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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도’를 따라... / この道に従って...。(2022년 10월 16일 주일예배)
본문; 사도행전 24:10-21
행 24:10 ○그 때에 총독이 바울에게 말하라고 머리를 끄덕이니, 바울이 대답하였다. "총독님께서 여러 해 동안 이 나라의 재판장으로 계신 것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기쁜 마음으로 내가 한 일을 변호하겠습니다. 11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은, 총독님께서도 곧 아실 수 있습니다. 12 그리고 나를 고발한 사람들은 내가, 성전에서나 회당에서나 성내에서, 누구와 논쟁을 하거나, 군중을 선동해서 모으거나,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13 지금 그들은 내가 한 일을 들어서 고발하고 있지만, 총독님께 아무 증거도 제시할 수 없습니다. 14 그러나 나는 총독님께 이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내가,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그 '도'를 따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것을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15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는데, 나를 고발하는 이 사람들도 그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곧 그것은 의로운 사람들과 불의한 사람들의 부활이 장차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나도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없는 양심을 가지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17 나는, 내 겨레에게 구제금을 전달하고,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려고, 여러 해 만에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18 그들은, 내가 제물을 바치는 절차로 성전에서 정결예식을 행하는 것을 보았을 뿐이고, 내가 작당을 하거나 소동을 일으키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19 그 자리에는 아시아에서 온 몇몇 유대 사람이 있었는데, 내가 한 일을 들어 고발할 것이 있으면, 그 사람들이 총독님 앞에 나타나서 고발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20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의회 앞에 끌려가서 섰을 때에, 이 사람들이 내게서 무슨 잘못을 찾아냈는지, 그것을 말하라고 해 보십시오. 21 다만 나는 그들 가운데 서서 말하기를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은, 죽은 사람들의 부활과 관련된 문제 때문입니다' 하는 이 한 마디 말을 부르짖었을 뿐입니다.".
10. 総督が、発言するように合図したので、パウロは答辯した。「私は、閣下が多年この国民の裁判をつかさどる方であることを、存じ上げておりますので、私自身のことを喜んで辯明いたします。11. 確かめていただけば分かることですが、私が礼拝のためエルサレムに上ってから、まだ十二日しかたっていません。12. 神殿でも会堂でも町の中でも、この私がだれかと論争したり、群衆を扇動したりするのを、だれも見た者はおりません。13. そして彼らは、私を告発している件に関し、閣下に対して何の証拠も挙げることができません。14. しかしここで、はっきり申し上げます。私は、彼らが『分派』と呼んでいるこの道に従って、先祖の神を礼拝し、また、律法に則したことと預言者の書に書いてあることを、ことごとく信じています。15. 更に、正しい者も正しくない者もやがて復活するという希望を、神に対して抱いています。この希望は、この人たち自身も同じように抱いております。16. こういうわけで私は、神に対しても人に対しても、責められることのない良心を絶えず保つように努めています。17. さて、私は、同胞に救援金を渡すため、また、供え物を献げるために、何年ぶりかで戻って来ました。18. 私が清めの式にあずかってから、神殿で供え物を献げているところを、人に見られたのですが、別に群衆もいませんし、騒動もありませんでした。19. ただ、アジア州から来た数人のユダヤ人はいました。もし、私を訴えるべき理由があるというのであれば、この人たちこそ閣下のところに出頭して告発すべきだったのです。20. さもなければ、ここにいる人たち自身が、最高法院に出頭していた私にどんな不正を見つけたか、今言うべきです。21. 彼らの中に立って、『死者の復活のことで、私は今日あなたがたの前で裁判にかけられているのだ』と叫んだだけなのです。」
지난 주일 말씀을 통해 자기 욕망과 탐욕을 위해 자신에게 맡겨진 재능과 실력을 탕진하는 더둘로나 아나니아와 같은 이들과 오직 주님을 향해 순종하는 바울과 같은 인생을 비교하였습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달란트와 같은 재능과 실력을 이기적인 태도나 자기중심적인 탐욕을 채우는 일에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해서 온전히 섬기는 일에 활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더불어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바울이 자신에게 허락하신 재능을 어떤 태도와 자세로 활용하였는지를 다시금 발견하고 또한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메시지의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지난주일 설교를 하면서 제가 한 달란트의 가치에 대해 잘못 표현한 것이 있어서 바로잡겠습니다. 한 달란트는 무게의 단위이면서 동시에 화폐의 단위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자료]에 보시는 대로... 화폐의 단위인 은 한 달란트와 중량의 단위인 금 한 달란트의 가격이 조금 차이가 있는데요. 먼저 화폐단위로서 은 한 달란트는 약 6천 데나리온으로서 노동자 한 사람의 6,000일치 임금의 가치가 있습니다. 1년 365일중에 주말과 공휴일을 제외하면 약 250여일을 일한다고 하는데요. 이를 근거로 은 한 달란트의 통화가치는 어림잡아 평균치로 각자가 자신의 약 24년 동안의 연봉이라고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금 한 달란트는 금의 무게를 측정하여 환산하는 단위로서 현재의 금시세로 바꿔보면 [자료]에서 보시는 대로 약 26억의 값어치가 있는 중량의 금의 양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이처럼 한 달란트의 재산을 맡은 종도 실은 매우 큰 액수의 자산을 운용할 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큰 재능과 실력을 주님께 받아서 살고 있는지를 다시금 떠올려 보면서, 지난 주일에 잘못 전달한 정보를 바로잡습니다.
오늘 본문도 비교적 긴 분량의 내용인데요. 웅변가인 더둘로와 아나니아가 총독 벨릭스에게 바울을 그릇된 말로 고발하는 것에 대해 바울이 변론하는 진술입니다. 우리도 모두 납득하고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지요. 바울의 진술을 간략하게 정리를 하면 11절부터 13절까지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소동을 일으키거나, 문제가 될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구요. 다음으로 14절부터 16절까지는 바울의 신념은 바울을 고발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신념과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17절부터 20절까지는 유대인 장로들의 고발하는 것은 거짓된 것이며, 날조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변론의 내용을 가벼운 시선으로 보면 단지 자신의 억울한 처지에 대해서 매우 논리적으로 변론을 절 하고 있는 것으로만 느껴지기 십상입니다. 게다가 바울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말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과연 이 글을 읽는 나는 구체적으로 과연 어떤 메시지를 들을 수 있을까... 하고 고민이 되는 것이 사실인데요. 바울의 논리적이고 매우 이성적인 태도를 배우라는 말씀인가? 아니면 이런 언변을 연마하기 위해서 특별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말씀일까요? 그도 아니면 억울할 때에는 적극적으로 반박해도 된다는 메시지일까요?
저는 바울의 변론하는 태도와 말들을 찬찬히 반복해서 읽고 보면서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하였는데요. 그 첫 번째는, 그는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서 상대의 약점을 들추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재판의 절대적 권력을 가진, 즉 재판의 결과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총독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부하거나 선처를 구하는 발언을 제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보기에 따라서 세속적인 논쟁과 언쟁을 할 때에 있어서 매우 불리한 태도입니다.
누군가와 언쟁을 하거나, 논쟁을 할 때에는 자신의 입장이 옳다는 것을 최대한 드러내기 위해서 상대의 약점을 말하거나, 감정을 상하게 하여 평정심을 흔드는 방법을 쓰는 것은 매우 오래된 노하우 중에 하나입니다. 이런 태도는 우리의 현실적인 일상생활에서 너무도 흔히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한데요.
예를 들어 가정에서 자녀들이 서로 싸우거나 다툼이 일어나면 아이들은 최대한 상대편 아이의 잘못이나 약점을 침소봉대하여 중재하기 위해 다가오는 부모에게 어필합니다. 아이들의 싸움만이 아니라, 어른들의 싸움과 다툼에도 그런 일들은 비일비재하지요.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누군가의 송사를 판단할 일이 있을 때 한 쪽의 말만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송사에서는 먼저 온 사람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의 상대자가 와서 밝히느니라 (잠 18:17)
죄가 많고 허물이 많은 이 세상의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뜻하지 않게 송사에 휘말리거나, 억울한 일을 변호해야 하거나, 혹은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을 때가 생깁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은 자연스레 상대방 혹은 누군가의 잘못이나 약점과 단점을 적극적으로 들춰내어 자신의 말과 입장이 옳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지만, 상대의 잘못으로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었다는 식의 말을 자주 합니다. 또한 자신이 실수하게 된 것은 누군가의 의도적인 사기와 부정이 원인이 되었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요. 대체로 복음을 믿지 않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언쟁하고 논쟁할 때의 특징이 이렇게 자신의 잘못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남의 탓을 하며 자신의 허물을 가볍게 보이려는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이들이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이유는 회개한 경험이나 태도가 없기 때문인데요. 회개란 먼저 자신의 잘못된 방향과 태도와 행동을 인지하고,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죄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아 거듭난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는 상대의 그릇된 시선과 태도를 문제 삼는 상식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진술함으로서 무결함과 무죄함을 증언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처럼 이렇게 당당할 수 있으려면 항상 진실하게 행하고, 진리 안에 주님과 동행하는 자세가 최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고, 빛은 숨겨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2주 전에도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세상에서 복음의 가치관을 중심으로 살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빛나는 존재로서 드러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마치 어항에 사는 금붕어가 자신의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다 보여 주고 사는 것처럼, 우리도 세상 가운데 있는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것을 알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1-32)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말씀은 진리를 알고만 있으면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거리낄 것이 없이 제멋대로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리이신 주님과 동행하면 우리의 행동이 진리의 반대편에 서 있는 죄와 허물의 감옥에서 벗어난다는 뜻이지요. 아울러서 남을 탓하고 단점을 고발함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유혹에서 자유하게 된다는 말씀으로도 들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바울은 진리를 알고, 그 진리와 함께 동행하는 자로서... “그 도”를 따르는 참된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러니 더둘로의 궤변이나, 유대인들의 고발에 어떤 헛점이 있는지, 어떤 약점과 단점을 지니고 있는지를 논쟁하거나 고발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 간지 12일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과 순수하게 자신의 믿는 바에 성실하였던 것, 그리고 유대의 군중들을 선동하거나, 소동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을 진솔하고 담담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담백하고 잔잔한 호수와 같은 평정심을 배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바울은 이 재판의 결과를 제 마음대로 결정할 권력을 가진 총독 벨릭스에게도 과도한 찬사를 보내거나, 아부하는 말을 남발하지 않았습니다. 지난주에 읽었던 본문에서 웅변가 더둘로는 벨릭스에게 하는 자신의 말 절반 가까이를 총독을 추켜세우며 아부하는 내용으로 채웠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총독의 공적이고 행정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임무에 대해 존중하는 인사말 외에는 어떤 아부도 하지 않고 곧바로 자기 변론의 본론을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권력과 권세, 그리고 권위나 혹은 외적인 여건과 형편에 따라 태도와 자세가 바뀐다는 흥미로운 심리학적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한국의 교육방송에서 실험을 하였습니다. [사진1] 이런 차림을 하고 쇼윈도우에 서 있는 사람에게 여성들은 이런 편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진2, 3]
하지만, 다시 이런 차림으로 쇼윈도에 서 있으면[사진 4] 이런 평가를 내리게 됩니다. [사진 5, 6]
사람들은 외모만이 아니라, 세속적인 권위나 권력을 나타내는 복장이나 옷차림에도 매우 민감한 태도변화를 보이는데요. 심지어 권위자의 복장을 갖춘 사람이 너무도 유치하고 말도 안 되는 몰상식한 선택을 강요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의하고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심리학교재에도 다루고 있는 매우 유명한 실험이 있는데요. 한 번은 일반인에게 파일럿 제복을 입혀 비행기 승무원들에게 새롭게 개발된 기내행동요령이라면서 상식을 벗어난 행동요령을 가르치구요. 한 번은 진짜 파일럿에게 캐주얼을 입혀 승무원들에게 상식적인 기내행동요령을 강의하는 실험입니다.
실험결과 기내 승무원 교육을 받은 항공대학 졸업반 학생들이라도 그들 앞에서 일반인이 파일럿 제복을 입고 강의하면, 상식에 벗어나는 행동요령을 가르치더라도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면 진짜 파일럿이 일반인처럼 옷을 입고 강의하는 내용에는 신뢰하지 못한다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말씀 드린 이런 류의 심리학 실험에 대한 내용이 상당히 많이 있는데요. 사람은 대체적으로 권위를 가진 누군가의 말을 신뢰하며, 동시에 그들에게 생각과 마음이 매이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적인 조건으로 행동과 태도를 결정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미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삼상 16:7)
물론 우리도 사람의 내면을 한 번에 알아 볼 수 있는 재능이 있다면 인간관계의 여러가지 불편함과 껄끄러움에서 조금은 쉽게 자유로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특정한 심리검사나 혹은 성격유형검사를 통해 자신은 어떤 유형인지, 혹은 상대는 어떤 유형인지를 말하고 나누는 것이 유행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유형이라서 어떤 유형과 잘 맞고, 어떤 유형과는 상극이라서 피해야 한다는 결정을 손쉽게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어떤 회사들은 그런 성격유형검사를 면접의 참고자료로 사용한다고 하는데요. 사람의 내면을 쉽게, 그리고 편리하게 비교 분석하고자 하는 시대의 흐름을 조금은 들여다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워낙에 사람들과의 관계가 복잡하고 다양해진 시대라서 정서적으로 소모되는 것을 되도록 피하려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은 상대 인간의 중심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진리와 진실입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도 있지만, 굳이 우리가 사람의 속을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한다면 굳이 사람의 성격이나 유형을 알아내고 규정하여, 그것을 서로 구별하여 나와 맞고 안 맞고를 결정하여 분리하고 진단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그 계획하심과는 동떨어진 것은 아닌가 조심스레 생각해 봅니다.
다만 오늘 본문에서 발견한 이에 대한 가르침은...
바울이 총독의 권위와 외모를 보면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정당함을 진술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마음을 꿰뚫고 계시는 주님의 뜻과 약속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정작 우리가 의식해야 할 것은 우리의 속사람과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님을 통해 지금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 마음과 삶에 임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당당하게 권위자에게 아부하지도 않고, 상대를 깎아내리거나 논리의 헛점을 파고들지 않았던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을 받거나, 율법을 어기는 일이라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늘 본문 16절에서도 말을 하지만,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가지려고 힘쓰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투명한 양심을 갖고 사는 것, 진실하고 신실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투명하고 진실하고 경건하게 살아도 얼마든지 기쁘고 즐겁고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복음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이며 가르침인 것을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 주눅 들지 않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당당하게 부끄러움 없이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와 허물과 유혹과 부조리와 부정함을 다 이겨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지금 성령으로 저와 여러분 안에 와 계십니다. 한 순간도 떠나신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니 안심하며 사셔도 됩니다. 물론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 바라보며, 주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는 결단과 순종이 있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이 또한 주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당당하게 진리 안에서 투명한 양심으로 경건하고 거룩한 일상을 살 수 있도록 지켜 주실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의 묘안과 처세술에 따라 살기보다, 주님과 함께 진리 안에 순결하게 사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자신을 고발하는 이들의 논리적인 헛점이나 약점을 드러내기 위해 총독을 설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총독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지어내거나, 아부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현실은 자신을 합법적으로 죽이려는 정적들 앞에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형편을 손쉽게 좌우할 수 있는 권위자 앞에 있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더욱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매일 서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동행하며, 자기 안에 성령님께서 임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침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경건하며 담대하게 자신의 무죄함을 진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당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투명한 양심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주님을 바라보며 경건하고 올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참 사람됨의 모습이며, 아름답고, 행복한 일상인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행복하길 갈망합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사랑이 풍성하길 열망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사람답게 늘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기를 꿈에도 소망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바울처럼, 믿음의 선배들처럼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늘 성령충만한 일상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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