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2품 ‘가선대부’ 벼슬 받은 알렌
미국이 세계적 강대국으로 부상한 때
미국이 오늘과 같이 부강한 나라로 성장한 것은 1840년에서 1890년, 그 반세기 만의 일이다. 50년 사이에 미국의 공장 생산고는 무려 7배 늘었다.
당시 미국사람들은 그런 비약적 발전이 자기들의 힘으로 이룬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 덕분이라고 고백했다. “주님이시다”라는 함성이 전국에 가득했다. 당시 그들은 찬송가를 많이 작곡하고, 불렀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미국계 찬송가는 다 이 어간에 지어진 것들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기 위해 전 국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며 대각성운동을 펼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세계선교운동을 전개했다. 우리나라에 선교사들이 온 것도 그 때의 일이다.
한국 최초 국립학교 교사들
고종은 배재학당이나 이화학당 같은 미션학교들이 들어서자 국립학교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종은 1886년 여름 육영공원이라는 학교를 세우고, 미국 대통령에게 3명의 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한다. 미국 대통령은 당시 뉴욕의 유니온신학교에 다니던 유능한 학생 셋을 선발해 보냈다. 헐버트, 번커, 길모아 이 세 사람이다. 이들은 모두 선교사로 한국에 남아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들이다.
미국 대통령은 왜 하필 신학교 출신들을 보냈을까. 미국이 한국의 근대화 과정 그 첫날에 기독교를 그 교육의 근간으로 하려던 생각이 놀랍고 고맙다.
하지만 2∼3년이 지나 육영공원이 폐쇄됐다. 이들 세 사람은 한국에 남아서 선교사 일을 하게 된다. 이들이 한국 근대교육 초기의 교사로 선발된 배후에는 알렌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헐버트는 후에 해아(헤이그)밀사와 동행해 초행인 한국대표들을 위해 온갖 큰 역할을 다 한다.
한국은 세계기독교의 기수국가
1909년 미국 국무성의 문서에는 한국이 ‘세계기독교의 기수국가’라고 하는 글귀가 있다. 여기서 기수라는 표현은 한국이 세계 기독교의 대표이자 상징이란 뜻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엄청난 평가는 알렌이 계속 미국 국무성에 보낸 서신을 근거로 나온 것이 분명하다. 알렌은 1908년 “지금 한국에서는 기독교만이 유일한 희망으로 보입니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고종과 알렌의 우정
고종은 알렌과 인간적으로 아주 친밀한 관계였다. 알렌은 당시 궁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술 외에도 대부분의 국내외 문제에 대해 고종과 논의하고, 마치 자문위원 같은 역할을 한다. 알렌은 이런 말까지 남겼다. “마침내 나는 이 지구상에서 왕족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지구상에서’라는 말에 주목하자. 미국선교본부도 이 특별한 총애를 줄줄이 기록으로 남기기 바빴다. 다들 혀를 차는 모습이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선교사 입국 1년 안에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기독교와 근대과학과 미국, 이 세 가지의 승리였다. 얼마 후 청국에서 오래 유폐생활을 하던 대원군조차도 귀국해서 곧 알렌을 찾아와 악수까지 하였다고 한다.
궁궐 안에서의 알렌
고종은 알렌에게 궁궐 안에 사무실을 하나 내주었다. 그리고 1886년 여름에는 벼슬도 내린다. 처음에는 정3품 당상급의 ‘통정대부’라는 벼슬이었다. 반년 후에는 종2품의 ‘가선대부’에까지 오른다. 그만큼 알렌이 고종에게 환심을 샀고, 고종은 알렌을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고종과 민비가 얼마나 외로웠기에 그렇게까지 하였을까. 사실 고종이 덕수궁으로 옮겨간 이유도 근처 미국공관 옆에 있고 싶어서였다. 만일 알렌이 미국의 명문 대학 출신 그리고 명문가 출신이 아니고, 또 그렇게 유능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생각하면 두렵다. 한국근대사는 전혀 다른 길로 갔을 것이다. 그러니 알렌 그 한 사람이 우리 근대사에 끼친 공적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다.
궁궐에서 알렌을 그렇게 대접한 이유
왕족들도 알렌을 수시로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몸이 조금만 불편해도 밤낮으로 알렌을 불러댔다. 신기한 치료방식도 보고 알렌과 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왕족들은 궁중에 밤새도록 남아서 정사를 보고 새벽녘에야 퇴청하는 것이 일상사였다. 그러니 알렌이 왕족에게 불려가는 시간은 대개 밤중, 그들이 일하는 시간이었고, 알렌에게는 잘 시간이었다.
알렌이 궁궐에 가면 대기실에서 오래 기다려야 하는 때가 있는데, 그럴 때에는 시종들이 “담배를 피우라” “샴페인을 마셔라” “사탕과 과자를 먹어라” “커피를 마시라” 하면서 융숭한 대접을 했다. 알렌이 사양을 했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나중에 알렌은 시종들이 그렇게 권하는 이유를 알았다. 당시 관리들에게 그런 서양의 식품은 신기한 것이었고, 이를 대접하는 것이 예우를 갖추는 것이었다. 관리들은 시종이 가져온 담배나 사탕, 과자 등을 그 자리에서 다 피우거나 먹지 않고 관복의 커다란 소매 자락에 집어넣고 집에 가져가기도 했다.
[출처] [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12) 미국과 고종, 그리고 알렌|작성자 뱅갈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