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 않은 복음, 자랑인 복음
2021. 9. 26(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1:11-17
여러분은 살면서 부끄럽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정치학박사 김지윤씨가 세바시에서 쪽팔리게 살지 맙시다는 주제로 강의를 하였다. 그 강의에서 김지윤씨는 미국에서 공부할 때 일본외무성의 후원으로 연수를 온 친구 이야기를 한다. 일본황실가문이고, 동경대를 나와서 주미대사관에서 일하는 최고 엘리트인 이 친구는 연수받는 2년 동안 자신이 잘아는 동북아시아의 정치학, 일본정치학을 들으면 쉽게 공부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막스주의, 군사안보학과 같은 어려운 공부를 하였다. 일반적으로 연수를 가면 쉬어가면서 공부를 한다. 그래서 강의는 잘 알고 있는 내용으로 듣는데, 이 친구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왜 그런 과목을 공부하느냐?고 물었더니 다 아는 것을 배우는 것은 쪽팔리는 것이 아니냐? 하고 말한 것이다. 일본 친구가 부끄럽다고 말하는 것은 외무성에서 연수를 보내어 주었는데,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부끄럽다고 여기겠는가? 김지윤박사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경제가 급성장하였다. 이렇게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요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래서 대부분이 명품가방을 사고, 또 여행을 다니면서 부요를 누릴 때, 그 부를 행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부끄럽게 여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사회에 심각한 문제를 남겼다. 왜냐하면 정말 부끄러운 것은 가난이 아니라, 편법과 거짓으로 부를 모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난이 부끄러운 사회는 편법과 거짓을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용납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무엇을 부끄러워 하느냐?에 따라서 사회는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신앙인으로서 저와 여러분이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그 부분을 읽어보자.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있는가? 이전에도 설명한 것처럼 AD 49년에 로마 황제 클라우디오는 로마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들을 다 추방하였다. 왜냐하면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기독유대인과 정통유대인들의 분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회당에 모일 때마다 싸웠기 때문에 이것이 로마사회를 시끄럽게 한 것이다. 그래서 클라우디오 황제는 로마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하였다. 그런데 유대인이 사라진 로마의 경제는 급속도로 나빠졌다. 그래서 5년이 지났을 때 추방령이 해제되어서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온 것이다.
이렇게 5년이 지나 유대인들이 로마로 다시왔을 때 로마사회가 유대인을 보는 시선은 어떠했겠는가? 반가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들은 싸우는 사람이야 하는 그런 좋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시선을 받는 유대인 중에 예수님을 믿는 기독유대인들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라는 사람을 믿는데, 그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고, 또 3일만에 다시 살아나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십자가형은 로마인들이 가장 협오하는 것인데,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고, 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니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로마사회에서 복음을 자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기 때문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아니 갈라디아서 6:14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라고 고백한다.
그러면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성도와 복음을 자랑하는 바울의 삶에 어떤 차이가 있었겠는가? 1962년 빌리그레함 목사님이 시애틀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그 집회를 마친 후 함께 기도하는데, 갑자기 마릴리 먼로(Marilyn Monroe)가 생각이 났다. 그래서 목사님은 집회가 마친 후 스텝들에게 마릴리 먼로와 통화를 할 수 있게 연락을 해 보라고 하였다. 스텝들은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마릴리 먼로와 통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드디어 매니저와 통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매니저는 빌리그레함 목사님이 마릴리 먼로와 통화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듣고 2주 후에나 가능하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어버린다. 그리고 이틀 후에 마릴리 먼로는 침대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최고의 배우였던 마릴리 먼로는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수면제를 먹었는데, 그 날은 많은 수면제를 먹어서 다음날 일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침대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마릴리 먼로 옆에는 일기장이 있었다.
나는 한 여성으로 지닐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다. 아직 건강할 뿐 아니라, 매우 아름답고 돈도 많이 모았다. 하루에 수백통의 팬레터를 받으며 사랑에 굶주리지도 않는다. 부족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왠일일까 나의 마음은 외롭고 공허하며 기쁨이나 평안이 없다. 나는 이유없이 불행하다.
왜 마릴리 먼로는 이유없이 불행하였겠는가? 그런데 마릴리 먼로와 쌍벽을 이루었던 에반스 콜린(Evans Colin)는 전혀 다른 말을 한다. 에반스 콜린은 할리우드 배우들이 모여 식사하는 자리에서 대뜸 여러분! 나는 지금 사랑에 빠졌습니다!고 말했다. 그러자 장내는 시끌거리기 시작했고, 그때 누군가가 도대체 그 행운을 잡은 사나이가 누굽니까?하고 외쳤다. 그때 에반 콜린스는 거침없이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그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선택했습니다. 그 분은 날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는 그분을 사랑합니다.
그 말을 한 에반스 콜린은 할리우드를 떠나 신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선교사와 결혼하여 7년동안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선교사역을 한다. 그리고 안식년이 되어 미국에 돌아와 빌리그레함 목사님을 만났는데, 그때 빌리그레함 목사님은 할리우드의 명예와 부를 버리고 예수님을 택한 일에 후회가 없는지?를 물었다. 그때 에반 콜린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네, 후회는 무슨 후회입니까? 할리우드의 스타나 영국 여왕의 자리도 지금의 저와는 바꿀 수 없습니다. 미국 대통령의 자리도 이 자리와는 절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저에게 가장 귀하신 분이십니다.
마릴리 먼로는 인생이 이유없이 불행한 삶을 살았는데, 에반스 콜린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러면 마릴리 먼로와 에반 콜린스의 차이는 무엇이었는가? 이것이 복음이다.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우리의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이유없이 불행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어도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면 후회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복음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우리교회는 이번 주부터 갈라디아서를 공부한다. 그 강의 때 나오는 내용을 오늘 이 시간 맛보기로 보여드리고자 한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갈리디아교회는 거짓교사로 인하여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이 전한 복음마저 부인하는 갈라디아교회에 바울이 쓴 편지가 갈라디아서이다.
그러면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쓸 때 어떤 심정이었겠는가? 내가 전한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가 있을지어다(갈 1:8)고 말할 만큼 바울은 굉장히 흥분되어져 있었다. 그런데 만약 제가 바울이었다고 해도 그렇게 흥분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1차 전도여행에서 구브로를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이고니온-루스드라-더베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런데 그 지역이 바로 갈라디아지역이다. 갈라디아는 창원과 같은 지명이 아니라, 경상남도와 같은 구역명이다. 그 갈라디아는 북갈라디아와 남갈라디아로 나뉘어 지는데, 사도 바울은 남갈라디아에서 1차 전도여행을 한 것이다.
그때 바울이 얼마나 힘들게 복음을 전했는지 사도행전 13-14장은 잘 기록하고 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은 유대인에 의하여 쫓겨나서 이고니온으로 간다. 그런데 이고니온에서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이 두 패로 나뉘어져 분쟁이 생기고, 결국 바울은 쫓겨난다. 그래서 루스드라에 갔을 때 바울은 앉은뱅이를 일으켜 신적인 존재가 된다. 그런데 옷을 찢으며 우리는 너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다고 하면서 고함치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래서 루스드라에 복음이 증거되었는데,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이 선동하여서 바울은 돌에 맞아 쓰러졌다. 그때 사람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밖에 던져 버렸다. 그래서 더베로 간 바울은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자신의 고향인 다소가 있는데, 자신을 박해한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으로 돌아간다. 바울이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으로 돌아간 것은 교회를 살피기 위함이었다. 바울을 쫓아낼 정도로 유대교가 강력하게 저항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그 유대교도들이 있는 교회들을 살피기 위하여 다시 돌아간 것이다. 그런데 갈라디아교회가 너무 빨리 복음에서 돌아선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바울이었다면 이러한 갈라디아교회에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얼마나 많이 헌신했는데, 너희가 어찌 라는 말을 하실 분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13-17절로 이야기 한다. 함께 읽어보기 바란다.
(갈 1:13-17)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2가지를 말하고 있다. 먼저 하나는 나는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인데, 이런 나를 하나님이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라비아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은 박해자인 나를 부르시고, 계시를 허락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울이 복음을 자랑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내게 베푼 은혜를 알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면 복음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랑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복음이 자랑이 되어져 있는가? 윤동주시인이 1942년 일본 유학시절에 쓴 시 중에 쉽게 씌어진 시가 있다.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學費) 봉투(封套)를 받아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유학 간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고, 또 문학도를 시를 쓰는 것이 왜 부끄러운 일인가? 그런데 윤동주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은 나라를 위하여 피 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땀내와 사랑내 나는 학비받아 편안하게 공부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니 나라 잃은 백성이 독립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그 사실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이렇게 편안한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할 줄 알았던 윤동주는 인생을 쉽고 편하게 살 수 없어 독립운동을 행한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부끄러워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내게 베푼 은혜가 기억나고, 또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깨달아 알아서 복음을 자랑하는 자리에 설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복음을 위하여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주 앞에 엎드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의 자랑이 오직 십자가가 되는 복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