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차게 가고 있다 / 이임순
갑진년 첫날이다. 용트림하며 솟아오르는 해를 보면서 올해의 바람을 빈다. 무슨 일이든 순풍에 돛단 듯 풀리고, 건강도 지키면서 나와 인연이 있는 모든 이들의 행운이 있기를 기원한다.
솔직하고 싶다. 게으름은 인정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내 일상을 꾸려가려 한다. 습관처럼 하루를 독서로 마무리했다. 늦은 시각 책을 들고 앉으면 잠이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아무리 눈꺼풀을 치뜨려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골아떨어지기 일쑤였다. 새해 첫날인 오늘부터는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어제까지는 책을 읽다 안고 잤다. 내 의지가 부족한 탓이었다. 이제부터는 하루 50쪽의 양을 정해 놓고 읽고 난 다음 편히 잠자리에 들 것을 새해 새 마음으로 정한다. 작심삼일이 되지 않게 졸리면 서서라도 읽으리라 다짐한다.
독서, 중학교 때부터 소설을 많이 읽었다.‘데미안’을 읽은 날 중간고사 시험 날짜가 발표되었다. 전개가 궁금하여 틈만 나면 읽으니 짝궁이 시험은 걱정도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신혼 때‘토지’를 읽었다. 서희의 마음이 길상에게 다가가는 인간의 내면에 이끌려 시어머니 점심 차려드리는 것도 잊고 책에 묻혔다. 나이가 들수록 시야가 좁아지면서 생각은 내 위주로 한다. 그러니 갈수록 마음이 옹졸하고 삭막해진다. 이런 증상은 병원에서도 처방해주지 않는다. 굳이 병명을 따지자면 이기주의에 자기 도취증이다. 병은 자가진단 하지 않고 병원에서 치료해야 하는데 내 경우는 스스로 처방을 할 수밖에 없다. 내가 약으로 고른 것은 독서다.
장르 가리지 않고 책을 읽었다. 수필을 쓰기 전에는 소설과 위인전을 많이 읽었다. 그때 느꼈던 것은 위인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만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결과라는 것이었다. 두 해 전, 코로나19가 사람들의 발목을 잡을 때 내 이상형인 고향 선배로부터 우편물이 왔다. 여든이 넘은 연세에 집필한 자전적 장편소설이었다. 그 열정에 감명받아 꼬박 밤을 새웠다.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조부 슬하에서 자라 행정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여 교사, 작가, 황순원 문학관 촌장까지 역임했다. 고향 백운산의 상백운암을 배경으로 등산하다 날이 저물어 일행들과 하룻밤 신세를 지면서 몰래 본 일기장이 인연의 시초였다. 책을 읽고 전화를 드렸더니 온화한 목소리로 소설의 주인공 이야기를 해주셨다. 문학성에 이어 인간성까지 배울 수 있었는데 그것이 독서가 준 선물이다.
내 책 읽기는 글을 쓰기 위한 수단이었는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 보면 글감이 떠오르기도 하고 소재가 연결되기도 했다. 혼자만의 착각 속에 살지언정 한 편의 글이 완성되었을 때 느끼는 희열이 있다. 내 생각을 작은 소리로 외치고 하소연하며 어우러 살고 싶다. 안에 담고 있는 것을 글로 쓰면서 자아실현을 위해 몸부림을 친다. 글쓰기는 내 치부를 부끄러움도 모르고 표출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감성적인 글을 쓰고 싶을 때가 있었다. 방송에서 우연히 정채봉 작가의 작품세계를 듣고 난 후였다.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새콤달콤 문학 향기 시민과 함께’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었다. 모래알 하나를 보고도, 풀잎 하나를 보고도 너를 생각했다는 작가. 내 안에서 여리기만 한 작가처럼 감성적인 싹을 틔우고 싶어 정채봉의 책을 필사했다. 6개월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원고지 25장에 그의 글을 옮겨적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감성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한 자 한 자 쓰면서 이슬이 구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행복한 착각이 한 날은 황혼이 붉은 꽃으로 피었다.
언제부터인가 지인들의 수필집이 1주일에 두세 권씩 배달 되었다. 가끔은 시집과 소설도 쌓였다. 동화책이 오는 날은 영락없이 동심으로 돌아가 풍뎅이를 잡아 고개를 비틀어 놓고 누구 것이 더 오래 도는지 친구와 견주던 때가 생각나기도 했다.
갑진년 내 계획 1호는 하루 50쪽의 책 읽기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즐기면서 살고 싶어서다. 청룡의 기운을 듬뿍 받아 만인이 인정하는 작품을 한 편이라도 썼으면 좋겠다. 그 동안 시간이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노력은 게을리했다. 모자람이 있으면 열심히 노력으로 채워야 하는데 바쁘다는 핑계만 댔다. 사람답게 사는 것은 무엇일까 잠시 생각해 본다. 정도를 가는 것이다. 남들이 하는 것 나도 하면서 생활을 즐기려면 노력이 더해져야 한다.
오늘은 20여 년 전에 선물 받아 손때가 묻지 않은 채 책꽂이에 꽂혀있는 건설업자이기도 한 라대곤 작가의 ‘취해서 50년’을 읽으며 그분의 삶에 나도 취해 보련다. 내 새해 결심을 다지는 파이팅을 외친다. 해가 중천에서 웃고 있다. 나도 웃음으로 화답한다. 이렇게 웃음을 주고받으며 갑진년을 향해 힘차게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