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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에스라9장9~15절
제목 : 은혜를 범죄로 갚다
에스라는 베풀어주신 큰 은혜를 알기에 감히 용서해달라고 말하지 못하고 그저 주님께 벌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고백합니다.
1. 은혜를 불순종으로 갚은 백성(9~10절)
1) 에스라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봅니다(9절)
“[9]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1)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하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저려 두지 아니하였습니다.
노예가 되었사오나. – 이것은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사실을가리킵니다(8절).
원어상 여기의 '노예'는 앞 구절의 '종 노릇하는', 그리고 이어 나오는 '복역
하는'이라는 단어와 동일한 어근을 갖습니다.
버리지 아니하시고. - '버리지'(아자브)는 '용서하다', '돕다' 등의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끊다' 혹은 '떠나다'의 의미로서, 깊은 관계 중에 있던 어떤 상대를 배신하여 기존의 관계를 청산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8:22; 신28:20 ; 왕하 2:2; 대하 13:10).
(2)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하시고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셨습니다.
(3)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습니다.
여기의 '울'(가다르)은 '담벽'을 의미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본문의 '울'이 예루살렘 성벽을 가리킨다고 보고, 이 사실에 근거하여 에스라의 귀환이 느헤미야에 의해 주도된 성벽완공 이후에 이루어 졌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① 에스라가 팔레스틴에 왔을 때는 예루살렘 성벽이 훼파된 상태에 있었으며(느 1:3),
② 이 말이 만일 예루살렘 성벽을 가리킨다면 수식구인 '유다와 예루살렘에서'라는 표현이 매우 어색하며 또한
③ '울'이라는 단어는 포도원의 담장과 같은 것을 가리키며(시 80:12 ; 사 5:1-7) 대개 '성벽'은 '호마'라는 말로 표현된다는 점 등에서 볼 때, 문자적 의미의 예루살렘 성벽을 뜻하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의 '울'은 영적 의미의 '하나님의 보호'를 가리킨다고 봄이 무난합니다.
2)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의 계명을 저버렸다고 합니다10절).
“[10]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이렇게 하신 후에도. - '이렇게 하신'은 하나님께서, 범죄하여 회복되기 곤란한 상태에 빠졌던(7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다시 허락하사 팔레스틴으로 귀환하게 하신 사실(8, 9절)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에스라는 먼저 이스라엘이 반복적인 범죄로 인해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자격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여기서 에스라는 이방 민족들과의 통혼을 율법 규정을 어긴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는 가나안 족속과의 통혼을 금지하는 신명기의 율법 규정(7:1~4)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 약속의 땅에서 주신 명령(11~12절)
1) 에스라는 이방 족속과의 통혼 문제를 구체적으로 지적합니다(11절)
“[11] 전에 주께서 주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얻으려 하는 땅은 더러운 땅이니 이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그 더러움으로 채웠음이라”
본절의 초두에 관계대명사 역할을 하는 '아쉐르'가 있음을 볼 때, 본절은 10절의 '주의 계명'을 수식하는 구절로 봐야 합니다.
주께서 주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 '선지자들'은 모세 오경을 기록한 모세를 포함하여(신 18:15 ; 34:10 ; 호 12:10) 이스라엘 전 역사 기간 동안에 활동했던 모든 선지자들을 가리킴이 분명합니다.
이 같은 견해는, 이어지는 내용이 여러 선지자들에 대해 예언되었던 것들을 혼합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타당성이 입증될 수 있습니다.
한편 여기서 '주께서'는 문자적으로 '당신께서'입니다.
가서 얻으려 하는 땅은 더러운 땅이니. – 이것은 레 18:25 ; 20:22 ; 신 4:5 ; 애1:17에 있는 말씀의 종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얻으려'(레리쉐타)는 '소유하다' 혹은 '빼앗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 '야라쉬'의 부정사로서, 본 단어 앞의 '가서'의 목적을 보여줍니다.
한편 '더러운'(니다)은 구약성경에서 월경을 하는 여인과의 접촉(레 12:2) 혹은 성적 타락(레 20:21) 등으로 인한 의식적(儀式的) 부정(不淨)의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된 단어로서 여기서는 우상 숭배 및 그것과 관련된 부도덕한 행위들을 뜻합니다(대하 29:5 ; 애 1:17 ; 겔 7:20 ; 36:17).
결국 이것은 그 땅의 백성과 접촉하는 일은 자신을 부정하게 만드는 일이며, 따라서 그들과의 접촉은 금해야 함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이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 이것은 신 18:9 ; 왕하 16:3 ;21:2 ; 대하 28:3 ; 33:2 등의 말씀이 종합된 것으로서 그 '땅'이 왜 '더러운 땅'인지 그 이유를 말해줍니다.
한편, 본절에서 원용된 사항들이 대체로 신명기서의 내용이라는 점은, 에스라가 신명기서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시사합니다(Fensham).
그리고 여기서 '이방 백성들'은 가나안 원주민을 가리키며(1절), '가증한 일을 행하여'(베토아보테이헴)는 '혐오하다' 혹은 '몸서리치도록 싫어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타아브'에서 파생된 명사와 방법을 나타내는 전치사(베)가 합해져서 이루어진 단어입니다.
에스라는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하여 이방 민족과의 통혼 때문에 임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합니다.
2) 구체적인 죄에 대한 지적에 이어 미래를 위한 귀환민들의 결단을 촉구합니다(12절).
“[12] 그런즉 너희 여자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그들의 딸들을 너희 아들들을 위하여 데려오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평화와 행복을 영원히 구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왕성하여 그 땅의 아름다운 것을 먹으며 그 땅을 자손에게 물려 주어 영원한 유산으로 물려 주게 되리라 하셨나이다”
본절 또한 11절과 같이 10절의 '주의 계명'을 수식합니다.
여자들을...주지 말고 저희 딸을...데려오지 말며. – 본절은 신 7:3에서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여자를 데리고 오는 것에 대해서만 대부분 말하는데(2절 ; 창
6:2 ; 26:34 ; 출 34:16 ; 삿 3:6) 반하여, 여기서는 그 반대의 경우에 대해서도 유일하게 언급하고 있음이 독특합니다.
그러나 이는 오직 에스라 시대에만 딸들을 이방인들에게 시집보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방인의 딸들을 데려온 시대에는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의 딸을 이방인들에게 시집보내는 일도 수반되었을 것입니다.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했던 일차적 목적이 우상 숭배는 물론 그것과 관련된 타락한 이방 악습의 유입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신약에서도 불신자와의 결혼은 배격되고 있습니다(고전 7:39 ; 고후 6:14).
그들을 위하여 평화와 행복을 영원히 구하지 말라. – 이것은 신 23:6에서 모세가 모압과 암몬 족속에 대해서 언급했던 명령입니다.
이처럼 '모압과 암몬'에 해당되는 특별한 명령인데도 여기서 이방인 전체 민족에 대해서 적용되고 있는 까닭은
(1) '모압과 암몬' 이외의 다른 민족들도 또한 하나님의 백성과 교제를 가질 만큼의 윤리적 수준을 전혀 갖고 있지 못했으며(사 19:1-20:6 ; 23:1-18 ; 렘 46:1-28; 47:1-7 ; 48:1-47 ;49:1-22),
(2) 실제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암몬 및 모압 족속과도 통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평강'의 문자적 의미는 '그들의 평화'로서 개인적 '건강', '마음의 평화' 및 정치적 '안정'을 주로 가리킵니다(왕상 4:25).
그리고 '형통'은 문자 적으로 '그들의 선'을 뜻하며, 보다 내적인 의미에서의 '행복'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본 문구는 '그들의 평화와 행복을 바라지 말라'라고 번역될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과 평화와 행복을 공
유하지 말아야 할 것, 즉 그들과 교제하지 말아야 할 것을 뜻합니다(Ridderbos, 출23:32 ; 34:12).
3. 멸망 받아 마땅한 죄(13~15절)
1)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악한 행실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남겨 주셨다고 고백합니다(13절)
“[13] 우리의 악한 행실과 큰 죄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당하였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 죄악보다 형벌을 가볍게 하시고 이만큼 백성을 남겨 주셨사오니”
죄악보다 형벌을 가볍게 하시고. – 하나님께서 엄격히 공의대로 하셨다면 이스라엘백성들은 완전히 멸망될 수밖에 없었으며 바벨론 포로 사건을 끝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 막을 내려버렸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자'가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형벌이 가벼웠음을 뜻합니다.
2) 만약 이 책임을 완수하지 못한다면, 또 다시 하나님의 진노가 모두에게 임하게 될 것을 경고합니다(14절).
“[14]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백성들과 통혼하오리이까 그리하면 주께서 어찌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진노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완전히 멸망하게 하지 않으시고 일부를 남겨주셨음에도(13절) 불구하고 또 다시 범죄 한 이상 이스라엘은 멸망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같은 에스라의 언급은 그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바라고 있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만 에스라는 백성의 대표 자격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철저히 자복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간절한 심정으로 죄의 용서를 구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 '거역하고'(파라르)는 원래 '파괴하다' 혹은 '깨뜨리다'의 뜻을 갖습니다.
이 단어가 구약 성경에서 53회 사용되는 중 23회는 직접 목적어로 '언약'이라는 단어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단어의 성격을 보다 극명하게 드러내줍니다.
즉, 이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는 곧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는 행위임을 분명히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레 26:15 ;겔 17:18 ; 슥11:10).
에스라는 ‘남아 피할 자’인 귀환 공동체가 그 땅의 이방 민족들과 통혼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율법에 근거해서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들은 가증한 백성으로 그들과 통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명령)을 거역하는 일입니다(신7:1~5절).
하나님의 은혜는 이스라엘에게 그에 따른 반응(책임)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3)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공동체를 맡깁니다(15절)
“[1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말미암아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하니라”
에스라는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공동체의 문제를 맡깁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에스더는 먼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에스라의 찬양에서 정점을 이룹니다.
에스라의 고백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 할 수 있습니다.
첫째, 변론적인 의미입니다.
설령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다시 멸망시킨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개입에 대한 기대를 나타낸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때로 그의 백성을 향한 구원의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누가 설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라는 지금까지 보여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다시 한 번 자비를 내리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 절 말씀은 하나님이 이 백성을 다시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의 표현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택하심과 구원하심과 미래의 소망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날마다 찬양하였듯이 우리도 바다보다도 깊고 넓고 하늘보다도 높은 은혜를 받았음을 생각하면서 은혜를 범죄로 갚을 것이 아니라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구원하시고 회복하시고 살 터를 주시는 분입니다(9절).
옛적에 애굽의 노례였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하여 약속의 땅에 터를 잡게 하셨고, 이제는 바벨론에서 종살이하던 유다 백성을 해방하셔서 다시 고토로 데려와 성전과 울타리를 재건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짓기를 반복하는 백성을 끈질기게 징계하시고 또 회복하셨습니다.
우리 공동체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완전한 모습을 이루기까지 고치고 다듬어가실 것입니다.
2) 의로우신 재판관이자 자비를 베푸시는 아버지입니다(13,15절).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고 반드시 책임을 물으십니다.
그러나 완전히 넘어뜨리지 않으시고, 회복의 여지를 남기셔서, 돌이켜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반복해서 죄를 짓기에 차마 용서를 구할 염치가 없어 그저 죽여달라고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은 용서할 채비를 갖추고 계십니다.
측량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며 헤아려봅시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 백성의 소명은 가증한 일로 가득 찬 더러운 땅을 거룩한 땅으로 기경하는 일입니다(11,12절).
따라서 이방 민족과 타협하거나 그들의 풍습에 동화되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켜 행해야 했습미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전에도 실패했고, 지금 다시 이방 여인과 통혼함으로 조상의 불순종했던 전철을 밟습니다.
우리도 세상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할 하늘 백성임을 잊지 맙시다.
혹시 나는 세상 속에서 세상 문화를 즐기는 일에 빠져 나의 신분과 내게 주신 사명을 잊고 살지는 않습니까?
2) 에스라는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진멸당해 마땅하다고 인정합니다(13~15절).
주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범죄의 기회로 악용했으니, 도무지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읍소합니다.
나는 주님의 용하시는 은혜를 너무 자주, 너무 쉽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죄의 심각성을 이니식하지 못하고, 죄짓는 일에 익숙해지지는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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