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
2026. 10. 11(주일낮예배) 누가복음 4:16-21
교회 방문한 사람이 교회 정착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일반적으로 성도들은 교회를 방문한 사람이 정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설교, 화려하고 큰 건물, 그리고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의외로 교회에 정착한 새신자들에게 물어보면 교회 정착한 가장 큰 이유는 옆사람이었다고 한다. 낯선 교회 와서 찬송도 모르고, 목사님 설교는 무슨 말인지? 현실감과 너무 떨어져서 듣기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옆사람이 열정적으로 찬송하고 또 집중하여 말씀을 듣다가 아멘으로 화답도 하고, 또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그렇게 옆 사람이 예배에 집중하는 것을 보면서 이 교회에 뭐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한번 두 번 오다가 말씀이 들려져서 교회에 정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저와 여러분의 예배드리는 모습은 다른 사람이 신앙생활하는데 도움이 되겠는가? 베트남 전쟁 후반인 1971년 로버트 스틸(Robert Steele)과 모건 머피(Morgan Murphy) 의원은 베트남을 공식적으로 방문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알게 된 것은 베트남 전쟁으로 15%의 병사가 중독성이 강한 헤로인에 중독되었다는 것이었다. 전쟁의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미군들은 마약을 치료제로 사용하였고, 그 결과 15%의 병사는 헤로인 중독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골든 플로우 작전(Operation Golden Folw)을 실시하여 약물검사를 하여 마약반응이 양성이 나오면 마약을 끊을 수 있도록 재활치료를 실시하였다. 그래서 마약반응에 음성이 나와야 미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였다.
그러면 마약중독에서 회복된 미군 병사들은 건강한 모습으로 사회생활을 하였을까?일반적으로 헤로인 중독은 중독성이 강하여서 재발률이 78%에 달하였다. 그런데 심리학자 리 로빈슨(Lee Robins)박사가 미국으로 돌아온 병사들의 재발율은 고작 5%였다. 그리고 그 5%의 병사들이 왜 헤로인 중독에 다시 빠지게 되었는지를 조사한 결과 헤로인 중독에 다시 빠진 사람들은 자신을 반갑게 맞이하는 가족이 없는 사람이었다. 전쟁의 두려움과 고통 가운데 헤로인 중독에 빠졌지만, 집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을 반갑게 맞이하는 가족이 있는 병사는 건강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자신을 반갑게 맞이하는 가족이 없는 병사는 다시 헤로인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중독의 반대말은 관계라고 말한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중독을 이길 수 있는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누가는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여리고를 지나가셨음 기록한다. 그때 예수님이 만난 사람이 소경 거지 바디매오(눅 18장)와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눅 19장) 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2명의 사람을 만난 것은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모두 당시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 39절을 보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바디매오가 고함쳤을 때 사람들은 꾸짖었다고 말한다. 그 부분을 함께 읽기 바란다.
(눅 18:39)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꾸짖다는 단어는 ἐπιτιμάω(에피티마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가치를 결정하다, 존경하다, 경외하다는 τιμάω(티마오)에 대항하다는 의미를 가진 접두사 ἐπι(에피)가 붙은 합성어이다. 그래서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치는 것을 진리에 대하여 저항하는 것이다는 것이다. 너는 소경이고, 또 거지인 주제에 어디 감히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느냐? 그것은 틀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꾸짖으면서 잠잠하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누가복음 19장에서도 나온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수근거렸다. 누가복음 19장 7절을 함께 읽기 바란다.
(눅 19: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수군거리다(διαγογγύζω디아공귀조)는 미완료형이다. 그래서 한번 궁시렁거리는 것이 아니라, 쉴새없이 계속 궁시렁 거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예수님이 만난 바디매오와 삭개오는 아무도 상종해주지 않는 사람들이었고, 또 누군가가 상종하면 그 사람마저도 배척을 당하게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바디매오를 만나고, 또 삭개오를 만난 것이다.
왜 예수님은 이들을 만났겠는가? 페이스페인팅을 한 여인이 의자에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있는다. 그때 한 아기가 다가가서 꼼짝도 하지 않는 그 여인의 입에 자기의 입을 맞춘다. 그러자 여인은 그 아기를 보고 활짝 웃는 것이다. 그 여인의 웃음을 보고 웃는 아기의 얼굴이 귀엽지 않는가? 아기는 꼼짝도 하지 않는 여인을 보는 것이 신기하고, 또 두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다가가서 입을 맞추었을 때 아기는 모두에게 감동을 주는 역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동영상>
목회를 오래 하신 목사님이 성도를 대하는 당신의 변화된 모습을 이야기 하였다. 젊었을 때 목사님은 교회를 힘들게 하는 성도를 보면 저 사람은 왜 교회만 오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나? 하는 생각에 미움이 생겼다. 그래서 목사님도 그 사람을 볼 때는 평안하지 못한 얼굴로 대하였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난 후에 교회에 말썽을 부리는 성도를 보면 얼마나 사랑과 관심이 받고 싶으면 저렇게 할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목사님이 말썽을 피우는 성도를 얼마나 외롭고, 사랑이 받고 싶으면 저렇게 할까?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성도를 대하자 그 성도가 조금씩 변화되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숙한 목사님의 모델이 예수님이 아닌가? 사람들은 소경 거지 바디매오를 멸시하고 천대할 이유를 먼저 찾았다. 그래서 너는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삭개오와 같은 매국노는 함께할 수 없는 죄인이다고 낙인을 찍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죄악과 실패와 분노로 가득한 자들을 멸시하였는데, 예수님은 먼저 다가가시고 보듬어 주심으로 자유와 회복을 허락하여 주신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이 아닌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으로 가신다. 그리고 회당장이 준 성경을 받아서 읽었는데, 그 부분이 오늘 본문이다. 누가복음 4장 18-19절을 읽기 바란다.
(눅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주의 은혜의 해는 희년을 말한다. 유대인들은 희년이 되면 대속죄일에 제사장이 양각나팔을 분다. 그러면 가난한 자들의 빚을 다 탕감해주고, 또 종들에게는 자유를 선포하여 준다. 그래서 희년을 통하여 자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사야는 자유와 회복이 있는 희년의 완성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오실 때 이루어진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사야 61장의 내용이고, 또 예수님이 회당에서 읽은 성경내용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성경말씀을 읽고, 딱 한문장인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21절) 라는 말씀으로 설교한다. 예수님은 성경을 읽을 때 일어셨다. 그리고 그 성경을 덮어서 회당장에게 주시고 자리에 앉으셨는데, 그때 모든 사람이 주목하고 있었는데, 이 한문장으로 설교하신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예수님의 설교는 결코 짧지 않았다. 마태복음 5-7장은 산상수훈인데, 그 설교원고 길이가 결코 적지 않다. 그리고 누가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실 때 해가 저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설교는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는 단 한말씀이었다. 이사야가 예언한 희년의 자유와 회복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어떻게 희년의 자유와 회복의 역사가 이루어졌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정말로 놀라운 능력이다. 그래서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라고 말씀하시면 빛이 생기고, 하늘의 해와 달과 별도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신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을 성취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는 것도 말씀으로 죄없다 라고 하시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는 일에는 말씀이 아니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신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말씀이 아니라, 사랑을 이루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사실 최고의 설교는 제가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이 모습이 아니다. 최고의 설교는 선포된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다. 그래서 선포된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지금 저와 여러분의 삶에는 말씀이 완성되어져 가고 있는가? 정현종 시인이 쓴 방문객이라는 시가 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정현종이 쓴 방문객이라는 시는 사람이 온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오는 것이다는 이 싯구이다.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 순간에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정현종 시인의 이 시를 읽으면서 또 다른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그 사람은 많은 상처와 실패의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픔과 상처를 가진 사람에게 바람은 다가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온 몸 사이를 따스하게 불어서 스다듬어 주는 것이다. 정현종 시인은 이렇게 상처와 아픔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따스한 바람이 그의 몸에 부는 것을 흉내내는 것이 환대라고 하였다.
저는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하여 멸시와 천대받는 사람들을 찾아가시고, 그들에게 구원을 선포하는 예수님의 이 사역을 흉내내는 삶이 바로 환대인 것이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 환대가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세상에 외로운 사람들을 더 외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자유와 회복을 심어주는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