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날의 일과
한용유
새벽 4시 반에 잠이 깼다. 오랫동안의 습성은 반복의 연속으로 고칠 수 없었다. 아내는 벌써 일어나 주방에서 덜그럭 꺼리고 있었다. 침구를 정돈하고 일기를 쓰고 05:50분 새벽 산책길에 나셨다. 추석이라서 인지 나 혼자뿐이었다. 손에는 여전히 비닐봉지와 집게를 덜고... 자신이 생각해도 좀 이상했다. 사이코 성 습성은 이미 고질이 된지 오래다. 평일과 같이 앞산공원 녹지공간에 도착하니 06:45 평소에 10여 명 식 왔는데 아무도 보이지 안했다. 여명의 새벽공기가 신선했다. 무늬 돌 위에 윗옷을 벗어놓고 파란 잔디위에서 요가와 국민체조를 30분간 하고 녹지 공간 둘레를 한 바퀴 돌며 걷기 운동을 하면서 쓰레기 줍기를했다. 매일 주어서 그런지 주울 것이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주운 쓰레기를 화장실 쓰레기통에 버리고 집에 도착하니 06:50이었다. 골목과 대문간 청소를 하고 화단에 물을 뿌린 후 보이라 스위치를 돌려 온수 욕을 했다. 아내가 초안해서 건네 준 예배부름을 워드, 복사를 하고 있는데 지난 주 결혼한 손주 내외가 한복으로 정장을 하고 들어섰다. 새벽 8시었다. 9시에 둘째 석호 식구가 오고 9시 반에 큰애 식구가 와서 아내의 주도로 추석예배를 봤다. 예배를 마치고 음식을 준비하는 막간을 이용 거실에 둘러앉아 벽에 걸려있는 입향조님의 고봉초당 시와 유계부군의 聞丁丑南漢下城 詩를 새사람 손부를 중점으로 낭송을 하면서 풀이를 했다. 400여 년 전 임란 때 남부여대 피란 올 때의 사정과 이어 병자호란 이듬해 청나라의 침범으로 삼천리가 초토되고 인조가 강화에서 남한산성으로 몽진(蒙塵), 그리고 40여일의 守城, 결국 말의 피를 항복의 증표로 인조의 三拜九叩頭, 참아 눈으로 볼 수 없는 치욕의 역사를 내가 아는 역사지식을 총동원하여 열변을 토했다. 그리고 오늘날 허리 잘린 동족상잔의 비극까지 덧붙이면서 아직도 우리의 힘만으로 통일을 이룰 수 없는 약소민족의 서러움과 이념대결의 고질을 한탄하며 나도 모르게 흥분했다.
아침 식사준비가 다 되어 둘러앉아 맛있게 먹었다. 아내가 준비한 반찬에 두 며느리가 작만해온 추석빔으로 상이 가득하고 풍성했다. 식사를 마치고 고향 부모님 산소를 참배하기 위해 새로 맞이한 손부를 태우고 진호, 서호 2대의 차에 분승 10시50분에 출발했다. 벌써부터 차가 밀리기 시작 1시간 내외에 갈 수 있는 20km의 거리인데 1시간 20분이나 걸려 12시에 도착했다. 먼저 팔 밭골 부모님 산소는 가파르고 길이 험해서 손부가 임신 5개월이라 무리가 될 것 같아서 마루터기에 있게 하고 나머지 식구만 참배를 하면서 소주 며느리를 맞이한 구두 고유를 올렸다. 부모님 산소 참배 후 망근쟁이 자부 산소로 가면서 입향조님 산소와 파조님 산소를 참배했다. 400여 년 전 피난 온 얘기를 하면서 척박한 산골에서 경산 4대성의 반촌의 긍지를 지키며 어렵게 살아온 사실을 들려주며 다시 한 번 집안 뿌리의 내력을 알렸다. 자부산소 성묘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들머리 밤나무를 베어버렸다. 자부산소 아래 묘역 후손이 그늘이 진다고 벌초 하로 와서 베여 버린 것 같은데 분명 우리 종산 땅에 자란 밤나무다. 알밤이 발갛게 떨어져 있는 것을 주우면서 밤나무를 무단 벌목한 묘 임자에게 항의를 해야 하지 않겠나 생각했다. 밤도 과수이고 남의 산에 심어진 나무를 산주에게 알리지 않고 무단 벌채 했으니 소유권 침해인 동시에 산림법위반이 아닌가. 형사고소 대상이라고 본다. 따끔한 경고를 하지 않으면 앞으로 어떤 범행을 또 할지 모르니 종회에 건의키로 마음먹었다. 또한 내가 자부 산소 벌초 갈 때마다 주운 알밤 줍기 추억을 송두리째 앗아 가벼렸으니 괴심 했다. 이제 알밤 줍는 사람도 없다. 양복 주머니가 축 늘어지게 주운 알밤을 만지면서 어릴 때 밤 밭 등 알밤 줍기 추억이 스쳐갔다. 그 알밤을 남 먼저 줍기 위해 새벽 일찍 희붐할 때 돌아다니던 그 밤밭등은(율산파조묘역) 택지개발로 아파트 숲에 묻혀 버렸다.
재실 주차장으로 돌아와 추석 성묘 차 온 일가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재실 안으로 들어가 새 손부에게 구경을 시키고 뒤편 영모당에 올라가 함께 묵염을 드린 후 영모당 내력을 얘기하면서 내가 사후 유택이 이곳 영모당 이라고 하면서 온가족에게 선포를 했다. 나는 국가유공자로 영천국립묘지에 갈 수 있으나 내가 주도해 세운 이곳 영모당에 오기로했다고 했다. 유골은 의학연구용으로 임이 영대 병원에 기증했으니 그대로 하고 수목장 후 위패만 아버지 위패함 밑에 안치 해달라고 당부를 했다. 모두마치고 시계를 보니 오후 2시, 돌아오는 길에 둘째에게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산기로 분만이 임박한 환자가 왔다면서 빨리 가야 한다고 했다. 새벽에도 분만환자로 병원에 다녀왔는데 두 번째다. 오늘 출생하는 영아는 복 받은 어린이라면서 서둘러 갔다.
오후 3시에 대명동 집에 돌아왔다. 1신간이 걸렸다. 오식을 하고 송현효요양병원에 5년째 입원중인 여동생의 병문을 하고 왔다. 배설도 좌변기로 간병인의 부축을 받아야하고 식사도 수전증으로 힘이 들었다. 비교적 정신은 맑아 누구인지 다 알았다. 마음이 아팠다. 나보다 네 살 아래다. 서울 구현종군과 부산 삼락 조카로부터 추석 안부 전화가 와서 고마웠다. 새벽 산책, 성묘, 병문 등에 지쳐 저녁 보름달 구경도 못하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2018년 9월24일 일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