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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무르만스크, 북위 69도, 러시아 서북쪽 끝에 위치한 도시, 무르만스크, 혹독한 추위와 매서운 바람으로 서 있기 조차 힘든 땅입니다.
손현주/배우: 이 추운 무르만스크에도 우리의 아픈 역사가 있었다며?
허일후/아나운서: 100년전, 이곳에 500명이 넘는 선조들이 계셨다고 하니, 얼마나 고국에 가고 싶으셨겠어요?
손현주: 정말 진심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으셨을 것 같아~
그동안 잊고 살았던, 하지만 이제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소중한 이야기, 1부 100년전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인천국제공항/2019.02.13, 지난 2월 13일, 긴 여정의 첫번째 단추를 채우는 <집으로> 사절단이 모였습니다. (특별한 임무를 맡은 <집으로> 사절단, 손현주 배우, 홍수현 배우, 허일후 아나운서),
우리의 임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세계 각지에 살고 있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만나고 한국으로 초대하는 초청장을 전달하는 건데요. 이런 막중한 임무를 수행할 또 한 명의 단원, 최태성 역사강사,
손현주: 저는 나이 때문에 억지로 추대된 단장 손현주입니다.
최태성/역사강사: 단장님 이시구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손현주: 그리고 참 제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로고를 준비하였습니다 (집으로 사절단의 상장, 특별히 배지를 준비한 손현주 단장), 작은 배지 안에 우리 대한민국의 100년의 역사가 담겨 있는 것만 갔더군요. 마음이 무겁죠?
홍수현: 사명감이 드는 것 같아요.
사명감, 희망을 안고 출발하는 집으로 사절단, 프랑스 파리-프랑스의 수도, 세계 최고의 문화 중심지이자 관광도시,
우리의 첫 목적지는 다름 아닌 프랑스 파리,
손현주: 에펠탑 안에 들어가면 거기가 에펠탑인지 남산 타워인지 모른다고,
최태성: 맞아요. 에펠탑은 밖에서 봐야 에펠탑이죠.
허일후: 에펠탑도 우리가 보고 개선문도 우리가 봤는데 약간 궁금하긴 해요. 프랑스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잖아요?
홍수현: 미식의 도시, 패션의 메카? 그런데 백년 전에 독립 운동가들이 활동을 하셨다는 거잖아요.
최태성: 그렇죠, 1919년 프랑스 파리, 적어도 약소국가의 민족대표자들에게는 파리가 희망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손현주: 지금으로부터 백년전 프랑스 파리는 평화를 상징하는 도시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후 처리협상을 위한 파리강화회의 개최지로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었죠. (파리강화회의-1919년에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해 27개국의 협상국이 파리에서 개최한 회의), 특히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협상원칙으로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하면서 한국은 큰 기대를 품게 됩니다.
최태성: 파리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얘기를 듣고 각지역에서 대표들이 와요. 미국에서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올려고 했고 국내에서는 유림계 유교쪽을 대표로 하는 김창숙이 대표해서 올려고 했고 연해주 쪽에서는 윤해를 중심으로 올려고 했고 중국에서는 신한청년단에서 김규식을 보낼려고했는데 이때만 해도 일본이 잘 나가는 싯점이었어요. 줄을 잘 섰어요.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 라인에 줄을 선 상황이었습니다.(승전국-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일본이 당연히 한국 대표들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원천봉쇄를 해요. 그러니까 일본 여권을 갖고 있지않은 한국인들이 여기 들어오는 것을 막아달라 라는 것을 1919년 1월 3일에 공문을 통해 다 조치를 취해요. 이런 상황에 신한청년단 대표로 김규식(김규식 1881~1950: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이 도착해요,
손현주: 1919년 2월 1일 김규식 선생은 큰 포부를 품고 중국 상하이를 출발 40여일간의 고된 여정 끝에 프랑스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뜻밖에 소식을 듣게 되지요. 그것은 바로 3.1운동 소식이었습니다 (3.1운동-1919년 3월 1일을 기해 일어난 거족적 독립만세운동으로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한국의 독립을 선언함),
최태성; 내가 지금 여기 와 가지고 외교적 행위를 해야 되는데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으니 얼마나 독립을 주장하기가 좋았겠어요.
홍수현: 그러면 완전 가슴 벅차서 빨리 얘길할려고 달려 왔겠어요.
최태성: 그럼요. 내가 뭔가 한번 해봐야겠구나 라는 희망과 설렘으로 파리에 입성한 김규식이 아니었을까.
조국독립의 희망을 품고 걸었을 그 발자취를 한세기가 지난 지금 따라가 봅니다.
손현주: 야, 대단하다. 정말 규모가 어마어마해.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22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베르사유 궁전, 17세기에 지어진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로 매년 방문객만 7백만명에 이르는 세계적인 관광지중 하나 인데요.
홍수현: 가까이서 보니까 더 화려한데요.
허일후: 아니, 그런데 베르사유 궁전이 대단히 유명한 곳이긴 한데 여기는 우리가 왜 온 거예요?
최태성: 신한청년단 대표 김규식이 희망과 설레임을 가지고 프랑스 파리에 파리강화회의에 참석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그랬잖아요. 그 파리강화회의 열린 장소가 바로 여기예요.
허일후: 이곳에 참석하기 위해 독립운동가들이 오신거군요.
최태성: 그렇죠, 그렇죠.
손현주: 1919년 6월 28일, 이 거울의 방에서 독일과 연합군과의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됩니다 (베르사유 조약-1919년 6월 28일 파리강화평화회의의 결과로 31개 연합국과 독일이 맺은 강화조약), 유럽의 정치 외교 중심지인 파리에서 1월 18일부터 약 5개월 동안 이루어진 세계평화를 위한 회담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김규식 선생이 파리에서 공식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신임장을 발송하기도 했죠 (4.13. 상해 내외에 독립정부 성립을 선언하고 김규식의 외무총장 겸 전권대사 신임장을 발송함), 하지만 이날까지 한국의 독립에 대한 문제는 단 한마디도 거론되지 못한 채 회담은 막을 내립니다.
최태성: 베르사유에서 지금 열리고 있는 파리강화회의는 철저하게 승전국, 승전국의 입장에서 패전국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 공간이었습니다. 승전국에 어느나라가 들어가 있느냐 하면 일본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사실은 그 이전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통해 가지고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거란 기대감이 있었는데 그게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아요. 오로지 패전국 식민지만 적용되는 것이고,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일본이 승전국이었으므로 우리는 해당이 안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일본이 여기에 무려 70여명의 엄청난 공식인원을 파견하면서 자신들의 위용을 과시하면서 여기서 자기나라의 식민지 나라에서 온 김규식 일행들에 대해서 철저하게 막은 거예요.
손현주: 진짜 속상하다.
최태성: 회담장에 들어올 수 없도록 원천봉쇄를 한 거죠.
허일후: 문에도 못들어오게~ 말 그대로 문전박대 아닙니까
손현주: 대한 독립의 꿈의 희망을 갖고 있었을텐데 저 문을 못들어갔다는 얘기 아니예요? 지금 보면은 현재도 속상하고 안타깝고 착잡합니다. 마음이~ (그 뼈아픈 역사를 듣고 있자니 안타까워 말문이 막힌 <집으로> 사절단), 견고한 황금철문 앞에서 힘없는 약소민족이 외쳤을 독립, 아무도 듣지 못한 커다란 외침이 마음을 울립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두번째 장소로 향하는 <집으로> 사절단,
허일후: 이 친구(?)만 오면 이제 유럽팀이 완전체로~
과연, 늦게 합류한 집으로 사절단 단원은? 집으로 사절단 다니엘 린데만/방송인 도착,
일동: 박수 박수
허일후: 드디어 다니엘이 합류하므로 집으로 사절단 단원이 다 채워졌습니다.
집으로 사절단 우리 독립운동사에 또 다른 발자취를 찾아 파리에서 200km 떨어진 쉬프로 길을 나섭니다.
홍수현: 우리 베르사유 궁전 갔다 왔는데 같이 갔으면 너무 좋았을 텐데~
다니엘 린데만/방송인: 그러니까 너무 가고 싶었어요. 한번도 못가봐서 프랑스 파리에서 독립운동도 이뤄졌다는 거 저는 진짜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허일후: 한국 사람도 모르고 저도 잘 몰랐습니다.
손현주: 굉장히 아픈 역사가 있어요~
허일후: 그런데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 선생께서 못들어가시고 좌절이 된 거잖아요.
최태성: 이 후에 그러면 어땠을까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후에 예측을 해 보자구요 독립운동가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추측1: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힘을 합쳐서 독립을 위해 계속 노력했을 것이다. 좌절은 했지만 계속 하지 않았을까요?
추측2: 독립을 위한 새로운 방법을 찾으려고 했을 것이다.
최태성: 다들 긍정적이시네요.
손현주: 그래도 포기는 않했을 것 같애요.
최태성: 맞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이쯤되면 그냥 다 때려치우고 안되는구나 하는 생각이들 수도 있었을텐데, 파리 오신 분들은 대단하신 분들이예요. 절대 좌절하지 않고요 그래 그럼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지 하고 다시 시작해요. 다시 희망을 갖고 시작하는데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면 첫째가 뭐냐하면 선전전이예요. 우리가 지금까지 베르사유 체제 속에 들어가지 못했던 일을 포함해서 우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가 식민지를 벗어나기 위해서 굉장히 갈망하고 있음을 알릴 필요가 있겠다.
손현주: 파리강화회의에서 독립을 청원할 목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치했던 기관, 파리위원부, (파리위원부-프랑스 파리에 설치한 외교부서), 한국의 독립이 좌절된 상황에서도 우리의 실상을 알리려는 노력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던 한 사람~
최태성: 작년(2018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미스터 션사인이라는 드라마, 션사인의 주인공이 누구였죠?
허일후: 유진 초이!
최태성: 이병헌이라고 한 줄 알았는데~
허일후: 러브 해 보겠소?
최태성: 맞습니다. 이병헌씨가 역활했던 유진 초이가, 그 유진 초이가 사실은 작가님께서 이 사람을 그림으로 그렸다라고 하더라구요.
허일후: 실제 모델이 있다구요.
최태성: 네,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황기환 선생님이세요.
미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 참전경력과 뛰어난 영어실력을 가진 황기환 선생, (황기환 (미상~1923)-프랑스 미국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파리위원부의 서기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너무나도 귀한 인재였던 그는 파리위원부의 서기장으로 임명됩니다. 그리고 1919년 10월 이후 파리위원부의 실질적인 위원장 역할을 하며 선전활동을 전담하죠. 강제침략으로 일본은 들으라 “우리는 독립을 원한다” 이역만리 타국 땅 프랑스에서 조국의 해방을 끊임없이 외쳤습니다.
최태성: 기록에 의하면 당시 유럽 언론 180여개 곳에 계속해서 독립을 기고했고요. 우리가 독립을 요구한다는 것을 계속 해서 기고한 거예요. 무려 5백여개가 넘는 기사를 게재가 됐습니다.
손현주: 되게 눈물나네~
최태성: 이건 사실 밝혀진 것만 이렇지 안밝혀진 것도 포함하면 더 많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거예요. 그러니까 그 기록들을 보면은, 야, 이분들 정말 열심히 어떻게든 우리라는 존재를 알리려고 노력을 했구나~ 또 있어요. 아직 안끝났어요 하는 일이 많으세요. 파리위원부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한국인 구출작전! 한국인 구출작전은 정말 우리가 잊지 말아야될 그런 내용인데 진짜 드라마틱해요!
손현주: 한국인 구출작전과 쉬프는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요? (프랑스 쉬프(Sippes)-프랑스 중부 마른 지방에 있는 소도시),
홍수현: 여기가 바로 쉬프 역인데~ 아니 뭐예요? 뭐 아무것도 없네.
허일후: 뭐 아무 것도 없네.
홍수현: 삭막하다.
손현주: 여기가 쉬프 역인데인데 이렇게 황량한 거야
사람들의 발걸름이 뜸해진 쉬프역, 녹슨 기찻길은 시간까지 멈춰버린듯 한데요.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이곳에서 역사의 시계를 되돌려 봅니다.
손현주: 기분 묘하네~
홍수현: 역이라는 표시가 없고~
황량하고 쓸쓸한 쉬프 기차역 앞,
허일후: 그냥 버스만 좀 다니는 거 같애. 이쪽 근처로 버스만 다니구 기차는 운행을 하지 않는 것 같애요.
손현주: 쉬프가 생각보다는 별 다른게 없어요. 아까 황기환 선생님의 한국인 구출작전과 쉬프 지역이 어떤 연관이 있나요?
최태성: (대한민국 임시정부 앞으로) 전보 한 통이 날라옵니다. 전보 한통의 발신은 리첸코, 그리고 발신지역은 무르만스크,
허일후: 무르만스크는 또 어디예요?
최태성: 러시아 최북서단에 위치한 항구도시인데, 전보를 분석하면서 황기환이 읽어보니까 이런 내용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우리 임시정부의 상황을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자유 대한민국 만세, 한국독립만세! 만세! 만세!--------무르만스크 리첸코-------이런 전보 한통이 전부예요.
허일후: 아무 정보가 없는데 한국독립만세만 결국 남네요!
최태성: 황기환이 그걸 보고나서 이들을 지금 구출해야되겠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뭔가 SOS를 친거잖아요. 그래서 알아보니까 무르만스크 지역에 한인노동자들이 철도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해고된 상태 속에서 500여명이 계셨던 거에요.
손현주: 100년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 서북쪽 땅끝 마을까지 이주했던 한인들, 이곳 무르만스크 철도공사현장에서 추위와 싸우며 노역으로 연명해 가던 어느날 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무르만스크를 점령한 영국은 이곳 한인들을 일본의 압제 속으로 돌려보내려고 합니다. 그 소식을 접한 황기환 선생은 동포를 구할 절박한 심정으로 영국과 수차례 협상을 시도하는데요. 그리고 마침내 황기환 선생은 30여명의 한인을 쉬프로 구출해 내는데 성공합니다.
홍수현: 아니, 선생님! 당시의 한인들은 쉬프에서 어떻게 생활을 했어요?
최태성: 그러니까 이 쉬프지역이 어떤 지역이냐 하면 여기가 전략적 요충지였어요. 그러다 보니까 여기 독일어 프랑스어 주인이 일본인으로도 바뀌어요. 엄청난 싸움이 있었다는 이야기잖아요. 전쟁이 끝나고 나서 이곳이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다니엘: 파괴된 상태였겠지요.
최태성: 완전 파괴되었을 거 아녜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쉬프는 독일과의 전투가 치열했던 장소였습니다. 크나큰 상흔이 휩쓸고 지나간 곳, 시신과 유골을 수습하고 묘지를 조성하는 힘든 일은 이곳으로 이주한 한인들의 몫이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허허벌판에 임시 거처를 두고 별을 보며 일어나 어둠이 내릴 때까지 계속되었던 고된 노동, 하지만 그 고단한 삶 속에서도 프랑스 최초의 한인회인 재법한국민회를 조직해 한국의 독립에 힘을 더 하는데요. “선생님, 저희들이 모은 돈입니다.” “구국을 위해 써 주십시오”
최태성: 무엇보다도 이 지역에 와서 정말 고된 노동 속에서 살았던 그 사람들의 1920년 3월 1일은 어땠을까. 이건 정말 이 지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지역에 있는 한인들한테 1920년 3월 1일은 전세계 한인들 정말로 정말로 중요한 날이거든요. 그때 이 지역에서도 3.1운동 기념식을 갖었던 것이죠.
홍수현: (쉬프 지역) 이곳에서요!
최태성: 이곳에서 노래도 부르고 축가도 부르고 연설도 하고 정말 뜨거운 심정으로 3.1운동을 맞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마지막에 불렀던 그 애국가! 눈물이 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손현주: 이런 이야기가 사실은 교과서에 나와있지도 않잖아요.
최태성: 그렇죠.
손현주: 그런 것들이 안타까워요. 이런 이야기들도 우리가 알아야 되는데~
허일후: 그래서! 그래서! MBC 에서 지금 준비하고 있는 사업이 있습니다. 그것도 제가 설명을 해드려야 할 것 같은데 <독립운동 사적지>에 저희가 지금 표지석을 세우는 사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겁니다. 이게 상당히 무거워요. 대한민국 독립운동 사적지 Historic site of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신한희망재단 Shinhan Dream Foundation 이렇게 해서 여기 보시면은 홍수현씨 이거 보여요? QR 코드를 찍어 보시면 이렇게 연결이 됩니다.
동영상 등장-1920.3.1. 3-1운동 기념식에 모인 사람들을 찍은 사진입니다. People had gathered to commemorate the anniversary of the March 1 Movement. The photo was taken in Shippes, a small towm located 200 km away from Paris. 독립운동 사적지에 대한 설명영상이 사진 속 장소는 파리에서 200 km 정도 떨어진 쉬프 마을입니다. 우리 조상님들과 관련한 영상까지도 링크를 해서 바로 이곳을 찾으실 역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곳인가를, 저희가 이런 식으로 사적지 표지석을 세우는 겁니다.
다니엘: 베를린 같은 경우에는 사실 도시 전체가 어떻게 보면 다 표지석 이에요. 돌아다니면, 예를 들면 2차 세계대전 때 수용소로 끌려갔던 유대인들 묘가 따로 없으니까 그 사람들이 살던 곳에 땅에다가 표지석이 돼 있어요. 사람이 곳곳에 다 있으니까 마음을 먹지 않아도 걷다가 오, 이게 뭐지? 하고 알아보기 시작하고 이런 것도 있었구나 바로 일상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거죠.
손현주: 쉬프에서 차로 30분 거리, 우리 선조들의 또 다른 발자취를 따라 왔습니다. 마른 지방의 모든 역사적 문서를 보관하고 있는 이곳에서 최근 반가운 흔적을 찾았습니다. (프랑스 마른문서보관소). 이곳에서 중요한 문서를 발견한 연구자를 만나기 위해 온 집으로 사절단, 이장규 역사학자,
최태성: 이장규 선생님 이시라구요 이제부터 우리에게 정말 뚜껑이 열리지 않았던 보물 상자를 많이 열어주실 거거든요.
일동: 박수로 화답~
손현주: 어떤 문서를 발견한 거예요?
이장규: 여기서 한인들이 100년전에 첫발을 디딘 한인들의 명단을 제가 찾았는데요.
허일후: 그전까지는 설이었던 거죠. 100년전에 이쪽에 한국인들이 계셨다 카더라를 명확하게 선생님께서 찾아내신 거죠?
이장규: 그렇죠,
허일후: 박수 한번 드려야 합니다.
이장규: 감사합니다.
허일후: 어디에 있는 건가요?
100년전 프랑스에 살았던 한인들의 명단, 이 기록이 남아있을 거라고는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이때 프랑스 마른문서보관소 여직원이 문서를 가지고 나타났다.
홍수현: 선생님 저희가 한번 열어볼 수 있을까요?
다니엘: 글씨를 한번 보세요. 글씨가 아주 예술이네~
이장규: 이 자료는 1921년도에 여기 쉬프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과 프랑스인의 인구조사 한 자료입니다. 여기에는 한인들이 11명 이렇게 조사가 돼 있습니다. Lee Do Soon, Park an Nam, Lee Do Soon,
손현주: 문서에 차례로 적힌 것은 분명한 한국식 이름이었습니다. 이 머나먼 땅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곳에서 한국인의 이름을 보니 가슴이 뭉쿨하더군요.
허일후: 이것은 또 어떤 자료인가요?
이장규: 이건 100년전 쉬프에 한인들이 도착했을 때 녹색체류증을 발급받은 대장이에요. 여기에 보면 “고려인” 이라고 되어 있죠? 박병서~
최태성: 최씨도 있잖아요
이장규: 그런데~ 후~ 후온? 한국 이름이 아니지 않나요? 이름이 중국식으로 되어 있는데~ 그때 당시에는 한인들이 만주나 연해주 지방을 떠돌다가 시베리아를 거쳐서 무르만스크까지 도착을 했는데요. 그들이 그 곳에 정착하고 일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 식으로 이름을 바꿔서 쓰지 않으면 안됐어요. 이름을 스스로 바꾼 경우도 있고~
손현주: 일본의 탄압을 피해 조국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 때론 이주한 지역에 정착해 살기 위해서 때론 일본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당시 우리 민족은 자신의 이름을 감춰야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국적 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던 그들~,
최태성: 저는 진짜 이 ‘코리아’ 라고 하는 이 글자를 보면서 진짜 눈물이 날 거 같아요. 왜냐하면 지금 1919년 이 싯점은 ‘코리아’는 지구상에서 소멸된 나라예요. 그런데 100년전 프랑스에서 ‘코리아’ 라는 이름을 이렇게 지켜냈다는 게~
다니엘: 인정한다는 뜻이잖아요.
최태성: 저는 이게 너무 소름 돋을 정도로~ 우리가 늘 공부를 하면서 일제 강점기 식민지라는 것만 우리가 배우고 있는데 그렇지 않고 바로 이곳 프랑스에서 코리아 라는 이름이 살아있다. 여전히 살아있다 라는 것을 느끼니까 아~ 참, 이건 감동이네요.
낯선 땅에 우뚝 서서 대한민국이 있음을 알렸던 사람들, 그들의 소중한 흔적을 더 찾고 싶었습니다.
손현주: 저기 명단에 있는 분들 중에 흔적이 남아있는 분이 계십니까?
이장규: 지금 거의 없는데요. 작년(2018년) 부터 조금씩 밝혀지고 있는 분이 한 분 계세요. 홍재하라는 분인데요. 홍재하 ‘인 시옹 푸안’ 이라고 쓰여있죠?
허일후: 이분이 홍재하 선생님이세요? (홍재하(1898~1960)-프랑스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아직까지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 홍재하,
다니엘: 홍재하 라는 사람은 처음 들어보는데요. 어떤 사람인가요?
최태성: 기억하시죠. 100년전 쉬프지역에 왔던 한국인들이 만든 한인단체 이름 재법한국민회, 재법한국민회의 지도자라고 보시면 돼요. 제가 얘기한 재법한국민회가 무엇을 했는지 꼭 말씀을 드렸잖아요. (재법한국민회-1919년 결성된 프랑스 최초의 한인단체), 그 일들을 이분이 선두에 서서 해나갔던 분이세요 베르사유 궁전에서 우리가 기억했던 인물이 김규식 선생이었죠. 김규식 선생님 뒤를 이었던 분이 황기환, 황기환 선생님도 1920년도에 미국으로 돌아가세요. 황기환 선생님이 떠나시고 비어있는 공백을 실질적으로 매꾸신 분이 세번째 인물 홍재하 선생님이 되세요.
허일후: 이게 정말 우리 유럽에서 독립운동의 역사를 이끈 지도자들의 이름이네요. (김규식->황기환->홍재하),
이장규: 여러분들이 찾고 있는 바로 숨은 영웅들입니다.
홍재하 선생은 1919년 러시아 무르만스크에서 프랑스 쉬프로 넘어온 한국인이었습니다. 타국에서도 조국의 항일운동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그의 흔적들이 지금에서야 밝혀지고 있는데요. 1920년 9월 2일, 홍재하가 보낸 220불을 받았다는 내용이 담긴 황기환 서기장의 자필서신,
손현주: 혹시 명단에 있는 분들 후손 중에 현재 살아계신 분이계실까요?
이장규: 거의 없는데요. 지금 연락되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바로 아까 말씀드렸던 홍재하 선생님의 후손 분이 지금 프랑스에 살고 계십니다.
이 순간의 감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있을까요? 그저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버스로 9시간을 달려 홍재하 선생의 후손을 만나러 갑니다. 프랑스, 생브리외-프랑스 브르타뉴 반도 북부에 있는 항구도시, 다음날 홍지하 선생의 후손을 처음 알린 분을 만났습니다. 김성영/대학교수와 송은혜/대학강사, 저희와 동행해 주기로 했죠.
최태성: 아우~ 집들이 예쁘다,
일동: 오~ 저기 태극기! 저 집이예요?
송은혜: 네, 저 집 맞아요.
홍수현: 여기서 태극기를 보다니~
허일후: 한국에서 온다고 하니까 태극기를 준비해서~
홍수현: 어떤 분들이 오시는지 모르니까~
장자크 홍 푸안/홍재하의 막내 아들이 웃으면서 현관문을 나서다. 집으로 사절단을 반갑게 맞아주는 홍재하의 후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손현주: 저희들은 집으로 사절단의 단원들입니다.
장자크 홍 푸안/송은혜 통역: 아버지가 하늘에 계시는데 다 보고 계신다고~아주 명예롭게 생각하실 것 같다고 하셨어요.
최태성: 태극기 덕분에 찾아오는 게 안어려웠어요. 너무 좋았어요.
일동: (모두 집안 소파에 앉아서) 감사드립니다.
장자크 홍 푸안/송은혜 통역: 너무 기쁘고 너무 명예롭다고~
허일후: 진짜 궁금했던게 아버지가 한국의 독립운동가 였다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장자크 홍 푸안: 예,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한국에 대한 말씀을 거의 안하셨어요. 그런데도 애국심과 한국에 대한 사랑이 분명해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어요.
다니엘: 그러면 언제부터 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나요?
장자크 홍 푸안: 본인이 아주 똑똑한 아이였기 때문에~
1942년에 태어난 장자크 홍 푸안씨가 기억하는 아버지, 홍재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장자크 홍 푸안: 우리 집은 항상 한국인들이 모이는 곳이었어요.
일동: 거점 역할~
장자크 홍 푸안: 오후에는 한국인들과 지내면서 고국에 관해 이야기 하셨어요. 또 한국에서 독립운동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얘기하셨어요. 아버지는 정말 상냥하셨고 한국인 말고도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분들을 집으로 불러 따뜻하게 대해 주셨어요.
이때 장자크 홍 푸안의 아내가 <집으로> 사절단을 위해 손수 만든 음식을 가지고 나왔다. 손님이 왔다고 음식을 잔뜩 차려 주셨는데요. 늘 사람들에게 베풀었다는 홍재하 선생의 모습이 아들에게서 그대로 보입니다. 혹시 아버님께서 한국 음악이나 아드님이 아버님께서 한국음악을 하신 걸 들으신 적이 있으신지?
장자크 홍 푸안: 네, 아버님은 노래를 즐겨 부르셨어요.
손현주: 어떤 노래인지요?
장자크 홍 푸안: 아리랑 하고 다른 노래도 부르셨어요. 그러다 저도 언젠가부터 따라 부르게 됐죠.
허일후: 오~ 그게 기억나세요?
장자크 홍 푸안: 많이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도와 주신다면 부를 수 있습니다.
일동: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허일후: 이 노래 아리랑을 아버지가 흥얼거리면서 부르셨던게 귀가에 아직도 남아있군요.
질문: 아버지 생각 나시겠어요?
장자크 홍 푸안: 네, 많이 생각납니다. 아버지께서는 항상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 하셨어요. 그런데 그때는 무척 가난했어요. 1950년대는 최대한 돈을 모아서 가족이 모두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결국 홍재하 선생은 해방된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홍수현: (장자크 홍 푸안에게) 손에 꼭 쥐고 있는 이건 뭐예요?
송은혜의 통역: 예전에 홍재하 선생님이 양복 입을 때 고정하는 거 있죠? 그 당시에 쓰시던~
아버지가 썼던 카프스를 유일하게 유품으로 간직하고 있는 아들,
다니엘 린데만: 계속 보셨겠지만 아버지의 유품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장자크 홍 후안: 아버지 유품을 보면, 아버지께서 얼마나 슬퍼하셨을지 알 수 있어서 후회가 많이 돼요. 제가 좀 더 컸으면 한국행 비행기표를 사드렸을텐데 아버지께서 그 전에 돌아가셔서 너무 후회돼요. 그때는 제가 17살이라 아버지를 한국에 보내드릴 수 없었어요.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제가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면 제가 번 돈으로 가장 먼저 한국에 보내드렸을 거예요.
얼마나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으셨을지, 그 마음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장 자크씨,
최태성: 1958년도에 홍재하 선생님이 대한민국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을 때 대한민국이 답장한 문서가 있어요. Republic of the Korea 라는 문서가 한 통 와있는데~ 여기에 보면 홍재하 선생님이 편지를 보내신거 같아요-집으로 가고 싶다고~ 여기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어요.
Republic of the Korea
Mission to the United Nations
단기 4291년 2월 20일
홍재하 귀하
귀하의 혜서는 반갑게 잘 받았습니다. 대한민국과 본인의 장래를 위하여 축복하여 주시는 귀하에게 감사드리며 하나님의 은총이 항상 귀하에게 내리심을 충심으로 기원하는 바입니다.
오랫동안 멀리 고국을 떠나있으면서 해외의 쓰라린 풍상을 겪으시는 귀하의 심정에 충심으로 동정하오며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고국으로 하루 속히 돌아가셔서 정다운 동료들과 같이 여생을 지내시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러하오나 요청하신 귀국 여비 6,000불에 관하여는 현재 본인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형편을 이점 양지하시어 다른 방도로서 해결하여 주심을 앙망하나이다. 앞으로 모든 문제가 소원대로 해결이 되어 금의환향 하실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끝으로 귀하의 영원한 행복과 건강을 축복하옵고 총총 불기 사례하나이다.
멀리 미국 뉴욕에서
림병직 배
최태성: 거기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어요~꿈에도 잊을 수 없는 고국으로 하루 속히 돌아가셔서 정다운 동료들과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요청하신 귀국에 대한 도움을 저희가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고 이렇게 답변이 와 있어요. 1958년도에 대한민국의 답변인데~
허일후: 아까 도움은 못주지만 오시고 싶으면 오시라 그 정도~
최태성: 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저희는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라는 이런 대한민국의 답이 58년도에 있더라구요.
허일후: 그러면 돌아가시기 2년전 이군요.
최태성: 이걸 받아보시고 얼마나 속상하셨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손현주: 이런 사실을 장자크씨는 알고 계셨어요?
장자크: 편지를 받고 나서요, 불행히도 아버지께서 암선고를 받고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께서 프랑스어도 모르고 직업이 없으셨어요. 하지만 프랑스까지 건너오신 큰 용기는 훌륭하다고 봐요.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가족들을 부양하셨던 걸 보면 아버지께서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늘 조국의 독립을 기원했고 늘 조국의 품으로 돌아가길 원했던 홍재하, 하지만 아직 그는 프랑스에 있습니다.
허일후: 저는 그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홍재하 선생님을 쭉 저희가 공부를 하면서, 첫번째는 너무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고, 둘째는 우리 아이들만큼은 홍재하 선생님을 오랫동안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최태성: 이제 2019년을 맞아서 다시 한번 대한민국이 이제는 돌아가셨지만 돌아가신 분에 대해서 우리가 다시 한번 답을 제대로 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한민국 그 네 글자를 지켜내기 위한 노력을, 그 마음을 앞으로 백년이 지난 후에도 우리가 기억하겠습니다.
장 자크 홍 후안: 아버지 당신은 훌륭한 애국자예요. 이번에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서 아버지께 깊은 감사를 표하러 사람들이 왔어요. 당신은 그걸 자격이 있으니까요. 당신은 하늘에 가실 때까지 외국에 계셔서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셨어요. 다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아버지가 고국의 품으로 돌아가시길 바랄게요. 그건 정말 멋지고 특별할 거예요.
홍재하 Rene Hong Fuan 1898~1960
Marie Louise Fuan 1906~1974 Jean Rene Hong Fuan 1940~2004 Rene Lin 1931~2005
살아있을 때에도 그리고 아직 까지도 바라고 있을 귀향, 당신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소르본 대학이 위치한 플아스 파리의 생 미셸 거리, (생 미셸 거리-파리의 5구역과 6구역의 경계를 이루는 거리, 샹젤리제 거리, 몽파르나스와 더불어 파리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 대학가 답게 젊음의 기운이 넘쳐나는데요.
허일후: 여기는 왜 온거예요?
손현주: 하 참, 나 단장이잖아요. 파리의 마지막 밤인데 여러분 한테 아주 특별한 숙소를 한번 섭외를 했어요. 심지어 라운지까지 있습니다.
최태성: 단장님 역할을 하시는 거 같아요.
손현주: 제가 준비한 숙소, 기대 되시죠?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집으로 사절단, 과연 손현주 단장이 준비한 특별한 숙소는?
손현주: 바로 이곳입니다. 사실은 최 선생님이 알고 있는~
최태성: 제가 일고 있다구요?
허일후: 최 선생님이 알고 있는 숙소가 있어요?
최태성: 나는 여기 호텔 모르는데~
손현주: 걱정 말고 들어가 보세요. Excuse me, key please, Thank you.
허일후: 정말로 예약을 하셨나 보다
손현주: 수현씨 61호, 여기는 참고로 엘리베이터가 한 사람만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허일후: 진짜 옛날 건물이구나
손현주: 들어가서 느껴 보세요
최태성: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가고 싶지만 너무 좁아서~
홍수현: 영화에서나 봤던 엘리베이터예요. 어머나 깜짝이야~호텔이 엄청 기대돼요 계단이 있고 방이 하나 밖에 없나 열쇠도 옛날 것처럼 생겼네 제방은~ 아니 정말 오래된 방인가봐요. 근데 아무것도 없네요 여기서 공부만 해야되나
손현주: 이런 거 한번 보세요.
허일후: 진짜 오래 됐나보다 백년은 넘었겠다.
손현주: 여기 보면 그대로 남아 있어요. 지붕모양을 그대로 놔둔 거예요.
홍수현: 제가 아까 계단으로 올라가 봤는데 바로 지붕이 있더라구요.
손현주: 네, 스카이 라운지가 있습니다.
허일후: 지붕 위가 스카이 라운지 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단장님, 지금 약간 얘기가 다른거 같은데~
손현주” 지금 단장을 못믿겠다는~
허일후: 못믿겠다는 건 전혀 아니고~
손현주: 이러면 난 단장 못해요. 이러지 마세요. 나중에 여러분들 이곳이 어떤 곳인지 제가 말씀드리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사절단이 오늘밤 반드시 묵어야 하는 호텔의 비밀,
손현주: 궁금하시죠?
허일후: 오늘 묵을 숙소를 단장님이 안내해 주셨는데요
손현주: 아까 그 호텔이 사실은 내일 서영해 선생님 후손을 우리가 만나잖아요. 만나기 전에 파리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낼 훌륭한 장소라고 생각해서 예약한 것입니다.
홍수현: 서영해 선생님이랑 무슨 관련이 있나요?
손현주: 아까 그 장소가 서영해 선생님이 만드신 고려통신사입니다.
최태성: 아, 진짜요?
허일후: 그래서 최태성 선생님이 아실 거라고 하신 얘기가 그 얘기구나
최태성: 그 건물이 고려통신사예요?
손현주: 네, 맞습니다. (고려통신사-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의 명령으로 독립운동가 서영해가 1929년에 프랑스 파리에 설립한 외교기관). 파리 말브랑슈 7번지, 자신이 살던 호텔에 1929년 고려통신사를 설립한 서영해 선생, (서영해(1902~실종)-프랑스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1929년 파리 말브랑슈 7번지에 고려통신사를 설립), 1920년 그가 프랑스에 첫발을 디딜 때만 해도 불어 한마디 할 줄 모르던 청년이었죠. 하지만 불과 6년만에 초-중-고 과정을 모두 마치고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 입학을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중퇴를 결심하는 데요.
최태성: 요 근처 어디에선가에서 알바를 하셨겠죠. 여기서 알바도 하셨고 어느 신문사에도 들어가서 식자공, 문자를 뽑는 알바를 하다가 기사를 봤는데 한국을 비하하는 기사를 보게 된 거예요. 왜 나의 조국을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하지 라고 해가지고 그때부터 기자라는 것에 관심을 갖게 돼 가지고 언론학과에 들어가요. 28년에 들어가서 거기서 공부하다가 29년에도에 고려통신사 라는 걸 아까 우리가 봤던 장소, 그곳에서 설립을 하죠.
허일후: 그 통신사가 이 통신사군요.
최태서이 그렇죠. 내가 조국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 속에서 나온게 바로 고려통신사,
허일후: 그러면 거기서 통신사 라는 얘기는 거기서 기사를 쓰셨다는 얘기 아네요?
홍수현: 특별히 빛을 발한 기사가 있었나요?
최태성: 윤봉길 의거가 있었을 때에 그때 중국 프랑스 조계지에서 안창호 선생님이 체포가 돼요. 그런데 이때 이 소식을 듣고 서영해가 이게 도대체 워 하는거냐 안창호 선생이 잡혔다는 건 말이 안된다. 왜냐면 프랑스는 자유, 평등, 박애의 나라다. 이런 나라에서 조국을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을 잡아 간다는게 말이 되느냐 이런 걸 방조하는게 프랑스냐 라는 기사를 서 가지고 프랑스인들의 심금을 울렸던, 프랑스를 반성하게 만들었던 그런 글을 쓰면서 노력을 했던 분이죠.
손현주: 박수를 안칠 수가 없네요.
일동: 박수
고려통신사에서 서영해 선생은 한권의 책을 출간합니다. 그 책은 바로 프랑스어로 쓴 한국역사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 (어느 한국인의 삶-1929년 서영해가 프랑스어로 쓴 한국역사소설), 단군신화에서부터 3.1운동은 물론 대한제국 임시정부 수립까지 한국의 역사가 꼼꼼히 수록되어 있는 책으로 그는 한국이 오랜 문명국가 라는 것과 일본이 한국을 강제병합한 사실을 만방에 알렸습니다. 책의 말미에는 기미독립 선언서를 프랑스어로 실어 한국의 강한 독립의지를 보여 주었죠.
허일후: 책이 어떻게 팔렸나요?
최태성: 인기폭발이었어요.
허일후: 진짜요?
최태성: <어느 한국인의 삶> 1년만에 책을 출판했는데 5쇄를 찍었어요. 이러면 대박이예요. 한번도 아니고 5쇄를 찍었다는 건 대박이거든요.
허일후: 그렇죠. 당시 프랑스인들도 동방에 있는 작은 나라, 한국이라는 나라가 한국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역할을 서영해 선생이 전방위적으로 했죠. 이런 말이 있었어요. 미국에는 이승만이 있으면 유럽에는 서영해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승만만 알잖아요. 유럽쪽에 서영해 선생의 독립운동 같은 거를 우리가 적극적으로 알리는 출발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허일후: 아까 우리가 잠깐 머물렀던 그 숙소가 이렇게 뜻 깊은 곳일 거라고는 진짜 상상을 못했네요.
허일후: 와! 우리 단장님~
홍수현: 웬지 모르지만 분위기는 뭔가 있었는데 그게 뭔지 몰랐는데~
고려통신사 흔적이 오롯이 남아있는 호텔에서, 그날밤 작은 쪽방에서 펜으로 큰 그림을 그리셨을서영해 선생을 기려봅니다. 나라없는 작가, 기자, 외교관 서영해 나라 있음을, 대한민국이 있음을 그는 나라 반대편 유럽에서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홍수현: 얼마나 외롭고 힘드셨을까. 잠시나마 당시 선생님의 모습을 그려보자니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허일후: 고려통신사를 만들어 기사를 통해 엄혹한 조선의 상황을 알리려 노력하신 것, 어찌보면 그 길을 통해 언론이 해야 할, 나아가야할 길을 선생님께서 보여 주신듯 합니다.
손현주: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 그 말이 가슴 깊이 와 닿습니다. 선생님께서 만드신 고려통신사에서 이렇게 앉아 편지를 쓰니 왠지 모르게 편을 잡은 손에 힘이 갑니다. 선생님께서 계셔서 오늘의 저희들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오스트리아 뵐러스도르프, 집으로 사절단 첫번째 초청장을 전달하기 위해 먼 오스트리아에 도착했습니다.
손현주: (오스트리아) 인사말 한번 다시 가르쳐줘
다니엘 린데만: 그뤠스 고트(안녕하세요)
일동: (시골 별장 같은) 목가적인 그런, 비행기에서 봤던, 호두까기 인형 거기에 나오는, 영화에 나오는, 계세요?
다니엘: 안녕하세요
다니엘의 부름에 마중나온 서영해의 후손, 드디어 서영해 선생의 후손을 만났습니다. 웬지 모르게 친근감이 느껴 지더라구요. 수지웡/서영해의 손녀, 스테파니 웡/서영해의 손녀,
홍수현: 저희들이 처음 온다고 했는데 처음 들어셨을 때 어땠는지요?
수지웡: 한국에서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으로 저희를 만나로 온다고 해서 매우 기뻤습니다.
스테파니 웡: TV출연이 처음이라서 유명인과 만나는게 약간 긴장되기도 했어요. 하지만 멋진 일이죠.
최태성: 아니 궁금한 게, 할아버지 서영해 라는 분이 대한민국 독립 유공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셨는 지가 제일 궁금하거든요.
수지웡: 할아버지가 한국인이고 책을 쓰셨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스테판 웡)가 1970년대에 할아버지에 대해 찾으려고 했지만 당시에는 인터넷이 없어서 어려웠어요. 그리고 저도 2013년에 할아버지의 이름을 인터넷에서 찾아봤지만 쉽지 않았어요.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다보니 할아버지의 책이 한국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할아버지에 대한 정보를 요청했고 며칠 후 답장이 와서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 라는 걸 알게 됐어요.
최태성: 할아버지의 책을 읽어보셨어요?
수지웡: 네, 우선 한국 역사에 대해 알아야 했어요. 그 당시 저희는 한국이 오랫동안 일제의 지배를 받았다는 역사를 몰랐으니까요 한국 역사를 알고부터 놀라움이 더욱 커졌죠.
손현주: 우리가 질문을 너무 급히 드리나봐~ 좀 천천히~
허일후: 직접 보니까 궁금한게 계속 생겨가지고~혹시 두분은 한국에는 방문해 보신 적이 잇나요?
수지 웡: 네, 저는 2017년에 가봤어요.
스테파니 웡: 저는 아직 못가봤어요.
다니엘: 한국에 처음 방문 했을 때 어땠나요?
수지 웡: 엄청나게 흥분되고 매우 마음에 들었어요. 특히 한국에 가족이 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할아버지(서영해)는 한국에 형제자매들이 많았고 덕분에 사촌 언니 지에서 3주 정도 머물렀어요. 그런 첫 경험이 정말 좋았습니다.
한국방문 당시 사진을 설명하며 신이난 수지씨, 사진첩에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 담겨있겠죠.
다니엘 린데만: 처음 한국에 있는 가족들을 만났을 때 어색하지 않았나요?
수지 웡: 저도 친척들도 내무 긴장했어요. 이런 눈 빛으로 그냥 서 있었죠. 그래도 어색한 분위기는 금방 사라지고 대화가 시작되긴 했어요. 언어 때문에 대화가 쉽진 않았죠. 사천 형부와는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서로 한 마디도 못하다가 1주가 지나니까 우리만의 언어가 만들어지면서 소통이 잘 됐어요.
다니엘: 한국어도 아닌 영어도 아닌 독일어도 아닌 언어로 가족이기에 서로를 느낄 수 있는~
홍수현: 그게 다른 언어를 써도 진짜 느껴지고 통하는 것 같아요.
다니엘: 제가 좀 늦게 합류했잖아요. 미션 임파셔블 영화 촬영을 하나 찍고 왔는데요. 완벽하게 완성시켰어요.
한국에서 영상편지를 준비해온 다니엘~
서혜숙/수지웡의 사촌언니: 수지 안녕? 한국에 왔다 간지 2년째 되니까
수지 웡: 눈물이 나네요.
서혜숙: 우리들도 많이 보고 싶고 막내도 보고 싶다고 많이 이야기 해 올해는 우리에게 의미있는 해가 될 것 같아. 수지하고 스테파니가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초대를 받아서 한국을 방문할 수 있고, 다같이 가족들이 모일 기회가 돼서 너무 즐겁고 기대되는 한 해 이기도 해. 수지, 스테파니, 프리다(스테파니의 딸), 한국에는 너희를 기다리고 잇는 가족들이 있으니까 건강하고 행복하게 우리 모두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을게~ 곧 만나자를 독일어로 어떻게 하나요?
다니엘: (독일어로 짧고 굵게) 스바터 Bis spatter (곧 만나자)
서혜숙: 수지 스테파니 프리다, 비스바터
허일후: 다니엘 큰 일 했어요~ 야~
스테파니 웡: 정말 감동적이에요.
손현주: 오스트리아에 다른 가족은 있나요?
스테파니 웡: 생각해 봐야겠네요. 별로 없어요. 아버지도 형제가 없었어요. 아버지도 할머니도 돌아가셨습니다.
수지웡: 어머니는 독일에서 혼자 사셔서 여기에는 우리 둘만 남았어요.
6년전 아버지가 돌아가신후 가족이란 단 세명 뿐, 그녀들에게 한국에 있는 가족은 얼마나 소중할까요. 가족이 있는 집으로 그녀들을 초청합니다. 초청장 전달식이 있겠습니다.
먼저, 100년전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먼 타국으로 건너가서 우리의 조국, 집을 찾기 위해서 독립운동을 열심히 해주셨던 서영해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그리고 그의 후손 수지 웡, 스테파니 웡에게 한국으로 초청하는 초청장을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일동: 너무 감동이다. 박수~~
20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한국으로부터 초대를 받은 소감은 어떨까요?
스테파니 웡: 한국과 강한 연대감을 느껴요. 우리는 한국에 대해 더 많이 알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한국에 새로운 가족들도 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서영해의 후손들과 기념사진 “집으로 대한민국 집으로 오십시오. 끝. (MBC 임정 100주년 기념특집 백년만의 귀향 1회, “100년전, 우리의 이야기”에서 정리).
① 1910~2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신한청년단 김규식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 다큐를 통해서 파리에서 독립운동가 황기환, 홍재하, 그리고 서영해 이야기를 보면서 일제 때 애국심을 갖고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을 발굴하는데 관계당국은 계속 노력해 주기 바랍니다.
② 1914~1918 4년여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후 처리협상을 위해 27개 협상국이 프랑스 파리에서 파리강화회의를 개최하는데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 특히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협상원칙으로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하면서 한국은 독립에 큰 기대, 미국에서 이승만, 국내에서는 김창숙, 연해주에서 윤해가, 중국에서 김규식이 올려고 했는데, 김규식만 파리에 도착,
③ 1919. 1. 18. 약 5개월 동안 파리강화회의는 철저하게 승전국의 입장에서 패전국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 때문에 승전국 편에 선 일본의 식민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 김규식의 참가문제는 아예 처음부터 접수조차도 되지 못해서 우리의 독립문제는 승전국 수뇌들 회의 테이블 위에 올라가지도 못했다. 6월 28일 연합국과 독일간에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
④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파리에 파리위원부 설치, 위원장에 김규식, 서기장에 황기환 임명, 파리강화회의 종결 후 김규식은 떠났고, 황기환이 위원장 역할, 어느 날 황기환에게 러시아 리첸코 무르만스크에서 SOS 전보, 알아보니까 제1차 세계대전 후 무르만스크 철도공사현장에서 500여명 한인노동자들 해고된 상태, 영국이 한인들을 일본 압제 속으로 돌려 보낼려고 시도, 황기환은 영국과 수차례 협상, 30여명의 한인을 프랑스 쉬프로 구출,
⑤ 1919년 쉬프에 온 30여명의 한인들 세계대전 격전지 쉬프 지역에서 시신과 유골 수습, 힘들고 고단한 일을 하면서 프랑스 최초 한인회 재법한국민회 조직, 이를 아끈 지도자가 홍재하(1898~1960), 돈을 모아 황기환에게 전달, 그 다음해 1920년 3월 1일 쉬프 지역 한인들 3.1운동 기념식, 황기환이 떠난 파리에서 독립운동을 한 홍재하, 2018년부터 재불한인들이 조금씩 밝혀지고, 홍재하의 막내 아들, 장자크 홍 후안 프랑스 생브리외 (프랑스 브르타뉴 반도 북부 항구도시)에 거주, 홍재하의 활동이 제대로 조명되도록,
⑥ 서영해 독립운동가, 1920년 그는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못했던 청년, 하지만 불과 6년만에 초-중-고 과정을 모두 마치고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 입학, 갑자기 중퇴를 결심, 여러 군데 알바도 하고, 어느 신문사에 문선공으로 일하다가 한국을 비하하는 기사를 보게 된 것, 왜 나의 조국을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하지, 그때부터 언론에 관심, 28년에 언론학과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29년에 자신이 살던 호텔 파리 말브랑슈 7번지에 고려통신사 설립,
⑦ 그는 프랑스어로 한권의 책을 출간, 한국역사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 단군신화에서부터 3.1운동은 물론 대한제국 임시정부 수립까지 한국의 역사 수록, 한국이 오랜 문명국가 라는 것과 일본의 한국강제병합 사실, 책의 말미에 기미독립 선언서를 프랑스어로, 동방에 작은 나라, 한국을 알리기 위한 역할 전방위적으로, 미국에는 이승만이 있으면 유럽에는 서영해가 있다.
⑧ 윤봉길 의거가 있고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안창호 선생님이 체포당함, 이 소식을 듣고 서영해가 프랑스는 자유, 평등, 박애의 나라인데 이런 나라 영토에서 조국을 위해 애쓴 안창호가 잡혀갔다는 건 말이 안된다. 그는 도대체 프랑스는 뭐하는 나라냐는 기사를 써서 프랑스인들한테 심금을 울리고 반성하게 만든 글을 쓰면서 노력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