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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심을 자랑하지 말라 / 렘 11:18-23, 약 3:13-18
서양 속담 중에 시기심이 심한 사람을 가리켜 ‘이웃이 번창할 때 야윈다’라는 말이 있고, 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우리 속담도 있다. 이러한 시기심은 온갖 죄악의 근원이 된다. 구약성서를 보면, 아벨을 시기하여 그의 형 가인이 동생을 살해하였고, 사울은 젊은 다윗의 인기가 높아지자 그를 시기하여 죽이고자 했으며, 또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요셉은 형들의 격력한 시기를 받아 애굽으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새 나라가 임할 때 그 왕국의 좌우 정승의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탐하는, 시기하고 질투하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다.
한 예로 어떤 젊은 여인은 먹기만 하면 토하며 몸이 약해지는 병세가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의학으로도 병의 원인을 못찾는다며 포기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다시 정신과 의사와 상담하게 되었는데 마침내 그 병이 정신적인데 원인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곧 그 여인은 사랑하는 남편의 마음이 아내인 본인보다 시어머니에게 더 쏠린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시어머니에 대한 질투심, 시기심이 북받쳐 한지붕 밑에 같이 살면서 너무 미워하다보니 신체상으로 병이 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도 백해 무익한 시기심, 질투심이 우리 마음 속에도 도사리고 있어서 때에 따라 이것이 발동이 걸리곤 한다.
욥 5:2절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본문 16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사도 베드로도 이렇게 권면하고 있다. 벧전 2:1-2절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과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았다면 시기와 비방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처럼 말씀을 사모하라, 위를 바라보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기심이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자주 나타난다. 시기심이 마음에 자리잡으면 기도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 이웃과 형제를 미워하게 되니 살인하는 죄를 짓게 되며 마음에 지옥을 이루게 된다. 우리는 이 시기심을 용납하지 말고 그때그때 철저히 처리해야 한다.
본문 14-15절을 보면 우리 마음 속의 독한 시기심과 이기심은 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땅 위의 것(세상) 정욕의 것(욕심), 귀신의 것(마귀)이다. 그러므로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악한 일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 사람의 마음 속에 시기심이 자리잡고 있으면 남을 비방하게 되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쾌감을 즐기고, 심지어 추측이라는 심증을 가지고 다른 이의 인격을 살해하는 악한 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시기심과 비방하는 말이 악한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시기심은 다른 사람을 향하여 화살을 쏘는 것이라는 것도 인정을 한다. 또한 그 쏜 화살이 반드시 내게로 돌아와서 나를 괴롭힌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대개 사람들은 설교를 들을 때나 성경공부를 할 때에는 지당한 말씀이라고 긍정하면서도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누구의 흉허물을 말하면 귀가 쫑긋하며 활짝 열려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심지어는 쾌감까지 느낀다. 그러면 땅 위의 것인 시기심을, 정욕의 것인 질투심을, 귀신의 것인 증오심을 어떻게 제거하고 절제하며 승리의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겠는가?
1. 어떻게 땅 위의 것인 시기심의 발동을 제어할 수 있을까?
그 해답은 신앙적인 섬김의 삶의 가치를 깨닫는데 있다. 신앙적인 삶인 섬기는 삶을 설명하려면 땅 위의 삶이 무엇인가 살펴보아야 한다. 땅 위의 삶이란 어떠한 삶을 말한다고 생각하는가? 어기 성서에 인용한 ‘땅 위’라는 헬라어 원어의 뜻은 ‘힘으로 다스리는 사회, 권세로 지배하는 사회’라고 설명할 수 있다. 지배욕이 통하고 지배력이 다스리는 사회가 바로 땅 위요, 이러한 가운데 시기심은 움튼다는 것이다. 땅 위는 권력으로 사람을 다스리려 하고, 얻은 지식으로 사람을 이용하고, 모아 놓은 재물로 사람을 부리고 있다. 그리고 지배를 당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지배하려는 자에 대한 거부 반응이 생긴다. ‘자기가 뭔데’ 하는 시기심, ‘어디 두고 보자’ 하는 질투심이 나타나는 것이다. 땅 위의 삶은 무엇이든지 나와 비교를 하니 배가 아프고 열등의식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보다 나은 것은 못 봐주고 어떻게 해서라도 끄집어 내리거나 흔들어 떨어뜨리자니 비방하고 모함하는 악을 범하는 것이다.
그러면 신앙적인 사람은 어떤 것인가? 예수님의 마가 10장의 가르침과 그의 생애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세상 권세 잡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할 것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러가서 주님이 새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면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냐에 관심이 많았다. 열두 제자들을 둘러 앉히시고 ‘이 세상의 집권자들이 구하는 것이 바로 너희가 경쟁하고 수군거리고 쟁론하는 그런 것이요 남을 지배하려는 삶이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마다 종이 되고,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끝이 되며, 지배하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느니라. 너희 중에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리라’ 하시면서 예수님은 신앙적인 삶이 무엇인가를 선포하셨다. 45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섬기려는 삶에 무슨 시기심이 있는가? 자기 목숨을 내어주려는 절대적인 사랑의 삶에 무슨 질투심이 있겠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기심을 치료하고 모든 분쟁을 처방하는 특효약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지배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되고, 성공자가 아니라 희생자가 되며, 으뜸이 되고자 함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종이 되려는데 있다. 곧 섬기는 삶의 위대한 가치를 자각할 때 세상적인 시기심은 꼬리를 감추고 신앙적인 봉사심이 무성해지게 되는 것이다.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땅 위의 세계를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교회 안에서도 땅 위의 의식과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는 모습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교회 직분에 대한 교인들의 의식만 해도 그렇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교회의 직분을 받는 것을 교회 안에서 계급을 차지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직분에서 탈락되면 분노하고 섭섭해 한다. 집사 임명에서 빠지면 교회를 나오지 않는다. 직분은 출세가 아니다. 직분은 봉사하라고 준 것이다. 직분이 클수록 더 많이 봉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상대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께 충성하고, 또한 내 이웃을, 주의 몸 된 교회를 내 몸처럼 사랑하고 섬기는 사명을 받은 것이다.
테레사 수녀를 가까이 하는 사람마다 그녀의 인격에 순결한 감동을 받는다. 질투없이 살아가는 그녀의 삶의 모습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커다란 도전이 되었다. 어느 날 테레사와 함께 살고 있던 한 분이 그녀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수녀님, 당신은 잘사는 사람, 평안하게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높은 자리에 있는 그런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 시기심이 안 생깁니까?’ 이 질문을 받았을 때 테레사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으니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참으로 섬김의 지혜와 섬김의 자부심을 가지고 신앙적인 삶을 영위하는 한 수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님 왕국의 스타는 섬기는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보좌 앞에서 상급을 받을 때 ‘너는 목사로 있었느냐?’가 아닐 것이다. ‘너는 교회에서 겨우 그 흔한 집사로 봉사하다가 여기 왔느냐?’ 하며 책망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참으로 가족을 섬겼느냐? 네게 주어진 직책으로 교회와 이웃을 얼마나 충성되게 섬겼느냐?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어 땅 위의 삶에 근거한 시기심의 발동을 제어했느냐?’고 질문하실 것이다.
2. 정욕의 것인 질투심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까?
유대인은 한국 사람들처럼 질투심과 욕심이 많은 민족이다. 그런러데 유대인 랍비들의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날 한 천사가 두 사람의 유대인 여행자를 만났는데, 한 사람은 욕심쟁이고 한 사람은 시기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 둘은 천사와 함께 한참 여행을 하다가 헤어져야 했다.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천사가 말하였다. ‘이토록 다정한 두 분과 제가 여행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헤어지기 전 두 분의 소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먼저 말하는 사람의 소원은 그대로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분은 첫 소원의 갑절을 들어드리겠습니다.’ 욕심쟁이는 물론 두 갑절을 받고자 입을 딱 다물었다. 질투심이 많은 이 친구도 욕심쟁이가 갑절의 복을 받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서로 먼저 말하기를 기다려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급기야는 욕심쟁이가 참다 못해 화가 폭발했다. 질투쟁이의 목덜미를 잡으며 ‘너 욕심도 많구나. 먼저 이야기하지 않으면 죽여 버릴테다’ 하며 다그치자, 질투쟁이는 화가 나서 천사에게 그의 소원을 말하였다. ‘내 눈 하나만 멀게 해주세요.’ 그는 욕심쟁이이 두 눈이 멀어버리기를 원한 것이다.
갈 5:15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시기심은 다른 사람을 향해서 화살을 쏜다. 그런데 그 화살은 언제나 내게로 돌아와서 다시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이 정욕에 대한 처방이 무엇인가?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욕심을 어떻게 버릴 수가 있는가? 성서에 보면, 계속해서 얻고 취하는 것으로 삶의 본질을 삼고 있는 인간을 향해서 외치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곧 인생은 적신으로 왔다가 적신으로 가는 존재이니,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맡겨주신 재능과 재물을 통하여 남에게 주는 것을 삶의 본질로 삼으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얻기 위하여, 쌓아두기 위하여 땀을 흘린다. 그런데 하나님은 네 보물을, 네 달란트를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창고에 담아 보라. 네 재주와 생애를 나누어 주어 보라. 그것이 삶의 보람이요 성공이며, 그런 자에게 여호와는 동행하시고,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형통하리라고 약속하고 계신다. 부모가 자녀 잘되기를 바라면서 이것도 주고 저것도 준다. 그러면서 기뻐한다. 주는 것이 기쁜데 그곳에 무슨 시기가 있겠는가?
미주 대륙을 개척한 청교도들은, 그들의 삶 가운데 자기 재능을 활용하지 않거나 재산을 남기고 죽는 것을 치욕적인 죄로 간주하였다. 하나님께서 부여한 재능이나 건강을 가지고 일하지 않는 것도 죄요, 또 가치있게 쓰라고 축복한 재산을 그냥 남기고 죽는 것도 수치스러운 죄로 알았다. 그래서 청교도 정신을 이어받은 미국인들 중에는 많은 분이 그들의 재산을 죽기 전에 종교 사업, 또는 교육 재단에 기부하고 자선사업에 투자하였다. 미국의 유명한 대학이나 병원들이 그렇게 생겨났으며, 또 훌륭한 선교기관들도 그렇게 생겨난 것이다. 가난의 쓰라림을 맛본 동양인은 그만한 여유가 없다. 어떤 방법으로라도 긁어모은 것만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러나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가장 분명한 교육은, 욕심으로 긁어모으기 위하여 살지 말고 나누어주며 살라는 것이다. 그 절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다. 요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무엇을 하셨나? 독생자를 주셨다. 그리고 독생자는 하늘 영광을 버리고 육신으로 이 땅에 인자로 오셔서 무엇을 하셨나?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신 것이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이제껏 나는 무엇을 주면서 살아왔는가? 얼마나 바치며 살아왔는가? 주님 앞에서는 날 여러분에게 ‘얼마나 벌엇느냐?’고 주님은 묻지 않는다. ‘너는 얼마를 주었는가?’라고 물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 삶의 성공의 척도를 얼마나 벌었느냐에 두지 않고, 얼마만큼이나 주었는가로 판단하실 것이다. 성서는 말한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나님께 바치고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성도는, 얻는 것에 대한 욕심에서 자유할 것이요 질투심에서 해방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젊음을 불살라 가난한 이를 돕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전파하다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목숨,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우리를 위하여 흘리셨다.
3. 시기심은 귀신의 것으로 마귀가 가져다 주는 농간이다.
마귀는 본래 천사장 중의 하나인 루시퍼가 자기 위치를 떠나서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다가 타락한 것이다. 롬 12:2-3절상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라고 권고하고 있으며, 계속 읽어내려가면 하나님이 주신 은사대로, 직분대로, 분수대로 살라고 했다. 많은 사람이 주님 안에서 한 지체가 되어, 주신 은사와 직분을 통하여 완전한 몸을 이루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각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사와 위치가 있다.(예로 부엌의 그릇들) 하나님은 나의 재능대로 내 위치에서 내가 쓰임받기를 원하신다. 내 모습 이대로 주님에게 쓰임받기 위하여 순종하는 자세를 가질 때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이다. 나에게 부여된 삶의 고유한 영역에서 하나님을 상대로 성실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갈 5:26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나는 내가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거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시기를 낳는다. 다시 말한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의무와 삶의 영역에 성실하자. 그러면 시기심은 힘을 잃게 될 것이다. 17-18절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우리는 ‘오늘도 누구를 섬기는 하루가 될까?’ 하고 섬기는 삶의 자부심을 갖자. 그리고 얻고 받기 위하여 살기보다는 바치고 주기 위하여 살자. 주는 참 기쁨을 체험해 본 사람은 안다. 그리고 맡겨진 사명에, 자신이 처한 삶의 여건에 성실하자. 하나님의 위로부터의 축복이 임하여 시기심이 사라질 때, 이 땅에 천국은 이루어질 것이다. 이런 목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구원하셨으며, 하나님의 백성이요 주의 종으로 택하셨다. 시기하여 비방하지 말고 사랑으로 섬기고, 나누어주고, 성실함으로 귀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상급 받기를 바란다.
(1995-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