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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 윤선도 유적, 세연정 * 2019.12.28.
♣ 학정 이재익 시인의 발길은 의미를 추구한다. [주요 내용] 0. 보길도 지명 유래, 행정구역 변천 _페이지 서두 0. 고산 윤선도 연보_페이지 서두 1. 3대 古庭園은?_1(사진 번호) 2. 세연정의 별칭 편액_2 3. 윤선도의 보길도 정착_3 4. 연못 구분_5 5. 윤선도 시조 <우후요>_11 6. 오우가_12 7. 어부사시사_13 8. 7암 명칭_16 9. 사투암_15,16,17 10. 혹약암_20,21 11. 붉게 물든 회수담_30 12. 옥소대_31,32 13. 보족산 공룡알해변_33,34 14. 우암 송시열이 보길도에서 남긴 시_34 15. 윤선도와 송시열 사이, 탕제일화_35 16. 윤선도와 송시열 생몰연대비교_36 17. 판석보_42 18. 망끝전망대, 선창리 유래_49 19. 윤선도 유적지들_페이지 끝 ▣ [보길도의 지명 유래] ; 옛날 영암의 한 부자가 선친의 묘자리를 잡고자 한 지관을 불렀는데, 지관이 '十用十一口' 라는 이상한 글귀를 남기고는 가버렸다. 그 뜻을 몰라서 월출산 선암사의 스님께 물었는데, 그 스님의 대답은 이러했다. " 섬내에 명당 자리가 11구(곳) 있는데, 10구는 이미 다 사용됐고, 나머지 한 구도 이미 쓸 사람이 정해졌다." 이 글귀에서 十用→ '甫, 十一口→ 吉', 그래서 甫吉島(보길도)라고 부르게 됐다~ 한다. ▣ [보길도] 행정구역 * 1694년 이래 영암군 소속 * 1870년 (고종 7년) 주민 요청, 防鎭설치, '三道鎭' * 1897년 완도군 소속 * 1982년 완도군 노화읍 소속 * 현재는 노화읍에서 분리, 완도군 보길면 * 섬지역 명칭 대부분 고산 윤선도가 명명, * 윤선도 유적지 세연정(1993년 복원)이 있는 곳은 부용동(연꽃모양 지형) * 완도에서 서남쪽으로 32km 떨어진 거리. 해남 땅끝에서 12km 뱃길로는 완도보다 해남의 땅끝이 가깝다. * 보길도는 크기 ; 동서 12km, 남북 8km. 33㎢ * 섬전체 상록수림이 울창하다. * 출입구는 황원포 ▣ 孤山 尹善道 先生 年譜
* 1578년(선조20)~1671년(현종12), 본관 해남, 호 孤山, 海翁 1) 1578년 6.22. 예빈시 부정 유심의 자, 한성부 동부 연화방에서 태어남. * 8세 때 큰집 강원관찰사 지낸 유기 양자로 감(한성부 남부 명례방종현 소재) 2) 26세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 3) 1616년(광해8) 30세 12월, 성균관 학생신분으로 집권파(이이첨, 박승종, 유희분)의 전권란정(專權亂政)을 상소(병진상소) * 31세 1월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 * 견회요 5수, 우후요 1수 등 시조 6수 지음 * 1년 후 기장으로 이배됨. (기장 유배중 양부 사망으로 3년상 허용) * 1623년 37세, 인조반정으로 (6년)귀양 풀려남. * 의금부도사 제수 3월만에 사직, 해남 낙향 4) 1628년 42세 봄,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 급제 *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麟坪大君) 사부가 됨 * 공조좌랑, 형조좌랑 한성부서윤 등 5년간 겸임 5) 1633년 증광문과 병과 급제, 예조정랑, 사헌부지평 등 6) 1634년 강석기 모함으로 성산현감으로 좌천후 파직, 해남 낙향 7) 1637년 50세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해남에서 가복 수백명 이끌고 강화도, 남한산성 방향으로 갔으나, 환궁 후라 되돌아 옴. * 1638년 51세 3월, 보길도 입도 8) 1638년 52세 6월 왕에게 문안하지 않았다는 죄로 영덕 귀양(1년) 53세 2월에 풀려남 9) 56세 해남 금쇄동 생활 중, 산중신곡, 산중속신곡, 고금영, 증반금, 오우가 등 19수 지음 10) 1651년 65세, 완도 보길도 부용동에서 어부사시사 40수 지음 11) 1652년 66세, 8월 예조 참의, 서인반대로 사직. * 경기도 양주 고산 은거, 몽천요 지음. * 윤선도는 가사는 없고 단가 시조만 75수 지음. 정철, 박인로, 윤선도 ; 조선3대 가인 12) 1657년 71세, 동부승지, 송시열과 대립 삭탈관직 시무8조소, 논원두표소 등으로 왕권확립 강조 * 윤선도는 벼슬살이가 파란만장하여 동부승지, 정3품, (차관급) 정도에서 멈췄다고 봐야 한다. 13) 1659년 73세, 효종 서거, 제1차 예송논쟁으로 서인 송시열과 대립 자의대비(효종 계모) 복상기간문제(효종은 차자, 정통성과 연관된 문제) * 남인 윤선도, 허적 ; 3년설, 윤선도 귀양 -남인 윤선도 ; 장남 소현세자 사후, 차자 효종 즉위했으니, 장남대우 해야한다는 주장 * 서인 송시열 ; 기년설(1년설), 서인 승리 * 1660년 74세 6월, 함경도 삼수로 귀양감, 1665년 광양 추동마을 이배됨, 1667년 81세 7월, (7년)귀양 풀려남 * 전후 15여년 유배, 19년 은거생활 14) 1671년 6월 11일 보길도 부용동 낙서재에서 85세로 별세. * 이해 9월 22일 해남군 현산면 금쇄산성하에 묻힘. 15) 1675년 숙종 2월 이조판서에 증직됨 * 1679년 숙종5년 8월 諡號 ; 忠憲 [危身奉上日忠, 博文多能日憲] 시호 충헌, 충헌공에 담긴 정신을 풀어보면, " 신상의 위험을 무릅 쓰고 임금께 언제나 충성했고, 널리 학문하고 다능해서 어제나 모범을 보여줬다 ." 라고 풀이 된다. 16) 허목 평가 ; “경외하는 외우(畏友), 시대의 의인” * 성격 곧고 직설적, 적이 많았음. 1. ▣ 세연정은 국내 3대 古庭園으로 꼽힌다. ; 세연정(완도 보길도), 소쇄원(담양), 서석지(영양) * 세연정은 생활공간, 놀이공간, 시조문학의 산실, 별서정원이다. 주거처의 정원이 아니라 별장의 정원이라는 의미다. 주거처는 격자봉 아래 낙서재였다. * 고산의 여유로운 전원생활이 가능했던 것은 노비를 많이 거느린 지주였기 때이다. 윗대부터 간척 등으로 많은 농토를 소유했다한다.( 40만평?) 2. ▣ 세연정 洗然亭 ;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하여지는 곳이란 의미. 시중에 이 명칭 활용한 음식점이 있다. * 세연정은 앞뒤가 다 연못, 중앙에 축대를 높이 쌓고 세운 정자이며, 방향에 따라 다른 이름이 걸려 있다. * (대개 사찰에서 한 건물을 방향에 따라 사방 다른 명칭을 붙이듯이. 예 ; 통도사 금강계단) * 세연정 동서남북 ; 중앙_세연정(洗然亭, 본연의 명칭), 동_호광루(呼光樓)/ 서_동하각(同何閣)/ 남_낙기란(樂飢欄)/ 칠암이 있는 서쪽 七岩軒 편액을 걸었다. [참고] 통도사 대웅전 한 전각의 동서남북 명칭 각기 다르다. ; 동_대웅전/ 서_대방광전/ 남_금강계단/ 북_적멸보궁 3. ▣ 고산 윤선도(1587~1671)가 1637년(51세)에 지은 정자이다.(1671년 현종2년 85세로 낙서재에서 별세) 강학, 독서, 소요, 은둔, 풍류 등의 장소로 쓰였다. * 처음 해남에 은둔하고 있는데,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나자, 가복(노비) 수백명을 배에 태우고 인조가 피난한다는 강화도로 떠났다. 근왕병으로 왕을 호위할 생각이었다. * 가는 도중에 강화도는 이미 점령당했고, 남한산성에서 농성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또 남한산성으로 향해 가는 데, 이번에는 이미 항복하고 환궁했다는 소식이다. 치욕을 느낀 나머지 되돌아오며 제주도로 가서 은거할 생각을 하다가 도중에 보길도의 매력을 발견하고, 부용동이라 칭하고 거처와 원림을 개척했다. 4. 호광루 동하각 등 보조 편액은 기록에만 있는지, 잘 보이지 않고, 세연정 편액이 붙은 방향은 북쪽. * 세연정 축담밑으로 계담(자연 연못)의 물이 들어오는 구멍은 5개, 빠져나오는 구멍은 3개로 회수담(인공연못)으로 유입된다.(5입3출, 수량조절) 5. 회수담쪽에 오래된 소나무가 시원하고 멋지다. ▣ [연못 구분하기] * 계담 溪潭 ; 앞쪽 계곡 자연연못. 자연 계곡에 판석보을 설치해 물을 저수했다. 정자와 계담 사이에 나무로 가려짐 없이 시야가 시원하며, 크고 작은 7암이 널려 있다. * 회수담 回水潭 ; 딋쪽 인공연못이다. 물구멍을 통해 계담의 물이 회수담으로 들어 간다. 오래된 소나무에 정자가 많이 가려진다. * 세연지 洗然池 ; 계담과 회수담을 합쳐 일컫는 명칭 6. 2006 여름 * 이 페이지 사진은 2019년 12월 사진이며, 2006년 여름에 탐방했을 때 사진을 몇 장 추가한다. 이 정원을 <윤선도 원림園林> 이라 칭한다. 7. 2006년 여름 8. 2006년 여름. * 계담의 물을 저장하기 위하여 물을 막은 판석보가 右상에 잘 보인다. 9. 2006년 여름 * 이 돌 ; 사투암射投岩, 7암의 하나. 옥소대를 향하여 활을 쏘는데 발받침 역할. 10. 윤선도 문학의 산실이다. 보길도를 개척한 후에 다시 해남의 금쇄동을 발견하고 이쪽 저쪽 거처를 옮겨 다니며 국문학상 주옥같은 작품활동을 했다. 11. 고산 윤선도의 시조 <우후요>. 성균관 학생신분으로 광해군 권신들에 대항하다가 함경도 경원에 유배된 시절 지은 시조. 1년 후 기장으로 이배되었다. 이 자료는 윤선도의 기장 죽성 유배지 황학대에 게시된 자료이다. * 게시자료 틀린 곳 두 곳, 학정이 수정함. 12. ▣ 윤선도의 오우가. 13. ▣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는 40수나 된다. 보길도에서 지은 것이라 한다. 14. 해남의 녹우당 일원. 이 규모로 성역화한 것은 윤선도 문학의 힘이다. * 이 중에 고택의 사랑채는 윤선도가 효종 어릴 때 스승이었으므로 효종이 수원에 집을 하사했는데, 윤선도 당대 만년에 그 집 일부를 뜯어 배로 운반해 1668년 사랑채로 이축해 녹우당이라 불렀다. 지금은 이 유적 전체를 녹우당이라한다. 뒷산에 잘 가꾼 바자림에 바람이 불면 비소리가 난다고 녹우당이랬다. 15. ▣ 비홍교(飛虹橋) ; 누각에 진입하는 다리 * 다리는 거북암석의 등을 가로지른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고, 그냥 정자 진입로다. ▣ [사투암射投岩] ; 계담의 멋진 바위 7개 중 하나. 옥소대를 향해 활을 쏠 때, 발 받침이 되는 바위. (연못 쪽 들려진 바위 부분에 발을 버텨 딛고 활을 쏘았다 한다. * 세연정은 정면, 측면 각 3칸 정사각형이며, 그 한가운데 한변이 2.5m씩인 온돌방이 있다. 16. 사투암 ▣ 회수담의 7암이란? ; 혹약암, 사투암, 귀암, 유도암, 무도암, 용두암, 목소암 * 혹약암과 사투암은 확실히 알았는데 다른 것은 구별하기 힘드네. 17. 완도타워 영상자료화면. 사투암射投岩에 섰네. 18. 완도타워 영상자료화면, 품격과 정서, 힐링 장소 19. 세연정 진입하면서 가장 먼저 맞이하는 모습이다. 20. ▣ 바위 이름이 재미있다. 혹약암(或躍岩) ; 或(혹시 혹), 躍(뛸 약), 岩(바위 암) * '혹약재연(或躍在淵)'이라는 역경(주역)의 효사에서 가져온 이름 21. ▣ 혹약암 ; 뛸 수도 있으나 (연못이 좋아서) 연못에 머물고 있다. 언젠가는 뛸 수도 있는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22. 계담. 그냥 계곡이다. 23. 판석보. * 여름에 배롱나무(목백일홍)이 피면 더욱 멋지다. 24. 서대 25. 문짝을 들어 사방을 다 개방해, 주변 풍경이 병풍이 된다. 들어열개문. 분합문分閤門(쪽문). 가운데 온돌방이 있다. 26. 동대 * 단을 쌓은 서대와 동대가 있다. 여흥을 할 때 동대와 서대 위에서 기녀들이 노래하고 춤을 췄다는 기록이 있다. 온통 연못이라 여유 공간은 별로 없다. 27. 7암이라 하여 바위에 관심이 가는데 저 바위 이름을 모르겠다. 28. 저 담장 밖은 보길초등학교 29. 세연정으로 진입하는 초입지점 30. 오늘 12월 28일. 떨어진 단풍잎 색깔도 생생, 온 연못에 가득하다. * 학정이 서 있는 뒤의 축단은 서대. 한변 7.5m, 높이 2.2m 정사각형 ▣ 보길도는 섬 온통 난대성 상록수가 뒤덮여서 단풍이 귀한데, 여기 한 나무가 속된 말로 오직이 단풍들었던 모양이네. 31. 판석보 다리를 건너 산으로 올라가면 옥소대 (玉蕭臺) ; 세연정 남쪽방향이다. ▣ <옥소대>는 바위 그 자체다. 바위 정상에 서면 전망이 좋다. * 옥소대의 그림자가 아래 세연지에 비친다고 한다. 32. 옥소대로 올라가는 도중에 가로로 걸쳐진 바위밑을 문같이 통과한다. 33. ▣ 보족산과 보옥리 공룡알 해변 34. ▣ 보길도 보옥리 공룡알해변이다. 시야를 한번 역사로 돌려보자. 보길도 동쪽 소안도 방향으로 가늘고 길게 뻗은 곳에 <송시열 글 씐바위>라는 게 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제주도로 귀양가면서 일기불순으로 이 보길도에 잠시 머물렀는데, 그 때 심정을 읊은 시문을 바위에 새겼다. 숙종이 장희빈 소생을 세자로 책봉(경종)하려 하자 송시열이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정세는 서인 송시열은 축출된 인현왕후편이며, 남인들은 장희빈을 감싸는 세력이었다. 어려운 한자는 토를 달았다. 八十三歲翁 滄波萬里中 一言胡大罪 三黜(출)亦云窮 北極空瞻(첨)日 南極但信風 貂裘(초구)舊恩在 感激泣孤衷(충) (송시열) 여든 셋 늙은 몸이 멀고 먼 찬 바다 한가운데 있구나 한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이기에 세 번이나 쫓겨나니 역시 궁하다 [다른 해석 ; 한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일까, 세번이나 쫓겨난 이(노나라 학자 유하혜 고사)도 또한 힘들었겠구나] 북녘의 임금님을 우러르며 남녘 바다 바람 잡히기만 기다리네. 이 초구(담비갖옷) 내리신(효종) 옛 은혜에 감격하여 외로이 흐느끼네. ▣ 우암 후학 임관주도 1707년 제주도로 유배가다가 우암이 지은 위의 시를 보고 읊어 그옆에 새겼다. 이 나라에 우암이 계시니 백도에 시를 남겼구나 [** 거문도 백도가 아니다. 이곳도 보길면 백도리 산1-1) 유도는 옛부터 곤액이 따르는데 큰 어른에게 어려움이 닥쳤구나 남아 있는 글귀는 춘추시대의 글인데 거친 바닷바람에 초구에 지는 눈물이여 외로운 신하의 한없는 느낌을 하늘의 해만이 그 붉은 마음 비쳤으리라. [** 춘추시대의 글 ; 춘추대의, 대의명분중시 / 송시열 스승님이 초구를 눈물로 적셨을 것이다. ] * 송시열은 이 시를 남긴 1689년 그해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다시 국문을 받으러 서울로 불려 올라가는 도중, 정읍에서 사사賜死되어 83세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35. ▣ 서인의 영수 송시열과 남인의 영수급 윤선도 사이에 인간적인 얘기 한토막. 두 사람은 당쟁이 가장 격심하던 시기에 정치적으로는 대립하는 사이 였다. 그러나 인간적으로는 서로 신뢰하는 사이였다. 윤선도는 학문과 의술이 뛰어났다. 어느 때 송시열이 몸이 좋지 않았을 때 아들에게 이르기를 '윤선도 선생에게 가서 약을 좀 지어 오라'고 분부했다. 아들 "혹시 독을 넣으면 어쩌시려고요?" 송시열 ; "윤선도는 절대로 그럴 인물이 아니다." 윤선도의 정성스런 약첩으로 송시열은 말끔히 나았다고 한다. 36. ▣ 송시열이 보길도에서 시를 지어 글씐바위에 새길 때, 송시열은 윤선도를 만났을까? 아니다. 이미 윤선도는 18년 전에 별세하였기 때문이다. * 윤선도 ; 1587~1671년, 남인 * 송시열 ; 1607~1689년, 서인(노론) / 윤선도가 송시열보다 20세 위다. 정치적으로는 라이벌, 대립했다. 특히 예송논쟁에서. 보길도에 예송리가 있다. 윤선도가 명명했을까? 37. 세연정 누대 진입로 비홍교(飛虹橋) 38. 진입로 비홍교(飛虹橋) 39. 계담 40. 옥소대 바위 정상. 손짚은 자리 바로 뒤에 작은 솔이 있다, 그것을 크게 찍어 봤다. 41. 옥소대 바위 정상의 아주 작은 솔. 자라서 멋진 바위송이 될 것이다. 42. ▣ 상재께서 판석보(板石洑) 위에 섰다. 굴뚝다리라고도 한다. * 세연지의 물을 저수한다. * 돌다리 역할을 한다. 다리를 건너 산 위로 옥소대에 올라간다. * 우기에는 폭포가 된다. * 다리축조 구조 ; 양쪽에 판석을 견고하게 세우고 그 안에 강회로 채우고 판석 뚜껑돌을 덮었다. 43. 계담의 진귀한 바위같은 이 친구, 금산~ 44 . 계담에서 학정, 본카페 운영자 45. 옥소대 바위 정상에서 학정 46. 계담은 세연정의 서쪽 방향 47. 야무진 이 표정은 고산 선생을 회고하는 것일까? 48. 고산 윤선도 선생 덕에 잠시 안락한 시간을 보내는 제법 선량한 후손들. 49. 멋진 포즈 50. ▣ 보길도 망끝 전망대 어부의 아내가 남편이 돌아오는 배를 기다리기에 가장 시야가 좋은 전망지였다. * 해남 <땅끝> ; 육지에서 조망이 가능한 끝지점 * 보길도 <망끝> ; 섬에서 조망이 좋은 끝 지점 ▣ 망끝 전망대 마을 <선창리 仙昌里> 지명 유래 ; 한라산신이 지리산신의 초대를 받고 가던 도중에 이 곳 망월봉에 잠시 머물러 쉬면서 살펴보니 신선이 노닐기 좋고 마을이 번창할 땅이라 선창리라 지었다 한다. 산신의 입장이 되어 윤선도가 지었을 터이다. * 제주도와 추자도가 보이며, 일몰이 아름답다. ▣ 윤선도 유적지들
1) 서울 이화동 ; 1587년 선조 20년 탄생지(~1671년 현종 12년 몰) 유심(예빈시 부정)의 아들, 유기(강원도 관찰사, 유심의 동생)의 양자로 감. 서울 마로니에 공원에는 탄생지 비가 있다. 본관 해남, 1628년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하여 봉림대군, 인평대군의 사부師傅가 됨. 1633년 증광문과에 병과 급제하여 예조정랑,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함. 2) 해남 녹우당 ; 해남은 선조들의 고향. 중앙 정치 무대에서 밀려나면 고향에 은거함. 고산 윤선도 유적지 녹우당과 사당이 있는 곳. 3) 함경도 경원, 부산 기장 ; 1616년 병진소를 올려 귀양간곳. ~1623년 인조반정 후 풀려났다. 4) 완도의 보길도 ; 1635년 병자호란후 제주도로 가다가 경치에 이끌려 정착 개척한 곳. 부용동(마을 이름 명명 개척), 낙서재(저택), 세연정{연못과 정자). 곡수당, 동천석실 등. 마지막 85세로 별세한 곳은 낙서재이다. 5) 해남 금쇄동 ; 보길도 시절에 새로 개척한 곳. 문학활동, 묘소도 금쇄동에 있다. 6) 영덕 ; 병자호란 후 왕에게 문안인사를 드리지 않았다는 죄로 1638년 귀양 간 곳 7) 경기도 양주 고산 ; 1652년 고산이 예조참의로 임명됐으나, 서인들의 모략으로 사직하고 은거한 곳. 孤山은 그의 호가 됨. 8) 함경도 산수 ; 1657년 71세로 동부승지에 올랐으나 송시열과 대립하여 삭탈관직 되었고, 효종 서거후 예론에서 서인에게 패배하여 1659~1667년 유배됨. 풀려난 후 여생을 보길도에서 살다가 4년후 별세하였다. 9. 광양 추동마을 ; 함경도 산수에서 이배된 2년 4개월 동안의 유배지 다음은 [곡수당,낙서재], [청산도], [완도탑] 에서 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