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굴비와 조륵(趙玏)선생
이 흥 규
근세 까지도 조선 팔도에서 고을 백성들이 가장 살기 좋은 고장을 일컬을 때「남 영광 북 안악」이란 말이 회자되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고장은 한양의 북쪽에서는 황해도 안악군이요, 남쪽에서는 전라도 영광군으로 이 두 고장을 옥당(玉堂)고을 이라 일컫는다. 옥이란 서양의 다이아몬드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 조상들이 가장 귀히 여기던 보물이다. 구멍을 뚫은 곡옥은 그 모양이 마치 모체내의 태아를 닮아 생명의 탄생을 상징하며 다산과 자손의 번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왕관을 곡옥으로 장식하고, 여인들의 귀걸이, 옥가락지, 옥비녀 등 애장품을 옥으로 만들었다. 이처럼 옥은 우리민족의 상징적인 보물 이였으며, 옥당(玉堂)고을이란 가장 살기 좋은 고장을 의미한다.
이 두 지역의 입지조건을 살펴보면 황해도 안악은 평양의 관문인 남포를 마주보는 대동강 하구의 드넓은 평야지대로 대동강과 재령강이 감싸고돌고 구월산이 병풍처럼 바람막이를 해주는 재령평야를 안고 있어 산수가 조화를 이루는 곳으로 농 어업이 주업이던 옛날에는 이보다 더 살기 좋은 고장은 보기 힘들었으리라.
영광은 어떤가? 내륙지방인 장성과 경계를 이루는 고성산과 태청산 등의 노령산맥이 동쪽과 남쪽의 울타리를 형성하며 벋어내려 함평과 경계를 이루는 불갑산으로 이어져 바람막이가 되고 북은 작은 언덕으로 펼쳐진 황토의 야산들이 드넓은 논밭을 형성하고 있으며 서는 칠산 바다와 접해있어 농 어업의 최적지로 농수산물이 풍부한 고장이다.
또한 법성포는 고려 때는 부용창, 조선시대에는 법성창이 전라도 곡창지대인 서부지역 여러 고을의 세금을 관할하는 무역항으로 중국과 교류가 빈번하였고 따라서 자연히 예악이 발전하고 문물도 흥성하여 임기를 마친 영광 군수는 큰 과오가 없는 한 중앙의 당상관으로 승진해 조선시대 문화의 황금기인 성종 때 이곳을 홍문관의 별칭인 옥당고을이라 명명하였으며 전라도에서 전주목, 나주목, 순천부 다음으로 인구가 많아 흥선대원군이 호불여영광(戶不如靈光 ; 호수는 영광만한 곳이 없다.)이라 했다 한다.
영광이 살기 좋은 고장이라 이름 난 여러 가지 요건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산물이 소금과 굴비다. 소금은 식생활에 필수적인 식품으로 어떤 의미에서 식량보다도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신안의 천일염은 자급을 위한 것 이였을 뿐 육지로 실어오는 것은 어려웠기 까닭에 염산과 백수의 드넓은 개펄에서 나는 천일염은 호남 영남은 물론 전국에 조달 되었다.
굴비는 영광의 브랜드다. 국가브랜드 대상을 탄 영광굴비는 한국 최고의 생선으로 등극했다. 사실 굴비는 참조기를 말린 것이다. 남지나해에서 알밴 참조기는 사오월에 영광과 서해 칠산 사이의 바다 골짜기를 지나 연평도 앞바다에서 알을 낳는다. 칠산 바다에서 잡히는 조기류는 13여종 정도이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참조기와 수조기이다. 참조기는 몸빛이 회색을 띤 황금색이며 입이 불그스레하고 몸통 가운데 있는 옆줄이 다른 조기에 견주어 굵고 선명하다.『동의보감』에는「약성이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강하거나 약하지도 않고 평이하며 약간 단맛이 있고 전혀 독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서해안의 민간요법으로는 어린이나 노약자 병약자의 영양 보충에 좋다고 해서 조기(助氣)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하며 이는「기운을 북돋운다」는 의미이다. 흔히 황석어(黃石魚)를 참조기의 새끼로 오인하는데 색깔이나 모양이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황석어는 법성포에서는 사투리로「 황숭어리」라고 하며 참조기와는 다른 어종으로 주로 김장용 젓갈을 담는다.
조기 조리법은 다양하다. 누렇게 알을 밴 생조기는 매운탕이 별미다. 조기의 알은 느끼하지 않고 담백하여 여타 생선의 맛과 비교할 수 없다. 간을 하여 열흘정도 말린 마른조기는 불에 굽거나 조림 또는 조기 찜이 밥맛을 돋운다. 조기를 오랫동안 저장해 둘 수 있도록 바짝 말린 것을 굴비라 한다. 타 지역에서는 조기를 소금물에 담갔다 말리는 방법에 비해 영광굴비 맛의 비결은 소금에 절이는 방식과 말리는 기상조건에 있다. 염산면과 백수읍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천일염을 2년 정도 보관해서 간수가 완전히 빠진 천일염을 조기아가미에 넣고 켜켜이 재는 것을「섶간」이라 하며 이 섶간 한 조기를 옹기에 30여 시간 절여두었다가 꺼내서 짚으로 엮어 덕장에서 약 3개월 정도 말린 것을 굴비라 한다. 법성굴비가 타 지역보다 월등히 뛰어난 것은 누렇게 알밴 칠산 바다 조기의 어물로서의 우량성과 서해안의 바람과 고품질 천일염, 그리고 천년을 이어온 장인의 염장법에 있다. 법성포는 평균 기온이 10.5℃, 습도 75.5%, 초당 풍속 4.8m의 기상조건과 서해에서 불어오는 북서풍인 하늬바람의 영향으로 건조 조건이 월등하다.
원래 법성포 굴비는 독(옹기)에 보리를 넣고 굴비를 보리 속에 묻어 보관하였다. 보리는 가을에 심어 겨울을 지나 늦은 봄에 거두는 작물로 냉(冷)한 곡식이다. 이 보관법은 냉동시설이 없던 옛날 굴비를 오래 보관하기 위한 냉장보관의 한 방법이라 할 수 있으며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이 찬 보리 속에 묻어놓은 굴비를 보리굴비라 하며 굴비의 으뜸으로 친다. 고추장 굴비는 굴비의 뼈를 모두 발라낸 뒤 고추장에 버무린 굴비로 별미이며 전통적으로 굴비를 조리하는 방법 중 하나다.
말린 조기를 굴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데에는 역사적 근거가 있다. 고려 16대 예종 때 이자겸은 그의 딸 순덕을 왕비로 들여 그 소생인 인종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하였다. 그리고 인종에게는 이모가 되는 그의 3녀와 4녀를 시집보내 중복되는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독차지 하고 은근히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었다. 경원이씨인 이자겸은 이씨가 왕권을 잡는다는 십팔자도참설(十八子圖讖說)을 믿고 두 차례나 왕을 독살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자신의 딸인 왕비가 인종을 도움으로써 실패했다.
그 뒤 최사전이 이자겸의 측근인 척준경을 꾀어 이자겸을 체포한 후 법성포 맞은편 지금의 영광 백수읍 한시랑으로 유배 시켰다. 그는 유배지에서 굴비를 먹게 되었고 마침내 칠산 바다에서 잡아 소금에 절인 조기를 진상하며 비굴하게 자기의 잘못을 용서 받기위한 아부가 아니라는 의미로 굴비(屈卑)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그때부터 영광굴비는 임금님 수랏상에 진상되고 궁궐에서부터 영광굴비가 명물로 등장하여 각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굴비는 조선제일의 맛을 지닌 식품답게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온다. 이 자린고비 일화의 실제 인물은 충청도의 조륵(趙玏)선생(1649~1714)이다. 선생이 제사를 지내고 굴비를 천장에 매달아놓고 쳐다보면서 식사를 했는데 아들이 굴비가 먹고 싶어서 여러 번 쳐다보자 짜다고 야단을 쳤다는 이야기로 선생의 절약정신이 얼마나 몸에 배어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는 해산물이 풍성한 전라도 지방이 아닌 충청북도의 얘기로 교통이 불편한 옛날에 영광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굴비가 얼마나 귀하고 값비싼 어물 이였는가를 입증해 주는 실화다.
조륵 선생은 평생을 부지런하게 일하고 절약하여 구두쇠라는 말을 들으면서 재산을 모아 만석군이 되었다. 선생이 회갑을 맞아 당시 전라 경상도 지역에 심한 가뭄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백성들에게 그 동안 모은 재산을 아끼지 않고 베풀어 기근을 구제하였다. 이에 경상 전라도 지방의 관리들이 그의 공을 조정에 상소하여 정3품에 해당하는 가자(加資) 벼슬을 하사 하였으나 선생은 남은 재산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을 뿐인데 그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냐며 끝까지 벼슬을 사양했다고 한다. 평생 동안 절약하고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자신의 영화나 후손들을 위해 감추지 않고 어렵게 살아가는 이웃에게 아낌없이 베풀어 준 선생의 근검 절약정신과 자선사업의 행적은 충주시 신니면 대화리 화치마을 뒷산에 자린고비 정신의 묘비가 세워져 그의 높은 뜻을 후세에 기리고 있다.
물질 만능주의가 팽배한 요즈음 나라에 내는 세금을 제 재산을 빼앗긴다는 심사로 감추고 속이는 일을 일삼으며 증여세를 내지 않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대물림하고 심지어는 재산을 남의나라로 빼돌리기까지 하는 우리나라 일부 재벌들의 추악한 행위가 언론에 보도될 때마다 피 끓는 분노를 삼키곤 한다. 국민이 가진 재산은 자신의 재산임과 동시에 국가의 재산이다. 국가의 재산을 남의나라로 빼돌리는 행위는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외국으로 재산을 빼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재벌들은 이미 경제적인 면에서 그들 자손대대로 부를 누리고 살아갈 수 있는 기반 위에 올라서 있는 자들이다. 그러한 그들이 무엇이 부족하여 무엇을 더 갖기 위해 매국을 한단 말인가. 애민정신은 곧 애국정신이다. 우리나라 일부 재벌들은 조륵 선생의 애민정신을 거울삼아 매국적 행위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신과 자손을 위한 길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어려운 이웃에게 베풀어 줌으로서 얻는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참다운 가진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