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타종교인 전도원리와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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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수 목사
Ⅰ.시작하는 말
전도현장에서 사역하다 보면 많은 타종교인들을 만나게 된다. 타종교인들을 처음 대면할 때 대체적으로 전도자들은 당황하게 된다. 그리고 어디에서 부터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난감해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비인격적인 방법으로 상대방을 대하는 경우까지도 있다. 우리는 전도의 주체이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나가야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도의 현장에 만나는 타종교인들에 대해서 효과적인 복음전달을 전달할 수 있도록 가장 지혜로운 방법들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이 글을 쓰게된 동기이다.
사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자기 것만이 최고이고 상대의 것은 무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만 알고 타종교을 모르는 사람은 오히려 자신까지 모르는 이중적인 무지의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타종교를 전혀 알지 못하면서 비난(非難)하는 것과, 알면서(?) 비판(批判)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이다. 전자는 무지(無知)에 근거한 편협주의에 불과하고, 후자는 이미 자신의 정체성이 분명하여 흔들리지 않는 자유인인 것이다. 타종교를 알므로 해서 자신의 신앙이 파괴될 것을 두려워하는 신앙은 올바른 신앙이 못된다. 오히려 자기의 신앙에 대한 확신이 없는 자로서 전도자로는 자격미달이다.
특별히 이번에 서울제일교회 매일전도팀에서 이러한 주제로 함께 연구할 시간을 갖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사실 이 강의는 필자가 십자군전도대 시절에 전도사님들을 대상으로 강의했던 내용을 다시 평신도들에게 맞게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어떤 부분은 평신도에게 좀 어려운 부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전도현장에서 적용하는데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본다. 제2장에서는 타종교인 전도의 기본적인 원리들에 대해서 "존 시먼즈,[타종교인 복음전달의 실제]에서 주로 참고하였고, 제3장에서는 타종교인 전도의 실제에 대해서 필자의 경험과 여러 참고서적들을 참고하여 정리하엿다. 많은 나눌 이야기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전도의 원리와 불교인,유교인 그리고 민속신앙인들로만 구분하였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불신자인 한국인들은 이 구분 속에 포함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Ⅱ.타종교인 전도의 기본적인 원리
A.피해야할 접근 방법
1. 정면대응법
이는 다른 종교인들을 공격적으로 논박하고 정죄하는 방법이다. 다른 종교는 모두 마귀의 역사이며, 잘못되었고,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다른 접촉점은 없다. 정면대응법은 타종교인들에게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미지(편견, 마음의 분노)를 가장 많이 주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러한 방법을 '제국주의적인 전도방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른 종교를 파괴해야 기독교을 신앙을 세우는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복음은 복음 그 자체로서 진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어떤 신자들은 불교의 사찰에 찾아가서 불상에 붉은 페인트 칠을 하고 달아났던적이 있다. 심지어 어떤 전도자는 전철 안에서 심한 욕설을 하면서 '불교믿는 00들은 지옥에 간다!'고 소리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불교인에게 기독교인의 공격적인 전도방법은 한낱 저급한 자기 욕망(慾望)에 대한 집착(執着)으로 비쳐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한다. 때로 유교적인 사람에게는 기독교인들의 공격적인 전도가 점잖치 못하고, 무례한 사람들로 인식될 가능성도 있다. 기본적으로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태국 선교사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태국은 불교국가이기는 하지만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한국보다 앞선다. 그런데 태국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당시에 기독교 선교사들이 태국의 국왕 앞에서 기독교를 설명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이때 그 선교사는 여러 불교도인 여러 대신들을 향하여 불교를 믿으면 지옥에 갈 것이며, 이는 마귀의 역사라고 항변했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그 선교사는빰을 맞고 추방되었다. 이후 태국에서 기독교의 선교는 더 어려워지게 되었다. 전도를 위한 용기와 헌신은 높이 살만하나 같은 값이면 좀 더 효과적이고 뱀처럼 지혜로운 접근 방법이 필요할 것이다.
2. 타협적인 방법
이 방법은 전도대상자가 쉽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복음의 내용을 희석(혼합) 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오히려 믿음에 대한 배신행위일 뿐이다. 전도자는 메시지의 형태를 바꿀 수는 있지만, 그 내용을 변화시킬 권리는 없다.
B.효과적인 접근 방법
1.마음 대 마음 접근법
마음대 마음의 접근법이란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갖는 본성과 고통이라는 공통 분모 속에서 보편적인 접촉점을 찾는 방법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전도대상자의 종교적인 배경이 아니다. 하나의 종교인이기 앞서 하나의 인간이라는 것에 관심을 갖고, 모든 인간이 소유한 본성과 문제를 통하여 복음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밑으로 가면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 모두들 같은 생리적인 필요들이 있으며, 모두들 근심으로 부터 안정과 자유를 누리기 원하며, 모두들 사랑받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욕구가 있다. 또한 모든 사람은 자기 성취에 대한 갈망이 있고, 대부분 삶 속에서 비슷한 유혹들을 받는다. 모든 사람은 죽음의 공포에 직면해야 한다. 이 모든 보편적인 인간본성의 갈망은 동일한 것으로서 우리의 접촉점이 될 수 있다.
심리학자 메슬로우(A.H.Maslow)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5단계로 구분한 바가 있다. 전도 할 때 메슬로우의 분류는 도움이 된다. 전도대상자가 지금 생리적으로 심리적으로 어떤 단계에 있는지 파악하고 그 수준에 맞게 전해야 할 것이다. 만일 생리적으로 배고픔에 있는 사람에게는 빵을 주면서 함께 복음을 전해야 비로서 전도자의 말이 귀에 들어올 것이다.
메슬로우(A.H.Maslow)의 동기의 위계
따라서 처음부터 전도대상자의 종교체계에 관심을 두고 접근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공통적인 인간욕구들로 부터 접촉을 시도한다면 무난하고 긍정적으로 복음에 도달할 수 있다.
2. 접촉점 접근법
접촉점 접근법은 마음대 마음의 접근법과 유사한 점이 있지만, 근본관심이 전도 대상자의 관심사에서 부터 출발한다는 점이 다르다. 예컨데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죽음의 문제를 가지고 접촉을 시도했다면 이는 '마음 대 마음의 접근법'이다. 그러나 수험생을 향하여 그가 가장 관심있는 합격(合格)에 역점을 두고 '천국합격을 위한 조건'등을 제시한다면 이는 접촉점 접근법이다. 이 경우 '시험에 합격'이라는 포인트가 그의 마음과 정신으로 통하는 문이 된다. 전도 대상자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을 파악하여 그와 유사한 비유나 어휘를 사용하여 종교적인 부분으로 관심을 돌린다.
가령 권투선수에게 최고의 관심은 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인생의 링에서는 어떻습니까?"라고 하면서 접근할 수 있다. 필자는 이발소에서 머리를 손질하면서 이발사에게 복음을 전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발사의 관심은 '돈을 버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가 돈버는 법을 가르쳐드릴까요?"라고 하면서 말을 건냈다. 그러자 이발사는 눈을 크게 뜨면서 그 방법을 물었고, 필자는 그동안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간증하고 복음을 전했다.
따라서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전도대상자가 관심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만일 처음 만난 전도대상자라면 내가 먼저 말하기 전에 그의 관심사를 들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사람들의 관심과 어휘의 통로를 통하여 기쁜 소식을 나누는 기술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3. 대조 접근법
이것은 기독교와 타종교의 유사점을 발견하기 보다는 대조점들을 발견하여 접근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논리적인 면이 있다. 따라서 전도자는 논쟁이 되지 않도록 인내력을 갖고 차근차근 설명해 가야 한다. 이 방법은 현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드러나기 때문에 듣는 사람을 사로잡기 쉽다. 예컨데 석가모니의 생애와 예수의 생애를 비교하면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라든지, 열반과 구원의 차이를 설명것 또는 무서운 무속적인 귀신들과 사랑의 하나님을 비교하면서 복음을 설명할 수도 있다. 몇년전의 일이다. 홍제동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었다. 동네 골목에서 한 할머니를 만났는데, 이 할머니는 공부를 많이한 학식이 있는 분이셨다. 그리고 그 할머니는 아주 깊은 불교신자였다. 절에서 '보살'이라는 칭호도 받았고, 또 부처에게 절을 많이 해서 무릎에서 두꺼운 살이 박혀 있었다. 병을 고치는 체험도 했다고 했다. 그때 필자는 석가모니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비교하면서 '왜 석가모니가 출가했으며, 결과는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리고 그 할머니는 "내가 지금까지 만난 교회믿는 사람들 중에서 청년이 가장 설득력있게 전도하는구먼"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마음이 흔들린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사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직접적인 '대조접근법' 보다는 이것을 응용한 방법이 좀 더 효과적인 결실을 많이 거두었다. 즉 대조 비교를 하기는 하지만 직접적으로 상대방의 종교적인 체계는 말하지 않고(머리 속에만 두고), 타종교와 차이나는 기독교의 특이성만을 쉽게 말해가는 것이다. 이것이 시간도 절약하고 논쟁도 없애며, 더 설득력있는 듯하다.
이 방법을 위해서는 전도자가 먼저 타종교에 대한 지식과 공부가 필요하다. 특별히 이 방법을 사용할 때 전도자는 논쟁을 조심하고 또한 듣는 사람의 신앙을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4. 세 가지 방법의 종합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방법들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인 것이다. 실제 전도에서 어느 한 가지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면서 복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예컨데 처음에는 '마음대 마음 접근법'이나 '접촉점 접근법'을 통하여 전도대상자들의 마음을 열고, 그런 다음에 적극적인 태도로 복음의 특이한 진리들을 '대조 접근법'으로 적용할 수 있다.
C.타종교인 전도를 위한 사전 준비
1. 타종교의 근본적인 물음과 대답이 무엇인지 연구하라
타종교를 이해하거나 전도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그 종교가 근본적으로 던지는 질문과 대답이 무엇인지를 인지해야한다.
가다머(H.G.Gadamer)에 의하면 역사는 영향사적(影響史的)인 사건이다. 즉 내가 어떤 역사를 이해하려고 할 때 이미 그 역사는 객관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이미 나는 그 역사의 영향으로 그 역사에 영향을 받아서 된 것이기 때문이다(순환).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해하려는 한국종교는 이미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만일 우리가 과거의 종교 또는 역사와 인격적인 대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과거 속에 그 대상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져야 한다. 그 대화의 방법은 질문과 대답이다. 과연 한국종교는 궁극적으로 어떤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 나타난 것인지를 그 종교 자체에 물어야 한다. 그후에 그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도 물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한국인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종교들의 궁극적인 관심과 대답을 고찰하고 이에 맞추어서 기독교의 입장을 정리하고, 효과적인 복음전달 내용과 방법을 설정해야 한다.
예컨데 불교 신자를 전도하기 원한다고 할 때, 전도자는 먼저 불교가 인생에 대해서 던지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의 관심은 인간의 생로병사의 고통 즉 고(苦)에 대한 해결에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영원하지 않은 것들에 욕망을 갖고 거기에 집착(執着)하는 데서 부터 고통이 시작된다고 갈파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하였다. 석가는 이 방법을 깨달은 각자(覺者)였고, 스스로도 자신은 이 길을 가르치는 스승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전도자는 이것을 포인트로 해서 인간의 고통의 원인이 욕망에 집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죄(罪)에 있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고통은 현상이지 원인은 아니다. 가령 길거리에 지나가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모두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다. 기뻐서 울 수도 있다. 그러나 눈물만 보고 사람들은 슬퍼한다고 생각한다. 눈물이 현상이라면, 그것을 유발시킨 슬픈 이유나 기쁜 이유는 원인이다. 바로 이 원인이 중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모든 고통은 욕망에 집착에서 오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죄성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다른 종교에도 동일한 원리로 적용된다.
2.타종교인(他宗敎人)을 연구하라
한국인은 기본적으로 감성적이고 혼합종교적이다. 흔히 말하기를 한국인의 출생은 도교적이며, 삶은 유교적이며, 죽음은 불교적이라고 한다. 필자가 보기에 우리 한국인은 종교혼합적인 민속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보인다. 불교도 사실은 민속신앙과 혼합된 것이 많고, 유교의 조상숭배도 사실은 민속신앙에서의 그것과 융합되어서 유교적인 형식을 가진 것이다.
따라서 유교인 보다는 유교적(儒敎的)인 사람이 많고, 불교인 보다는 불교적(佛敎的) 색체를 띤 민간신앙인(民間信仰人))인이 많은 것이다. 기독교에서 흔히 말하는 '은혜받았다'라는 개념도 서양인과 한국인의 개념은 차이가 있다. 서양인에게 '은혜받았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설교가 이해가 되었거나, 논리적으로 납득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있어서 '은혜받았다'는 말의 일차적인 의미는 '무언가 가슴에 와 닿았거나, 가슴이 찡 했다'는 의미이다. 사영리나 전도폭발이 지식인들이나 대도시에서는 잘되는데 농촌이나 중소도시에서는 잘 적용이 안되는 이유도 여기에 그러한 숨은 원인들이 있는 것이다. 산골 할머니에게 사영리를 아무리 설명해도 머리만 아플 뿐이다. 그러나 간증 시간에 되면 눈물을 흘리며 듣는다.
의사표현에 있어서도 한국인은 소극적인 면이 많다. 즉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한다. 한국을 '은둔(隱遁)의 나라'라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영향이 있다. 누군가가 한 번만 교회에 가자고 끌어주면 못이기는 척하면서 갈 수 있는 데, 그렇게 끌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용기를 못내고 못나가는 사람도 있다. 선물을 주면 겉으로는 거절을 해야 미덕이다. 용기를 내서 그 자리에서 끌러보기가 왠지 쑥스럽고 어색한 경우가 많다. 서양의 사고하는 사뭇다른 특성이 있다.
그런가하면 한국인은 무의식적으로 공통적인 한(恨)스러운 정서를 갖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칼 융'이 말하는 '집단무의식'과도 관계있을 수 있다. 이것은 수 천년을 내려오면서 당해온 침략과 피난, '양반-상놈'의 구별 속에서의 설음 등이 한(恨)이라는 무형의 실체로서 민족의 집단무의식을 이룬 것이다. 그런가하면 어떤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건을 집단적으로 경험하면 그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에서 없는 공통적인 집단무의식이 새로 생긴다는 연구도 있다. 예컨데 광주사태 이후 광주시민의 마음 속에 생긴 '광주의 한(恨)'이라든지, 민주화 과정에서의 고통을 공유한 세대는 그 세대끼리의 공통적인 회한이 생긴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한국인의 사회적(社會的) 성격의 특징은 다음의 5가지이다. 1)가족주의 2)감투지향주의 3)상하서열주의 4)친소구분의식 5)공동체지향의식 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러가지 복합적인 한국인의 종교심성과 정서를 이해하고 거기에 맞게 융통성 있게 복음을 설명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3.훌륭한 청취자가 되라
전도자가 효과있게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듣는 것도 중요하다. 대부분의 전도자들이나 설교가들이 듣는데 약하다. 어떤 전도자는 입만 가지고 나가고 귀는 집안에 두고간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연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다. 만일 전도자가 일방적으로만 강변한다면, 상대방은 '강요당한다'는 느낌을 갖을 수도 있고, 또한 혼자'지껄이는 것(?)'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음 기억해야 한다.
4. 제자로서 모범적인 행동을 하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Life-Style)이 성숙해 질 때 복음전도는 자연스러운 접촉점을 가질 수 있다. 복음을 전할 때 아무리 유창한 전도방법을 구사한다 하더라도 그의 삶의 방식이 그리스도인 답지 못하다면, 그의 전도방법은 이미 하나의 '기능이나 말재주'에 불과하다. '틀에 박힌 공식적인 전도방법'만 가지고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전도자는 자신의 내면적인 경건의 모습과 외형적인 경건의 모습이 병행되어야 한다. 자신의 생활이 엉망인 전도자는 자신있게 복음을 전할 수 없는 것이다.
5.친밀한 관계 구축하라
전도자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전도대상자를 만나면 우선적으로 그 대상자와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지 못하면 복음은 허공을 치기 일수이다. 개교회에 소속된 전도자가 그 지역에서 전도하고자 할 때 특별히 친밀한 관계는 더욱 중요한 것이다.
D.타종교인의 기본적인 전도원리
1.성령을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라(영적전쟁)
전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전도자는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전도사역에서 승리하는 원리는 주인이신 하나님이 친히 전도의 사역을 이끌어 가시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스스로 일하시는 하나님 이다. 성령은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계신다. 따라서 전도자는 이러한 성령의 도우심을 믿고, 의지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수류탄의 폭발력은 누가 안전핀을 뽑든 간에 동일하다. 어린이가 안전핀을 뽑아도, 할머니가 안전핀을 뽑아도 그 폭발력은 동일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고 나간다면 그 폭발력은 지금도 동일하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2.타종교의 종단 보다도 개인 자체의 문제(고통,환란)에 관심을 두고 접근하라
이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모든 인간은 고통을 가지고 있고,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 알기 원한다. 그래서 그 고통의 원인을 규명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는다. 그 방법들 중에는 부적, 무당, 종교적인 접근, 과학적인 분석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실제로 불교나 샤마니즘 또는 대부분의 인간의 종교나 각종 고민들이 고통의 원인을 규명하려는데서 발생하였다. 따라서 각 개인의 현실적인 고통의 문제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은 좋은 접근방법이다.
그렇지 않고 타종교 교리나 종단에 관심을 두고 접근하면 논쟁으로 흐르기 쉽다. 그러나 전도 대상자의 개인에 관심을 두고, 그의 현실적인 삶의 문제나 실존적인 문제등을 통해 접촉점을 갖는다면 보다 용이한 접촉을 이룰 수 있다. 어디서나 누구나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와 문제는 비슷한 면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3.복음을 단순화하라
일반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배경이 적은 사람들에 복음을 전할 때에는 먼저 단순하고 기본적인 복음의 사실들을 제시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해야 한다. 무거운 신학과 심오한 설명을 피해야 한다. 너무 복잡하게 이것 거것 주섬주섬 열거하거나, 나름대로 연구한 타종교와의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려운 단어들을 열거하면서 강의하면 전도대상자는 싫증을 느낀다. 현대인들은 쉽게 싫증내고, 복잡한 것을 싫어한다. 언어는 쉽고(되도록 비기독교적 용어), 간결하게 그리고 말하는 요점이 분명한 전도가 되어야 한다.
4.긍정적으로 말하라
긍정적으로 말하고, 칭찬하면서 접근하는 것은 매우 유용한 방법이다. 칭찬은 상대방의 마음의 문을 열도록 만들다. 기본적으로 기독교는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종교이다. 복음 자체가 희망적이요 기쁜 것이다. 만약 사람들에게 의무사항이나 금지사항들을 더 많이 강조한다면-예컨데 술담배를 금하는것이나 십일조는 반드시 바칠것 등- 전도대상자는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부정적인 언어사용은 논쟁을 야기시키기 쉽다. 논쟁에서 이길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람은 잃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너무도 많은 전도자들이 전도한다고 하면서도 변론만 하고 돌아오는 것을 흔히 본다. 만일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며, 미래지향적으로 간증과 도전을 준다면 복음전달은 더 수월해질 것이다.
5.전도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이 되라
전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강조하느냐'보다도, '누구를 강조하느냐'이다.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무엇을'이나 '어떻게'에 강조점을 두면 필경은 논쟁으로 흐른다. 예컨데 '어떻게(How)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가?'는 논쟁을 야기시킬 가능성이 많다. 오히려 '지금 우리 앞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Who)인가?'라는 것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 복음선포에 훨씬 유리하다. '성육신'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성육신하신 분'이다. 따라서 전도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라는 것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 사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인 것이다. 단지 병고치기 위해서 교회에 나와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병을 고치신 분'이 중요한 것이다.
6.조급하지 말라(지속성)
'사과는 봄에 수확하는 것이 아니라, 가을에 수확하는 것이다'. 즉 이 말은 모든 것에는 결실의 때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 전도자가 복음을 전했는데 당장 그 자리에서 결신하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전도에는 실패가 없다 다만 실패한 듯이 보일 뿐이다. 예컨데 고구마전도왕으로 불리는 김기동집사의 경우처럼 전도대상자(그는 전도대상자를 영적인 고구마로 봄)의 반응이 냉담하다해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지속적으로 접촉하는 것이다.
Ⅲ.타종교인 전도의 실제
A.불교인 전도
1.석가모니의 생애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는 약 2500년 전(BC 600년경), 지금의 네팔 남쪽에 위치했던 '카필라 왕국'에서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났다. 석가가 태어나고 활동한 시대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남유다가 멸망(BC.586년)하기 얼마전에서부터 포로기에 해당한다. 석가모니의 본명은 '싯다르다 과타마(Siddhartha Gautama)'이다. 싯다르다는 '목적을 달성한'의 뜻이며, 과타마는 '매우 좋은 소'라는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석가모니라는 말은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는 뜻이며, 붓다(Buddha)는 '깨달은 자'라는 의미이다. 부처나 불타는 붓다의 음역(音譯)이다.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은 석가모니를 출산하기 위해서 친정으로 가던 중에 '룸비니'라는 공원에서 출산을 했으며, 출산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석가모니가 어렸을 때와 성장기의 기록은 별로 없다. 다만 석가가 만년에 회상한 글을 통해서 그가 궁중에서 유복한 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석가모니는 이러한 궁중의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무엇인가를 골똘히 명상하는 버릇이 있었다. 성장한 석가모니는 결혼을 하였고 '라훌라'라는 아들을 났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석가모니는 왕궁 사문(四門) 밖의 공원을 거닐던 중에 네 종류의 사람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것을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한다. 그것은 갓태어난 아기(生), 허리가 굽은 늙은이(老), 앓아 누운 병자(病) 그리고 죽어서 상여나가는 초상행렬(死)이었다. 이 중에서 죽어나가는 사람을 보고 가장 심각한 질문을 던지는 장면이 유명하다.
이후 석가모니는 인간의 근본적인 죽음과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출가(出家)를 결심하게 된다. 이때 그의 아버지인 국왕은 석가모니가 출가만 포기한다면 모든 조건을 다 들어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때 석가모니는 아버지에게 한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그것은 '죽음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달라는 것이었다. 만일 아버지가 그 방법을 가르쳐 주면 출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말문이 막힌 아버지는 그의 고행을 허락하게 되었다. 이때 석가모니의 나이 29세였다.
출가한지 6년 만에 석가모니는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진리를 깨우쳐서 붓다(Buddha, 깨달은 자)가 되었다. 부처가 된 석가모니는 80세에 이르기까지 각지를 순회하면서 무지한 사람들에게 적극인 불타의 깨우침을 가르쳤다. 석가모니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제자들을 향하여 '진정으로 나의 제자가 되고 싶으면, 나를 믿지말고 나를 배우라'고 교훈하였다고 한다. 석가모니는 자신이 깨달은 것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옛날 성자(聖者)들이 찾았고, 걸었던 그 길을 다시 발견하고 걸어간다고 하였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스스로 그 길을 가르키고, 그 길에 가는 법(法)을 가르치고, 그 길을 걸어가는 도사(導師)임을 천명하였다. 석가모니는 진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키는 스승이요 도사(導師)일뿐, 자신이 진리(眞理)라고 언명하지 않았다(석가모니가 신성화, 우상화된 것은 후에 대승불교에 이르러서 이다).
2.불교의 기본적인 주장과 문제점
불교의 기본적인 주장을 정리할 때 필자의 견해로는 첫째 불교의 근간이 되는 네 가지 교설(三法印,緣起論,中道論,四聖諦)의 상호관계를 이해하고, 둘째는 우리나라 불교의 근간인 대승불교의 특징을 이해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한다. 이 네 가지 교설은 인간의 고통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1) 삼법인(三法印)
삼법인(三法印)이란 불교의 우주관 내지는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삼법인에서 법(法)이란 진리(dharma)를 의미하면, 인(印)은 확실히 그러하다는 인증을 의미한다. 따라서 삼법인은 세 가지의 확실한 진리라는 의미이다. 삼법인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제행무상(諸行無常): 시간적(時間的)으로 우주의 모든 현상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2)제법무아(諸法無我): 현상계의 모든 실재(實在, reality)는 공간적(空間的)으로 아무런
실체(實體,substance)를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에는 인간도
예외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물질적(物質的)인 오온
(五蘊)의 집합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3)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 이러한 무상함을 깨닫고 쓸데없는 인간의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를 정리하면 ① 이 세상에는 시간적으로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은 없으며(無常), 모든 것은 순간순간 찰라의 연속일 뿐이다. ② 또한 공간적으로 볼 때도 이 세상 만물은 아무런 실체(實體,substance)를 가지고 있지 않다(無我). ③ 따라서 이러한 이법(理法)을 깨달아(覺) 모든 인간적인 괴로움에서 벗어나 번뇌의 불길을 소멸하고 열반이라는 이상적인 안온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불교는 깨달음(覺)의 종교이다. 인간의 고통은 이러한 우주의 본래의 모습(무상, 무아)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고(무지,無知), 영원한 것을 찾으려고 집착(執着)하는데서 출발한다고 본다. 즉 인간의 고통은 무지와 집착(또는 욕망)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 인간의 근본문제는 고통의 문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또한 성경은 창조자 하나님의 영원성을 말하고 있으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영적인 존재임을 말한다. 즉 인간의 고통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곧 죄(罪)의 결과인 것이다. 고통은 '죄의 부산물'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성경적인 세계관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고통의 제거에 있지않고, 죄의 제거에 있다. 인간의 고통은 죄의 부산물(결과,현상)이며, 죄는 고통의 근본원인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무지(無知)를 말하지만, 우주 최초의 무지가 어디서 연유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데 있는 것(=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파괴)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본뜻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인 것이다.
따라서 원인이 해결되면 고통도 해결된다. 이 원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가령 어떤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겉으로 볼 때는 그 사람이 슬퍼서 우는 것인지 기뻐서 우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때 눈물을 흘리는 것이 현상이라면, 그 사람이 울고 있는 내적인 이유는 본질인 것이다. 불교는 인간의 문제에 대해서 고통이라는 현상(現象)은 보았지만, 죄성이라는 본질(本質)은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한계이자, 불교와 기독교의 중요한 차이점 중의 하나이다
죄가 고통의 근본원인이고,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죄악을 씻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면, 문제는 해결된다. 그런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누가, 어떤 방법으로 인간의 내면의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줄 수 있겠는가? 인간은 스스로 그러한 능력을 회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나있고, 죄악된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인데, 이처럼 불완전한 존재에서는 완전한 것이 나올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모든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완전하신 하나님의 '은총(Grace)'에 의존하는 것과 그 은총에 대해서 믿음( Faith)으로 반응하는 것뿐이다. 은총 이외에는 죄악된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대안은 없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아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다.
(2)연기론(緣起論)
연기론(緣起論)이란 한 마디로 모든 존재는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공간적(空間的),시간적(時間的)으로 서로가 원인이 되고 또 서로가 의지하여 관계하여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들이 흔히 사용하는 인연(因緣)이라든지, 인과업보등의 말들은 연기론에 근거한 불교의 개념들이다.
먼저 공간적(空間的)으로 현존(現存)하는 모든 사물은 독불장군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과율(因果律)에 따라 서로 어울려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는 경전(經典)의 구절은 곧 모든 사물은 서로 관계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데 대표적인 연기론인 십이연기(十二緣起)에 보면 인간의 모든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무명(無名)의 세계에서 시작하여, 생사활동과 정신활동이 생기고 또 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6가지 감각기능이 생기고 또 이것에 의하여 생존이 규정되고 여기서 다시 탄생과 병듦 그리고 늙음과 죽음이 순서적으로(또는 연쇄적으로)발생한다는 것이다. 이에따라 모든 인간들은 개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너'의 관계로 서로 연관이 되어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 되는 것이다.
둘째로 이러한 연기의 법칙은 시간적(時間的)으로도 적용이 되어서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은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되어서 계속적으로 윤회(輪廻)한다. 연기에 의해서 인연과 윤회가 생겨나는 것이다. 연기의 인과율(因果律)의 작용에 의해서 인간은 자신의 업(業:karma)에 따라 환생하게 된다. 업(業)이란 살아있을 동안의 의지작용과 언어행동의 결과이다. 인간이 만든 모든 업의 결과는 반드시 현세나 미래에서 업보(業報)를 받는다. 즉 오온(五蘊)의 물질로 구성된 인간 나(我)의 실제는 없어지더라도 살아있을 때의 의지활동과 언어행동이 원인이 되어 생긴 업(業)은 그대로 남았다가, 49일만에 업보에 따라 오온이 다시 모여 인간이나 짐승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관계적인 존재인 것을 말하지만, 그것은 창조자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일차적으로 중요하게 취급하며, 또한 인간과 인간사이에 삶의 양식으로서의 관계성을 말한다. 이러한 면에서 인간의 존재 발생 자체를 고통과 업보에 의한 인과율에 의해서 생성되고, 소멸된다고 보는 불교의 입장과는 다르다. 불교에서의 인간의 출생은 그 자체가 업보에 의한 인과관계이기 때문에 생로병사(生老病死) 그 자체가 이미 고통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은 태초부터 각자의 인격의 존귀함을 갖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축복된 존재이다.
물론 성경에서도 '심은대로 거둔다'(갈6:7)는 말씀처럼 부분적으로 인과율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인과율은 성경이 말하는 진리의 전부(全部)가 아니다. 그것은 진리의 작은 일부(一部)일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인과율의 원리에 의해서 벌을 내리시기도 하지만, 인과율에 속박되어 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과율 보다 크신 분이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인과율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예컨데 성경은 인과율은 뛰어넘는 수 많은 기적들을 말하고 있으며, 또한 욥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욥의 친구들은 인과율의 사고방식에 의해서 욥의 고통의 문제에 접근했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그들의 접근이 정당한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다(욥42:7).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의 원인에 대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다(요9:1-3). 즉 인과율에 의한 업보의 논리로서 질문하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전적으로 거부하시는 대답을 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자체가 이것을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과율에 의한 '업보의 법칙'에 메이지도 않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지도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의 법칙'에 따라 스스로 인류의 죄를 대신지시고 죽으셨다.
(3)중도론(中道論)
삼법인과 연기론이 불교의 이론적인 원리라면 중도론은 열반에 이르는 방법론적(方法論的)이고 실천론적(實踐論的)인 원리로 볼 수 있다. 석가모니가 교설한 첫 번째 중의 하나가 바로 중도(中道)이다. 이는 곧 모든 극단적인 것을 피하고 중도(中道)의 도(道)를 따르라는 것이다. 흔히 철학자들이나 구도자(求道者)들이 자신의 것을 최고라고 주장하고 자신과 다른 것을 무시하는 것을 보게된다. 석가에 의하면 이러한 것은 군맹촉상(群盲觸象:장님들이 코끼리 다리만지기)과 같이 부분만 보고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으로서, 보잘것이 없는 희론(戱論;의미없고 쓸데없는 이론)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극복하려면 영원하지 않은 모든 것들에 대해서 극단적인 애착(愛着)을 버리고 중도(中道)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구원에 이르는 길은 인간의 노력이나, 수행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믿음이다(행2:8-9). 즉 구원은 '믿음 + 은총'인 것이다. 인간의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가 마땅히 행하여야 할 열매와 결과인 것이다.
(4) 사성제(四聖諦)
사성제는 인간의 현실적인 존재양식 즉 불교의 인생관(人生觀)이라고 볼 수 있으며, 동시에 인간이 고(苦)를 초월하여 열반(涅槃:니르바나)에 이르는 과정이기도 하다. 삼법인(三法印)이나 연기론(緣起論) 그리고 중도론(中道論)은 결국 사성제의 골격에 대입되어진다. 따라서 사성제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불교의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성제란 곧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諸), 도제(道諦)를 말한다.
먼저 고제(苦諦)란 곧 모든 인간존재 자체가 고(苦)라고 보고 이것을 깨닫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인생을 구성하는 모든 정신적, 육체적인 요소는 모두 고(苦)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한다. 원시불교에서 고(苦)란 duhka로서 원뜻은 '바퀴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다. 즉 모든 우주의 생사윤회의 자연법칙에서 벗어난 상태가 고(苦)요, 인생인 것이다. 따라서 인생은 그 출발부터가 고통인 것이다.
둘째로 집제(集諦)란 이처럼 고(苦)가 쌓이는 원인을 규명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이처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처럼 영원한 것은 없는데도(無常)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욕망에 의하여 영원한 것을 찾고자 집착(執着)하는 것 때문이다. 그래서 유아적(幼兒的:자기중심적)인 인간은 이생에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생명을 헤치는 일까지 자행하고, 유희의 불나비가 되어 삼독(三毒: 我執,我漫,我見)의 불길을 향해 달려간다.
셋째는 멸제(滅諦)이다. 멸제란 고(苦)의 원인이 되는 세속적인 욕망을 소멸하고, 인간 본래의 모습을 깨달아 인과율의 연기윤회 법칙으로 부터 자유로와진(벗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열반(涅槃:니르바나)이다. 특히 고려시대의 승려 보조국사 지눌은 인간의 본래 마음은 원래 부처와 같은 것이라하여 진여자성(眞如自性)이라 했고, 바로 이 근본 마음의 상태를 깨닫는 것(覺)이 부처가 되는 것(覺者)이요, 돈오(頓悟:인간본래 마음이 부처와 같이 청정한 것이라는 것을 순간적으로 깨닫는 것)라고 했다. 대승불교의 확립한 용수(龍樹:나가주나,150-250)는 사성제 중에서 열반을 의미하는 멸제(滅諦)만이 진제(眞諦)요 나머지 고제,집제,도제는 속제(俗諦)라고 하였다.
넷째는 도제(道諦)이다. 도제는 구도자가 열반은 물론이거니와 그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오는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말한다. 석가모니는 불자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중도실천(中道實踐)해야할 덕목으로서 팔정도(八正道:여덟가지 바른길)를 제시한다. 팔정도는 정견(正見:올바른 지식), 정사(正思:올바른 마음), 정어(正語:올바른 언어), 정업(正業:올바른 행실), 정명(正命:올바른 직업), 정정진(正精進:올바른 노력), 정념(正念:올바른 마음가짐), 정정(正定:정신을 집중하여 마음을 가라앉히는 일)이다. 보조국사 지눌에 의하면 불자는 자신이 도를 깨우침과 함께 다른 사람을 향하여 이타적(利他的)인 자비행(慈悲行)을 실천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을 지눌은 점수(漸修:깨달음 이후의 점진적인 정진)라고 하였다. 도제는 바로 이러한 것과 같은 것이다. 붓다는 이러한 과정을 깨닫고 중생들에게 해탈의 방법을 깨우쳐 주는 자인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불교의 사성제에 입각한 인간관, 인생관을 거부한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구원의 대상이라고 본다. 타락한 인간은 그 내면에 가진 죄성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로 인해서 불완전 존재인 것이다. 보조국사 지눌이 '진여자성'을 말하면서, 인간이 마음이 마음이 본래 선한데,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야 말로 석가모니가 말한 군맹촉상(群盲觸象:장님들이 코끼리 다리만지기)의 우(愚)를 범하는 것이다. 아무리 선하게 보이는 인간이라 해도, 또 설령 수행을 했다해도, 그것은 마치 더러운 쓰레기가 강바닥에 있지만, 바람이 고요함으로 마치 물이 깨끗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조금만 바람이 불고, 물결이 요동치면, 강바닥의 더러운 것들이 요동을 치게 된다. 어린아기는 천사처럼 보이지만, 성장하면서 스스로 탐욕과 분을 내고, 미워하기도 한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나있고,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수 많은 고통의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가 무언가를 행해야, 깨달을 수 있다는 논리는 맞지 않는 이법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혹자는 불교를 자력종교(自力宗敎), 기독교를 타력종교(他力宗敎)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죄성을 가진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 이르는 방법은 하나님의 은총 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선행은 구원얻은 성도가 마땅히 행해야할 결과인 것이다.
만약 불교의 가르침대로 수 많은 수행과 가르침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으며, 그것을 이루기 이루기까지 수 없는 시간을 업보에 의해 윤회 반복한다면, 몇 명이나 궁극적인 구원의 길에 이를 수 있겠는가? 결국 이러한 깨달음의 과정들은 심오한 진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그 의미를 돌이켜 본다면 실상은 인간들에게 절망을 주는 것이다. 중도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올바른 행실들은 구원에 이르는 방법이 아니라, 구원얻은 자의 마땅히 취할 행동인 것이다. 즉 행함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인 것이다.
3. 대승불교의 주요 특징
우리나라에 전파된 불교는 대승불교이다. 대승불교의 특징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필요하다. 여기에서는 여러 가지 대승불교의 특징들 가운데 몇 가지만 소개한도록 한다.
(1) 공(空) 사상
대승불교의 특징 가운데에서도 핵심적인 것은 먼저 '공(空) 사상'을 들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공(空)은 '허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나 자성'이 없다는 의미이다. 즉 모든 사물은 독립된 실체로서 자기만의 개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인과율에 의해서 서로 상관하고 의지하면서 끊임없이 변해 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실제는 고정된 것이 없으며, 항상 불변하는 것이 없는 상대적(相對的)인 것으로 본다. 이러한 면에서 불교의 공사상은 종교다원주의나 뉴에이지 운동, 또는 현대 물리학의 상대성 이론등의 사상적인 이론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상은 앞에서 언급한 삼법인이나 연기론 또는 사성제등의 내용과 같은 맥락이다.
(2) 부처의 신성화,형상화
석가모니 사후에 시간이 흐르면서 불교는 서서히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게 된다. 여러부파가 발생하고, 더나아가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로 구분되게 되었다. 특히 불탑(佛塔)을 중심으로 발생한 대승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부처가 신성화, 형상화되고, 원시불교에서는 없었던 교리가 출현하게되었다. 원래 부처 자신은 스스로를 진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는 자임을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처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부처는 이상을 실현한 성자(聖者)로서, 찬미와 경외의 대상이였다. 석가모니는 80세로 세상을 떠난후 추종자들에 의해서 초인적인 인격으로서 승화(昇華)되었다. 실제 석가 자신은 해탈의 길을 가르친 위대안 스승에 지나지 않았으나, 초인으로 승화된 부처는 신앙의 대상이고 예배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승화작용이 극대화되면서 영혼불멸의 법신(法身)을 상정(想定)하게 되었다. 이후 역사적인 인물인 부처는 영원불멸의 법신불이 되어 시간상에 투영된 그림자로서 응신불적(應身佛的)인 존재가 된 것이다.
부처를 영원불멸의 법신불로 설정한 이후 추종자들은 논리적으로 석가모니와 같은 이상적인 부처는 석가모니 한 사람으로 국한될 수 없다고 보았다. 즉 석가모니 이외에도 많은 수행을 쌓아서 부처가 된 자는 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석가모니 이전에도 과거불(過去佛)이 존재했었다는 신앙이 나타났고, 더나아가 과거불이 있으면 당연히 미래불(未來佛)도 있어야 한다는 신앙이 등장하였다. 여기서 미래불로서 미륵불(彌勒佛) 사상이 대두된 것이다. 모든 중생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아미타불도 법장(法藏)이라는 승려가 중생을 돕겠다는 일념으로 수행한 결과 불타가 된 것이다. 이리하여 여러가지 불(佛)이 현신(現身)하여 예배의 대상으로서 불교사원에 봉안되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석가모니의 형상을 만드는 것들과 같은 우상숭배에 대해서 철저하게 경고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만든 것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우주에서 하나님 이외에는 피조물이 아닌 것이 없다. 따라서 창조자 이외에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의 섬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3)보살행(菩薩行)과 반야지(般若智)
부처의 신성화와 함께 대승불교에서 두르러진 또 하나의 특징은 보살행(菩薩行) 즉 보살신앙(菩薩信仰)이다. 보살이란 원래 원시불교나 소승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부처가되기 전의 상태을 의미했다. 대승불교에 오면서 무수한 보살이 등장하면서, 사람은 누구나 보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불타(佛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정진하는 사람을 보살이라 불렀고, 그의 실천행동은 보살행이 된다.
원시불교에서는 팔정도(八正道)를 실천의 덕목으로 정하나 대승불교에서는 그것의 변형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6바라밀'을 보살행의 덕목으로 본다. 6바라밀은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의 여섯가지 덕목을 지칭한다. 이중에서 첫째의 보시와 마지막의 지혜를 가장 중요시 한다. 자비에서 우러나와 실행되는 보살의 보시는 철저한 자기희생으로 이루어진다.
보살과 함께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의 하나는 지혜(智慧)이다. 이는 세속적인 지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분별을 초월하는 종교적인 통찰력으로서 가장 근원적인 지혜 그 자체를 가르킨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이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지혜라는 단어보다는 반야지(般若智)라고 한다. 따라서 반야지의 통찰력과 보살의 실천이 병행될 때 비로서 온전한 보살의 자비가 되고 열반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언급했듯이 성경은 선행을 성도의 마땅한 열매로 강조하지만, 선행이 구원에 이르는 조건은 아니다.
4. 불교인 전도모델의 실례
(1) 1단계:불교와 기독교의 간단한 비교
필자는 불교신자와 처음 대화를 시작할 때 먼저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질문한다. 여기서의 포인 트는 구원에 있어서 불교는 자력종교이고 기독교은 믿음과 은혜라는 것을 말한다. 그후에 바로 인간의 한계(죄인:갓난아기 예화)를 설명하고, 죽음에 강조점을 둔 열쇠예화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시킨다.
1) 불교와 기독교의 간단한 상호비교(山 비유)
2) 모든 인간의 죄성과 인간의 한계(갓난아기 예화)
3) 죽음의 해결(열쇠예화)
4)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다음은 필자가 실제 전도하는 첫 대화의 한 모형이다.
* 상호비교(산 비유)
"절에 다니신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혹시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상대의 대답을 듣는다) "저는 기독교인이지만 불교에도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자신있게). 제가 아주 간단하게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 제가 틀렸다면 지적해 주십시요. (종이에 산(山)을 하나 그리면서) 자 여기에 산이 하나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산 앞에 한 사람이 서있습니다. 만약 불교식으로 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컨데 저기 산이 있으니 저 산을 네게 수 백번 오르락 내리락하면 도를 깨달을 것이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불교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독교식으로 설명한다면 이런 것입니다. '저기 산이 있다. 단지 저기에 산이 있다는 사실을 네가 믿기만 하면 너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기독교입니다. 그리고 그 산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저는 가끔 불신자 친구들로 부터 '하나님은 살아계시지 않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왜 이세상에 이처럼 많은 불의와 폭력이 있고, 왜 불의한 사람은 더 잘살고 있는냐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생긴다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 어떤 친구는 '없는 하나님을 믿지말고 차라리 내주먹을 믿어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이 땅에 고통과 불의가 활개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짓는 데에 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서 죽음과 슬픈일들이 인간세상에서 생긴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죄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친구는 자신이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
* 갓난아기 예화
"저는 교회에서나 가정에 갓난아기들을 많이 보는데, 사실 아기엄마들이 아기에게 거짓말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거나, 남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법을 가르치는 엄마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아기는 자라나면서 스스로 알아서 욕심을 내고, 거짓말을 능숙하게 하고, 미워하고, 싸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동의를 구한다) 왜 그런가하면 그것은 인간이 마음 속에 태어날 때 부터 죄가 있는 상태로 출생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이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고 불완전한 인간에게서는 항상 불완전한 것만이 나올 뿐입니다. 그리고 불완전한 모든 인간은 죄의 결과인 죽음의 문제를 극복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인류와 성자들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지만 다 죽었습니다."
* 열쇠예화
"(종이에 문과 문고리를 그리면서) 여기에 문이 하나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물론 열쇠구멍도 있겠지요. 이 문이 선생님의 안방 문이라고 해도 상관없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리 많은 열쇠 꾸러미를 가지고 있어도(열쇠들을 보여준다) 이 문에 맞는 열쇠는 오직 한개 뿐입니다. 그렇죠(동의를 구한다) 마찬가지 입니다. 모든 종교와 가르침에는 다 배울 것이 있고, 나름대로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훌륭한 진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문을 열수 있는 열쇠는 오직 한가지 뿐 입니다. 그것은 믿음이라는 열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로 인해 죽어가는 모든 인류를 위한 해결자로서 이땅에 오셨습니다(이하 생략) "
(2) 2단계:석가모니의 생애
2단계는 석가모니의 생애를 접촉점으로 하여 복음과 연결시키는 방법이다. 즉 석가모니가 출가(出家)하게 된 목적을 설명하면서, 과연 그는 자신이 목표한 죽음의 고통을 해결하였는가? 여기서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석가의 생애를 볼 때 그는 생로병사 고통의 문제 특히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했지만, 결국 자신도 죽어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석가는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죽음의 문제 역시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2단계에서의 대화 순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석가모니의 출가목적과 실패(죽음과 고통에 대한 문제 해결) : 앞에서 설명한 내용참고
2)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한 예수와 석가의 반응 비교(두 과부 이야기)
3) 열쇠예화(유일한 방법) : 앞에서 설명한 내용참고
4)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한 예수와 석가의 반응 비교(두 과부 이야기)
"석가는 죽음에 대한 불교적인 깨달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가는 인간이 현실적으로 죽음의 문제를 피할 수 없음을 인정하며, 자신은 그 현실적인 죽음의 문제를 피할 수 없음을 인정했습니다. 현실적인 죽음의 문제에 대한 석가의 반응을 알게하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석가가 인도 사위성(舍衛城)을 지날 때의 일입니다. 그곳에 사는 '끼사고따미'라는 과부로부터 그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달라는 눈물의 간청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석가는 그 여인에게 사람이 죽은 집이 없는 일곱 집을 찾아내서, 쌀(겨자) 한 옴씩만 얻어오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그녀는 그대로 실행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죽음의 문제를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수도 나인성을 지나다가 이와 유사한 상황을 만납니다(눅7:11-17). 예수가 나인성문 앞에 이르렀을 때에 어느 장례행렬을 만나게 됩니다. 그 장례행렬은 나인성에 살고 있는 어느 과부의 외아들의 장례행렬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는 과부의 눈물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서면서 그 장례행렬을 세우십니다. 그리고 죽은 청년을 향해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시자 즉시 그 청년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그 과부와 사람들에게는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석가는 인간의 현실적인 죽음의 문제를 자신도 피할 수 없었고, 다른 사람의 죽음의 문제도 해결해 줄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것을 인정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도 죽음에서 삼일만에 부활하셨고, 다른 사람들의 죽음의 문제도 해결하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염려와 근심에 쌓인 사람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다른 성경구절에서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죽음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고통에 대한 석가와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를 분명히 말해주는 것입니다"
(3) 3단계 : 불교신앙에 독실한 사람(대조비교법)
3단계는 불교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해당된다. 전도를 하다보면 이 단계까지 해당되는 사람은 많지않고 대부분 1,2단계에서 복음제시가 이루어진다. 대체로 대조비교법을 이용해서 전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주의할 것은 결코 우리의 목적은 논쟁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본래적인 불교의 기본사상을 가지고 말할때는 사성제(四聖諦)를 응용하여 고(苦)의 근본원인을 집중 규명하는 것이 좋고, 대승불교사상을 염두에 시작할 때는 인간은 누구나 청정한 불성이 있으므로 수행하여 불타가 될 수 있다는 것에 착안하여 '인간은 불완전하며 불완전한 존재에서는 항상 불완전한 것만이 나올 뿐'이라는 것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1) 사성제(四聖諦)를 이용한 전도의 모형
2) 대승불교인 전도의 내용
a.전도자가 기억할 명제 :"불완전한 것에서는 항상 불완전한 것만이 나올 뿐이다".
b.복음제시 내용요약:
인간세상에는 끊임없이 고통이 있는데, 고통의 원인은 인간이 욕망에 집착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외형적인 현상만 보고 근본적인 원인을 못본 것이다(현상과 원인). 예컨데 눈물흘리는 사람이 모두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다. 기뻐서 우는 사람도 있다. 노동하는 사람이 모든 슬픔만 느끼는 것은 아니다. 행복을 느낀다. 따라서 현상만 가지고 원인을 알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단지 인간이 고통당하는 원인이 욕망에의 집착이라고만 규정한다면 이는 외형적인 현상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된다. 문제는 그 고통을 유발시킨 원인인데, 그것은 인간의 죄때문이다.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 육신의 죄는 감옥에서 용서되지만, 영혼의 죄는 그리스도의 피로 된다. 석가는 피상적인 인간의 고통을 깨달았다면, 예수는 좀더 근원적인 죄의 문제까지도 해결한 자이다.
3)기타 접촉점: 해탈과 구원,열반과 하나님 나라 등을 비교할 수 있다.
B.유교인(儒敎人) 또는 유교적(儒敎的)인 사람 전도
우리나라는 조선시대를 지나오면서 유교적인 제례와 형식들이 정착되어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 저변에 함께 흐르는 불교나 도교,샤마니즘같은 사상들을 무시할 수 없다. 전도를 하다보면 유교인들을 접하게 되는데, 필자의 견해로는 엄격하게 말해서 참유교인 보다는 유교적인 성격을 띤 사람이 많은 듯하다. 유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말할때 가장 먼저 전도 현장에서 부딪히는 것은 제사문제 즉 조상숭배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이것은 효도(孝道)라는 명분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유교적인 사람들이 기독교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제사지내지 않는 사람들', 또는 '효도하지 않는 사람들', 심지어는 '애미,에비도 몰라보는 XX자식들'이라는 생각을 떠올린다. 주변에서도 장자이기 때문에 못믿고, 제사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성도들을 본다. 따라서 유교의 조상숭배를 중심으로 전도문제를 생각하기로 하겠다.
1. 유교는 단지 철학에 국한되는가?
흔히 말하기를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의 철학체계라고 말한다. 유교의 근본적인 목적은 도덕적인 수양을 통한 자기완성과 점진적인 자기확대를 통한 가정과 나라와 세상을 다스리고 이상사회를 건설하는데 있다. 그러면서도 죽은 조상에 대한 제사와 귀신에 대한 개념은 그 속에 흐르로 있다. 최근 우리나라의 유학자들이 '유교의 종교화'를 선언한 바가 있다. 이것은 단지 유교가 학문적인 철학을 넘어선 종교적인 것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다.
고대 의례(儀禮)에 대한 공자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의 고전 [예기(禮記)]는 백신(白神:모든신)을 대상으로 붉은 송아지를 잡아서 희생제를 드리는 제의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백신(白神) 중에는 일월성신,사방신,천지산천 그리고 죽은 사람의 혼(魂)등이 모두 포함된다. 이 중에서 상제(上帝)는 최고신 이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조상들이 죽은 후에 하늘에서 상제를 모시고 살고있으며, 그들이 후손들에게 복과 화를 내린다고 믿었다. 이러한 사상이 주나라(BC 1222-1247)에 와서는 인간중심적인 사고로 전환되면서, 상제(上帝) 개념은 이와 유사한 천(天)개념으로 바뀌고, 군왕의 정치덕복으로 인본주의적인 사상이 자리잡게 되었다.
2. 공자(孔子)와 조상숭배
공자(孔子)는 이러한 인본주의적인 동향속에 태어나고 활동하였는데, 공자 당시의 세상은 홍수와 질병으로 백성이 도탄에 빠져있었다. 이때 공자는 재래 종교들을 비판하거나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길을 제시한 윤리적 철학지도자 였다. 공자가 귀신숭배를 멀리한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가 귀신숭배를 배척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제사할 대상(귀신)을 바로 알고 제사할 것을 가르쳤고, 제사할 때는 반드시 자신이 참여할 뿐 아니라, 그 대상인 조상 내지는 귀신이 살아있는 듯이 대할 것을 가르쳤다. 공자는 자신도 귀신에게 제사할 때에는 몸과 마음을 재계하고 의복고 음식 그리고 거처까지도 구분하였다. 논어(論語)에는 공자가 식사전에 반드시 고수레(음식을 조금 떼어 바침)를 하였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유교의 덕목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성(誠)이다. 중요에 의하면 성(誠)은 만물을 이루고 자기를 이루는 요소로서, 지극한 정성은 신과 같은 것내지는 귀신과 같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제사를 지낼 때 깊은 정성(誠)을 다하여 성실하게 드림으로서 음양의 초감각적인 귀신이 발현하여 현현하게 된다. 정성없는 제사에서는 조상귀신이 사멸되고 발현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제사들릴 때의 정성에 따라서 귀신의 존재여부가 결정된다. 율곡도 사람이 성경(誠敬)하면 귀신도 존재하고,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므로 유교에서 정성스러운 제사는 부모의 혼백이 사멸되는 것을 막는 효행으로서 절대시되며, 효행의 실천원리가 되는 것다. 유교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을 가장 악덕으로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예기(禮記)]에서는 예(禮)의 가장 중요한 것을 제사라하고, 제상의 10가지 윤리 중에서 첫번째 것을 '귀신을 섬기는 일'이라고 하였다.
3.유교인에 대한 전도
유교는 윤리적 도덕적이므로 전도자의 윤리와 삶이 특히 중요하다. 유교의 목적과 공자의 고백들을 비유로 복음에 접근할 수 있다. 또한 효도를 주제하여 복음에 접근 할 수 있다.
다음은 필자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방법을 요약한 것이다(여기 사용된 예화는 불교인 전도 부분을 참고하기 바란다).
"공자는 인간에게 가장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었고, 또한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많은 가르침과 노력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모두의 바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역사상 어떤 인간도 염원하는 이상사회는 건설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끊임없는 전쟁과 폭력이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이죠. 이런 결과가 났을까요?
이 모든 현상은 인간에게 어떤 해결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 마음속에 숨어있는 근본적으로 악한 죄(罪)이라는 사실입니다(갓난아기 예화 인용). 사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을 느끼기는 커녕 싸움과 미움을 일삼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죄라고 하는 구름이 가로막로 있기 때문입니다(구름의 예화).
공자깨서는 [논어(論語)]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공자 曰 "朝問道면 夕死라도 可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이말은 곧 '내가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결국 공자는 자신이 신(神)이 되지 못함을 고백한 것이지요. 그리고 많은 가르침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도 역시 모든 인간들이 그랬던 것처럼 죽어갔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열쇠예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열쇠입니다."
다음은 제사문제를 통하여 복음으로 연결 시켰던 필자의 경험을 요약한 것이다.
1) 상대를 칭찬한다
2) 기독교는 제사의 종교임을 말한다(구약)
3) 기독교는 효도의 종교임을 말한다(십계명)
4) 예수 그리스도는 부모님께 효도한 분이심을 말한다.
5) 우리는 당연히 부모님께 효도할 의무가 있음을 말한다.
6) 유교와 기독교는 제사방식의 차이일 뿐이지 효도를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함을 말한다.
7) 부모에게 효도하듯이 천지를 지으신 창조자를 경외하는 것 또한
당연함을 말한다.
8) 그런데 사람들은 창조자를 알지 못해서 해와 달등에 복을 빈다.
9) 그 원인은 인간의 죄에 있다(갓난아기 예화, 구름의 예화).
10) 그 해결은 육신의 부모님과 창조자 하나님께 효도를 다했고 또한 우리에게
부모님과 하나님께 대한 효도를 가르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C.한국의 민간신앙인(民間信仰人)에 대한 전도
1. 민간신앙이란 무엇인가?
한국인의 대부분은 민간신앙의 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얼마전 '무궁화 위성'이 발사 되었는데, 불가사의 한 것은 최신 위성을 앞에 두고 발사하기 전에 돼지머리를 놓고 과학자들이 절하는 장면이다. 그런가하면 자동차만 구입해도 고사를 지내고, 산에 가서도 돼지를 놓고 절하고 빈다. 그런가하면 숫자에서도 1,3,5,7,9 등의 홀수 숫자는 재수있고 2,4,6,8 등의 짝수 숫자는 꺼리는 경향도 보인다. '아침에 그릇이 깨지면 하루가 재수없다', '첫손님이 여자이거나 안경 쓴 사람이면 재수없다'등 미신적인 민간신앙의 형태는 끝이 없는 듯하다.한국인들이 절하고 복을 비는 대상은 누구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민간신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민간신앙은 교조(敎祖)에 의한 교리가 문서화된 경전이나 체계화된 조직없이 '자연상황 그대로의 자연적(自然的) 종교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개념으로 민간신앙을 보면 그 범위는 매년 반복되는 신년제를 비롯한 계절제, 가신(家神)신앙, 동신(洞神)신앙, 무속(巫俗)신앙, 독경신앙, 점복(占卜)신앙, 풍수신앙, 동물신앙, 자연물숭배, 영웅신앙, 사귀신, 민간의료, 주술, 산신, 용왕신, 염라대왕등 민간의 생활을 통해 전승되고 있는 자연적(自然的)인 종교현상을 민간신앙의 범위로 설정할 수 있다.
2. 민간신앙의 특징
(1) 현실기복적이다.
단적으로 현실에서 복을 받기 원한다. 죽은자를 위한 무당의 굿도 사실은 이승 사람의 행복을 위해 하는 것이다. 죽은자 자체를 위한 것은 사실은 부차적인 것이다. 죽은 영혼을 굿을 통하여 조상신이 되게 하여 그로 하여금 이승의 후손들에게 복을 주는 존재로 바꾼다. 이승에서의 복을 받기 위해서 각종 주술과 복을 비는 행동을 한다.
(2)사후세계는 이승의 투사물이다.
한국 민간의 인생관은 한 마디로 삼생관(三生觀)이다. 즉 전생, 이승 그리고 저승에서의 삶이다. 전생에서의 삶에 따라서 이승의 삶이 결정되고 이승에서의 삶의 질에따라서 저승의 삶이 결정된다. 저승에서의 삶도 이승과 별다를 바가없다. 그래서 저승에 갈 때 노자돈을 준비하기도 한다. 이는 저승열두대문을 통과 할 때에는 저승 문지기에게 뇌물을 줘야 무사히 지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체로 저승의 위치는 막연한데 대체로 이승과 저승사이에 강이 있고(요단강?) 이곳을 건너가면 저승이 된다. 저승에 들어간 죽은 인간은 열두 대문을 거친 후에 저승문서를 관장하는 최판관(崔判官=재판관?)에게 심사를 받고,저승 열대왕(十大王:시왕)의 심판을 받는다. 저승의 시왕(열대왕)이란 각기 다른 10개의 지옥을 다스리는 존재들이다. 흔히 말하는 염라대왕은 시왕 중에서 5번째 대왕으로서,어른 말을 거역하거나 거짓말한 사람의 혀를 잡아빼는 발설지옥을 맡고 있다.
심판의 기준은 대체로 혈연을 중심으로한 인간관계가 많다. 특히 부모에 대한 효도와 가족 사이의 화목이 주된 심판 대상이 된다. 심판결과 죄가 없고 공덕이 많은 사람은 저승에서 다시 태어나 환생하거나 새나 나비가 되어 이승에 환생한다. 그리고 죄가 많은 사람은 지옥의 정화과정을 거쳐 저승에 가게 된다. 지옥벌로도 다스려지지 않을 때에는 소나 말 또는 지네, 구렁이, 지렁이 등으로 환생한다. 이때 무속의 환생은 불교의 윤회와는 달리 단지 동식물로만 가능하며, 인간으로서 이승에 사는 기회는 단 한번 뿐이다.
(3) 신에 대한 개념이 복합적이고, 막연한 면이 있다.
대체로 애니미즘의 경우처럼 수많은 신들이 등장하며, 신들 중에는 계급이 있어서 하늘님이 가장 큰 신이 된다. 특히 많은 제사와 의식들을 행하면서도 그저 막연한 신에게 복을 비는 경우가 많다. 즉 대상이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바울도 사도행전에서 이러한 종류의 아덴 사람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했다.
민간신앙에서도 조상귀신을 숭배하고 제례를 올린다. 우리는 조상숭배 제례가 단지 유교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민간신앙의 숭배와 유교적인 조상숭배 형식이 만나면서 더 활성화 되고 대중화 된 것이다. 따라서 형식은 유교적인 면이 있는데 내용은 민간신앙적인 면이 있다.
(4) 두려움을 주는 신적인 존재가 많다.
영적인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기본적으로 흐르고 있다. 민간신앙에서 섬기는 신령은 흔히 최영과 김덕령 등과 같은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영웅들이다. 흔히 무당들의 입무과정에서 보면 꿈속에서 무서운 '식대감'이나 '장군'등이 나타난 협박을 하고, 달래기도 하며, 심지어는 성관계를 갖는데 실제로 무당은 이때 성적인 오르가즘을 느낀다고 한다.
(5) 종교적인 관념이 혼합적이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불교인이라고 하면서도 사실은 혼합적이고, 유교인이라고 하면서도 혼합적인 종교상태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민간신앙을 통해서 대부분 한국종교인들의 심성을 보아야 함이 타당할 것이다. 절에 가면 반드시 무서운 형상의 명부전이나 시왕전 같은 지옥관련 건물이 있고, 거기에 그려진 그림들도 처참한 장면이 많다. 또한 대웅전 뒤에는 칠성각(七星閣) 같은 것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것은 한국의 무속과 혼합한 증거인 것이다.
3. 전도에서의 강조점 및 과정
필자의 경험으로는 먼저 그들의 종교적인 심성의 상태를 지적해줄 필요가 있다. 그후에 복음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때 대체적인 민간종교의 특징들을 염두에 두고 전도내용을 전할 필요가 있다. 이때 논리적인 전개도 중요하지만, 개인적인 삶에서 신앙체험과 변화된 윤리적인 모습등을 증거하면 더 효과적이다. 때로 민간신앙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에게는 영적인 영역에서의 능력(能力)의 문제가 특히 요구되기도 한다.
#복음내용 전달 과정
Ⅳ. 마치는 말
시간이 흐르고 해가 바뀔 수록 전도현장에서 절감하는 것은 이 시대가 점점 더 영적으로 악(惡)해져 간다는 사실이다. 몇 년 전에는 전도현장에서 결신율도 높았고, 설령 거부하더라도 끝까지 복음을 들어주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결신은 커녕 복음을 듣지도 않고 오히려 말도 꺼내기 전에 전도지를 찢어버리고 가버리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는 온 기독교를 대표해서 야단(?)을 맞기도 하고, 축호전도를 하면서 잡상인 취급도 수없이 당한다.
그러나 이 글을 마치면서 전도대원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의지하고 나아가서 승리하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도는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이 주인이시며, 우리들은 주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완악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연구하고, 기도하는 전도자가 되어야겠다. 왜냐하면 전도는 사랑이고, 전도는 기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