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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없이 살아가는 삶 / 합 1:1-4, 2:1-4, 딤후 1:3-14
북한의 잠수함이 동해안에서 좌초된지 이번주로 한달이 다 되어간다. 그런데 이들이 무장공비냐 아니면 간첩이냐는 의문이 있다. 신문마다 공비라고 하든지 간첩이라고 하든지 서로 다르게 표현한다. 금요일 MBC 9시 뉴스에서도 간첩이라고 했다가 공비라고도 했다. 어느 것이 맞는 말인가? 생포된 이광수의 말을 빌리면 이번 말고도 서너차례 남한을 들락거렸다. 강릉, 속초 부근에 군사시설이 많다. 이 시설을 탐지하기 위하여 몇 번 왔다갔다 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로 장교들만 온 것으로 봐서 지금까지 왔다갔다 하며 수집한 자료가 사실인지 어떤지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내려온 것이라고 군사평론가들은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은 무장공비가 아니라 간첩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왜 공비하고 부르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처음에는 국방부도 간첩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다음날 공비라고 호칭을 바꾸면서 언론을 향해 공비라고 고쳐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방송과 일부 신문들은 즉시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것은 안기부법 개정 등 정권 유지 차원에서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겠다. 다른 나라 언론들은 이번 사건을 공비라는 말을 쓰지 않고 무장 특공대, 침입자, 무장 요원이란 단어를 사용했고, 일본은 무장병, 공작원, 스파이(간첩)라는 말을 사용한 것으로 봐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 간첩들이 산으로 버섯 등을 채취하려 간 민간인을 이번에 살해했다. 이곳 주민들은 무서움과 불안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낸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두려움의 문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일생을 두고 두려움을 안고 산다고 한다. 그래서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어떤 두려움이 울음으로 표현되어 진다고 말을 한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옆에 없으면 두렵다. 청소년 때, 공부하는 학생 때에는 학업, 용모, 친구관계, 진학문제 이런 문제로 인해서 극도의 두려움을 경험하고 있다. 어른이 되어서도 두려움이 그치지 않는다. 하는 일이 잘되지 않을까, 직장인은 동료보다 승진이 늦어질까, 또 암이나 어던 중병에 걸려서 페인이 되지 아니할까, 자녀들은 원대로 자랄까 하는 두려움을 누구나 가진다. 더 나이가 들면 어떻게 지낼 것인가, 치매나 중풍에 안걸릴까, 무얼하면서 살아갈까 등 이런저런 문제에 대한 두려움도 가지고 있다. 아기를 임신한 주부들 중에는 혹시 기형아나 불구아를 낳지 앟을까, 이 뱃속에 아기가 어니라 다른 이상한 것이 들어있지나 않은가 하는 두려움에서 공포감을 이기지 못해서 결국 정신과의 치료를 받는 경우도 있다. 두려움은 우리의 일상생활의 여러 측면에서 위험을 일으키고 있다. 사실은 두려움의 문제라는 것은 두려움을 일으키는 요소,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일 그 자체보다도 우리 마음이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불안과 절망감을 가지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스페인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옛말 스페인에 ‘페르디난도’라는 임금이 있었다. 이 사람은 점쟁이를 무척 좋아했고 점쟁이 말을 그대로 믿고 살았다. 한번은 점을 치는데 점쟁이가 말하기를 ‘마드리칼에는 절대 가지 마십시오. 거기에 가면 죽습니다’라는 점괘를 말햇다. 마드리칼에는 임금의 별장이 있는 곳이다. 점쟁이의 말을 믿었던 왕은 마드리칼에 있는 별장에 21년 동안 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사냥하러 겄었는데 산과 계곡이 너무 아름답고 좋아서 신하에게 ‘도대체 이곳이 어디냐?’라고 물었다. 그러니까 신하가 ‘이곳은 마드칼레입니다’ 하고 지명을 말하니까 임금은 부드부들 떨면서 ‘이곳이 마드리칼이라고? 마드리칼에 가면 내가 죽는다고 했는데’ 이렇게 혼자 속삭이면서 떨고 있었다. 사실은 점쟁이가 말한 마드리칼하고 지금 임금이 사냥하고 있는 마드칼레하고는 다른 지명이고 이름도 다르지만 비슷하게 발음이 되다 보니까 임금이 혼동을 한 것이다. 임금은 ‘마드리칼에 가면 내가 죽는다고 했는데’ 하는 공포심을 이기지 못한채 말 위에서 부들부들 떨다가 그냥 말 위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은 점쟁이가 점을 쳤다는 그 자체보다도 임금의 마음 속에 생기는 그 공포감, 두려움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말에서 떨어져 죽은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일상생활에 두려움이 없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평화를 잃어버리게 되고, 불안에 떨게 되고, 할 수 있는 일도 제대로 못하는 그런 무능한 사람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극도의 두려움이 마음 속에 생기면 어떤 일이 앞에 있어도 자신감이 없어지고 불안과 절망감에 쉽게 빠진다. 그서보다 더 무서운 것은 두려움은 하나님께로 향한 우리 믿음을 송두리째 앗아간다. 반면에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마귀를 찾게 만들고, 마귀는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그 사람 속에 들어와서 그 두려움을 이용해서 시험을 하고, 농락하고 흔들어댄다.
욥기를 읽다 보면 궁금한 점이 하나 있다. 왜 욥이 시험을 당하느냐, 왜 욥이 그토록 시험을 당하며 고통을 겪어야 하느냐는 문제에 부딪힌다. 왜냐하면 욥은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건강의 축복, 재물의 축복, 열자녀를 낳는 자녀의 축복도 받았다. 거기다가 욥은 욥 1:1절에 보면‘욥이라 불리는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이다. 동방이 의인이다. 선한 사람이다. 죄를 모르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며 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왜 갑자기 하루 아침에 시험을 만나서 재산이 날아가고, 자녀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자기 몸에 중병까지 생기나? 저도 그 원인을 발견하지 못해서 욥기서를 몇 번이나 일은 적이 있다. 마귀가 욥을 시험할 때 욥의 약점을 이용해서 시험했다. 욥의 약점은 바로 마움 속에 있는 두려움이었다. 어떤 두려움이 있었느냐 하면 혹시 무슨 사건이 일어나서 자녀들이 죽임을 당하지 아니할까, 자녀들이 무슨 변을 당하지 아니할까 하는 자녀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또 하나는 무슨 변이 일어나서 재산이 몽땅 날아가지 아니할까 하는 재산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거기다가 내 몸에 혹시 병이 생기지나 아니할까 하는 병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이런 것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 마귀가 그 두려운 마음을 이용해서 욥을 흔들어대고 시험한다. 욥이 엄청난 시험을 받았을 때 하나님 앞에 자신을 회개하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간증할 때에 그 원인이 나타난다. 욥 3:25-26절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평소에 자식에 대해서, 건강에 대해서, 재물에 대해서 어떤 두려운 마음을 가졌는데, 바로 그 두려워하는 마음 그대로 나에게 현실로 이루어졌구나 하는 말이다. 이처럼 내 마음 속에 어떤 문제에 대해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마귀는 그 두려워하는 마음을 이용해서 나를 흔들어대고 나를 고통에 빠지도록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미워하고, 멀리하고, 선한 싸움의 용사로 뽑지 않는다. 신 20:8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모세가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이스라엘 군대를 모아놓고 말하기를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그의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낙심될까 하노라’라고 말한다.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는 용사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성서는 신구약 성서 전체를 통해서 365회 이상 ‘두려워하지 말라, 명려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 겁내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사람에게 두려움을 일으키는 요소가 무엇인가? 물론 많은 요소가 있겠지만 그 중에 대표적인 요소를 찾는다면 세가지를 들 수 있다.
1. 외롭고 약할 때 두려움이 생겨난다.
성서를 보면 위대한 사람도 외롭고 약할 때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채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중에 대표적인 한 사람을 든다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들 수가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고향 땅을 떠나 가나안 땅에 왔다. 당장 먹을 양식이 없었다. 그러자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고 애굽으로 도피해 내려간 것이다. 애굽에 가서는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면서 살 궁리를 했다. 이처럼 외롭고 약하게 되어지면 마음에 시험이 생기고, 살 길을 찾아서 발버둥치고, 생계에 대한 어떤 두려움이 생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근본문제이다. 다시 가나안 땅에 돌와왔다. 적들이 생겨서 이웃 왕들이 침략해 오니까 또 그들과 싸움을 해야 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극도의 두려움이 생겼던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러한 아브라함을 향해서 창 15:1절에 말씀하시기를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게서 아브라함을 꾸짖으면서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다. 이처럼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조상도 외롭고 약할 때 두려움이 생기는 것 같다. 그런데 구약 성서에 보면 다윗은 아브라함 못지 않게 약할 때가 있었고, 외로운 때가 있었고, 생명의 위협을 당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향해서 노래하기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했다. 나에게 어떤 두려움의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께게로 향한 믿음이 더 크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의이 두려움을 이기게 해주신다는 고소백이다. 이런 고백이 오늘 여러분들에게도 있기를 바란다.
2. 죄가 있을 때 두려움이 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다. 그 마음 속에 두려움이 생긴다. 하나님을 두렵게 여기는 마음이 생겨서 결국 동산 숲속에 숨고 말았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죄가 잇을 때, 잘못한 일이 있을 때, 허물이 있을 때 마음 속에 느끼는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죄지은 사람이 도망가서 어디 숨어 있을 때 집 밖에서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혹시 경찰이 나를 잡으로 오지 않았나?’ 하는 두려움을 가진다는 것이다. 죄가 해결되지 아니하면, 잘못한 것이 해결되지 아니하면 항상 두려움이 있다. 행 3:19절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이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내 마음이 상쾌하고 기쁘다는 말씀이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한다.
3. 장래가 불확실할 때 두려움이 생긴다.
동물의 세계에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공포도 걱정도 없다.그래서 미래를 향해서 오늘을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문명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미래를 생각하면서 오늘을 살아간다. 쟁래를 생각하면서 오늘을 살아간다.
장래에 대한 어떤 확실한 보장, 확실한 희망이 있으면 오늘 고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오늘은 피담을 흘리며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이 아무리 편안하다 할지라도 장래에 대한 어떤 희망이 없고, 장래에 대한 어떤 확실한 보장이 없다면 오늘의 생활이 지옥과 같은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인 ‘폴 틸리히’는 20세기를 진단하기를 불안의 시대 또는 불안의 세대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왔던 20세기는 1차대전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중반에 2차대전이 있었고, 그후에 동서냉전이 계속되었고, 결국 공산당의 몰락과 더불어 20세기는 종말을 고해가고 있다. 20세기 한 세기를 먼 훗날 역사가들이 평가하면 ‘전쟁의 시대’였다고 말할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많은 전쟁과 갈등 속에서 떨면서 살아온 한세대였다. 불안의 시기였다.
그러면 21세기는 어떤 세기이겠나? 미래학자인 ‘엘빈 토플러’는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한다. 불확실성의 시대, 예측을 불허하는, 예측할 수 없는 세대라고 말한다. 왜 그런가? 과거에 100년 동안 성취햇던 일을 21세기에 들어가서는 단 10년 동안에 이룰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과거에는 백년을 예측할 수 있었다면 미래에 가서는 십년도 예측할 수 없도록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그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가 살 고 있다. 정치, 경제, 국제관계, 십년을 예축하기 어렵다. 장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 속에 우리가 살고 있으니까 그 어느 때보다도 두려움에 대한 어떤 공포감을 떨칠 수 없는 형편이다. 금년도 고등학교나 대학을 졸업하거나 앞두고 사회에 첫 출발하려는 우리 젊은이들에게도 올해는 불황까지 겹쳐 더욱 불확실한 장래문제로 두려움이 앞설 것은 분명하다. ‘장래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이냐?’ 하는 두려움이 앞서리라 생각되어진다. 특별히 우리의 젊은이, 20대 젊은이들은 20대에 인생의 가장 중대한 문제 3가지를 결단해야 한다. 하나는 어떻게 사느냐? 생계에 대한 문제를 결단해야 한다. 직업선택의 문제이다. 또 하나는 누구와 함께 사느냐 하는 문제를 결단해야 한다. 배우자와 만나야 하고, 동료를 만나야 한다.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세 번째는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죽을 수 있느냐?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결단을 해야 한다. 이 세가지를 20대 젊은이의 가슴으로 해결하기에는 너무 벅차기 때무에 마음 속에 두려움이 앞설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20대 젊은이를 가리켜서 두려움에 떠는 존재, 방황하는 존재, 심지어 비틀거리는 존재라고까지 이야기를 한다. 그만큼 갈등과 고뇌가 많다. 이런 젊은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하고, 넓게 그리고 깊이 이해해주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확실히 장래가 보장되지 아니하는 문제가 우리에게 두려움을 일으킨다. 그러면 어떤 두려움이 밀어닥칠 때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해 가면서 좀더 용기있게 좀더 희망차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성서는 대답한다. 오늘 본문 7절에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고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능력과 사랑과 근신의 마음이라고 한다. 이 세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