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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성경: 디모데전서 6장 11~12절
찬송: 357, 410, 587, 589, 591
설교: 이 경준 목사님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디모데전서6: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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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은 잘 지내셨습니까? 아무쪼록 하나님의 은혜로 깊어 가는 가을과 함께, 다가오는 겨울과 연말연시에도 행복한 날들이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명절이 되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마음 한구석에 남모르는 근심을 갖게 됩니다. 반갑게 고향 집을 찾기는 하지만, 온 식구가 같이하는 차례상을 어떻게 대할지가 걱정이 되는 것이지요. 정말 난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 말씀에 “너 하나님의 사람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라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인류의 역사 속에는 여러 형태의 문화가 존재해 왔었습니다. 그 문화의 중심에는 항상 종교가 있었고, 제각각의 종교에는 그 종교만의 특별한 세계관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속한 기독교의 세계관은 성경 말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면 구원받게 된다는 진리를 믿습니다. 그런데 1,600년경으로부터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따라 받을 수 있다는 보수주의(칼빈주의)와 구원은 인간 자유의지로 받게 된다는 알미니안주의(자유주의)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해석을 하는 것도 보수주의에서는 성경으로만 할 수 있다고 했었지만, 자유주의에 속한 사람들은 성경해석을 성경뿐만 아니라 다른 세상 학문을 차용(借用)하여도 무방하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유주의에 속한 사람들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게 되었는데 종교관에 있어서 기독교만이 절대적인 종교가 아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여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 다원론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종교 다원주의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모든 종교에는 구원이 있다'라고 합니다. 이런 종교 다원주의는 인본주의(人本主義)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참된 종교라 면 인본주의는 배제하고 신본주의(新本主意) 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의 벽을 허물고, 서로에게 구원이 있는 종교라고 인정해 주면은 진리에 대한 다툼이 없어질 것 같이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때부터 종교의 생명은 끝이 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원주의자들은 산을 오르는 사람이 어느 방향으로 오르든지 도착하는 곳은 산 정상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펴기도 합니다. 그럴듯한 말인 것 같지만 틀린 말입니다. 구원으로 향하는 길은 산봉우리 하나를 목표로 오르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로 향하는 진리의 길을 걷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영혼도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나는 것이라면 도착할 곳이 같을 수도 있겠지만, 영혼은 이생에서 참된 구도의 길을 걸은 결과에 따라서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종착점이 모두 같다는 말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길을 잘못 선택하여 가는 사람이 같은 종착점에 도착할 확률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흔히 절에서 성탄절을 축하하거나 성당에서 석탄일을 축하하는 행사를 하면서 종교 간에 다툼을 없애려는 노력이 보이고 있습니다. 겉보기는 좋은 것 같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진리와 진리가 아닌 것이 타협하여 공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종교 다원주의의 발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의 시작이었던 원시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종교가 생겨났고, 또 사라졌습니다. 그중에서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해온 종교는 몇몇에 불과합니다. 살아남기 위하여 종교의 근본이 되는 교리를 서로 인정해 주고, 공존하려고 한다면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진작 없어졌어야 할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믿음의 본질을 흐리게 하지 않기 위해서 최소한 상대 종교에 대한 분석과 비평이 필요불가결(必要不可缺)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필요 속에서 생겨난 학문이 비교종교학(比較宗敎學)입니다. 비교종교학이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주요한 종교들의 사상과 성격, 그리고 신앙에 대해서 분석하고, 비교함으로 기독교를 변증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학문입니다. 이런 학문을 접함으로 기독교인들은 다른 종교들이 주장하는 구원론의 허구성(虛構性)을 들려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시시대로부터 신적인 존재의 필요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필요에 따라 스스로 신을 만들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 대상은 큰 바위라든지, 산이나, 오래된 나무, 그리고 물과 하늘의 정령이 있었고, 그 외에도 많은 것들입니다. 이른바 샤머니즘(shamanism)에 속한 것들입니다.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는 이런 신앙 모습을 곳곳에 존재하여 있습니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종교가 그와 같은 조건 속에서 발전되어 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특히, 일본 같은 나라는 각 가정에 신주(神主)라는 것을 소장해두고 예배 의식을 치르기도 하는데, 그들은 오래된 물건이면 무엇이든지 신으로 섬기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너무도 많아서 다 거론할 수는 없지만, 대표적으로 ‘아마데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라고 하는 팔백만 신을 섬기기도 하고, 심지어는 다 낡은 빗자루까지도 신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말도 안 되는 민속신앙이 종교로 발전하여 인간사회 속에서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나약함 때문이었습니다. 태어남으로부터 죽음이라는 공포 속에서 살아야 하고, 재난과 고난에 피난처가 필요했던 인간은 상상 속에서 현실을 초월하는 힘을 가진 존재를 상상으로 만들어 놓고, 그것에 의지해 보려고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아시아에는 불교 신자가 가장 많습니다. 그들은 윤회(輪回)를 주장합니다. 윤회란 수레바퀴가 끊임없이 구르는 것처럼 업보(業報)에 따라 삶이 돌고 돈다는 의미입니다. 이생에서 부귀공명을 누리는 사람은 전생에서 착한 업을 쌓았기 때문이고, 이생에서 짐승으로 태어나거나 고생을 하는 사람은 전생에 악한 업을 쌓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업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 세상에서 고귀한 사람으로 태어나 부귀공명을 누리려면 이생에서 착한 업을 많이 쌓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생을 증명하려면, 전생에 대한 기억이 있어야 할 텐데 사람들에게는 그런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이생에서 평안을 누리거나 험한 삶을 사는 원인이 전생에서 착한 업이나 악한 업을 쌓은 결과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기억이 없다는 것은 허구에 지나지 않은 설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구원을 영원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철학적인 방법으로 증명하려고 했었는데 그 학설을 신(神) 존재증명(存在證明)이라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님을 최초원인자(最初原因者)로 생각했습니다. 최초원인자(最初原因者)란 움직이는 물체를 최초에 움직이게 한 궁극(窮極)의 원인(原因)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움직인다는 것은 다른 무언가의 작용에 의한 것이고, 또 그 작용은 다른 무엇에서 나오는 힘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이 원인을 끝까지 추적해보면 궁극적으로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인을 찾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인데,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궁극원인(窮極原因)이라고 하며, 만물의 창조자 곧 하나님의 존재증명이라고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 존재증명이 되었다 하더라도 구원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구원하시는 하나님께로 인도되는 길이 필요한데 우리는 이 길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라고 믿습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길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구원받는다는 개념을 ‘예수를 믿는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내에서도 초기 기독교 때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구원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 논쟁의 핵심은 대부분 믿음이란 무엇을 말하는가였습니다. 교회에서는 구원의 조건이 되는 믿음을 조금씩 다르게 해석함으로 교회 내에서 파벌이 생기고 분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때로는 이단이라는 낙인을 찍어서 교회 공동체에서 추방하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믿음과 구원에 대한 해석은 조금씩 다르게 하는 교회가 많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는 원칙에는 동의하지만, 믿음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믿음인가? 라는 질문에는 조금씩 다른 해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공동체에 소속이 되어서 신앙고백을 하면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는 복음주의적 교회가 있는가 하면, 좀 더 적극적으로 신앙생활과 함께 생활 속에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열매도 맺어야 한다는 보수적인 교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전자와 같이 교회만 다니면 쉽게 예수를 믿는다고들 합니다. 그 믿는다고 하는 사람 중에는 형식적인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과 지식적으로 예수를 조금 아는 정도의 사람들도 포함하고 있어서 그런 믿음은 구원받을 믿음으로 보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구원을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은 모든 기독교인의 일치된 견해이지만 믿음에 대한 해석은 이렇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영혼이 구원에 이르려면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해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에 이르려면 믿음에 이르는 모든 조건을 힘써 지켜나가는 것이지, 그저 믿는다는 고백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한다고 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야고보서 2장 14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당연히 믿음의 증거가 되는 행함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참된 믿음은 신앙적 고백과 함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믿음은 입술로 고백하는 것뿐만 아니라 행함의 열매도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온전한 믿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신앙의 고백과 함께 그 고백에 따르는 성도의 옳은 행실이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고백하는 믿음과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열매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라고 19장 8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구원받은 성도의 세마포 옷은 옳은 행실, 곧 그리스도인의 열매입니다.
믿음을 쉽게 해석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씨앗을 선물로 주셨는데 그 씨앗을 가지고 성장시키고 열매를 맺게 해야만 온전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믿음의 씨앗만 있고, 열매도 맺지 못하였다면 그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닐 것입니다. 사과의 씨를 가지고 사과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듯이 말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 열매는 성도의 옳은 행실입니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본문에서는 “선한 싸움을 싸워 영생을 취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추석을 지내시기에 힘이 드셨을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언제 어디에서든지 믿음의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되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라고 말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악에 대항하여 피 흘리기까지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때까지 선한 싸움을 싸워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된 것에 만족하면 안 됩니다. 적극적인 기독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구원은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입니다.
사랑과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디모데전서6:11~12)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과 진리의 빛을 따라가야 하지만 우리는 진리와 타협한 세상적 지식으로 혼돈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 가운데 적당한 타협으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참된 생명의 길을 벗어나는 어리석은 길을 택하지 아니하도록 날마다 말씀과 기도가운데 깨어있어 참된 생명의 길을 따라갈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말씀 가운데 옳은 행실에 힘쓰므로 하나님 나라의 상급과 면류관을 소유하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우리가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는 말씀 따라 살아가므로 날마다 감사와 기쁨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축복이 우리 삶 가운데 있게 하시고,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다가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에서 우리 주님과 함께 영원한 천국의 삶을 살게 하소서!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올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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