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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열왕기상13장20~34절
제목 : 죽음으로 증명된 말씀
어제는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거짓말로 속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하고 벧엘 늙은 선지자의 집에서 떡과 물을 마시게 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이 벧엘 선지자에게 임하여 예언합니다.
그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사람은 죽임을 당하고, 그의 죽음을 통해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참 선지자이고, 그가 전한 예언이 반드시 성취될 것임이 증명됩니다.
1. 하나님의 경고(20~22절)
1) 유다에서온 하나님의 사람과 벧엘 선지자가 상 앞에 앉아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벧엘 선지자에게 임하였습니다(20절).
“[20] 그들이 상 앞에 앉아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그들이 상 앞에 앉아 있을 때에. – 본장이 전해 주는 이야기의 특징은 언제나 어떤 사건의 진행 중에 이에 대한 부정(No!)의 말씀이 들려온다는 점입니다. 4절 주석 참조.
본절 역시 이러한 특징을 보여 줍니다.
즉 벧엘의 선지자와 하나님의 사람이 식사를 채 끝마치기도 전(곧 금지된 교제 행위를 완료하기 전)에 이에 대한 심판의 선고가 들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 본장의 이야기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극적 요소는 반전(反轉)에 있습니다.
즉 앞서 여로보암에게 징계를 선포했던 자(2절)가,
지금은 도리어 징계를 선포 받게 됩니다(21,22절).
그것도 자기를 대접하겠다고 초대한 거짓 선지자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2) 벧엘의 선지자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의 잘못을 지적합니다(21절)
“[21] 그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외쳐 이르되. - '외쳐'에 해당하는 '카라'는 그 자체로 이미 어떠한 메시
지의 선포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는 또한 메시지를 받는 자의 어떤 응답을 '불러내는'(call out)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카라'는 앞서 하나님의 사람이 여로보암에 대해 했던 행위입니다(2절).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카라'를 받습니다.
이는 참으로 아이러니칼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 다음 사항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일꾼들은 끝까지 충성해야 합니다(히3:14; 계 2:10).
*히3: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계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솔로몬의 경우를 예로 들면, 그는 전무후무한 지혜를 소유하였으나 훗날 영적 방만 상태에 빠져 귀중한 은사를 간수하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의 호된 진노를 받았습니다(11:3-13).
반면에 사도 바울은 구원에의 확신 가운데서 수많은 일들을 감당해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좇아가노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빌 3 :13,14).
*빌3:13,14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2) 하나님의 일을 완수하게끔 하는 것은 자신의 능(能)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입니다(고전 15:10).
*고전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따라서 주의 일꾼 된 자들은 스스로 교만해질 것이 아니라 겸허하게 순종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공의는 지극히 엄정합니다.
즉 하나님한 때의 업적을 핑계 삼아 방만 상태에 빠져드는 것을 결코 허용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3) 벧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불순종 하였으므로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합니다(22절)
“[22]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하신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墓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조상들의 묘실, 즉 가족의 무덤에 묻히지 못함은 곧 객사(客死)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는 우리말로 하면 '고향의 선산(先山)에 묻히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에게도 고향과 친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객사한다는 것은 큰 비극이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금기 사항(8,9절)을 어긴 결과 노선지자의 예언대로 객사하여 타관 사람의 묘실에 장사되고 맙니다(30절).
2. 그 사람의 죽음과 장례(23~32절)
1) 하나님의 사람이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그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웁니다(23절).
“[23] 그리고 자기가 데리고 온 선지자가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그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라”
자기가 데리고 온 선지자가. - '자기(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데리고 온 선지자(하나님의 사람)'를 가리킵니다.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라. -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지금까지 줄곧 도보로 다녔었습니다(1,10절).
그런 그에게 이제 나귀 한 마리가 주어졌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1) 이유야 여하튼, 앞서 왕의 선물을 거절한 그가 벧엘에서 결국 선물 하나를 받은 셈입니다(7절).
(2)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귀를 내준 것은 친절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자기로 인해 지체된 데 대한 보상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즉 이러한 행위에는 시간의 지연으로 인해 생긴 저주(22절)를 시간의 단축으로 해독(解毒)해 보려는 측면도 있는 것입니다.
추측하건대 이러한 인위적인 제재(除災) 경향은 이 노(老) 종교가의 특징인 것 같습니다.
2) 하나님의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그를 만나 물어 죽였습니다(24절).
“[24]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그를 만나 물어 죽이매 그의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서 있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서 있더라”
사자. – 사자는 성경 시대의 팔레스틴에 흔한 맹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벧엘의 산간 지대와 요단 계곡의 숲은 사자의 서식처 였습니다(왕하 2:24; 렘 49:19; 슥 11:3).
하지만 이처럼 번성했던 사자도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는데 13세기경 므깃도(Megiddo) 부근의 레드자(Ledja)에서 죽임당한 후 팔레스틴에서는 멸종하고 말았습니다.
만나. - '만나'에 해당하는 '마차'는 '발견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우연히 맞닥뜨리다'보다는 좀더 능동적으로 '구하다가 마침내 따라잡다' 또는 '찾다가 끝내 발견하다'는 의미를 지닙니다(신4:29; 잠1:28; 사55:6; 렘 29:13 등).
14,28절에서의 늙은 선지자의 행동이 바로 이 '찾아가 발견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로 본절의 사자 역시 하나님의 사람을 '쫓아가' 덮친 것입니다.
나귀는 그 곁에 서 있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서 있더라. - 이 사건에 담긴 초자연성은 본장면이 지닌 예외성(例外性)에서 드러납니다.
보통, 사자라는 맹수는 주리지 않는 한 함부로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 드문 동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을 공격한 사자는 그를 죽여만 놓고 그 시체를 먹거나 어디로 물어가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희한한 것은 나귀조차 달아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며,
사자 역시 그 자리 곁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상식적이지 않은 이러한 요소들이 이 사건에 담긴 초자연적 목적에 생각이 미치게끔 합니다.
3) 지나가는 사람들이 상황을 보고 그 늙은 선지자가 사는 성읍에 가서 말합니다(25절)
“[25] 지나가는 사람들이 길에 버린 시체와 그 시체 곁에 선 사자를 보고 그 늙은 선지자가 사는 성읍에 가서 말한지라”
지나가는 사람들이 길에 버린 시체와 그 시체 곁에 선 사자를 보고. -
이스라엘의 행인들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유다 선지자의 시체와 그 특이한 죽음 현장을 목격하고서, 늙은 선지자의 성읍에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그것을 화제 거리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이 죽임을 당하게 된 원인을 알고 그들은 큰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려 벧엘 인과 더불어 음식을 먹고, 가증한 우상 숭배를 일삼는 자신들에게 임할 징벌은 실로 엄청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4) 벧엘 선지자가 듣고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사자가 그를 찢어 죽였다고 합니다(26절)
“[26] 그 사람을 길에서 데리고 돌아간 선지자가 듣고 말하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를 사자에게 넘기시매 사자가 그를 찢어 죽였도다 하고”
선지자가 듣고. – 행인들의 이야기를 들은 벤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21,22절)이 실현된 데 대한 경의감과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한 동정심과
죄책감 등으로 말미암아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부랴부랴 사건 현장으로 달려가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는 그 일이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임을 확신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또한 자기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듯이,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선포된 말씀 또한 그대로 성취되리라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을 것입니다(32절).
어긴. - '어긴'(마라)은 '쓰게 하다', '반역하다'는 뜻입니다.
즉 이는 곧 불순종과 배반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정을 쓰리게 함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동사에는 하나님의 사람이 귀환 도중에 겪은 불행(24절)을 확연히 조명해 주는 의미 해석이 들어 있습니다.
즉 그는 스스로의 불순종으로 인해 그 같은 불행을 만난 것입니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20,21절 주석을 참조하라.
넘기시매. - '넘기시매'(나탄)는 '위임하다', '허락하다'는 뜻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적 목적을 위해서 어떤 대리물의 행동을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사 사용에서 사자 습격 사건(24,25절)을 바라보는 늙은 선지자의 관점을 볼 수 있습니다.
즉 그것은 단순한 재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였다는 시각입니다.
5) 늙은 선지자가 그의 아들들에게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합니다(27절)
“[27] 이에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그들이 안장을 지우매”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 이는 13절과 동일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제 늙은 선지자의 내심은 그때와는 엄청나게 달라졌습니다.
즉 앞서 와는 달리 이제 그는 전체사건에 일정하게 작용하는 한 의지(意志)를 자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노련한 종교가로서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술수로서는 도저히 가리울 수 없는 하나님의 권능이 거기에 작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벧엘 제단의 어용 신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벧엘 제단에 대하여 절대적인 부정(absolutey No!)의 선고(1-5절)를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한편 벧엘의 늙은 선지자는 발람과 유사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Montgomery, 민 22:1-24:25).
6) 늙은 선지자가 가서보니 그의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었습니다(28절).
“[28] 그가 가서 본즉 그의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었고 나귀와 사자는 그 시체 곁에 서 있는데 사자가 시체를 먹지도 아니하였고 나귀를 찢지도 아니하였더라”
시체(屍體). - '시체'(네벧라)는 '시들다'(나벧)라는 동사에서 온 말입니다.
이 동사에는 시들은 잎사귀나 말라버린 초목의 이미지가 실려 있습니다.
이처럼 생명의 시듦이나 말라버림은 하나님의 심판을 비유하는데 사용되거니와 그 자체로도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4절 주석 참조.
길에 버린 바 되었고. - 여타 민족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도 시체가 제대로 매장되지 않고 방치되는 것은 큰 수치의 표시입니다(삼하 2:10이하; 삼상 31:11-13 등).
그리고 이는 종종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신 28:62; 렘 7:23; 26:23; 사 5:25).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의 시신이 길에 버려져 있음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냅니다.
그 뿐 아니라 그렇게 심판받은 시체가 벧엘에 버려져 있었다는 것은 그 성읍에 수치와 부정(不淨)을 안겨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신 21 : 1-9).
한편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해진 이러한 징벌은 일견 너무 가혹한 처사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개별적인 측면에서가 아닌, 벧엘 제단에 대한 하나님의 극한 분노와 혐오라는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합니다(1-5절).
그리고 그렇게 커다란 혐오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 저지른 실수는 결코 경미(輕微)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비록 동정의 여지는 있지만, 그가 벧엘로 되돌아와 식사를 함께 한 것(15-19절)은 그 성읍에 내린 경고의 엄중함을 격감시키는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시체가 벧엘에 버리우는 죽임을 당하게 하셔서라도 경고의 준엄함을 손상 받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나귀와 사자는...찢지도 아니하였더라. - 나귀와 사자가 이때까지 기인한 연출을 계속하고 있었던 까닭이 분명해집니다.
즉 이들은 하나님의 사람의 주검의 의미를 분명히 알고 이를 보전(保全)해 줄 인물의 도착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벧엘의 노선지자가 도착하자 이것으로 그 동물들의 소임은 끝난 것입니다. 24절 주석 참조.
7)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나귀로 성읍으로 옮겨 울며 장사합니다(29절).
“[29]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들어 나귀에 실어 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하되”
들어. - '들어'(나사)는 '들다', '메다'는 뜻입니다.
즉 늙은 선지자는 시신을 들쳐 메어 나귀에 실은 것입니다.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연로한 선지자가 손수 치루었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깊은 사죄와 자책감에 사로잡혀 있음을 반영합니다. 26절 주석 참조.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 늙은 선지자가 왜 하나님의 사람의 시신을 벧엘로 들였는지 까닭이 분명치 않습니다.
가장 가능성 있는 추측은 하나님의 사람의 묘를 벧엘에 둠으로써 그 성읍에 대한 지속적인 경고와 교훈의 표시로 남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벧엘의 노(老) 종교가는 회오(悔悟)를 통해 전체 사건의 의미를 깊이 자각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 이르러선 하나님 편에 선 적극적인 봉사를 한 셈입니다.
8) 하나님의 사람 시체를 자기 묘실에 두고 슬피 웁니다(30절)
“[30] 곧 그의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두고 오호라 내 형제여 하며 그를 위하여 슬피우니라”
본절에는 세 가지 요소가 들어있습니다.
즉 (1) 하나님의 사람의 시신을 늙은 선지자 자신의 묘에 장사한 것,
(2) 애곡,
(3) '오호라 나의 형제여'라는 호칭 등이 그것입니다.
이상은 일단 히브리인들의 장례식에 관습적으로 따르는 요소로서 볼 수 있습니다(렘 22:18).
그러나 관습적이라 해서 이 일을 무덤덤히 여기거나 부정적으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혹자는 시신을 남의 땅, 남의 무덤에 묻은 것은 잔인한 처사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실상 하나님의 사람의 주검을 자기 무덤에 안장한 늙은 선지자의 행동은 거꾸로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깊은 존경의 표시입니다(창23:6; 룻 1:17).
그러기에 신약에서 아리 마대 사람 요셉도 예수님을 자신의 묘에 장사했습니다(마 27:57-60).
오호라 내 형제여. - 히브리인들의 장례 절차에 있어서도 애곡(哀哭)은 필수요소입니다.
그런데 이때 애곡할 의무가 있는자는 가까운 친척들이었으며(창23:2;삼하 11:26), 여기에 구경꾼들이 가담하여 같이 울거나(삼상 25:1; 삼하 1:11), 직업적으로 만가를 부르며 울어주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대하35:25;렘9:16-19;암 5:16).
한편 벧엘 선지자는 사자(死者)에 대한 깊은 조의(弔意)의 표시로서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을 포함하여 모을 수 있는 인원을 총동원하여 애곡하였던 것 같습니다.
9)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후에 그의 아들들에게 자기가 죽거든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고 유언합니다(31절).
“[31] 그 사람을 장사한 후에 그가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 앞절과 관련, 혹자는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친척'으로 예우하여 장례지낸 것이라 합니다(Bahr).
그러나 본절은 친척 이상의 무엇을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늙은 선지자의 유언은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과 한 묘실에 '합장'(合葬)해 달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은 부부 사이에나 볼 수 있는 일입니다(창25:7-10).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 이 역시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최대한의 경의 표시'에 따름입니다.
그리고 이는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참선지자임을 벧엘 선지자가 시인하고 또 이념적 동의를 표한 것이기도 합니다.
한편 이 유언 덕분에 결과적으로 훗날 벧엘 선지자 자신의 주검도 안전하게 보존 되었습니다.
즉 약 300년 후 요시야 왕이 우상 숭배자들의 뼈들을 거두어 불사를 때, 하나님의 사람이 묻힌 묘실은 손대지 않았던 것입니다(왕하 23:16-18).
이와 관련 혹자는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이러한 결과를 미리 예상하고 유언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Matthew Henry).
벧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이 필히 이루어질 것을 믿었음을 볼 때 이는 전혀 타당성 없는 주장만은 아닙니다(32절).
10)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의 말씀이 반드시 이룰 것이라 말합니다(32절).
“[32]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
사마리아 성읍.-'사마리아'란 지명은 여로보암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때로부터 약 50년 뒤에 새로 생긴 지명입니다.
즉 오므리가 사마리아 산을 사 성읍을 건축한 후 그곳을 북왕국의 수도로 결정하면서 새로 정한 명칭인 것입니다(16:24).
*16:24 “그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 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읍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읍 이름을 그 산 주인이었던 세멜의 이름을 따라 사마리아라 일컬었더라”
따라서 이는 벧엘의 늙은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 정확한 말로 보기 어려우며,
후대 기록자가 자기당대의 용어를 구사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즉 본절에서 열왕기 기자는 벧엘 선지자의 말을 그대로 언급하지 않고,
다만 그 말의 의도를 충분히 살려 기록 당시의 언어로 표현하였다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사마리아는 오므리 왕 이후로 북이스라엘의 수도였으므로 사마리아에 대한 경고는 곧 북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경고와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 - 2절과 비교할 때,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은 본절에서 그 대상 범위가 좀 더 넓게 잡혀있습니다.
이러한 증폭은 후대의 상황이 반영, 첨가된 것입니다.
즉 2절은 막연하게 어떠한 산당을 말하고 있으나
본절은 '사마리아 성읍들의 모든 산당'으로 명료하게 그리고 더 광범위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자의적(自意的) 첨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비교적 후대의 상황이 적용된 기록임은 분명합니다.
3. 여로보암의 죄(33~34절)
1)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의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였습니다(33절).
“[33]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의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일반 백성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았으므로”
이 일 후에도 그의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 본장에서 '하나님의 사람 이야기'는 결국 본장 전체의 구도상 여로보암의 완악함을 가일층 강조하는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즉 그렇게 엄중한 경고를 받고도 여로보암은 타락과 배교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한편 분열 왕국 시대의 첫부분에 해당하는 본장이 이처럼 여로보암의 완악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즉 분열 왕국 시대의 남왕국 유다에는 그래도 비교적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들이 나타나곤 했습니다. ]
본서 서론 도표, '남왕국 유다의 열왕들' 참조.
그리고 이러한 왕들이 등장할 때마다 여호와 신앙은 주기적으로 부흥했습니다.
그러기에 열강의 틈새에서도 남왕국의 존속 연한은 북왕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길었습니다(북왕국 멸망은 B.C. 722년, 남왕국 멸망은 B.C. 568년).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결국 남북 왕국 각각의 신앙 상태와 결부됩니다.
즉 비록 전체적으로 쇠락해가는 진행 방향이긴 했어도,
남왕국의 역사는 간간(間間)이 부흥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동력의 배후에는 다윗이라는 이상적 군왕이 서 있었던 것입니다(11:9-13; 삼하 7:8-16).
하지만 이에 반해 북왕국의 왕들은 예외 없이 우상 숭배에 몰두함으로서
악한 왕이라는 평가를 모면치 못합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이야 말로 북왕국에 이러한 우상 숭배의 풍조를 뿌리내린 장본인입니다.
말하자면 후대의 왕들은 그가 조성한 토양에서 그의 선례를 본받아 우상숭배에 열중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대 사가(史家)들의 신앙적 관점에서 북왕국 우상 숭배의 원인균(原因菌)인 여로보암의 완악함이 주목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특히 본절의 '이 일 후에도...' 부분은 바로 그러한 초점이 모아진 곳입니다.
보통 백성. - 비단 레위 지파 출신 뿐 아니라 일반 모든 백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12:3 주석을 참조하라.
아론 자손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규례(출 28:1-4)를 무시한 여로보암의 이러한 정책은 북왕국 내에 진정한 여호와 종교가 발붙일 여유를 없애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신앙의 자유와 참 예배를 갈구하는 자들은 부득이 유다를 이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대하 11:13-17). 12:31 주석 참조.
2)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땅 위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됩니다(34절).
“[34]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땅 위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되니라”
이 일이...죄가 되어. - '이 일'이란 앞에서 언급된 여로보암의 모든 죄악된 행위를 총칭하는 것으로 간주해도 무방합니다. 즉 이는
(1) 금송아지 숭배(12:28,29)
(2)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음(12:31; 13:33)
(3) 자기 마음대로 절기를 정함(12:32,33)등을 의미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이 그러한 소행을 계속했다는
것이 본절에서 지적하는 요점입니다.
멸망하게 되니라. - '멸망하게 되니라'( 솨마드)는 '끝내다', '완전히 잡아 꺾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완전히 멸망되어 자취도 남지 않게 됨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훗날 여로보암 왕조는 2대로 그치고 멸절되고 맙니다.
즉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즉위 2년 만에 살해당하면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던 것입니다(15:25-30).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그도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20~32절).
벧엘의 선지자는 처음에는 하나님의 사람을 거짓말로 유혹해서 불순종과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지자에게 주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합니다.
거짓에서 돌아서서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고 심판의 예언이 실현될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전하는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어제의 실패는 어제의 일입니다.
오늘은 오늘의 하나님을 만나고, 어제와 다른 오늘이 되어야 합니다.
2) 그도 하나님의 사람입니다(26,29,30절).
유다에서 온 선지자는 결국 순종의 길에서 벗어났지만,
성경은 계속해서 그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호명합니다.
단 한 번의 잘못으로 불순종했지만, 반면교사처럼, 그는 슬프고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성취되고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 생명임을 가르칩니다.
선지자를 죽음에 내주면서까지 회개를 축구하시는 주님께 지금 돌이켜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삼상6:12)와 시체 곁을 지킨 사자(24절)처럼,
돌아보지도 말고 돌아가지도 말아야겠습니다.
*삼상6:12 “[10]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11] 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12]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13:24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그를 만나 물어 죽이매 그의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서 있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서 있더라”
3)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32절).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을 보고서야 벧엘을 심판한다는 예언이 실제로 실현될 것을 믿게 됩니다.
비록 전달자들의 약점과 잘못, 한계로 지연되고 흐려지기는 해도,
결국 말씀대로 되고 맙니다.
우리는 순조로운 출발에서 추락하고 만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거짓말로 함정에 빠트렸으나 다시 돌아온 늙은 선지자가 될 수도 있으며,
순종하여 시체를 먹지 말라는 금기를 어김없이 지킨 사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주의 일(뜻)에 어떤 모습으로 참여하고 있습니까?
4) 벧엘의 선지자는 돌아섰지만, 여로보암은 끝내 돌아서지 않습니다(33,34절).
선지자의 경고를 듣고 제단이 갈라지는 징조를 보았는데도,
아론의 후손이 아닌 자를 제사장으로 세우는 것을 계속합니다.
고의적인 반항이고 회개할 줄 모르는 고집입니다.
두려움이 많을수록 고집이 센 법입니다.
하지만 고집의 끝은 사망(멸망)입니다.
불순종의 고집을 꺾어 순종의 사람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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