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남도석성과 용장산성..........
고려는 근 40년을 몽고의 침략을 받아 엄청난 피해를 입은 피의 역사를 기록한다. 몽고의 침략에 대해 무력했던 최씨무신정권은 강화도로 쫓겨가고 각 지역의 민초들은 자력으로 몽고의 침략에 대향해 싸워야만 했다. 왕이 개경을 버리고 강화로 들어갈 때의 참상이 <고려사절요>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때 장마비가 열흘이나 계속되어 진흙길이 발목까지 빠져 사람과 말이 쓰러져 죽었다. 고관이나 양가의 부녀자들 중에도 맨발로 업고 이고 하는 자들이 있었다. 과부나 홀아비, 고아나 혼자 사는 사람으로 갈 곳을 잃고 통곡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끝내 몽고의 압력에 의해 무인정권이 붕괴되고 개경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자 이때 대몽항쟁의 기치를 들고 봉기하여 진도로 근거지를 옯겨 성을 쌓고 저항한 집단이 있었으니 바로 삼별초다. 농민군인 초적의 활약과 승려 또한 민을 동원하고 지휘하는 탁월한 전투능력을 갖춰 대몽항쟁의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 오랜 세월 고려가 입은 피해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고 몽고군은 이르는 곳마다 무자비하게 닥치는 대로 살육을 자행하였다.
고려의 백성들은 산성이나 섬에서 식량을 구하지 못하여 굶어 죽는 일이 허다하였다. 사로잡힌 사람, 살육된 사람을 헤아릴 수 없었으며 몽고군이 지나간 자리는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또한 경주 활룡사의 구층목탑을 비롯한 중요 문화재가 마구잡이로 소실되기도 하였다.
삼별초의 항전....
원래 밤에 도둑을 단속하는 일로부터 경찰업무와 군사업무까지도 맡게 되었던 삼별초는 고려정부가 몽고와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개경환도를 단행하자 진도로 옮겨와 장기적인 대몽항쟁을 계획한다.
진도는 일본이나 중국과 교류하는데 요충지였으며 비옥한 농지로 어느 정도의 자급자족이 가능한 곳이었다. 삼별초는 그래서 이곳에 근거를 두고 길목을 막아 전라, 경상도의 조세 운송에 커다란 차질을 빚게 하는 등 개경정부에 큰 타격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삼별초는 여몽연합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몇 차례 물리쳤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진도에서 제주도로 쫓겨 건너갔고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삼별초의 항전도 여몽연합군의 공격으로 무력해지자 고려는 몽고의 간섭을 받고 경제적 수탈을 고스란히 당하는 치욕적인 처지가 되고말았다.
대몽항쟁의 전적지인 남도석성에 올라 드러난 갯벌과 바다를 바라보면 해안선을 따라 새카맣게 떼지어 몰려드는 몽고군의 잔상이 떠오른다. 또한 성곽 위에서 이 땅을 지키고자 장렬한 항전을 벌였던 고려인들의 들끓는 함성도 들려오는 듯하다. 몽고의 침략으로 파괴되고 황폐화된 우리 국토와 말로 다 할 수 없는 백성들의 막대한 희생을 치룬 역사의 현장에 서면 숙연하게 절로 고개가 숙여질 따름이다.
또한 성의 둘레가 산으로 이루어진 용장산성 안에는 계단상의 건물지가 잡초 무성한 채로 남아 있지만 석축의 규모는 그 웅장함이 몽고 침략에 항거하여 조국을 지키고자 궐기한 고려 삼별초의 성지임을 짐작케 한다.
예전에는 무너진 돌더미가 쌓여 있더니 최근에 성루까지 보수를 해서 둘레가 610m에 이르는 남도석성은 둥그런 성벽 위를 걸을 수도 있게 되었다. 성 안에는 민가가 수십 호 들어서 있고 마을 사람들은 이 옛 성문을 통해 들고난다.
또한 남도석성 남문 앞으로 흘러가는 가느다란 개울 위에는 규모는 작지만 아담한 홍교(무지개 다리)가 놓여 있다. 편마암결의 판석을 겹쳐 세워 만든 것으로 전국적으로 유래를 찾기 힘든 특이한 양식이라고 하니 이 또한 눈여겨 볼 만하다.
첫댓글 끝까지 항거한 삼별초의 넋이 서린곳이군.
역시 우리나라 사람의 근성은 알아 줘야해~~
예전에 진도 내려가다가 차 퍼졌던 악몽이 다시 떠오른다.ㅋㅋ
ㅋㅋ 진도 야그는 하지 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