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화내겠다
이원우
글머리에 세종대왕은 몇 년째 화를 내고 있음에 틀림없다. 한글을 바로 못 쓰는 위정자와 소위 높은 사람들로 말미암아서다. 문인이나 학자도 마찬가지다. 그분의 꾸지람 대상인 거다. 이 소설은 논픽션이 바탕이다? 물론 그런 추측도 가능하리라.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다.
574돌 한글날 경축식 취재를 가야 하는데 불가했다. 이번에는 '한글날 노래' 악보가 고쳐졌는지 궁금하지만, 팸플릿을 보지 못했으니 안타깝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한글날 노래'에 무 마디마다 있어야 할 숨표(')가 찍혀 않았었다. 세종대왕은 그랬으리라. "주관하는 행정안전부 장관은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지, 쯧쯧. 네 박자를 끝까지 다 부르란 말인가? 서글프다. 나는 악보를 볼 줄 모르지만, 경축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도중에 숨을 똑 같이 쉬지 않더라. 작은 듯해도 그런 것 하나 바로잡아야 '한글날노래'를 통해 우리말과 글이 기림을 받을 수 있다."
바야흐로 ‘코로나 19’ 때문에 나라가 쑥대밭이 되고 있다. 텔레비전만 틀면 밤새 수백 명이 그 병에 새로 감염되었다는 소식을 연신 쏟아낸다. 전 국민이 공포에 휩싸인다. 특히 고령 환자가 사투에서 져서, 더러 죽는다는 속보(速報) 앞에 일흔 살 넘은 노인들은 안절부절못한다. 여든 살 예춘자(芮春子)인들 어찌 예외일 수 있으랴. 그도 이러다가 비명횡사(非命橫死)하지 않는가 싶어 적이 걱정이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참 그는 인터넷신문 기자이자 수필가다. 평소 ‘낙천(樂天)’을 생활신조로 삼고 있는 그도, 어쩔 수 없이 발을 동동 구르다니 싶어 스스로에게 연민의 정을 보낸다. 그들 부부는 딸 내외와 손자 등 일곱 식구와 함께 산다. 어쨌든 거듭 말하지만, 바야흐로 더 ‘나비 효과’에 버금갈 이 어쭙잖은 이 병으로 말미암아 지구촌 수십 억 인구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귀추를 짐작할 수 없다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다. 요컨대 뾰족한 대책이 없는 것이다. 부아가 섞인 푸념 하나. 중국이 발원지(발생지)인 모양인데, 피해는 우리가 되레 더 당하게 된 점이다. 대한민국 항공기의 기착을 금지하는 지구촌 나라가 2백 개국에 가깝다나? 정부 초기의 미흡한 대처가 큰 화를 불러 일으켰다는 데에 별 이의를 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심사를 혼란스럽게 하는 사실 하나. 정작 중국은 한숨 돌리고 있다는 거다. 베트남은 입국을 철저하게 통제함으로써 환자 증가를 0으로 만들고 있다는 점도 마찬가지, 우리는 도대체 뭘 하고 있나?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불행한 상황을 전하는 매체, 예를 들어 신문이나 방송들이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게 국민으로 하여금 분노를 억누를 수 없게 하고 있다. 정치이이며 기자, 패널, 프로듀서 등이 일을 그르치게 하는 그야말로 장본인(張本人)들이다. 그들의 우리말 실력이 그 정도여서는, ‘코로나 19’를 종식시키는 시한이 쉬 다가오지 않으리라는 불길한 느낌을 갖게 된다. 왜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예춘자 기자가 이래저래 절망하다가 내뱉는 한탄 섞인 푸념이다. 세종대왕이 불같이 화내겠다! 초 중 고등학교에 다니는 손자 셋이 공교롭게도 남자애들이다. 맏이가 고등학교 1학년이고, 둘째가 중학교 2학년, 막내가 초등학교 6학년….각각 2년 터울로 고고의 소릴 냈었던, 참으로 보물보다 더 보물 같은 존재인 녀석들 덕분에, 외로움 따위를 잊고 살아 온 것이다. 딸 내외의 퇴근이 늦어, 낮 시간에 그가 녀석들과 어울리는 건 너무나 당연하고말고. 겨울 방학이 끝난 지 오래지만, 등교 일자가 두 두일 이상 연기된단다. 요 며칠 새엔 사위만 출근한다. 그러니 마흔 평 아파트가 여섯 식구로 복작댄다. 오랜만에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이따금 코로나 공포를 잊어버릴 때도 있다. 하지만 텔레비전 앞에 앉기만 하면 예춘자는 얼굴은 주름살투성이가 된다. 뭔가 못마땅한 듯한 표정의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리기 예사다. “뭐라고? 전 장병의 휴가 외출을 통제한다고?” 예춘자가 자기도 모르는 새에 파열음이라도 낸 것일까? 손자 셋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들었다. 녀석들은 이구동성으로 입을 열고 할머니를 걱정한다. 남편이 합석하기도 하고. “할머니, 무슨 일이 생겼어요?” “아니 너희들도 알아야 할 일인데 말이야, 방송에 종사하는 아나운서며 캐스터, 패널 들이 뭘 모르고 있구나.”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귀여운 내 새끼들, 내 설명을 좀 들어보련?” 그로부터 작심한 듯 예춘자는 손자 셋을 앞에 놓고, 좀 전에 열을 올린 까닭을 설명했다. 입버릇처럼 말하는 ‘세종대왕이 화를 낼 수밖에 없는’, 그 가지 몇 개를 예시한 것이다. 시기가 시기이니 만큼 ‘코로나 19’에 국한된 것이다. “너희들, 장병이 무슨 뜻인지 아니?” 셋은 이구동성으로 반문했다. “군인들을 두고 말하는 거 아니예요?” “약간은 맞고 약간은 틀린단다, 장병이란 군인 전체를 뭉뚱그려 나타낼 때 쓰는 단어야. 군인은 장교와 부사관, 병사로 나눠지거든? 너희들 대위 혹은 대령이란 계급 있는 걸 알지?” “예, 저희는 ‘밥풀떼기’라 부르기도 하고 ‘무궁화 꽃잎’이라 부르기도 하곤 하지요.” “원, 녀석들도 많이 자랐구나. 우린 소위와, 중위, 대위 계급을 다이아몬드라 했단다. 그 여섯 계급 외에 장군이라는 계급이 있지. 별을 단 군인들이야. 준장 · 소장 · 중장 · 대장 등이야. 별 하나는 준장, 둘은 소장, 셋은 중장 넷은 대장….” 맏이가 끼어든다. “인천 상륙 작전의 주인공 맥아더는 별이 다섯 개던데요?” “아 참, 그 계급이 옛날에 다른 나라 유명한 장군들 중에 있었어. 맥아더 원수야.” “이등병, 일등병, 상등병, 병장, 하사, 중사, 상사, 원사, 준위도 있잖아요?” “그렇지. 그들은 병사 혹은 사병, 부사관, 준사관이라 불러. 병사들은 남자가 일정한 나이에 들면 국방을 위해 군에 입대하는 거야. 총칼을 들고 적과 싸우기 위함이지. 그게 국방의 의무야. 남자는 반드시 군복을 일정 기간 입어야 해. 여자들도 더러는 군에 간단다. 여자는 대신 제일 낮은 계급이 하사야. 여자는 무조건 간부(幹部)야. 며칠 전에 방송이나 신문에서 떠들썩했지. 며칠 전에 병사 하나가 휴가 중에 코로나에 감염되었던 모양이야. 그런데 이를 신문과 방송에서 이렇게 제목을 잡았어. 드디어 ‘장병마저 코로나에…’.국민은 혼란에 빠지기 마련이야. 자, 할머니 말 잘 들어. 장병은 장수 장(將)과 군사 병(兵)이 합쳐진 건데, 어떤 군인이든 혼자일 때는 장병이라 하면 안 되는 거야. 그런데 언론에서 장병 어쩌고저쩌고 하는 바람에, 많은 국민들이 패닉 즉 공황에 빠진 거야. 이윽고 양식 있는 어느 기자가 말이야. 해군 병사 하나가 휴가를 마치고 부대로 돌아와 보니 열이 나고 해서 검진을 받은 결과, 환자라는 걸 밝힌 거야. 불행 중 다행이란 말 있지? 병사 ‘한 명’과 ‘장병’ 한 명에는 그만큼 차이가 나는 거야. 이윽고 장교와 병사들 즉 장병들이 잇따라 코로나에 감염되는 바람에 온 국민이 더욱 걱정 속에 빠지게 되었지만.” 예춘자는 다시 보충 설명 삼아 몇 마디를 보탰다. 언론은 또 제 맘대로 떠들어댔단다. 전 장병의 ‘휴가 외출’을 없앤다고. ‘망발’이라고까지 하면서 그는 꾸짖었다, 언론을! 간부는 본래 부대 밤에는 부대 밖에서 혹은 부대 내 숙소에 거주한다. 합동참모본부장 이하 하사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전부 외출을 못 하게 한다? 별을 단 장군들도 임시 숙소에서나 자기 사무실에서 자야만 하고. 예춘자는 손자들에게 이 말을 강조했다. “애들아, 그런 일은 전시 즉 우리나라가 적군의 침략을 받아서 서로 총이나 포로써 싸울 때에나 있는 일이야. 물론 중요한 훈련 때도 그렇지만.” “와, 우리 할머니 아시는 것도 많으세요. 최고!” “할머니가 이래봬도 기자지 않니? 8사단 사령부 앞에 가서 코로나를 걱정하는 인근 주민들의 생활상을 취재하기도 했어. 코로나가 한풀 꺾이면 사령부도 방문할 계획이야.” 예춘자는 손자 녀석 셋으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고, 채널을 다른 데로 돌렸다. 하나 어떤 프로그램에든지 집중을 할 수 없다. 그는 또 고소를 날렸다. 모두가 ‘코로나’다. 조금 있으려니 딸애가 다가왔다. 예춘자는 딸애에게 말을 건넸다. “얘야, 큰일 났구나. 코로나 창궐로 인해 나라가 좀 이상해진 것 같아. 제1야당 원내 국회에서 세미나 도중 양성 환자 옆에 앉았던 게 겁이 나서, 검사를 받았다나?” “그런데, 엄마?” “다행히 음성으로 나왔다지만, 그가 하는 말이 너무 실망이야. 거리나 시장에서, ‘서민들의 애환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눈 하나 깜짝 않고 말하는 거지 뭐니? 세종대왕이 화내시겠더라.” “무슨 뜻인데?” “‘애환’은 슬픔과 기쁨을 나타내는 말이야. 슬플 애(哀), 기쁠 환(歡)! 슬픔은 모르지만, 기쁨을 뼈저리게 느꼈다는 말이 있을 수 있니? 여당 원내 총무 그 사람 서울 대학교 출신이라면서 그러니, 보통 사람이야 오죽하겠니?” “아하, 엄마는 역시 달라. 누가 기자 겸 수필가 아니랄까 봐서….한글날 취재 가거든 그 자리에서 표창을 받아야 하겠네.” 모녀는 여느 때처럼 또 웃음꽃을 피웠다. 여당 대표의 아들인 정신의학과 전문의가 어느 누구와 대담을 하는 도중 농담을 하는 바람에,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다는 데에 이르러 폭소가 터졌다. 그가 이랬었다는 거다. ‘코로나’는 코로 전염되는 병이다! “이럴 일수록 외래어를 안 써야 하는데, 요샌 오히려 극성이니 국민들은 혼란이야. 특히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늙은이들은 혼란에 빠지기 십상이거든?” “무슨 뜻이야?” “‘코로나 포비아’가 뭔지 넌 아니?” “코로나야 지금 대 유행하고 있는 이 병을 발하는 거고, 포비아가 뭔지 아리송하네, 엄마.” “거 봐 너처럼 고등학교 교사가 아리송하다니….‘포비아’는 ‘phobia’….ph는 f 발음을 내는 것 주의. 간단하게 풀이하면 ‘공포증’이야. 따라서 코로나 포비아는 ‘코로나 공포증’ 정도로 알려 주면 누구든 고개를 끄덕일 텐데….저승에 있는 세종대왕의 얼굴에 주름살이 늘겠어.” “엄만 대단해.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 “얘야, 거듭 강조하지만 내가 기자야. 또 그냥 넘어가지 못할 게 있어. 코로나 뒤에 붙어 다니는 ‘펜데믹’….‘전국적인 유행병’이란 말인데, 방송에서 저래도 노인들은 못 알아들어.” “엄만, ‘적(的)이란 말을 안 쓰잖아. 일본말 찌꺼기라면서….” “그렇지. 내가 깜빡했다. 전국 유행병이라 해야겠구나.” 딸은 엄지척을 해 보이며 저만치 떨어져 있는 컴퓨터 앞에 작업하러 갔다. 예춘자는 자기 스마트폰을 켰다. 메모난 에서 몇 가지를 골랐는데, 그걸 다시 기자 수첩에 옮겨 적었다. 그 중 두 개 재구성하여 살펴본다. ‘신천지’ 가 바야흐로 인구에 회자(膾炙)된단다. 신천지라는 종교 신도들이 코로나를 악화시킨 주범(?)이란 뜻으로 쓰는 모양이다. 회자는 긍정일 때 쓰는 표현인데….서글픔을 느낀다. 한데 며칠 전부터 ‘신천지’라는 이름을 가진 아파트 등에서 개명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어디에 사느냐 고 물었을 때, ‘신’ 자는 들먹이기조차 창피하다나? 그런데 3월 1일만은 신천지를 거부하는 자체가 불경스러운지 모른다. 순국선열들에게 말이다. 독립선언서 끄트머리 부분에 나오는 이 문장, 어떻게 생각할까? 읽는 사람이나 듣는 국민 모두가 “‘신천지’가 우리 안전(眼前)에 전개(展開)되도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올해는 일곱 사람이 나누어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더라. 머지않아 독립선언서에서도 신천지를 빼야 할 날이 올지 모르겠다. 슬프다. 마스크가 동이 났다. 전날 밤을 천막 안에서 자고, 이튿날 새벽부터 줄을 서는 기이한 풍속도가 생겼다, 그런데 언론에서는 마스크 ‘공적(公的)’ 판매를 한단다. 그 의미를 예춘자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공공 기관에서 판다는 뜻일까? 사회주의 용어라고도 하던데…. 예춘자는 그러는 중에서도 모레 서울에 다녀와야 한다. 쟈니리 가수를 만나기로 한 거다. 사서 고생이라더니 늘그막에 기자랍시고 동분서주하다니 서글프기도 하지만 그것도 소명에 의해서 빚어진 거다. 문득 지금보다는 한가롭고 여유가 있었던 부산이 그리워진다. 그 시절로 잠시 돌아간다.
예춘자를 소개하려면 전북도 보건국장이며 옥구(沃溝) 군수 등을 역임한 채낙현 구청장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이미 고인이 된 지 오래지만…. 채낙현 청장은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데, 사립 중학교 교장을 지낸 분이다. 부산에서 14년 동안 구청장으로 있었던, 그야말로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다. 경남도 함안군 함안면이 그의 출생지다. 예춘자는 채낙현과 동향인이었다. 집이 서로 2킬로미터쯤 떨어져 있었는데, 서로 왕래가 잦았다. 채낙현의 나이가 예춘자보다 훨씬 많아서 사석에선 아저씨라 불렀다. 채낙현이 한창 부산 시내에서 구청장으로서, 그 역량을 인정받고 있을 무렵이었다. 예춘자도 잠시 동구청 등에서 기능직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채낙현이 예춘자를 끔찍이 아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사고로 예춘자가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는데, 채낙현이 그를 보살펴 주는 바람에 예춘자는 봉생 병원 뒤에서 전통 찻집을 낼 수 있었다. 말이 전통 찻집이지 실제는 인삼차, 구기자차, 생강차, 쌍화탕 등을 같이 내는 그런….물론 녹차나 보이차가 위주이긴 했다. 예춘자는 키도 훨씬 크고 인물이 워낙 아름다워서였을까? 찻집은 날로 번성해 갔다. 남편 길천수는 공립 중학교 국어 선생으로 재직하고 있었고. 그도 채낙현의 덕을 많이 보았음은 중언부언할 필요조차 없었다. 채낙현은 봉생병원장 정의화 박사를 가끔 찾아 왔다. 물론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없이 정의화는 뒤에 국회의장으로 공직 생활을 마감했는데, 그는 채낙현을 깍듯이 대했다. 가물에 콩 나 듯 했지만 정의화와 채낙현은 그 뒤 몇 번인가 예춘자의 찻집에 들었다. 그들의 화두에 수필이니 데뷔니 하는 말들이 오가는 걸 예춘자는 듣는다. 어느 날 채낙현이 예춘자를 불렀다. “정의화 의원은 국회의원이기도 하지만, 수필가야. 봉생병원장이신 걸 너도 알지?” “그럼요. 두 분이 가끔 수필을 이야기하시더군요.” “어때? 너도 수필을 한 번 써 보고 싶은 생각 없어?” “저 같은 게 뭐….” “과공은 비례. 난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이 전부야. 그런데 수필집도 몇 권 냈고, 한글학회 부산지회장이잖아? 넌 방송대 졸업이고, 인상이 워낙 좋아 문단에서도 호감을 얻을 거야.” 그게 인연이 된 것이다. 가끔 그렇게 만난 채낙현에게서 수필 창작 법을 배워서, 2년 만에 부산 문인협회에 이름 석 자를 올리게 된다. 이윽고 한글학회에도 가입했음은 물어보나마나. 여기 저기 동인회에 글을 발표하자, 채낙현은 어느 날 그에게 <부산시보>를 한 장을 내밀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나오는 시청 기관지야. 여기 ‘주간 사설’이라고 있지? 사설(辭說)은 ‘사설시조’의 그 사설이야. 말씀 사(辭) 말씀 (說), 그저 수필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면 돼.” “한데, 이걸 제게 왜 보여 주시는 거지요?” “네가 원고 심부름 좀 하라는 뜻이야. 너 컴퓨터 다룰 줄 알잖니? 나하고 의논하여 필진을 구성하고, 그로부터 원고를 받아서는 편집부로 보내 주는 일을 좀 하라는 뜻이야.” “그 어려운 일을 제가 어떻게 해 나가지요?” 채낙현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예춘자 가게(전통 찻집)에 많은 명사들이 모여드니, 그들에게 가끔 작설차 한 잔씩 대접하면서 부탁해 보라는 것. 자기도 가끔씩 친구들에게 청탁하마고도 했다. 그게 예춘자가 무려 36개월 동안 <부산시보>에 매달리게 된 동기였다. 과연 찻집을 찾는 인사들이 자연스럽게 <부산시보>의 ‘주간 사설’ 고객 혹은 필자가 될 수밖에. 수필가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의 문인들과도 접촉의 외연을 넓혀 나갈 수 있었다. 한글학회 회원들이 출입하다 보니 그 지면은 점점 인기를 얻게 되었다는 게 시민들의 평이었다. 자기의 글이 실린 <부산 시보>를 수십 부 안고서는 지하철에 올라 승객들에게 나눠 준 원대권 수필가도 있었다. 그런데 애로 사항이 있었다. 필자가 약속을 도무지 지키지 못할 때가 있는 것이었다. 예를 한 번 들어 보자. 어느 교수가 학회 일 때문에 몇 주일 외국에 가 있게 되었다든가, 부친상을 당해서 도무지 시간을 내기 힘든 경우 등등. 그럴 때 비상수단으로 예춘자 ‘수필가’가 대타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보다는 컴퓨터로 받은 원고를 살펴볼라 치면, 오류가 너무 많다는 점은 그로 하여금 커다란 고민에 빠지게 하였다. 시민 대다수가 아는 필자가 있다 치자. 그런데 그의 글에 일본말 찌꺼기가 섞이고 맞춤법도 안 맞다. 정문(正文)이 아니고 비문(非文)인 경우도 많다.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외래어가 많다. 그걸 본인의 양해 없이 바로잡는다는 것은 상대방과의 인간관계를 그르치게 하는 원인이 되었고말고. 때로 호통을 당하기 예사였다. 그러는 가운데 36개월이라는 긴 시일이 지나갔다. 한 번도 결회(缺回) 없이 <부산시보>의 ‘주간 사설’은 시민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명문(名文)’을 접하는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심지어는 군부대에도 <부산시보>가 가끔은 들어가게 되었으니, 5전투비행단 부단장(副團長)의 글까지 받았던 덕분이다. 그때의 긴박했던(?) 상황을 몇 줄로 요약한다. 어느 부사관을 통해 부단장을 소개받고 의기투합했으렷다? 좋긴 한데 보안대의 검열을 받아야 한단다. 그 지침을 따를 수밖에. 원고는 팩스로 보내 주겠다고 했다. 한데 부대에서는 팩스 송수신이 불가하다. 부득이 이웃 덕도초등학교 서무실을 통해야 할밖에. 네 번을 그러는 동안 진땀께나 흘렸다. 물론 일정액의 고료가 지급되었다. 당시로 봐서는 상당액이었다. 부끄럽지만 그걸 더러는 전액 예춘자에게 수고료라며 되돌리는 필자도 있었다. 물론 예춘자의 대타(代打) 몫(고료)은 고스란히 자신의 통장에 입금되었고. 돌이켜보면 그 시절 3년(36개월)의 피나는 노력은 예춘자에게 엄청난 성장을 안겨 주었다. 36개월을 주 4회로 환산하면 114회다. 그 많은 양의 원고 교정에 혼신의 힘을 쏟았으니 그건 천금을 주어도 못 사는 수련과 공부의 기회였다. 보다 나은 수필을 쓰게 된 데는 ‘주간 사설’의 힘이라고 고백하는 걸 그는 망설이지 않는다. 기적에 진배없는 일 하나. 부산 시장을 비롯한 시의회 의장 등 관계자는 물론, 동사무소의 9급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눈치를 채지 못하게 비밀리에 그 일이 시작되었고 끝났다는 사실. 작전을 방불케 했다고 하자. 전직 경찰공무원인 편집실장이 바뀌고 나서 예춘자는 그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었다. 표창도 처벌(?)도 없는, 그냥 역사 속에 묻힐 일은 가끔 그에게 안도의 숨을 쉬게 한다. 하기야 그 눈물겨운 노력이 들통 난들 말이다. 시민들에게 해악(害惡)을 끼친 바 크지 않았으니, 결말은 흐지부지 되었으리라,
예춘자는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위로 둘은 딸이고 막내는 아들이다. 큰딸이 교원대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도에 발령을 받은 게, 그가 경기도에 오게 된 까닭이다. 큰딸은 자손이 귀한 집에 시집을 갔는데, 연거푸 아들 셋을 낳았다. 연년생이다시피 한 녀석들을 돌보지 않을 수 없어 처음엔 무척 힘들었다. ‘타관살이’의 설움을 톡톡히 겪었고. 그래도 정이 들면 타향도 고향이라더니, 그러다 점점 낯선 고장에 적응하기 시작한 거다. 부산에 다시 둥지를 틀 날만 기다리며 지냈지만, 이젠 오히려 여생을 여기서 마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흠칫 놀란다. 참, 딸 하나는 경찰학교를 나와 부산 시경에서 경감 계급을 달고 있다. 아들은 고등학교 영어 교사 출신인데, 지금은 교육청 연구사로 있다. 두 녀석 다 경제 사정이 괜찮은 편이고, 녀석들이 낳은 예춘자의 손자 넷은 사돈들이 키워 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예춘자의 삶에 너무나 크고 의미 있는 일이 생겼으니, <실버넷뉴스>라는 인터넷 신문 기자 모집 소식이었다. 한국수필가협회 김의배 부이사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이다. “예춘자 수필가님, 요즘도 ‘나그네 설움’ 가끔 부릅니까?” “예, 그래도 처음보다는 외로움을 덜 타는 편입니다. 부이사장님 덕분입니다.” 김의배의 이어지는 말이 이랬다. 실버에 의하여, 실버를 위하여, 실버가 만드는 신문이 있으니, 거기 기자가 한 번 되어 보라는 것. 예춘자가 자기에게 과분한 제안이라 사양했더니, 예춘자가 옛날 부산시보 편집위원으로 있었다는 걸 들먹이는 게 아닌가? 예춘자의 말 “그건 사실입니다만, 문자 그대로 시장의 위촉장도 없는, 어디까지나 비공식 직책이었습니다. 물론 그 일을 하는 덕분에 다른 기사도 더러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만.” “바로 그겁니다. 그 노하우를 우리 신문에 좀 접목시켜 주시지요.” 이래서 예춘자는 전혀 상상도 하지 않았던 일과 맞닥뜨리게 된다. 사전 안내에 의하면 한 달에 한 번씩 수습 교육을 받는단다. 다섯 시간씩이고. 물론 지원한다고 해서 다 합격하는 게 아니고, 반 이상이 탈락된다고도 했다. 긴장이 됐지만, 예춘자는 김의배의 권유를 받아들인다. 용인에서 교육장이 있는 왕십리까지는 지하철로 한 시간 거리다. 도중에 갈아타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고, 그는 첫날 교육에 참가했다. ‘16기 교육생 ㅇㅇㅇ’이라는 명찰을 달고, 사진 촬영이며 기사 작성 등의 기초부터 배웠다. 김의배가 일러 준 대로 교육자 출신 이며 문인이 상당수였다. 패널로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 중인 경찰대학 교수도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 작성은 그런 대로 예춘자에게는 수월했다. 요컨대 문장이 되느냐 한 되느냐 등의 구분이 가능했고, 어휘의 오용 구분, 맞춤법 및 띄어쓰기 등에 나름 일가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진 촬영은 역시 부담스러웠다. 물론 카메라가 아니고 스마트폰에 의지하는 거지만, 본래 기기 다루는 데는 항상 골머리를 앓고 있던 그였으니까. 과제물은 실버들이 많이 모이는 곳, 예를 들어 노인 학교 및 경로당, 그들을 위한 시책을 펴는 동사무소와 시청 등에 가서 ‘수습기자 명찰’을 달고 인터뷰를 해서 제출하는 것! 일흔을 넘긴 나이라, 솔직히 말하면 관공서 등에서 백안시를 당해야 했다. 동사무소 직원들을 붙잡고, 근래 보도 자료를 좀 내어 놓으라고 했다 치자. 그들은 드러내 놓고 표시는 않지만, 콧방귀 뀌는 표정을 예사롭게 보였다. 일종의 수모로 받아들여졌고말고. 예춘자가 어쩌다 익혀 습관화 되게 한 그의 신조 내지 고집이 있었으니, ‘형용사 안 쓰기’였다. 신문은 사실을 사실대로 나타내는 매체다. 예를 하나 든다. “그 여자는 아름답다”는 문장을 보자. ‘아름답다’는 형용사. 그 아름다움의 정도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문장은 어떨까? “그 여자는 ‘미스 아랑’ 대회에서 1등을 한 미인이다” 하다못해 “그 여자는 고등학교 시절에도 인물 하나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여튼 그는 마지막 면접 때 노래 한 곡을 불러 합격의 영예를 누리는 데 도움을 받았는데, 그 곡목이 ‘한글날 노래’였다. 그로 말미암아 그는 기자 임명장을 받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너무나 뜻밖에도 경찰대 교수는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으니, 기가 찬다는 후평(後評)이 아직도 동기 기자들 사이에서 오가고 있다. 아니 그건 수수께끼였다 하자. 그렇게 14기로 예춘자는 기자로 임명되었다. 따라서 그의 일상은 더욱 바빠질밖에. 처음 몇 달 동안은 부지런히 김의배 국장을 쫓아다녔다. 그가 시키는 대로 사진을 찍고, 기사 초안을 작성하여 그에게 컴퓨터로 보내면, 이윽고 출고(出稿)가 되는 것이었다. 그 순간의 기쁨이란! 수필을 한 편 발표하는 것과는 배가(倍加)되는, 계측 불가한 값어치였다. 예춘자에게는 또 다른 기쁨이 있었다. 자기의 문학 작품(수필)을 열두 장 안팎으로 신문의 ‘문화 예술관’에 발표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고사성어를 쓰다니 세종대왕이 불편해 할지 모르지만, 가끔 그는 혼잣말을 했다. 이런 걸 두고 금상첨화(錦上添花)라 한다고. 물론 자기 혼자에게만 해당 되는 게 아니고, 다른 문인 기자들도 마찬가지지만, 수필과 기사를 동시에 쓸 수 있다? 그건 그의 삶에다 작은 날개를 하나 더 달아 준 거나 다름없었다. 그는 지하철로 취재원이 살거나 근무하는 곳 혹은 공간 가까운 역에 내렸다. 그러면 거기에 김의배 국장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루 두서너 시간을 그렇게 보내기 일쑤였다. 이윽고 혼자서 취재가 가능해졌을 무렵부터는 남편이 예춘자를 승용차로 실어다 주었다. 제일 멀리 간 것은 1사단 사령부가 있는 문산. 거기 86세 김춘기 예비역 장군이 살아 있어서다. 이처럼 김의배 국장과 예춘자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만났다. 특히 원로 연예인이나 문인, 예비역 장군이며 부사관등의 근황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으니, 둘은 기를 쓰고 그들을 만났다. 몇몇만 예로 들어보자. 한국 소설가 협회 김지연 이사장과의 인터뷰는 협회 사무실에서 이루어졌다. 김지연 이사장의 최고 역저(力著)로 알려진 장편소설집 <논개>에 얽힌 여러 가지 사연들을 엮어서 다시 한 번 독자들에게 내밀기 직전이다. 워낙 거목이라 둘이서 역부족(?), 소협 이사이자 같은 기자인 변(卞) 작가도 합세했다. 도중 논개의 사진 자료가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자 예춘자의 남편이 승용차로 당장 진주에 갔다 오는 게 아닌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하이힐을 신었던 고 금사향 가수도 일산 요양원까지 가서 가수 생활에 얽히고설킨 이모저모를 수첩과 카메라에 담았다. 총 8회에 걸쳐 연재했는데, 반응이 참으로 대단했다. 그의 ‘홍콩 아가씨’ 중 ‘그리운 영란 꽃’이라는 가사에서 영란 꽃이 뭐냐고 물었더니, 은방울꽃이라는 대답이었다. 숙명여고의 교화(校花)라고 그가 덧붙였다. ‘노란 샤스의 사나이’ 주인공 한명숙 가수가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주공아파트 자택의 문을 열어 주기까지에는 온갖 난관을 뚫어야만 했다. 좁은 방에서 셋은 가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바빴다. 62년도 그 아름다운 모습으로 팬들을 뇌쇄(惱殺) 시키던 한명숙! 전 국민의 사랑을 받던 그가 80대 중반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셋은 또 ‘노란 샤스의 사나이’로 목소리를 높였다. 패티 페이지의 I Went To Your Wedding도. 한명숙의 발성은 만점이었다. 오기택도 빼 놓을 수 없다. 오기택 앞에서, 예춘자의 남편이야말로, 오기택 그의 진정한 팬으로 남아 있음을 강조해 이야기했다. 부관학교를 졸업하고 101보충대로 가는 십이 열차가 영등포에 닿았을 때 동승했던 전 병사들이 울부짖으며 노래했단다. 궂은비 하염없이 쏟아지는 영등포의 밤/ 내 맘속에 안겨오던 사랑의 불꽃… 그 밖에도 그가 단독 혹은 공동 취재한 기사는 여러 꼭지다. 저 유명한 배화 여대 명예 교수 이유식 평론가, 대사(大師) 전문 연기인 박병호 탤런트, 차중락보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많이 부른 사촌형 차도균(철없는 아내), 나훈아 모창 가수 1호 김명창, 사극에서 그가 빠지면 팥소 없는 찐빵이란 한탄의 소리가 나오게 하는 한인수….그 많은 유명 인사 외에 한국 기록 보유자 노령 마라톤 선수, 마을버스 모범 기자, 배우는 기쁨을 아는 어느 경로당 등 평범한 이야기의 주인공도 수두룩하다. 아무튼 예춘자는 그 과정에서의 수확은 저울로써도 계량할 수 없고, 필설을 통한 표현도 불가하다. 그러다 보니 수첩에도 빼곡히 적어 남기고 컴퓨터 및 스마트폰에도 담게 되었다. 지금은 묻힌 자료지만, 언젠가는 여럿에게 도움을 주리란 확신을 갖고 그 일에 열정을 쏟는 것이다. 물론 정리가 잘 되어 있지는 않아도 누구든지 그걸 대하면 비명이라도 질러야 할 만큼 알뜰한 자료다. 그가 몇 군데 문학 단체의 카페에 일화 식으로 옮겨 놓은 것 중 일부다. ● <금도>는 없다. 우리나라에서 우리말을 가장 그르치는 사람은 정치가들이다. 날마다 싸우기만 하고 자기 반성은 외면한다는 소릴 그래서 그들은 듣고 산다. 그들이 입에 달고 사는 최악의 단어는 ‘금도’다. 여야 할 것 없이 그들은 유식한 척, 나아가 마치 상대를 꾸짖듯 내뱉는 것이다. “뭐라고? 그 당의 원내 총무가 그런 발언을 했다면, 그야말로 ‘금도’를 벗어난 거야.”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마구 ‘금도’를 쏟아낸다. 금도? 이건 금할 금(禁)과 법도 도(度)로 이루어진 말이 아니다. 아무리 사전을 뒤져 봐라. 그런 금도(禁度)는 없다. 금해야 할 일정한 수준의 법도를 넘었다고 여긴 상대를 꾸짖는 뜻에서 썼는데, 천만에 말이다. 금도(襟度)는 소매 금(襟)과 법도 도(度)로 짝지어진 말로써 누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너그러운 마음으로 감싸준다는 뜻이다. 뜻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 우리나라 대통령이 북한군 의장대의 사열을 받아? 노무현이 북한에 갔을 때였던 것 같다. 당연히 김정일과 나란히 북한군 의장대 앞을 지나가고, 의장대는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 그걸 실황 중계를 하는데, 대통령께서 북한군 의장대의 사열을 받고 있단다. 최악의 망발을 아나운서들이 쏟아내고 있는 것. 국가 원수가 상대국의 의장대를 사열해야지(능동형), 거꾸로다(피동형). 세종대왕은 그 순간에 불같이 화를 냈으리라. ● 김정은 왈 “빙산의 일각입니다.” 남북한의 화해도 좋다. 나 같은 늙은 기자가 왈가왈부한다면 지나가는 개가 웃으리라. 문재인과 김정은이 회동을 마치고 하는 말. “오늘 참 역사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두 나라가 더욱 가까워졌으면 합니다.” “그러게요. 이건 ‘빙상의 일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 큰 경사가 앞으로 펼쳐질 겁니다.” 김정은의 실언이라 해야 하나? 그의 어휘 실력을 탓해야 하나? 남북한의 언어에도 그만큼 간극이 있으니 그냥 넘어가자는 데에 동의해야 하나? 실로 어리둥절하고도 남을 일이다. 왜냐고? ‘빙산(氷山)의 일각(一角)’은 부정의 경우에만 쓰는 말이기 때문이다. 어느 범법자가 오랫동안 나쁜 짓을 해서 많은 돈을 모았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끝내 그자는 경찰 당국에 적발되었다. 그의 횡령 액수는 수천 억 원 될 것 같은데 밝혀진 액수는 150억 원. 그럴 때 ‘빙산의 일각’이라 하는 거다. 두 정상 간의 대화 때 세종대왕의 심경은 어땠을까? ● ‘…적(的)’과 ‘…인(因)하여’, 그리고 ‘…에 대(對)하여’ 적게 쓰기 전 교육부 장관이 이야기 했다. 다음 교육 과정 개편 때 ‘…적(的)’과 ‘인하여’, ‘…에 대하여’ 등 일본식 표현의 찌꺼기를 줄이겠다고. 초등학교부터 점점 개선해 나가려는 의지였다. 한데 그런 작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 시책은 없던 일로 하고 말았다. 정권이 바뀌고 만 것이다. 세종대왕이 안타까워하는 가운데 오늘도 그 적폐(?)는 계속된다. 아래 문장을 보자. “‘코로나19’로 오늘 현재 6천 명 넘은 환자들이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국가적불행이요 재난입니다.” 보다 ‘코로나19……국가의 불행이요 재난입니다.”가 훨씬 낫지 않은가? 가톨릭 기도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세종대왕은 어느 편 손을 들어 줄까?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 내 남자 친구가 군대에 복무할 때, 사단장 표창장을 받게 되었다. 내게도 참석의 기회가 올 수밖에. 식이 시작되자마자 연병장에 모인 장병들을 지휘하는 중령이 우렁차게 외쳤다. “사단장님께 대하여 받들어 총!” 왜 ‘대하여’가 끼이는가 말이다. 그걸 과감하게 빼고 다시 한 번 흉내 내어 보자. “사단장님께 받들어 총!” 어느 것이 산뜻한가? 후자임이 분명하고말고.
여기서 일단은 컴퓨터를 꺼야만 할 것 같다. 정말 숨이 막힐 것 같은 예시(例示)들이 자그마치 1백 개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어서다. 물론 본인도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 세상에 드러내 놓는다면, 그 충격파가 만만찮으리라는 일종의 자긍심의 표출이기도 하자. 그렇다면 이 틀리기 쉬운 ‘우리말 및 외래어’의 조회 수는? 실로 만만찮다. 자신을 포함한 다른 회원들 각자가 올린 글은 많아 봤자, 200을 상회하기 힘들다. 그런데 예춘자는 거기다가 10을 곱한 거에 버금간다. 아니 훌쩍 넘기고도 남았다. 그만큼 많이 읽었다는 증거이고,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소중한 자료이기도 하다고 본인이 안 여긴다면 그게 거짓말이다. 그런데 마지막 충격 두 개가 그로 하여금 민망한 표정을 짓게 만든다. 그 긴 원고에 댓글 하나가 달렸고, ‘좋아요’ 즉 추천(하트 표)도 동수(同數)라는 사실! 한갓 장삼이사의 주장에 보내는 회원들의 일그러진 표정이 상상된다. 그런데 그 댓글이라는 게 웃긴다. 이름만 들먹인다 치자. 문인들의 반 이상이 그를 알아볼 사람인데….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더욱 많이 올려 주십시요! 그가 다시 한글날 경축식을 취재하러 갈 날이 머지않았다. 코로나가 종식된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그런데 한글날 노래 악보의 오류가 맘에 걸린다. 두 마디를 부르고 나서 반드시 숨을 쉬어야 하는데, 숨표 (’)가 없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틀리지 않고 부르기가 힘들다. 주무 장관에게 사전 강력 항의, 바로잡는다. 자, 세종대왕의 표정은 어떨까? 그의 맺는말은 이렇다. 카페에서 2천 명 이상이 무언의 동의를 해 준 ‘틀리기 쉬운…’을 소책자로 만들어 당일 이어 열리는 한글학회 행사에서 배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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