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슬을 바라며, 발한
따뜻한 햇살이 발한마을을 비추고 있다. 남쪽을 향해 마을이 있는 탓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을이 ‘남쪽을 바라보는 언덕’이라 해서 ‘바란이’라 불렀다. 따뜻한 햇살이 비추는 바란이는 살기 좋았다.
이곳 바란이는 조선조 숙종 때 청주 한(韓) 씨들이 들어와서 살며 동족마을을 이루었다. 한 씨들의 집성촌이었다. 그들은 ‘바란이’마을을 한자로 바꾸어 썼는데, 필 발(發)자에 이름 한(韓)자를 써서 발한(發韓)이라 표기했다. 앞으로 한 씨들이 무궁하게 펼쳐 나갈 것이라는 의미였다. 곧, ‘바란이’의 한글소리를 빌려서 한자로 ‘발한’이로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청주 한 씨 외에도 다른 성 씨들이 차츰 들어와 살았다. 그래서 지명에 성씨를 붙이면 좋지 않다고 했다. 당시는 왕조체제였기에 더더욱 성씨를 땅이름에 쓰는 것은 무리였다. 마을사람들은 ‘바란이’의 한자 명칭을 이름 한(韓)자에서 날개 한(翰)자로 바꾸었다. 날개 한자는 한묵(翰墨)이라 하여 글을 잘 짓는 문한(文翰)과 붓과 먹을 뜻하는 필묵(筆墨)으로 쓰인다. 글 잘 짓는 학자가 나서 벼슬을 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어쩌면 발한(發翰)과 묵호(墨湖)가 같은 바람이 담겨 있다.
그 때문일까. 발한은 묵호읍의 중심지가 되었다. 많은 관공서가 들어서고 사람들이 모여 살아 14리까지 있었다. 그러다 1980년 동해시로 승격될 때 1리·4리·7~8리는 발한동으로, 2리·6리·9~10리는 향로동으로, 5리·13~14리는 동호동으로, 11~12리는 사문동으로 되었다.(이학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