
토론 주제: 주체 소멸에 대한 인식 2
4. 삶 자체에 대한 우울한 반항
상인들이 혀로 무덤을 파는 도시,/ 텅 빈 빌딩들,/ 대체 어떤 휴일이 이 도시를 이토록 망쳐놓았는가// 그런 날들은 지상과 교회의 굳건한 결혼식이 성행한다/ 그러니 상인의 아들들아,/ 곳곳에 너희의 학교를 퍼뜨려라/ 공장은 얼마나 풍요한 공장을 갖고 있는 것이냐//
- 송찬호의 「밀봉된 시간」
<밀봉된 시간>은 이 시대의 삶에 대한 제유이다. 시간이 제대로 흐를 수 없음을 암시한다.
이 도시를 지배하는 것은 상업의 논리다. 빌딩들이 텅 빈 것은 인간이라는 주체가 거기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도시에 있는 것은 <풍요한 유방>을 지닌 <공장>뿐이다. 주체가 소멸한 다음 우리의 환경은 화폐경제의 논리와 그런 논리로 지탱되는 <공장>으로 변하다. 이런 객체들은 새로운 형식으로 객체성을 초월한다. 왜냐하면 주체와의 관계가 박탈되었을 뿐 아니라 객체가 주체의 기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송찬호의 시는 주체의 소멸과 객체의 소멸을 변증법적으로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인식의 객관성을 확보한다. 인식의 객관성이란 모든 이데올로기를 부정하거나, 그런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려는 태도가 생산한다. 이데올로기를 앞세우는 경우 사물 인식은 주관적 관념의 세계로 전락한다. 모든 객관적 인식은 사물이나 현상을 관계 속에서 파악할 때 가능하며, 그것은 특수한 객체들을 일반개념 속에 포섭시키는 이른바 동일성사고에 대한 부정이 낳는다. 이는 객체를 객체로 인식하려는 노력이다. 이 시대에 오면 인식 주체가 소멸하고, 따라서 객체 역시 소멸한다. 이런 소멸과정은 객관적으로 형상화될 필요가 있다.
주체와 객체가 소멸하고 나면 삶 자체에 대한 우울한 반항만 남는다?
비가 오면/ 속살 허옇게 다 드러내놓고 비바람 몰아치면/ 쑥대머리 풀어헤친 수양버들 길가,/ 속치마 바람으로, 자고 가요, 제발 자고 가요, 지나가는 남자만 보면 술 취해 미친 듯/ 손 흔드는 남희 엄마 기어이 부녀보호소로 끌려가고/ 벙어리 여인 신음 하나 행적 없이 사라져 가고//
- 김신용 「수건 섹스폰」
이 시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주체와 객체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다. 객관적이라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도식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 따라서 관념성을 극복한다는 점이다. 이데올로기나 관념에 사로잡히기 쉬운 시인이 관념적 이데올로기에 기대지 않고 노래할 수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는 병든 주체, 소멸해가는 주체와, 그런 주체를 감싸고 있는 병든 객체, 소멸해가는 객체를 객관적으로 노래한다. 주체와 객체가 병든 데에는 교환가치가 이유가 된다. 그로 인하여 주체의 소멸도 느끼지만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럴 경우 객체에 대한 반항이나 비판보다 우울이 나타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