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서 배척당하시는 예수님
마가복음 6장 3-6절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에스칸달리존토 엔 아우토)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육의 눈으로 바라보면 배척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영의 눈으로 바라보면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알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나님 아들을 영접하게 된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신 자(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는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갑자기 반기를 든 것이다. 즉 죽으시면 안된다는 말이다. 마태복음 16장 21-23절에서『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베드로와 같은 경우가 사도행전 21장 10-14절의 내용이다.『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성령을 통하여 바울이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는 말을 들은 많은 제자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도록 권했다. 바울은 이미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로서, 자기 목숨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로서 사명을 다 하려 했는데,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한 제자들은 바울의 죽음을 걱정하여 말리는 것이다. 즉 그들은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어떤 경우라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제자들은 또한 이를 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요한복음 6장 29-30절에서도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무엇을 믿으라는 것인가? 6장 38-40절에서『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데오론) 믿는(피스튜온 에이스 아우톤)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마지막 날은 모든 사람에게 종말을 의미하나, 아들 속으로 들어가는 자에게는 육적 죽음을 의미한다. 즉 로마서 6장 4-5절에서『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아들 속으로 들어가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in christ)에서 믿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자와 연합되는 믿음인 것이다.
예수를 배척하다 라는 헬라어 “에스칸달리존토 엔 아우토” 는 장애물에 걸려넘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장애물에 걸려 넘어져 그 분(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는 말이다. 장애물은 육적 눈이다.그들이 예수님의 육적인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이 자신을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겼다. 여기서 『이상히 여기셨다』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을 보면 『에다우마젠』이라는 단어인데, 마가복음 5장 20절에서 군대 귀신 들렸던 자가 예수님을 통해서 고침을 받은 후에 데가볼리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큰 일을 전하였을 때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겼다』라고 했는데, 그때 쓰인 단어와 동일하다. 데가볼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놀라운 능력의 역사를 체험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큰 일로 인해 기이히 여길 뿐,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께 데가볼리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였다. 데가볼리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큰 일로 인해 기이히 여겼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사렛 사람들의 완고한 불신을 이상히 여기셨다.
이 사건은 제자들에게 분명히 중요한 교훈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 자신들도 앞으로 직접 전도 사역을 감당할 때에 이런 배척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두 번째로 고향 나사렛을 떠나셨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을 떠나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가르치셨다. 나사렛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촌을 돌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배척 받으신 후에 고향 나사렛 주변의 모든 마을을 돌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부르사 둘씩 둘씩 전도 여행을 보내셨다. 이러한 내용들은 앞으로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드릴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