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
2024. 10. 20(주일낮예배) 누가복음 14:15-24
가수이고 영화배우인 미국의 마돈나(Madonna)는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연예인이다. 앨범의 수익이 15억불(2조)이었고, 비틀즈 다음으로 빌보드챠트에 가장 많은 이름을 올린 가수이다. 그런데 1991년 한창의 인기를 가지고 있을 때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성공의 정상에 섰지만, 한 번도 그것으로 만족한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나의 모든 노력은 끔찍한 열등감을 극복하는데 있었다. 열등감에서 벗어나 무대에 나가서 공연하면 그 순간은 특별한 사람이 된 것같지만, 다시 평범하고 시시해지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지금까지 반복되어 왔다. 그러므로 내 인생을 몰아가는 힘은 평범함에 빠지는 것에 대한 끔찍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마돈나는 평범함에 빠지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수고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여러분 이렇게 평범함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몸부림 친 마돈나의 삶이 행복해 보이는가?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마돈나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나온다. 오늘본문 16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 22장을 보면 그 잔치를 베푼 분이 왕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왕이 큰 잔치를 베푼 것이다. 그리고 큰 잔치는 유대인들이 오후에 베푸는 가장 풍성한 잔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고의 왕이 가장 풍성한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청함을 받은 사람의 반응이 어떠한가? 한 사람을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겠다고 양해해 달라고 말한다. 또 한 사람은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양해해 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나는 장가 들었으니 가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왕이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일치하게 사양하였다(18절). 이 말은 마치 그들이 마음을 맞춘 것처럼 그렇게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들이 잔치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핑계처럼 보이지 않는가? 왜냐하면 밭을 사고, 소를 사고, 장가를 가는 일을 계획없이 하는 사람은 없다. 돈을 모으고 또 몇번이나 살펴야 밭을 사고, 소를 사고, 장가를 가는 것이다.
그런데 주인의 잔치에 초대되어 이미 약속하였는데, 이 문제로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17절)라고 기록하고 있는 데 청함을 거절한 것이다.
왜 이 사람은 주인의 청함을 거절하였겠는가? 제가 어릴 때 불렀던 복음송이 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잔치에 갈 수 없소. 장가가야 하고, 소도 사야 하고
논과 밭에 나가서 할 일도 많아 내 어찌하리 죄송해요
한 어느 마을의 멋진 집에 살던 사람이 큰 잔치를 벌여놓고 손님 청했네
그가 널리 이웃더라 오라 했더니 그때 모든 사람들이 대답하는 말
갈 수 없소 갈 수 없소 정말 잔치에 갈 수 없소 장가들었는데 소도 사왔는데
논과 밭에 나가서 할 일도 많아 내 어이하리 죄송해요
이들이 청함을 거절한 첫번째 이유는 급한 일을 우선하였다는 것이다. 새로 산 밭을 돌아보고, 또 소도 살펴야 하고, 결혼한 아내와 기쁨을 나누어야 하는 급한 일을 하고 있다. 주인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중요한 일보다 급한 일을 먼저 하고 있었다.
사실 우리는 항상 중요한 일과 급한 일의 갈등 사이에 살고 있다. 그런데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알게 된 것은 급한 일을 먼저 하면 열심히는 살 수 있지만 성장은 할 수 없다. 그런데 중요한 일을 계속하면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쉬운 예로 건강관리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중요한 건강관리를 위하여 헬스를 매일 하면 어느 틈엔가 몸의 균형이 새로와지는 성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급한 일을 먼저 하는가? 중요한 일을 먼저 하는가?
이들이 청함을 거절한 두번째 이유는 청함을 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 높은 자리에 앉는 사람에 대한 비유이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청함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높은 자리에 앉았는데, 예수님은 청함을 받았을 때 상석에 앉지 말고, 끝자리에 앉으라고 말씀하였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였을 때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15절) 하고 말한 것이다. 그때 예수님이 오늘 본문인 큰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였다.
무슨 말인가? 잔치에 청함을 받아서 상석에 앉은 사람과 청함을 받았지만 거절하는 사람은 연관이 되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을 높이는 교만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24절)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혹시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교만이 없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작품 중에 최후의 만찬에는 많은 일화를 담고 있다. 이태리 밀라노의 한 수도원 식당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작품을 그리고 있을 때 수도원 부원장이 왜 이리 더디게 작업하느냐?고 다그쳤을 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화가 나서 부원장에게 편지를 썼다.
그 동안 유다의 악당같은 얼굴에 합당한 모델을 찾고 있었는데, 내가 상상했던 얼굴으 찾지 못한다면 부원장님의 얼굴을 그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 이 편지가 남아 있다고 하니 이 일화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화도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작품을 완성한 후에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때 친구 중 한 명이 상기된 얼굴로 정말 대단한 작품이야 예수의 손에 들린 저 광채나는 금잔을 봐! 이렇게 아름다운 금잔을 본 적이 없어! 그 말을 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붓을 들고 가서 그 금잔을 덮어 버렸다. 그 순간 심혈을 기우려 만든 작품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다시 그려야 했다. 그렇게 다시 그림을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님의 얼굴에 집중되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시선이 금잔에 머문다면 이 그림은 실패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사람들이 최후의 만찬을 볼 때마다 예수님을 제일 먼저 보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의 중심이 누구인가? 우리의 인생도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를 향한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이 고백되어지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청함을 거절한 그 사람들은 자기의 힘과 능력이 중심이 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밭도 살 수 있고, 소도 살 수 있고, 나는 장가도 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야! 하는 교만함으로 살았던 것이다. 이렇게 교만한 사람은 주인의 잔치를 맛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주인의 잔치를 맛볼 수 있는 사람인가? 오늘 본문을 좀 더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자기의 힘과 능력에 초점이 맞추어져서 청함을 거절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노하였다. 그래서 주인은 종들에게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21절)고 하였다. 그래서 종들이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많은 사람을 데리고 왔지만, 그 자리가 다 채워지지 않았다. 그때 주인이 한 말이 23절이다.
(눅 14: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여기서 강권하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단어만 보면 억지로 또는 강제로 시키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주인은 종들에게 길과 산울타리로 가서 사람들을 억지로 주인의 잔치에 데리고 오라고 해석해도 된다.
그런데 왜 주인은 이렇게 강력하게 사람을 데리고 오라고 했겠는가? 오늘 본문에는 3번의 청함이 나온다. 첫번째 청함은 자기 교만으로 가득한 유대인들의 청함이다. 그들은 왕의 청함을 받았지만, 자신의 힘과 능력을 더 믿는 교만한 자들이었기에 잔치에 참예할 수 없었다. 그리고 두번째 청함은 가난하고, 몸이 불편하고, 맹인이고, 저는 자들에게 주어졌다. 이들은 유대인이지만, 유대공동체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주인의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 그들은 참예한다. 그리고 세번째 청함은 사람은 주석가들에 의하면 이방인으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주인이 종에게 가라고 한 길과 산울타리는 성 밖을 말하기 때문이다. 주인은 이제 성 밖에 나가서 청함을 받을 자격도 없고, 또 주인의 잔치가 무엇인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그 사람들을 데리고 오라는 것이다.
그러면 자격도 없지만, 왕의 잔치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그 사람들을 어떻게 데리고 올 수 있겠는가? 주인은 강권이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여기서 강권이라는 말은 물리적 힘을 써서 데려오라는 것이 아니다. 주인이 잔치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 지를 설명하고, 감동을 주어서 인도하여 오라는 것이다.
동하여서 그들을 인도하라는 명령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에게는 강권하는 열심을 가지고 있는가?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주인의 잔치에 마땅히 참여해야 하는 사람이 잔치의 맛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잔치에 도무지 초대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강권하여 인도하라는 그 주님의 말씀이 너무 고마웠다. 왜냐하면 내가 3번째 청함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설교를 준비하면서 느낀 것은 우리는 첫번째 청함만 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반성을 해 보았다. 주인은 교만한 자들도 청하고, 우리 공동체에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도 청하고, 도무지 함께 할 수 없는 이방인도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고 하는데, 우리의 청함이 첫번째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것을 주인의 마음에 합당하지 않는 것이다.
이제 성 밖 울타리까지 주인의 명령을 들고 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주인의 잔치를 가득히 채우기 위하여 외치는 복된 성도의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