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이 장님을 이끄는 시대 / 전문성의 소중함을 절감했던 순간!
철학과 미네르바의 축제가 있었다. 해마다 돌아오는 철학과 학생들의 축제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축제 동안에 <학생들의 연극>은 꼭 함께 참여하여 보곤 했다. 지난해까지 철학과 <연극부>에 총 책임을 맡고 있었던 학생은 고등학교때 <전국 고교 연극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던 적이 있었던 매우 전문성을 가진 학생이었고, 그래서 인지 학생들의 연극이었지만 스토리 구성, 배우들의 캐릭트 소화, 전달하는 메시지 등 무엇하나 어설픈 것이 없었다. 비록 전문 연극인에는 미치지 못해도 재미도 있고, 몰입감도 있었고, 또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도 뚜렷하였다. 올해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내심 기대하며, 연극을 보러 갔다. 그런데 내가 한 가지 잊은 것이 있었다. 그 연극하는 철학과 학생이 올해 초에 졸업을 하였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는 참으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극은 총 시간이 2시간 가량 되었지만, 40분 정도 보다가 도저히 계속볼 수 없어서 나오고 말았다. 여과 없이 있는 그대로, 느낀 그대로 말하면 <총체적인 난국의 연극>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연극이었다.
① 첫째, 연극의 주제가 없었다. 제목이 무엇인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40분 동안 아무리 집중을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문제제기 자체가 없었다. 마치 개그 콘스트처럼 간간히 ‘웃음’을 선사하는 익살스럽거나 약간은 저속한 농담 등이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② 둘째, 연극의 내용이 비록 풍자적인 것이라고 해도 최소한의 고증이 있어야 할 것인데, 전혀 엉뚱한 역사적 설정을 하고 있었다. 연극에서 배경은 희랍초기의 철학자 그룹이 철학공부를 하는 것을 풍자하고 있었다. <아테네 학당>이 있었고 학당에 다수의 학생들이 있었다. 그리고 비주류 학생 그룹 중에 소크라테스를 위시한 학생들이 있었는데, “밀레투스 학파”라고 불렀다. 플라톤은 그 그룹에 들어가기 위해 애를 썼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플라톤과 선후배 관계가 되었다. 전혀 역사적인 고증을 무시한 설정이다. 밀레투스 학파(BC 635~BC590)는 희랍에서 최초의 철학자들의 그룹이었으며, 따라서 밀레투스 학파가 활동할 시기 철학자들은 오직 그들 뿐이었다. 다른 학교나 학당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소크라테스(BC470~BC399)는 200이상 이후에 등장한 철학자였다. 그리고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수제자였지 선후배의 관계가 아니었다. 아마도 전혀 역사적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 그림을 보고 막연하게 상상으로 이야기를 지어내었던 듯 하다. 철학과 학생들이 이렇게 철학자들에 대해 무지하여도 되는 것인지... <고중세철학> 수업시간에는 정신을 어디가 두고 있었던 것인지?
⓷ 셋째, 게다가 소크라테스를 위시한 그룹들의 성격에 대한 묘사가 과관이었다. 소크라테스를 위시한 밀레투스 학파를 마치 무슨 ‘조폭그룹’처럼 “형님~”이라고 부르는 건달처럼 묘사하고, 결정적으로 그들이 학교 뒤편에서 ‘아편’이나 하고 있는 불량학생으로 묘사하였다. 아무리 웃자고 하는 일이지만, 이는 선을 넘은 것이었다. 이는 마치 사학과 학생들이 ‘유관순 열사’나 ‘윤봉길 의사’를 마약을 하고 군기나 잡는 ‘양아치들’로 묘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러한 것을 철학과 학생들이 시나리오라고 만들었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학생들이 웃자고 한 것인데" 라고 변명 할 수 있을까? 만일 사학과 학생들이 독립투사 그룹을 그렇게 양아치들처럼 묘사했다면 학생들이 가만히 있을까? 네이버 사전에는 소크라테스가 예수 부처 공자와 함께 세계 4대 성인으로 나온다. 왜 일반인들이 성인이라고 존경을 표하는 철학자를 철학과 학생들이 일진 양아치처럼 묘사하는 것인지? 윤리학, 형이상학, 예술철학, 환경철학, 사회정의, 실존주의 등을 말하기 이전에 상식적인 삶을 먼저 익혀야 할 듯!
아테네 학당의 철학자들을 설명하는 한 블로그의 설명의 한 구정을 보면 아래와 같다.
이런 철학자들을 어떻게 양아치처럼 묘사하는지 그 두뇌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④ 넷째, 너무 불성실한 준비에 있었다. 연극의 연습을 거의 하지 않은 듯, 캐릭트들의 개성이 전혀 살아나지 않았다. 최소한 40분 동안 주인공 격인 사람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었다. 연기를 잘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배우가 맡고 있는 역을 잘 소화한다는 것에 있다. 예를 들어 ‘강력반’ 역을 맡고 있는 사람이라면, 분위기나 말투 행동양식에서 즉각 강력계형사가 느껴져야 하고, 시장 상인역을 맡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연기하는 것이 마치 진짜 시장상인을 불러온 것처럼 느껴져야 한다. 그래서 연기자들은 자신이 맡은 역사 속의 인물을 소화하기 위해 그 인물의 전기를 몇 번씩 반복하여 잃곤 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확연하게 구분되는 개성과 인격을 가진 사람이다. 소크라테스는 왜소한 외모를 가졌지만 열정적이고 강인한 정신, 타협을 모르는 대쪽 같은 사람이며, 말과 언행이 일치하였던 실천가의 유형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테네의 양심이라고 불렸던 사람이었다. 반면 플라톤은 거구의 몸을 가졌지만 매우 유순하고 지적인 사람이었고, 행동가의 모습 보다는 명상적이고 학자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삶의로서의 철학을 강조했던 스승 소크라테스와 달리, 삶 대신 이론을 정립하여 철학을 ‘학문’으로 바꾼 사람이었다. 이렇게 카리스마가 분명한데도 연극에서는 소크라테스는 친절하고 교양넘치는 조용한 사람처럼, 플라톤은 왜소하지만 깡이 있는 ‘앗사’처럼 묘사하였다. 한 마디로 그냥 대충 개그를 통해 웃음을 선사하고자 했지만, 너무나 어색하고 고증에 어긋나는 연극이라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중학교 학생들도 이보다는 좋은 연극을 만들지 않을까 생각하니 쓴 웃음이 났다.
⑤ 다섯째, 철학자들의 삶이 주제가 되기 위해서는 당시 철학자들이 무엇을 추구하였는지 그 핵심이 드러나야 한다. 웃음은 진실성이 있고 그 다음에 와야 한다. 웃기기 위해서 거짓을 지어낼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의 핵심은 당시 유창한 말솜씨로 변호사역을 자처했던 ‘괴변론자들’에 맞서 ‘진리’를 수호하고자 했던 사람이다. 토론을 하여 승리하는 것이 괴변론자들의 목적이었다면, 소크라테스는 양심에 떳떳하고 올바른 삶을 살고자 했고, 그것을 증거하고자 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고참선배로 있는 ‘밀레투스 학파’를 오직 ‘토론기술’을 배우고 토론에서 승리하는 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처럼 묘사했다. 아무리 연극이라지만 왜 너무나 분명한 ‘팩트’를 이렇게 이상하게 왜곡하는 것인지? 학교 연극에서 이렇게 한다면 후일 사회에 나가서는 어떨까?
이상의 내용들이 내가 <총체적 난국의 연극>이라고 느낄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전문성을 가졌던 한 학생이 떠나자, 모든 것이 바닥에서 시작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만 "전문가가 아니다"는 핑계가 이 결과에 대한 명분이나 합리화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삶에 대한 열정의 부족, 너무나 가볍게 무감각하게 대충 살아가는 것의 결과는 아닐까? 그 연극을 보러오는 학생 중에는 타과 학생들도 많았다. 왜 스스로 철학자들이란 쓸모 없는 인간처럼 보이도록 하는 것일까? 철학과가 없으면 안된다고 목청높여 소리치던 그 열정은 어디가고 스스로 자기 얼굴에 침을 뱃고자 하는 것인지? 왜 이런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인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누구도 자리를 떠나는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개그가 나올 때 마다 킥킥 거리고 웃고 있는 학생들에게도 약간은 화가 났다. 내가 너무 민감한 것인가? 선무당이 사람잡는다는 말이, 장님이 장님을 인도한다는 말이 이런 경우에 쓰는 말이 아닐까?
물론 내가 마지막까지 연극을 보았다면, 다른 반전이나 예상치 못한 결말을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연극이나 영화도 40분동안 실망만 안겨주는 작품을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