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왕국은 너희 안에 있다 (루카복음 17장 21절)
자~, 됐습니다. 다시 인과로 돌아가서 주된 장애물인 그것을 제거하려 해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카르마에 대한 자각을 방해하며 신의 현존에 대한 자각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의식 연구의 목적은 내재하는 신의 현존(the presence of God within)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외재하는 신의 현존(the presence of God without)에 관심을 둡니다. [종교에서] 신은 초월적이며 다른 시공간에 존재합니다. 심지어 기독교조차도... “당신이 착한 삶을 살았다면, 천국에 갈 것이오.” [기독교에서는] 천국이 신이 있는 곳입니다. 신은 천국에 있습니다. 예수가 신은 내재한다고 말함으로써 이러한 것에 반박하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예수가 정말로 그러한 말을 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할 일입니다. 신은 내재적이며 동시에 초월적입니다. 모든 것에 가득한 것은 결코 당신의 주변까지 왔다가 거기서 멈춰버릴 수 없습니다. 단순이 논리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만일 신이 우주의 모든 곳에 있다면, 생명의 근원인 신은 명백히 당신의 내면에 있습니다. ‘어떻게 당신이 이러한 것에 대한 앎과, 신의 현존에 대한 의식적 자각에 이를 것인가.’가 이러한 강연들의 목적이며 영적 연구의 목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인과라는 장애로 돌아가 보지요. 인과는 계속해서 ‘이것과 저것이 있다.’라는 이원적인 지각을 강화시킵니다. 인과는 분리를 가정합니다. 이원성의 세계라는 에고의 세계에서는 ‘당신은 여기에 있고 신은 저기에 있다.’는 것이 그럴 듯합니다. 하하하하. 모든 종교가, 모든 설교가, 모든 일요일 아침이 ‘당신은 여기에 있고 신은 저기에 있다.’라는 사실에 대한 것입니다. 하하하하. 그러니, 당신이 착한 남자였거나 착한 여자였다면 가게 될 천국에 이르기 전까지, 창세기 1장 이후에 사라져버린 신을 다시 만날 수 없다면, 당신이 어떻게 신을 경험하겠습니까? 하하하하. 오~신이시여. [청중의 웃음: 하하하하.] 그러므로 전통적으로 (어떠한 이유로 인하여) 깨달은 자, 깨달음에 도달한 이는 신비가라고 불리어 왔습니다. 신비가는 신을 모든 것에 가득한 ‘직접적인 현존’으로서 그리고 참나의 근원과 자신의 생명의 근원으로서 경험한 사람입니다. [신은 지금 보시고 계신] 이러한 말함(the speakingness)과 영감(inspiration)이며 그것으로부터 목소리를 통해 이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적인 에고는 1965년 1월 10일에 소멸했기 때문입니다. 에고는 다시 살아난 적이 없습니다. 말함은 스스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에 의해서도 초래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말함에는 아무런 원인도 없습니다. 아무런 원인도 없습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신은 ‘있는 그것(that which is)'이 펼쳐짐에 따라 ’나타난 것(manifestness)'입니다. 여기 이 말함에는 아무런 원인도 없습니다. 말함은 스스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신의 현존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이러한 말함이 말하도록 초래하고 있지 않습니다. 일어나는 모든 것의 유일한 원인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진화하고 있는 신의 현존의 진화입니다. 저것을 초래하는 이것은 없습니다. 그러한 것은 지각의 인공적 산물입니다. 움직임과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요? 신의 본성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지요. 왜냐하면 어떤 목적지로의 힘겨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자신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에 대해 아는 것이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하하하하.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말입니다. 구약성서의 신은 말하자면 가혹하고 정신이상이고 괴상하며 아주 자의적입니다. 당신은 그러한 식으로 살고 생각하는 사람을 당신의 영성 수업에 받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대갚아 줄 것이고, 이러이러한 사람들은 버려 버리고 없애버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아끼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당신은, “이러한 존재가 구루일까?‘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이러한 신은 심지어 구루조차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가 새로운 소식을 가지고 그것을 반기지 않는 곳에 왔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진리를 드러낸 것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David Hawkins - Jan 2002 - Casuality,
The Ego_s Foundation
○ David Hawkins
첫댓글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카톨릭 성경 루카 1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