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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회 창비신인시인상 당선작,
사랑에 대한 짤막한 질문 /최 금 진
차는 계곡에서 한달 뒤에 발견되었다
꽁무니에 썩은 알을 잔뜩 매달고 다니는
가재들이 타이어에 달라붙어 있었다
너무도 완벽했으므로 턱뼈가 으스러진 해골은
반쯤 웃고만 있었다
접근할 수 없는 내막으로 닫혀진 트렁크의
수상한 냄새 속으로 파리들이 날아다녔다
움푹 꺼진 여자의 눈알 속에 떨어진 담뱃재는
너무도 흔해빠진 국산이었다
함몰된 이마에서 붉게 솟구치다가 말라갔을
여자의 기억들은 망치처럼 단단하게 굳었다
흐물거리는 지갑 안에 접혀진 메모 한 장
'나는 당신의 무엇이었을까'
헤벌어진 해골의 웃음이
둘러싼 사람들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무엇, 무엇이었을까 …… 메아리가
축문처럼 주검 위에 잠시 머물다가 사라져갔다
제3회 창비신인시인상
조리사 일기 1 / 김광선
- 겨울나무
소 한 마리분의 내장을
부위별로 정리해놓고 가을도 끝난
나무 아래 섰다
아직도 그 선명한 빛이 가시지 않은
고기를 담근 통
한껏 흘려보낸 물빛처럼 노을이 피었다
물컹거리는 비린내보다도 허리의 통증
씻어내려 삼킨 막소주 한잔으로 모자라
담배연기 폐 깊숙이 밀어넣는다
풀풀 날린다 흩날릴 것도 없는
시푸르딩딩 겨울 초입 저녁나절
민망한 듯 잎새 몇 개 겨울나무 뜨악하다
몸짓만이 남았구나
바람 앞에서 초연할 수 없었던 의지
맨가지로 빈 하늘 받치고 섰구나
찬물 퉁퉁 불은 손을 쓰다듬는다
이 손끝에서
많은 사람들 포만하여 행복했을까
내 아직 푸른 수액은
어떤 혈관으로든 타고 흐를 수 있을까
찬밥덩이처럼 굳은 가슴 언저리
떨림도 없이 또 몇 잎
떨구는 까칠한 줄기 쓰다듬으며
다독이듯 내내 쓰다듬으며
조리사일기 4 - 겨울달
뽀얗게 우러난 국물이
겨울달처럼 말갛다
염통처럼 벌름거리며 끓어오르던
깊은 관절과 힘줄과 뼈마디
녹아 흐물거릴 때까지 우려낸 국물
산동네 가슴 시리던 겨울달 같다
끓이고 또 끓이고 토막난 사골과 반골
동동거리고, 엎어지고 넘어지고 부딪치고
먼저 떠오르는 두터운 기름층
대국자로 걷어내고 또 걷어내고
어느덧 비릿한 냄새도 가시고
구수한 냄새가 난다
구수한 냄새가 난다 애꿎게도
골분이 다 빠져버린 뼈다귀는
스펀지처럼 천공이 뚫리고
손으로 만지면 가루가 되어버리는
주방 뚝배기 같은 사내 가슴속
묵묵히 겨울달 하나 또 진다
2004년 제4회 창비 신인시인상 -무수/송진권 꽃잎사진관
절골 /송진권
고종내미 갸가 큰딸 여우살이 시킬 때 엇송아지 쇠전에 넘기구
정자옥서 술국에 탁배기까정 한잔 걸치고 나올 때는 벌써 하늘
이 잔뜩 으덩그려졌더랴 바람도 없는디 싸래기 눈이 풀풀 날리
기 시작혔는디 구장터 지나면서부터는 날비지 커튼 함박눈이 눈
도 못 뜨게 퍼붓드라는구만
금매 쇠물재 밑이까지 와서는 눈이 무픞꺼정 차고 술도 얼근히
오르고 날도 어두어져오는디 희한하게 몸이 뭉근히 달아오르는
디 기분이 참 묘하드라네 술도 얼근허겄다 노래 한자락 사래질
꺼정 해가며 갔다네 눈발은 점점 거치고 못뚝 얼음 갈라지는 소
리만 떠르르하니 똑 귀신 우는 거거치 들리드라는구만
그래 갔다네 시상이 왼통 허연디 가도 가도 거기여 아무리 용을
쓰고 가두 똑 그 자리란 밝고 뺑뺑이를 도는겨 이러단 죽겄다 싶
어 기를 쓰며 가는디두 똑 그 자리란 말여 설상가상으로 또 눈
이 오는디 자꾸만 졸리드랴 한걸음 띠다 꾸벅 이러면 안된다 안
된다 하믄서두 졸았는디
근디 말여 저수지 한가운디서 누가 자꾸 불러 보니께 웬 여자가
음석을 진수성찬으로 차려놓고 자꾸 불런단 말여 너비아니 육포
에 갖은 실과며 듣도 보지 못한 술냄새꺼정 그래 한걸음씩 들어
갔다네 눈은 퍼붓는다 거기만 눈이 안 오구 훤하드랴 시상에 그
런 여자가 옶겄다 싶이 이쁘게 생긴 여자가 사래질하며 불런께
허발대신 갔다네
똑 꿈속거치 둥둥 뜬 거거치 싸목싸목 가는디 그 여자 있는 디
다 왔다 싶은디 뒤에서 벼락커튼 소리가 들리거든 종내마 이놈
아 거가 워디라고가냐 돌아본께 죽은 할아버지가 호랭이 커튼 눈
을 부릅뜨고 지팽이를 휘두르며 부르는겨 무춤하고 있응께 지팽
이루다가 등짝을 후려치며 냉큼 못나겄냐 뒤징 줄 모르구 워딜
가는 겨
얼마나 잤으까 등짝을 뭐가 후려쳐 일어서 본께 당산나무에 쌓
인 눈을 못 이겨 가지가 부르지며 등짝을 친겨 등에 눈이 얼마
나 쌓였는지 시상이 훤한디 눈은 그치고 달이 떴는디 집이 가는
길이 화안하게 열렸거든 울컥 무서운 생각이 들어 똑 주먹 강생
이 거치 집으로 내달렸다는디 종내미 갸가 요새두 당산나무 저
티 가믄서는 절해가며 아이구 할아버지 헌다누만
무수/송진권
숱한 세월이 흘렀는디두 어제 일 겉다야
눈이 어둔 우리 고모 시래기 거튼 푸석한 손으로
막걸리 자신 입을 훔치며 무짠지 집어들고
찬찬히 그때를 짚어보시는디
하늘이 무수 대강이에 오른 파랑물 같은 봄날
해토한 움을 열고 우리 고모부 고종남씨 무수를 꺼냈겄다
삼동을 날 동안 무수 하나로 조석을 해댄
억척배기 우리 고모 박딸금씨도 그 저티서
광우리 무수를 담고 있었는디
얼렐레
내남적없이 하 배고픈 봄날에 박딸금씨
기중 못난 무수 하날 골라
쓱쓱 광목치마 말기에 닦아
한입 베물려는디
담배참으로 아지랑이나 쳐다보며 해찰하던
고모부 고종남씨가 여편네 고쟁이 새로 뵈는 무수 거튼
허연 다리통을 보고 만 거라
마음이 동한 고종남씨 싫다는 고모를 끌고
물 마른 봇도랑 새로 들어가
일을 벌이셨다는디
어따야
쉰밥 취급하던 여편넬 그리 장하게 밀고 들어온 적이 없었다는디
갓 날아온 제비년들이
전깃줄에 나리비로 앉아서들
난 다 봤는디
다 봤는디 머
하 입싸게 놀려대고
입 무거운 굴왕신마저도 움 속에서
우멍한 눈을 거멓게 뜨고는 신들신들 웃었다는디
낯 붉어진 박딸금씨
주섬주섬 광우리 무수를 이고
지아비 앞세우고 동네 입새 들어섰는디
삼동네 꽃다지 번지드끼
매초롬한 제비년들 입방아를 찧고 다녀
몇날을 얼굴을 못 들고 댕겼다는디
그 고모부 동란 때 잃고
삼남매 혼자 키워낸
아직 정정한 우리 고모 박딸금씨
아흔에서 둘이 빠지는 미수(米壽)
무수만 보믄 얼굴이 붉어진다고
갓 시물 난 시악시 겉다고
막걸리 대접 부시며
아직도 보얀 다리통 드러내며
희벌쭉 웃으시는 우리 고모 박딸금씨
시상 최고로 맛난 건
겨울 지난 무수 낫으로 썩썩 삐져 먹는 거라고
체머리 흔들며 말씀하시지요
아덜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다고
며느리한테 퉁박을 맞으면
애고 무시라
애고 무시라 하시믄서두요
심사위원: 이시영 최정례 박형준 (시인)
본심 진출작: 총 583명의 응모자 중 아래 24명의 작품이 본심에 진출함.
창비신인시인상 심사평
공동당선작을 낼 뻔할 정도로 좋은 시들이 많았다. 영혼의 꽃바구니에서 꺼낸 삶의 마술은 갈수록 우리 시의 침체가 심화되는 현실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신인들의 패기를 입증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는 여러 층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콜라캔으로 대변되는 도시 삶의 비애에서부터 청춘의 열정을 소진하던 80년대의 도시 외곽 풍경을 지나 농촌공동체의 한 끄트머리에 매달린 설화적 공간에 이르기까지 빼곡한 지층으로 이뤄져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다채로운 지층에서 내밀한 시적 생명성을 바탕으로 사회와 자연 등의 사물과 다리를 놓는 새로운 상상력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이번 창비신인시인상 심사는 세 명의 심사위원이 예심과정에서부터 참여하여 세심한 분석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시적 개성을 소중하게 키워나가는 좋은 신인을 여럿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본심 뚜껑을 열어보니 단 한명의 신인을 골라내는 일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시는 시인의 시선과 감정이 잘 녹아 있을 때 설득력을 발휘하는데, 이 양자가 행복한 결합을 이룬 시로 세 심사위원이 선뜻 동의한 신인이 쉽게 결정되지 않았다. 시인의 시선이 뛰어나면 감정의 무게가 부족했고, 이와 반대로 풍부한 감정이 잘 살아 있으면 새로운 시선이 부족했다. 시란 인간의 눈으로 보고 인간의 감정으로 느끼고 인간의 머리로 생각해서 표현하는 장르이기 때문에 작품을 쓴 사람의 사상과 시인의 눈 속에 들어온 형상의 결합이 시를 만드는 가장 큰 요소이다.
본심에서 논의된 신인은 모두 4명이었다. 이 중에서 김윤희의 시는 한국어의 순도높은 서정을 보여주는 안정성이 단연 돋보였으나 돌출된 언어구조가 빚어내는 매력이 부족했다. 또 자신만의 시적 스타일로 언술의 새로움을 추구하는 권오영의 시는 매력적 시세계에 비해 투고된 시작품이 균질하지 않았다. 특히 권오영의 시를 읽으면서 안타까운 것 중 하나는 공모제에서는 많은 시를 투고하는 것보다 자신의 시라고 해도 정해진 편수에서 시적 개성과 완성도를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스스로 가려뽑을 줄 아는 감식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당선자로 집중 논의된 신인은 송진권과 임재정이었다. 세 심사위원은 침묵과 설득이 번갈아 오가는 과정에서 두 신인을 공동당선자로 결정하자는 의견이 모아지는 듯했다. 그러나 한 심사위원이 끝내 임재정의 시가 당선작으로 하기에는 시적 높이가 그렇게 우수하지 않다는 부정적인 의견을 냈고, 자연스럽게 당선작은 송진권의 시로 결정되었다.
임재정의 「즐거운 수리공」외 4편은 젊은 세대의 감수성을 랩의 언어의 발랄하게 표현한 새로운 감수성이 인상적이었다. 가령 무거운 소재를 가벼운 어조로 치환하는 독특한 어법은 무덤 파는 포크레인을 ‘정원사’로 노래하는 「내 친구는 정원사」라는 시편에서 빛을 발한다. 포크레인에게서 “황토밭 위를 내닫는 소나기”를 발견하거나 “장지(葬地) 한쪽에 쉴 때면 합장하는 품새가 대찰 큰스님”이라는, 그러니까 가벼움과 무거움이 교차하는 시선의 발굴은 새로운 어조에 의해 흥겨움마저 선사해준다. 하지만 투고된 다른 시편들은 시적 대상을 표현하는 데서 개연성과 시적 깊이가 부족하고 재치에 흐른 단점이 있다.
송진권의 시는 본심에 회부된 통과작 중에서 세 심사위원이 각자 마음에 둔 시에 모두 포함될 만큼 생생한 설화적 풍경이 압권이었다. 그는 시를 만들지 않고 스스로 즐기면서 신명나게 분출한다. 구성지면서 입에 착착 달라붙는 말랑말랑한 언어의 묘미로 빼어나게 살린 충청도 사투리, 거기에 걸맞은 어휘 선택, 가난과 설화의 현실마저 경쾌하게 그려낸 우리 전통의 익살스러운 가락이 일품이다. 그러나「절골」「무수」두 작품이 이러한 높은 시적 성과를 거둔 반면 나머지 투고작은 상대적으로 우려의 심사를 던져준다. 과다하게 사투리로 상황을 설명하면서 지나치게 과거 편향적인 측면은 앞으로 이 신인이 현대 도시의 일상을 그릴 때 얼마큼 고뇌의 흔적을 보여줄지 조금 걱정스럽게 한다. 앞으로 이 신인이 신명의 언어로 시선의 다양성과 감정의 균형을 이룬, 뛰어난 시인으로 거듭나 우리의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켜줄 것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이시영 최정례 박형준]
제5회 창비신인시인상 당선작
판화처럼 나는 삽니다
김성대
판화처럼 나는 삽니다
날마다 나비의 무늬를 읽으면서
서부음악을 듣습니다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채식을 주로 하는 편이지요
우연히 상추에 붙은 나비 알을 먹고 나선
나도 모르게 뒤꿈치가 들려요
그럴 땐 빠리나 서귀포가 생각납니다
판화처럼 나는 삽니다
어떤 날은 터널이 계속 이어지기도 하지요
터널 저쪽엔 비가 오기를 바라지만
터널 그리고 터널, 뿐이지요
물잠자리의 날개와 독버섯의 얼룩이
눈앞에서 맴돌아요 그럴 땐
아주 먼 옛날이야기를 듣고 싶어집니다
일주일에 한번씩은 책방에 갑니다
거기서 사랑의 묘약을 찾은 적이 있어요
부끄럽게도 마음이 설레었던 거지요
그렇지만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는 걸 믿습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박쥐들과 부릅뜬 부엉이들이
나의 행운을 뜯어먹으러 달려들 거예요
가끔 꿈속에서 운 날이 아침은 눈이 맑습니다
그럴 땐 눈 위에다 예쁜 나비를 새기고 싶어요
눈꺼풀을 깜빡일 때마다 날개가 접혔다 펼쳐지겠지요
판화처럼 나는 삽니다
언제 한번 놀러 안 오시겠어요?
*고야의 판화 제목
물옥잠
그녀들이 하얀 발을 내밀었고
나는 번갈아 핥아주었다
왼발의 여자에게선 복숭아향이 났고
오른발의 여자에게선 장마비 냄새가 났다
새빨간 매니큐어의 밤
발톱들이 무척이나 반짝거려 먼 별들도 비출 듯한데
그녀들은 어깨에 담요를 두르고서
물옥잠에 대해 말했다
주렁주렁 꽈리를 튼 혹과 꽃들의 전
성기에 대해
부레가 부푸는 늪의 밤에 대해
그녀들의 말은 스펀지처럼 가볍고 구멍이 많았지만
귀기울여 듣다보면 피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철새가 날고 풀벌레가 울고 수초들이 자라
나의 방은 고요한 습지로 변해갔다
물옥잠의 자맥질에 밤은 깊어가고
그녀들의 발은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나는 달빛을 번갈아 핥으며
새벽이 벗겨질 때까지 그녀들의 상상 속에 머물렀다
일월식물원
삼거리에 용달차가 멈춘다
얼기설기 묶인 가구들이 잠시 기울고
액자 속 사진에서 머리칼이 휘날린다
저 이삿짐의 주인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낙향한다고
함부로 단정지어본다
국도는 매일 고만고만한 차들을 고만고만한 속도로 실어나른다
하루를 기점으로 순환하고 있는 걸까
이 삼거리는 세트장인지도 모른다
나는 꽃과 나무를 돌보는 역할을 한다
주기적으로 새순과 어린 나무들이 실려오고
아무도 그들의 생일을 기념하지 않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는 신생아실처럼 들끓는다
내가 그리 비중있는 배역은 아닌 것이
그들은 스스로 잘 자라기 때문이다
나는 약간의 손질과 이동을 도울 뿐이다
시절이 새초록해지면 아이들이 소풍을 온다
도시락을 흔들며 목련원피스를 입은 여자와 함께
삼거리를 건너온다
아이들은 나무를 흔들고 꽃을 쥐었다 놓지만
나는 내버려둔다
친적들은 서로를 아름답게 한다고 어딘가에서 읽었다
아이들은 꽃을 닮고 꽃은 아이들을 닮고
그런 밤이면 달무리가 겹으로 서고
삼거리에 초승달과 그믐달이 함께 뜬다
빨래하는 여자
모서리에 난 창으로 햇살과 햇살이 섞인다
여자는 세제를 넣으며 생각한다
그래 너무 기울어졌던 거야 상처마저 비스듬하도록
그런데 그 상처들은 다 어디로 새나갔을까
어느 틈에 단단한 솔기가 풀리면서
상처받지 않겠다는 마음까지 풀어지고
빙글빙글 드럼 속에서 색색 꽃들이 피고 지고
엉킨 흔적들이 흔적을 지운다
가만 보니 흰 빨래도 섞여 있다
안간힘을 쓰고 있는 사진 속의 얼굴
그때 내 표정은 떨리지 않았는데
어째서 배경만 번졌던 것일까
그의 손이 떨렸던 걸까
탈수는 늘 힘겹다
물기를 짜내고 건조해지려면, 가벼워지려면
온몸을 악다물고 덜덜 떨어야 한다
한번 끊어진 실은 다시 이어도 매듭이 남는다
눈으로 안 보이더라도 손으로는 느낄 수 있다
옹이진 기억들로 피로를 느낄 때
세탁기가 멈추고 음악이 흘러나온다
여자는 나비처럼 가벼운 손짓으로 빨래는 넌다
구겨지거나 뒤틀리지 않도록
작은 빨래도 탈탈 정성스레 편다
숨겨둔 열정이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다만 잔설처럼 남은 햇살이 좋아서라고
그건 외로움이 아니라 심심함이라고
월롱역
오래된 창고는 비밀스럽다
창고를 에워싼 갈대들이 수런거리고
꽃들은 잘 때도 눈을 감지 않는다
눈 뜨고 자는 달개비 앞을
발꿈치 들고 지나는 달빛
먼지 쌓인 비밀이 달빛에 살짝 드러난다
이따금 기차가 지나가면서
추억을 완행 연주하고
바람은 한소절씩 베어넘긴다
언젠가는 비밀도 곰팡이 핀다
비밀을 지커려는 생각도
다시 들추길 바라는 마음도
언젠가는 곰팡이 핀다
타다 남은 양초처럼 뭉툭해진다
달을 희롱하듯
달이 꽃을 희롱하고 꽃이
달을 희롱하듯
한시절 놀았으면 그뿐
창고에 걸린 달빛이 촛불처럼 떨린다
잠시 푸른곰팡이에 귀기 어리는 듯하지만
저 달에 단풍 들면
곧 기차도 뭉툭해질 것이다
제6회 창비 신인시인상-고은강 신인상수상작
푸른 꽃 외/고은강
1
점자처럼 두둘두둘, 지문으로 만져줄게요
서투른 척 해드릴까요
깨물어드릴까요
도시 냄새, 하얗게 질리겠어요
내일은 당신 아버지와 이 숨막히는 통사를 써볼까 해요
통사는 밤으로 흐르고 우리는 고독하니까
참을 수 없는 불면의 생 어딘가에서 멋지게 뒹굴어봐요
질척거리는 입술, 말라죽을 때까지
당신만 모르죠
우리가 함께 저지른 아름다운 불경죄,
난 선생님 곁에 누워 선생님의 아내를 가졌어요
우리가 낳은 불순한 아이를
당신은 목숨 바쳐 섬기게 될 거예요
그게 평등이랍니다
또,
침 뱉으시게요?
가슴을 까발릴까요
뒤통수에 달린 음부를 보여드릴까요
별로 가진 것도 없는데
침 뱉으시오, 라고
이름을 개명할까봐요
일수쟁이처럼 꼬박꼬박 잘도 처먹는 당신,
연민의 면죄부나 드리게요
확,
미끄러질까요?
절박했었다고 말할까봐요
덜렁덜렁 한쪽 어깨를 다 드러내놓고 더 열심히,
주둥이로 죄짓자고 꼬드길까봐요
내 애증을 지불해서
한 생의 치부를 조용히 덮어줄 수 있다면,
거리에서 제일 잘 팔리는 절망이 되어
여기저기 평등하게 열어줄까봐요
백성 없는 나라의 주인처럼
고독한 수염이나 무럭무럭 길러
그 밀림국의 첫번째 거짓말로
열망보다 가볍게
사랑한다니까요, 자기
2
나는 밤의 서식자,
당신의 오만한 지붕 위에서
보들레르의 고양이처럼 갸릉갸릉, 울겠어요
당신의 애완동물처럼 기르고 있는 독설의 여인과 함께
티끌처럼 뒹굴겠어요
썩은 비늘을 털며
전염병처럼 이 남자 저 남자 옮아다니겠어요
아이를 낳을 거예요
탄탈로스의 사생아 같은 아이를 낳아 통째로 잡아먹고
또 아이를 낳아 또 잡아먹고,
당신의 비루한 주머니를 털어
내 모반의 냉장고 속 꽉꽉 채우면서,
더럽게 뚱뚱해지겠어요
내 허구의 눈시울이 자꾸 가려워요 파랗게,
꽃잎이 지네요
호텔 캘리포니아/고은강
오늘밤 당신은 자전거를 버린 아이, 아리를 버린 엄마, 엄마를 버린 아빠
첫사랑의 둥지가 머나먼 기억으로 실족되어 떨어진, 그 남자 그 여자의 뒷이야기가 자막처럼 흘러서 내리는 밤이니까요
불충분한 가난과 설익은 연애 때문에 난 어쩌면 시인이 될 수 없을지도 몰라요 가끔은 헤프게 첫인상 흘리며 다 닳아빠진 절개로 활활 접속하고 싶은 서정도 있었지만 서정시보다 더 빨리 부패하는 건 없다고 내 안의 박테리아가 딱따구리처럼 쪼아대요 그러니 사랑이여,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이 '시적'인 거리감을 위해, 이혼해드릴까요
오늘밤 나는, 차라리 혀를 꽉 깨물고 싶었던 첫키스의, 찢어진 청바지의, 노랑브리지의 호텔 캘리포니아
혹시라도 쓸쓸한 그대, 측츤측은 어둠으로 젖어드는 이 거리의 호텔 캘리포니아로 오세요 뒷문 열면 보이는 당신의 구멍가게처럼 나는 있어요 한 남자의 새애 투숙해 살면서 세상에 도청당하는 여자들이 그물처럼 떠다니는 황혼의 거리에서 365일 영화는 상영하지요 주홍글자는 불황이 없어요
그러니 그대, 호텔 캘리포니아로 오세요
오늘밤 당신은 아빠를 버린 엄마, 엄마를 버린 아이, 아이를 버린 자전거
여행/고은강
나는 지금 발칸반도 같은 너의 몸을 더듬고 있어
너무 추워 자꾸만 필터를 껴입고 무너져내리는 가슴으로 한풍은 날아
들고 나는 장승곡처럼 나부낀다
시청률이 높은 채널을 향해서만 배고픈 부리를 쪼아대는 여기는 북위 37도, 정치면 사회면 고급주의 침 튀기며 하루해가 시끄럽다 하늘 위엔 냉소의 벽에 환조처럼 묶여서 이주민처럼 흘러다니는 구름들, 박제된 새처럼 자유롭고 바람은, 체지방처럼 무겁게 흘러내리는 삶의 이목구비를 지나 삐걱삐걱 이가 뒤틀린 생의 토대 위로 속보처럼 달아나버린다
논문처럼 잘 재단된 생의 어디쯤에서 전복된 나는, 파란불이 아니면 삶을 가로지를 수 없는 내 애증의 강 같은 너를 거룻배로 흘러서 간다 관계는 존재, 존재는 때로 슬픔, 그 슬픔을 딛고 찬란히 일어서는 협곡의 밤들 다 건너면 폐병환자처럼 검고 메마른 호흡의 절벽
나는 지금 입구가 없는 시간의 거리에 서 있어
발칸반도 같은 네 허리토막을 끌어안고 아주 두껍고 예민한 허기가 되어버린, 이 진화의 힘으로
착시/고은강
가령 우리는
연애시보다 더 간절했지만
정말 꽃이 아름다운 건지
상투적으로 피고 지는 일에
너무 많은 감탄사를 허비해서
서른도 채 되기 전에 주머니가 털린
허무처럼,
뽀개면 줄줄 쏟아졌다
잡음뿐인 턴테이블 위에서
우물쭈물 한쪽 발을 빠뜨린 채
휑하니, 한소절은 돌아가고 돌아오고
휘파람 부르며 즐겨찾기로
아무튼 사랑했지만
가령, 아무튼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씰크絲 화려한 내 이불 속의 남자들과
연극적으로 부둥켜안고
눈꺼풀에 푸른 성에를 덮은 채
토실토실 부어오른 낭만적 엉덩이를
한껏 흔들어대면서
오기처럼 시야를 벗겨먹던
구불구불 공복의 시간
시구문(屎口門)/고은강
이 세상과 딱 한번 연애를 하고 그녀는 죽었다 검색창 앞에서 끊임없이 고문당하고 영락없는 지도 속의 사물처럼, 빵빵 플래시 터지는 피사체 안에서 분명하게 사진 찍혀 현재가 죽고 유년이 죽고, 잉태 직전의 그 모든 것들은 얼굴이 벗겨진 채 태반을 떨구며 죽어나갔다. 허묘를 파헤치는 하이에나의 발톱에 수런수런 뜯겨나가는 살점, 살점의 유전자를 타고 그녀의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죽고 오천년의 뼈대가 가루가 되어 까맣게 재를 날린다 기억이 추상으로 날아가버릴 때까지 이건 리얼리즘이야!
랜을 타고 날아다니는 동물적 감각은 데시벨이 끝내주게 높다 자, 오늘은 누구를 화형시킬까 킁킁거리며 시구문을 달리는 초고속의 사회적 떼거지들
창비신인시인상 심사평 중에서
고은강의 「포식자」외 4편은 활달한 리듬으로 자기만의 목소리를 보여주는 것이 장점이다. 그리하여 시적 착상이 새롭다고 하여 그것에 모든 시의 언어를 집중시켜 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타 투고작들과는 달리, 눈에 띄었다. 이 시인은 우리 시대의 연애시인이다. 최승자의 시를 연상시키는 여성성의 언어로 세계에 치명적인 유혹을 던지는 데 서슴지 않는다. 때로는 낯설고 신선한 이미지가 외연에 머무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마저도 깊은 상처를 입은 연애의 쓰라린 어조에 의해 푸른 독(毒)으로 피어난다. 시인은 그 풍경을 “다 닳아빠진 절개로 활활 접속하고 싶은 서정도 있었지만 서정시보다 더 빨리 부패하는 건 없다고 내 안의 박테리아가 딱따구리처럼 쪼아대요”(「호텔 캘리포니아」)라고 말한다. 이러한 점에 의해 서정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깨는 ‘뒤통수에 달린 음부’(「푸른 꽃」)로 세계에 도발하는 여성성의 언어가 진정성을 획득한다. 다만 앞으로 시에서 직유를 쓸 때는 이미지가 단조롭게 될 수 있다는 점을 심사숙고하길 바라며 연애시의 어법에만 매달리지 말고 시야를 넓혀나갔으면 한다.[심사위원: 나희덕 박형준 김수이]
동양신문 지용신인시인상
11회 지용신인문학상】당선작-대작(현택훈)
국밥에 소주를 마시니
새벽별이 떴다야
택실 기다리는 저 사람들도
노래 소리가 작아졌군
가로등은 너무 밝아서
고갤 숙이고 있는 것 같아
달리는 새벽바람이
아침신문을 스치네
너는 날 다시
새벽으로 데리고 왔어야
등 굽은 청소미화원은
수도승처럼 거룩하지 않은가
국밥집 유리창 앞에 앉은
새벽 거리가 내게
눈물 같은
소주를 또 붓고,
제 12회 지용 문학상 당선작]
우리집에 왜 왔니/이시하
어둠을 파고 시궁쥐 눈깔 같은 봉숭아 씨앗을 심을래요 모르는 집 창문에 애절히 피워나 모르는
그들을 울게 할래요 봉숭앗빛 뺨을 가진 어린 손톱에 고운 핏물을 묻힐래요.
우리 집에 왜왔니 왜왔니 왜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서둘러야 해요 나를 통과해 가는 그대의 눈을 볼래요 너무 오래 견딘 상처는 아물지 않아요 몹시
처량해진 나는 모르는 집 창문 밑에서 울 거예요 당신을 부르며 울 때 사람들은 어두워져요
문이 닫혀요
이렇게 부질없는 이야기는 처음 해봐요 나는 늘 술래이고 아직 아무도 찾지 못해요 가위바위보가
문제에요 나는 주먹만 쥐고 있거든요 아무도 내게 악수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아요 당신도 곧잘
숨는다는 걸 알아요 이제는 내가 숨을래요 꽃 피지 않는 계절에 오래도록 갇혀있을 거예요
우리 집에 왜왔니 왜왔니 왜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봉숭아꽃이 만발했어요 보세요 정말 내가 모르는 집이에요 창문 밑에 피어난 저 붉은 봉숭아! 무슨 꽃은
봉숭아꽃이어야 해요 당신은 봉숭아꽃을 찾으러 온 거예요 나는, 나는 꽃 피지 않을 거예요.
아무도 찾지 못해요 문은 열리지 않아요
[심사평]
예년과 같이 많은 작품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심지어 해외에서까지 날아 들었다.
응모한 253명이 보여준 1604편의 작품을 읽었다. 대개 상당한 습작기를 거쳐 일정 수준의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들이다. 그만큼 고르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엇비슷한 언어구사와 소재 처리가 두드러져 규격화된 유행이 퍼져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개성적인 소재 처리와 말솜씨가 뚜렷한 작품을 찾으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개성을 드러내려고 작위적으로 ‘튀는’것은 눈에 거스르는 일이요 하나의 취약점이다. 또 산문과 시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길어지고 장황해지는 경향도 소망스러운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기다운 시선과 목소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여러 응모자들의 자성과 배가되는 노력을 요청한다.
‘집 나간 비둘기를 찾습니다’(최종길)는 순진한 발상이고 어사 선택도 아주 소박하다. 그래서 허를 찌르는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상투성에 물들지 않은 것이 큰 장점이다. 그러나 나머지 작품들이 허약해 새 얼굴로 나서기에는 미흡하였다. ‘인사’, ‘꽃잎’,‘문래동 4가 8번지’(안경숙) 등 다섯 편도 독자적인 목소리를 보여주고 있다. 산문화 성향을 억제하고 소재의 경제적인 처리를 지향하고 있는 것도 아주 든든하게 생각된다. 또 다루고 있는 소재도 다채로운 편이어서 믿음직스럽다. 그러나 대체로 소품이어서 매우 아쉽지만 이번엔 더 정련할 시간을 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에 왜 왔니?’‘꽃놀이 꽃놀이’등 다섯 편을 보여준 이향미 씨의 작품들은 섬세하면서도 경묘하고 신선하다. 그리고 소재처리나 언어 수사의 상투성을 피하고 있음도 잘 드러나고 있다. 또 시와 산문의 차이라는 것도 잘 분간하고 있어 믿음직스럽다. 작품에 여백을 두고 여운을 남겨주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 집에 왜 왔니’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당선을 축하하며 앞으로 자기 목소리가 더욱 뚜렷한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