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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일반지도법(一反至道法)
7. 권위를 딛고 서라 - 독창성을 추구하는 창의적 지식경영
1) 일반지도법(一反至道法) : 발상을 뒤집어서 깨달음에 도달하라
선배 가운데 율곡 이이 같은 분은 어버이의 사랑을 받지 못해 여러 해 동안 괴로워했다.
하지만 마침내 한번 돌이켜 도에 이르렀다. 또한 우리 우담(愚潭) 선생께서도 세상에서 물리친 바가 되었으나 그 덕이
더욱 발전하였다. 성호 이익 선생은 집안에 화를 당하고 나서 이름난 선비가 되었다.
모두들 우뚝하게 수립하여 벼슬길에 있는 고관의 자제들이 능히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너는 또한 일찌기 이를 들어 보았느냐? -〈두 아들에게 부침[寄兩兒]〉 9-
일반지도(一反至道)는 한차례 생각을 돌이켜 깨달음에 이른다는 말이다.
자극 없이 똑같은 일상 속에서 창의적 역량은 발휘되지 않는다. 늘 하던 대로만 해서는 새로운 성취를 이룰 수가 없다.
생각을 바꾸고 방법을 바꾸면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환하게 드러난다. 평범한 것에서 비범한 의미를 이끌어내고,
늘 보던 것에서 처음 보는 것을 끄집어낸다. 역경과 위기에 쉽게 침몰하는 대신 이를 기회로 돌릴 줄 알아야 한다.
다산의 논설문에서는 의표를 찌르는 발상으로 펼친 글과 자주 만날 수 있다. 누구나 뻔히 하는 생각을 뒤집어 역발상의
착상으로 펼치는 주장은 참신하면서도 강렬한 호소력을 갖는다. 여기서는 다산의 이러한 글쓰기에 대해 살펴보겠다.
누에치는 집에는 여러 가지 잠박이 있다. 큰 것은 폭이 넓어 잠실 끝에 닿고, 작은 것은 잠실의 4분의 1밖에 안 된다.
혹 잠실을 우물 정(井)자로 9등분을 해서 잠박이 그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기도 한다. 그래도 누에는 상자에서 편안해
하며 그 남은 공간을 넉넉해 한다.
지나다가 이를 본 사람이 큰 것을 보고는 몹시 부러워하고, 좁은 상자에서 편안해 하는 것을 보면 크게 한바탕 웃곤 한다.
하지만 어진 부인네가 이들이들한 뽕잎을 따다가 법대로 이를 먹여 세 잠을 재우고 세 번 깨어나게 해서 다 자라면 실을
토해 고치를 만든다. 이 고치를 켜서 실을 만든다. 작은 잠박의 누에라도 큰 잠박의 누에와 다를 것이 없다.
-〈사촌서실기(沙村書室記)〉6-98
사촌서실은 둘째 형 정약전이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을 때 그곳 섬 아이들을 가르치던 초가집 서당의 이름이다.
형님의 서당을 위한 기문을 쓰면서 다산은 뜬금없이 누에치는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았다.
여기에 이어지는 글은 대뜸 “세계는 모두 잠박이다.”로 시작된다. 다산이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렇다.
흑산도는 뭍과는 동떨어진 작은 섬이다. 잠박으로 치면 9등분한 잠실의 한 칸을 차지하기도 힘든 조그만 잠박이다.
형님은 그 조그만 잠박에다 누에를 기른다. 지나던 사람들은 이를 보고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여기서 무얼 가르치겠느
냐며 비웃겠지만, 훌륭한 스승이 단계에 따라 훈도하고 자양 있는 말씀으로 이끌면 이들 또한 서울의 훌륭한 스승 밑
에서 자란 학생들만 못지않은 쓸모 있는 인재가 될 것이다.
동쪽에서 소리치다가 서쪽을 치는 성동격서(聲東擊西)격으로 앞에서 뚱딴지 같은 말을 잔뜩 늘어놓아 독자의 궁금증을
증폭 시켜 놓고, 느닷없이 본질로 찔러 들어가는 수법이다.
다산은 기문에서 주로 이런 방식의 글쓰기를 즐겨 썼다. 상식의 허를 찌르는 의외의 도입으로 독자를 흡인하는 것이다.
얼굴은 벌겋고 머리는 젖어서 토악질하고 욕을 퍼부으면서 비척비척 거리를 지나는 자는 술 취한 사람이다.
그에게 손가락질 하며 취했다고 하면 분이 나서 크게 성내며, 자기는 취하지 않았다고 떠들지 않는 이가 없다.
눈을 감고 코를 골다가 이따금 크게 웃고 잠꼬대를 하는 자는 꿈에서 좋은 벼슬자리를 얻었거나 혹 주옥과 금전 같은
갖고 싶은 물건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잠을 깨기 전에는 그것이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찌 다만 술 취하고 꿈꾸는 것에만 이러함이 있겠는가?
병이 위독한 사람은 정작 자기가 병든 줄을 알지 못한다. 자기 입으로 병들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병이 그다지 심한
것이 아니다. 미친 사람은 자기가 미친 것을 알지 못하니, 스스로 미쳤다고 말하는 자는 가짜로 미친 것이다.
사특하고 음란하며 놀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이 나쁜 줄을 알지 못한다.
그것이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그 나쁜 점을 혹 고칠 수가 있다. -〈취몽재기(醉夢齋記)〉6-103
황군이 찾아와 다산에게 말했다. “취생몽사(醉生夢死), 취해 살다가 꿈속에 죽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제 집을 ‘취몽재’라 지었습니다. 기문을 지어 주십시오.” 다산의 기질에 이런 한심한 집 이름이 마뜩할 까닭이
없다. 무어라 한 소리를 해주고 싶은데, 대놓고 나무랄 수는 없고 해서 차라리 취몽(醉夢)에 대한 의미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자고 쓴 허두이다.
정말 취한 사람, 진짜 잠든 사람, 완전히 미친 사람은 취한 것도 잠든 줄도 미친 사실도 알지 못한다.
가짜로 미치고 짐짓 취한 체 하는 사람이 자기 입으로 미쳤다고 하고 취했다고 하는 법이다. 이런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그래도 아직은 개선의 가능성이 있다. 이쯤 해놓고 나서 본격적인 꾸짖음이 나올 법 하다.
그러나 다산은 여기서 앞서의 논리를 한번 더 비튼다. 이어지는 대목이다.
굴원은 취한 사람이다. 성을 내어 곧은 말을 하면 반드시 몸을 망치고, 능력을 닦아도 마침내 재앙을 부를 뿐이라는
사실을 그는 몰랐다. 비록 취한 바는 달라도 거나하게 크게 취한 사람이다.
때문에 분을 내어 크게 통탄하며 스스로 취하지 않았음을 변명하여 ‘나 홀로 술이 깼다’고 말했던 것이다.
장자는 이미 깬 사람이다. 능히 오래 사는 것과 요절하는 것을 같게 보았으니, 이는 환하게 깨달은 자이다.
그래서 ‘꿈꾸는 중에 또 꿈을 꾼다’고 했다. 그럴진대 스스로 돌이켜 본 것을 살펴 ‘또렷하다’고 하고 ‘깨었다’고 하며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모두 술에 절고 깊이 잠들었다는 증거일 뿐이다.
능히 스스로 취몽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혹 맨 정신으로 깨달을 기미가 있는 자인 셈이다.
-위 같은 글
다산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이 다 취했는데 나 혼자 맨 정신이어서 쫓겨났다고 임금을 원망하며 강가를 방황하던 굴원
은 정작 술 취한 사람이다. 꿈속에 꿈을 꾸다 가는 것이 인생이라며 호접몽의 이야기를 펼쳤던 장자는 정작 잠에서 깬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앞선 논리에 따르면 술 취한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취했다고 인정하는 법이 없고, 잠꼬대 하는 사람은 깨기 전에는
그것이 꿈인 줄 모르기 때문이다. 이제 황군은 제 스스로 취해서 꿈꾼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가 진짜로 취하고 꿈꾸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오히려 장자처럼 깨어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가 취몽재 안에서 술에 절어 잠에 취하는 대신 오히려 술에서 깨고 잠에서 깰 것을 기대한다.
역설에 역설을 더해 종횡으로 묘한 수사의 피륙을 짰다. 요컨대 다산은 이 아까운 인생을 취생몽사 속에 지나보낸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고 되묻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의 기분을 끝내 무안하게 하지 않으면서, 취와 몽의 의미를 비틀어서
취몽재의 집 이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다음은 귀양지의 다산을 이따금 찾아와 마음에 위로가 되던 이중협(李重協)이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갈 때 작별을
아쉬워하며 써준 글이다.
즐거움은 괴로움에서 나온다. 그러니 괴로움이란 즐거움의 뿌리다. 괴로움은 즐거움에서 나온다. 따라서 즐거움이란
괴로움의 씨앗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를 낳는 것은 동정(動靜)이나 음양(陰陽)이 서로 뿌리가 되는 것과 같다.
통달한 사람은 그러한 까닭을 아는 지라 깃들어 숨어있는 것을 살피고 성하고 쇠하는 이치를 헤아려 내 마음이 상황에
응하는 것을 항상 뭇사람들이 하는 것과 반대로 한다. 그런 까닭에 두 가지가 그 취향을 나누고 그 기세를 죽이게 된다.
이는 마치 경수창(耿壽昌)의 상평법(常平法)이 값이 싸면 비싸게 사들이고, 비싸면 싸게 팔아서 언제나 값이 일정하게
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것이 괴로움과 즐거움에 대처하는 방법이다.
-〈우후 이중협을 증별하는 시첩의 서문[贈別李虞侯詩帖序]〉6-35
글이 절반에 이르도록 이별의 이야기는 한 마디도 비치지 않는다. 다만 즐거움에서 괴로움이 나오고 괴로움에서 즐거
움이 비롯되니, 괴롭다고 괴로워 할 것 없고, 즐겁다고 즐거워하지만 말라는 이야기를 되풀이 했다. 곡물의 가격을
고르게 하는 상평법에 견주어, 괴로움과 즐거움의 평균치를 유지하는 것이야 말로 지혜로운 사람의 처신이라고 했다.
다산이 정작 하고픈 말은 이런 것이다. 이따금 귀양지의 외로운 나를 찾아와 위로를 주던 그대가 문득 서울로 떠난다고
하니 말할 수 없이 슬프네. 하지만 나는 이 슬픔을 훗날 내가 고향으로 돌아가 그대와 더불어 산나물 생선회로 술을 한잔
나눌 때의 기쁨을 위한 씨앗으로 삼겠네. 그렇지 않고 우리가 늘상 이렇게 만나, 만남의 고맙고 단 것을 못 느끼게 되고
오히려 서로에게 싫증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다시 괴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오늘 나는 말할 수 없이 슬프지만 슬픔을
눌러 오히려 즐거워 하려하네. 부디 건강하시게.
이런 문예적 글쓰기 외에 학술적 토론에서도 다산의 일반지도(一反至道)의 논법은 자못 통렬하고 통쾌하다.
명철보신(明哲保身)이란 네 글자는 오늘날 세상을 썩게 하는 으뜸가는 부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시경》의 해석에 잘못이 있는 줄 분명히 아는지라 매번 글자의 뜻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곤 했지만 이 같은 주장을 펼
데가 없었습니다. 이제 보내주신 글월을 읽으니 신기(神氣)가 솟구쳐서 침을 맞은 것처럼 합치되어 제 생각과 꼭 같습
니다. 선악을 분별하는 것을 ‘명(明)’이라 하고, 시비를 판별하는 것을 ‘철(哲)’이라 합니다. 또 어리고 약한 것을 붙들어
잡아 주는 것을 ‘보(保)’라고 하지요. ‘보(保)’란 ‘보(呆)’이니 곁에서 부축하여 지켜준다는 말입니다.
대신의 의리는 사람을 가지고 임금을 섬기는 까닭에 선악을 밝게 판단하여 어진 인사를 등용하고, 시비를 밝게 구별하여
뛰어난 인재를 발탁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어진 인사와 뛰어난 인재가 내 몸을 붙들고, 내 몸을 붙들어서 한 사람 임금
을 섬기는 것, 이것이 대신의 직분입니다.
하지만 지금 세속에서는 이 시를 두고, 이해를 판별하는 것을 ‘명(明)’이라 하고,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아는 것을 ‘철(哲)’
이라 하며, 몸뚱이를 온전히 하여 화를 면하는 것을 ‘보(保)’라고 풀이합니다. 정현의 주석이나 주자의 풀이에는 이 같은
해석이 없는데, 모든 사람들이 한 입으로 부화뇌동하여 깨뜨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으로 제 한 몸을 온전히 하고 한 집안을 보전하는 것을 지극한 비결로 여깁니다. 이 뜻이 선 뒤로는 임금이 장차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김덕수에게 답함[答金德叟]〉 8-243
명철보신(明哲保身)이란 말은 본래 《시경》 〈대아․증민(蒸民)〉편에 나오는 말이다. “현명하고 밝아서 그 몸을 붙들어,
온 종일 쉬지 않고 한 임금을 섬기누나.[旣明且哲, 以保其身. 夙夜匪解, 以事一人]”라고 했다. 주나라 선왕(宣王) 때의
재상 중산보(仲山甫)의 덕망을 칭송한 내용이다.
이로 볼 때 명철보신이란 현명하게 처신해서 제 한 몸을 보존한다는 뜻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세상 사람들은 이 말을 난세에 재앙의 기미를 미리 알아 현명하게 물러나 제 한 몸과 제 집안을
지키는 것을 가리키는 뜻으로 쓴다. 어떻게 본래의 의미가 이렇게까지 전도될 수가 있단 말인가?
다산은 김매순에게 준 편지에서 명철보신의 본래 의미를 문맥에 따라 정확히 분석했다. ‘명(明)’ 즉 현명하다는 말은 이
일이 내게 이익이 될지 손해가 될지를 잘 판단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것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를 잘 판단한다는
뜻이다.
‘철(哲)’ 곧 밝다는 말은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한다는 뜻이지, 눈치를 잘 보아 손해 날 것 같으면 입 다물고, 이익이 될 것
같으면 말한다는 뜻이 아니다. ‘보(保)’ 또한 어리고 미숙한 인재를 발탁해서 내 부족한 점을 붙들어 세운다는 뜻이지
내 한 몸 온전히 보전한다는 의미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아전인수격으로 엉뚱하게 해석한다.
명분과 의리가 도착되고, 나라보다 제 한 몸 제 집안만 중히 여기는 풍조가 이 한 구절에 대한 오해와 무관치 않다고
다산은 매섭게 따져 말했다.
나라를 위해 신명을 바쳐 일하는 것을 찬미한 이 표현을 위기가 닥치기 전에 알아서 숨으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으니,
이런 신하들을 데리고 무슨 정치를 펼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말인 명철보신(明哲保身)이 이제는 복지부동(伏地不動)과 비슷한 의미가 되어, 알아서 기고 나만 안
다치면 된다는 뜻으로 추락해버린 현실을 개탄했다. 좋은 시절에는 앞장 서서 온갖 생색을 내다가 막상 나라에 위난이
닥쳐오면 얼른 피해 제 몸 하나 지키는 것을 슬기롭다고 하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는가.
참으로 편견과 오해를 일거에 무너뜨려 지극한 이치를 밝힌 일반지도의 논법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을 받고 김매순은 크게 감동하여 이렇게 답장했다.
일깨워 주신 명철(明哲) 두 글자의 의미는 자훈(字訓)과 경전의 뜻이 분명히 이와 같습니다. 가슴 속에서 나온 의론이
성대하여 몸을 닦고 임금을 섬길 수 있겠고, 이미 어두워진 하늘의 이치도 밝힐 수가 있으며, 장차 시들어가던 나라의
운명을 오래 늘일 수도 있겠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말씀이십니다. 지금 세상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던 바입니다.
-〈김매순이 다산에게 보낸 별지[別紙]〉 8-263
이밖에도 다산의 논설문 중에 도둑도 도둑이 아니고, 강도도 도둑이 아니며, 무리지어 약탈하는 도적떼도 도적이 아니니,
진짜 도적은 한 지방을 다스리는 책임자인 감사(監司)일 뿐이라고 말한 〈감사론(監司論)〉이나, 금강산 유람을 떠나는
벗들에게 금강산의 나쁜 점을 잔뜩 늘어놓고 산에서 탐욕을 기르지 말고 심신을 기르라고 충고한 〈금강산을 유람하러
가는 교리 심규로와 한림 이중련을 전송하는 서문[送沈校理李翰林游金剛山序]〉 같은 글도 역발상으로 깊은 이치를
이끌어내는 촌철살인의 날카로움이 담긴 글들이다.
다산은 말한다. 상식과 타성을 걷어내라. 나만의 눈으로 보아라. 하던대로 하지 말고 새롭게 하라. 관습에 절은 타성
으로는 아무 것도 해낼 수가 없다. 생각의 각질을 걷어내고 나만의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 인순고식(因循姑息)을 버려라.
교주고슬(膠柱鼓瑟)도 안 된다. 듣고 나면 당연한데 듣기 전에는 미처 그런 줄 몰랐던 것이 창의적인 것이다.
들을 때는 그럴 듯 한데 듣고 나면 더 혼란스러운 것은 괴상한 것이다.
이 둘을 혼동하면 안 된다. 깨달음은 평범한 것 속에 숨어 있다. 그것을 읽어내는 안목을 길러라.
7-2 불포견발법(不抛堅拔法)
2) 불포견발법(不抛堅拔法) : 권위를 극복하여 주체를 확립하라
말씀하신 뜻은 삼가 잘 알았습니다. 그만 둘 수 없는 일이라면 어찌 좋아하지 않는 자가 혹 헐뜯음이 있다하여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습속이 날로 낮아져서 툭하면 남을 물어뜯으려고만 하니 아예 문 닫아 걸고 자취를 감춰 부지런히
실지로 실천하는 것만 못할 듯 합니다. -〈이문달에게 답함[答李文達]〉 8-104
불포견발(不抛堅拔)은 포기하지 않고 굳세게 나아가는 것이다. 옳다는 확신이 서면 어떤 권위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
는다. 힘 있게 주장하고 강단 있게 밀어붙여 자신의 입장을 세운다. 누가 한 마디 한다고 위축되어서는 제 목소리를
낼 수 없다. 턱도 없이 목청만 높여서는 안 될 말이지만, 공부의 길에서 끝내 제 목소리 한번 낼 수 없다면 공부하는
보람이 없게 된다.
다산은 경학에 관한 저술 때문에 당시 학계의 격렬한 반응을 일으켰다.
특히 그가 긴 귀양살이를 마치고 돌아와 여러 학자들에게 자신의 저술에 대한 질정을 청했을 때, 그의 엄청난 작업 앞에
그들은 당혹스러웠다.
그들을 가장 곤혹스럽게 했던 것은 다산이 모든 주석가들이 금과옥조로 받들던 한나라 훈고학자들의 주석에 대해 조금
도 거침없이 격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뿐만 아니라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주자의 견해에서
벗어난 논의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다산은 모든 논리를 철저하게 경전의 논거를 끌어와 자기의 주장을 입증하고 있었
으므로 쉽게 트집을 잡을 수도 없었다. 이에 대한 다산의 입장을 들어보자.
진나라에서 서적을 불태운 재앙을 만나 책이 마침내 감추어지고, 예법 또한 폐하여졌다.
한나라가 일어난 지 1백년이 되도록 이를 그대로 따라 돌이키지 않았다.
그러다가 하루 아침에 비부(秘府)에 깊이 간직되어 있던 책과 옛 집에서 나온 끊어지고 썩어 문드러진 죽간을 가져다가,
이를 들어 학문이 끊어져서 아무 것도 계승한 것이 없는 사람에게 주면서 “네가 이를 풀이하라.”하였다.
이것은 몸소 행해보지도 못했고, 눈으로 본 적도 없는 것이었으므로 그 풀이가 능히 잘못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융과 정현은 또 그 뒤에 나온 사람이다. 비록 오로지 정밀하게 생각을 한곳으로 집중하여 그 깊은 뜻을 펴려 해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렵거늘, 하물며 후당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황음까지 행하였음에랴!
-〈상례사전서(喪禮四箋序)〉 6-9
요컨대 한나라 유자들은 끊어진 학문의 맥을 제대로 이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고, 더욱이 그들은 음주가무로 황음한
짓까지 행하였으니 그 학문이 전일하지 않음은 당연하다고 말한 것이다. 다산은 한나라 유자들이 경전을 앞에 두고
고심한 것이나, 지금 자신이 경전을 앞에 두고 고심한 것이나 기본 조건에서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들은 놀고 즐기며 경전을 공부했고, 자신은 오로지 여기에만 온전하게 몰두했으니, 그 점에서는 자신이 그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자부한 것이다. 이런 그의 생각은 아들에게 보낸 다음 편지 글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마융과 정현이 비록 유자라고는 하나, 권세가 한 세상에 무거웠다. 외당에서는 제자와 더불어 강학하고, 내당에는 노래
하는 기생을 놓아두고 즐겼다. 그 번화하고 부귀하기가 이와 같았으므로, 경전을 궁구함이 정밀치 못한 것이 마땅하다.
뒤에 나온 공안국과 가규 같은 여러 학자들도 모두 유림의 뛰어난 학자였으나, 심기가 능히 정밀치 않았던 까닭에 논한
내용에 어둡고 모호한 곳이 많았다. 이제야 비로소 사람이 궁해진 뒤에야 비로소 저서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반드시 지극히 총명한 선비가 몹시 곤궁한 지경을 만나, 온 종일 꼼짝 않고 지내면서 사람들의 말소리나 수레바퀴의
시끄러운 소리가 없는 뒤에야 경전과 예법의 정밀한 뜻을 비로소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천하에 이처럼 공교로움이 또 있겠느냐? 대개 옛 경전을 고찰하고서 정현과 가규의 주장을 살펴보니, 대부분 건건이
잘못 풀이한 것이었다. 독서의 어려움이 이와 같다. -〈두 아들에게 답함[答二兒]〉 9-3
한대 훈고학자들에 대한 다산의 태도는 이처럼 비판적이었다. 다산은 경학사에서 갖는 그들의 확고한 권위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경전 본문에 입각하여 살피고 따지고 고증해서 자신의 주장을 하나 하나 세워나갔다.
당대 학계는 이른바 한학(漢學)과 송학(宋學)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학은 청대 고증학의 영향으로 한대의 훈고학적
성과에 기초하여 자구의 의미를 천착해 들어갔고, 송학은 정주(程朱)의 학문에 바탕을 둔 정통 성리학의 주장을 견지
하고 있었다.
한학이 송학의 권위에 도전하여 점차 목소리를 높여가던 상황에서 홀연히 수백 권의 저작을 들고 나타난 다산은 그들의
눈에 마치 무슨 괴물 같았다. 다산은 한학을 수긍하지도 않았고, 송학을 두둔하지도 않았다.
다산의 작업은 한눈에도 쉽게 비판할 수 있는 만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수긍할 수도 없었다.
한학과 송학 양편 모두에서 칭찬과 비난이 동시에 쏟아졌다. 격렬한 토론이 펼쳐졌다.
하지만 다산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물론 세부적 지적과 부분적인 비판은 조금도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강령이 되는 대원칙에 있어서는 추호도 물러서지 않았다.
특히 상례(喪禮)는 우암 송시열의 예송(禮訟) 논쟁 이후로 당시 학술계에서 매우 예민하고 민감한 사안이었다.
다산이 《상례사전》에서 그 복잡한 예론을 쾌도난마와 같이 척척 정리하고 새로운 주장을 내놓자, 정산(鼎山) 김기서
(金基敍) 같은 이는 한나라 때 유자들도 해결하지 못한 이 복잡한 문제를 어떻게 그렇게 함부로 논단할 수 있느냐며, “
높은 시렁 위에 묶어 두었다가 주공(周公)이 나오기를 기다리라.”고 나무랐을 정도였다.
심지어는 다산의 태도를 두고 “이 사람이 지금을 살면서 옛 도를 돌이키려 하니 재앙이 반드시 몸에 미칠 것”이라는
악담도 있었다.
앞서 절시마탁법을 살펴보면서 다산이 신작과 육향(六鄕)의 소재를 놓고 격렬한 토론을 벌인 일을 검토한 적이 있다.
이때도 신작은 다산이 정현의 학설을 채택하지 않고 기존 학설과 전혀 다른 새 주장을 편 것에 대해 시종일관 격렬한
반응을 나타냈다. 이에 대해서는 한학의 입장에 서 있던 추사 김정희도 다소 과격한 어조로 다산을 비판했다.
추사가 다산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을 읽어 보자.
대저 정현의 주석이 의심할만한 곳이 매우 많지만, 이것은 모두 사설(師說)이요 가법(家法)입니다.
비록 지금 사람이 견문한 것과 맞지 않는 점이 있다 해도, 명나라 성화(成化) 때의 도자기나 만력(萬曆) 연간의 질그릇을
가지고 봉우파사(鳳羽波沙), 즉 봉황새가 깃을 치는 모양을 새긴 고대의 청동기를 의심하기에 이르는 것은 크게 불가합
니다. 뒷사람이 정현을 반박하는 까닭은 자신의 알량한 식견을 가지고 어쩌다 신기하여 기뻐할 만한 곳을 만나 의연히
떨쳐 일어나 이를 공격하여 힘을 남기지 않은 것입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자기가 공격한 것은 별도로 사설(師說)도 없고, 더군다나 가법(家法)이 아닙니다.
저 왕숙(王肅) 같은 무리가 논난한 것은 의도를 가지고 다른 주장을 세워 스스로 기이한 것으로 현혹한 것일 뿐, 경전의
뜻이 날로 스러지는 데에 이르러서는 아예 고려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또 뒷사람이 크게 경계해야 할 바입니다. 육향(六鄕)이 왕성(王城) 안에 있다는 것도 어떤 명확한 근거가 있습니까?
보내 주신 가르침이 너무 간략해서 감히 근거를 대어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대저 육향이 교(郊)에 있다고 한 것은 정현 또한 가규와 마융의 풀이를 깬 것이니, 이미 정현의 시대부터 일정한 논의가
없었던 것입니다. 또 뒷사람으로 어찌 허공에 매달아 부연하고 추측하기를 마치 직접 그 땅에 가 보고 눈으로 본 것처럼
척척 말할 수가 있습니까?
설사 옛 사람과 꼭 맞아 떨어지는 것이 있다 해도 자기 의견을 스스로 내세우고, 자기 주장을 직접 만들어내는 것은 경전
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감히 하지 못할 바입니다. 이는 점점 갈등을 심화시켜 뒷사람의 안목을 어지럽히기에 족할 뿐
경전에는 아무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김정희, 〈정다산에게 주다[與丁茶山]〉
정현을 비판한 다산의 태도에 추사가 자못 격렬한 어조로 반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도대체 한나라 당시에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어쩌면 그렇게 직접 보고 들은 것처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자꾸 꼬투리를 잡아 자기 의견을 내세우기 시작하면 이는 후인을 현혹시켜 갈등만 조장할 뿐 무슨 보탬이 있느냐
고 힐난했다.
고증학을 받아들여 한학의 태도를 견지했던 추사는 다산을 대학자로서 존경했지만, 그의 경전연구 태도에 대해서는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다산이 세상을 뜬 뒤, 아들 정학연이 추사에게 《여유당집》의 편찬을 부탁했을 때도 추사는 유고를
모두 살핀 뒤 감히 취사할 수 없다며 그 청을 완곡하게 거절했을 정도였다.
이점은 추사 뿐 아니라 여러 차례 다산과 격렬한 토론을 벌였던 신작도 마찬가지였다. 신작도 다산이 경솔히 선배를 비판
하고 자기의 주장을 과도하게 내세우는 폐단이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실제로 다산의 글을 읽다보면 무모할 정도의 지나친 자기 확신과 고집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겉으로는 겸손해도, 고금의
학설을 조금도 인정치 않고 자기주장을 끝까지 내세움으로써 선유(先儒)의 견해를 비판하는 것은 다산의 주특기였다.
다산의 작업에 깊이 공감했던 김매순조차도, 다산이 《매씨상서(梅氏尙書)》가 위서임을 단언하면서 공심(公心)으로
살피지 않으면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다고 말한 데 대해 이렇게 말했을 정도다.
이 일은 주제가 너무 커서 한 구절 한 글자로 그 자리에서 변론해서 깨트릴 수 있는 것이 아닌 듯 합니다.
마땅히 눈이 휘둥그레질 사람이 많고, 떨리듯 수긍하는 자는 적을 것입니다. 마땅히 책 상자 속에 깊이 간직해 두시고
몇 년 뒤에 또 한 사람의 알아주는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리시지요. -김매순, 〈또 보내온 편지[又書]〉 8-252
대개 주장이 너무 강하고, 기존 학설에 대한 비판 수위가 지나친 것을 염려해서 완곡하게 돌려 말한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다산은 이 편지를 받고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선입견 없이 공정하게 시비의 진실을 살펴야지 어떤 것이 더 오래된 주장이냐를 가지고
논리의 근거로 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했다.
다산의 주장에 대해서는 한학을 하는 학자들 뿐 아니라 송학을 추구하는 학자 쪽에서도 반발이 있었다.
다산이 이인섭(李寅燮)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주신 편지에 “이는 신기함에 힘쓰는 병통이니, 정주(程朱)를 독실하게 믿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더군요.
이는 온 세상이 바야흐로 뒤에서 수군대면서도 곧장 말하기를 즐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숨김없는 가르침을 받고 보니, 사실이 그렇고 그렇지 않고를 떠나 감격하는 마음을 이지기 못하겠습니다.
비록 그러나 제가 어찌 감히 정주를 독실하게 믿지 않겠습니까? 다만 심성이기(心性理氣)의 주장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지라 일찍이 뜻을 두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간혹 과강(課講)하면서 경전과 훈고의 사이에 마음을 쏟아 뜻을 헤아려
보니, 또한 저윽이 천지의 큼과 일월의 밝음을 살펴볼 수가 있었습니다. 의리의 정미함을 낱낱이 분석한 것은 진실로 마음
으로 기뻐하고 성심으로 따라 손발이 춤추는 것을 금할 수 없었으니, 어찌 터럭 하나인들 의심하는 마음이 싹터 났겠습
니까? -〈이나주에게 답함[答李羅州]〉 8-96
이렇듯 다산의 관점이 정주(程朱)의 학설과 배치됨을 힐난하는 논의도 있었다.
사실 이여홍과의 거듭된 토론도 이러한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나왔다.
다산의 《논어고금주》만 하더라도 우선 《논어》의 중심 개념인 ‘인(仁)’에 대한 해석부터 주자의 해석과는 판이하게 달
랐다. 그러나 정주에 대한 정면 비판은 한나라 훈고학자에 대한 비판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으므로 이에 관해서만은
다산도 끝까지 조심스런 태도를 견지했다.
다산은 〈도산사숙록〉에서 퇴계가 율곡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선유(先儒)의 학설 중에 옳지 않은 곳만 찾아 힘써 폄척
한다고 지적한 내용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초학자들이 경전에 나아가 선생이나 장자와 더불어 글을 주고받으며 논난하려면 반드시 그 학설 중에 착오가 있는 곳을
찾아 집어낸 뒤에야 비로소 의문을 일으켜 질문을 끄집어 낼 수가 있다.
율곡은 당시에 선생과 왕복함이 있고자 했기 때문에 질문한 바가 어쩔 수 없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대저 꼬치꼬치 뒤져서 흠집을 찾아내어 새로운 견해를 내기에 힘쓰는 것은 진실로 큰 병통이다.
하지만 지혜를 버리고 뜻을 끊어 온전히 옛 경전을 답습하는 것 또한 실득(實得)이 없다.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 9-105
다산은 율곡의 편을 들었다. 자신의 경우에 비추어 당시 율곡의 입장을 이해한 것이다.
공부는 의문에서 시작되고, 의문이 있어야 질문이 생긴다. 질문을 위한 질문을 억지로 만드는 것은 문제지만, 자기
생각은 없이 그저 경전의 가르침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었다.
그러자면 용기가 필요했다. 다산은 공부하는 사람이 반드시 지녀야 할 미덕으로 ‘용(勇)’을 꼽았다.
용(勇)이란 삼덕(三德)의 하나다. 성인이 개물성무(開物成務)하고 천지를 두루 다스림은 모두 용이 하는 바이다.
“순(舜)은 어떤 사람인가? 하는 바가 또한 이와 같으면 된다.”는 것이 용이다.
경제의 학문을 하고자 하면, “주공(周公)은 어떤 사람인가? 하는 바가 또한 이와 같으면 된다.”고 하고, 뛰어난 문장가가
되고자 하면, “유향(劉向)과 한유(韓愈)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바가 이와 같으면 된다.”고 한다. 서예의 명가가 되고 싶
으면, “왕희지와 왕헌지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하고, 부자가 되고 싶으면, “도주공(陶朱公)과 의돈(猗頓)은 어떤 사람인가?”라고 한다. 무릇 한 가지 소원이 있으면 한 사람을 목표로 정해 반드시 그와 나란해 지는 것을 기약한 뒤에 그만
두어야 하니, 이것이 용의 덕이 하는 바이다. -〈학유가 떠날 때 노자삼아 준 가계[贐學游家誡]〉 8-27
다산은 이 글 외에도 양용(養勇), 즉 용의 덕을 기르는 방법에 대한 언급을 여러 곳에서 남겼다.
지(智).인(仁).용(勇) 삼덕 가운데 공부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으로 용(勇)을 꼽았다.
목표를 정해 그와 꼭 같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워 몰두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했다.
다산은 말한다. 어렵다고 포기하지 마라. 권위에 압도되어 위축되어서도 안 된다. 굳게 붙들어 뿌리를 뽑아라.
그저 주저 물러 앉아서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시키는 대로 하고, 남들 하는 대로 따라만 해서는 제 목소리를
낼 수가 없다. 마음이 굳세야 외물에 휘둘리지 않는다. 들은 것만 고집하여 바꾸지 않아서는 끝내 발전이 없다.
입장을 세우고 견해를 가져라. 목표를 정해서 그를 뛰어넘을 때까지 정진하고 정진하라
7-3 독후엄정법(篤厚嚴正法)
3) 독후엄정법(篤厚嚴正法) : 도탑고도 엄정하게 관점을 정립하라
군자는 의관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높이 두며, 묵묵히 바로 앉아 공손하기가 마치 흙으로 빚은 사람 같고,
언론은 도탑고도 엄정해야 한다.
이와 같은 뒤에야 능히 뭇사람을 위엄으로 복종시킬 수 있고, 풍성(風聲)이 퍼져 마침내 오래 멀리까지 이르게 된다.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계[示二子家誡]〉 8-18
독후엄정(篤厚嚴正)은 도탑고도 엄정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말의 힘은 화려한 수사나 능수능란한 임기응변에서 나오지 않는다. 재치만으로 한두 번 통할 수는 있어도 그 이상은
안 된다. 힘 있는 제 목소리를 내려면 바탕 공부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말의 무게는 겉꾸밈만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듣는 이를 압도하는 묵중함은 평소부터 쌓아온 온축의 힘에서 비롯된다.
다산은 경세제민보다 늘 수기(修己) 공부를 앞세웠다. 자식들에게 누누이 강조한 것도 바탕 공부의 중요성이었다.
다산 자신도 그 바탕 위에서 엄정하게 입장을 세워 힘 있는 주장을 펼쳤다. 다음은 위 글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만약 게으르고 경박한데다 우스개 소리나 뒤섞게 되면 비록 그가 말한 것이 이치에 깊이 들어맞아도 사람들이 또한
믿으려 들지 않는다. 살았을 적에 능히 바탕을 수립하지 못하면 죽은 뒤에는 저절로 나날이 스러져 없어지고 마니,
이는 사리의 당연한 것일 뿐이다.
천하에는 어리석은 자는 많고 통달한 사람은 적다. 누가 보기 쉬운 위의(威儀)를 버려두고 별도로 알기 어려운 의리를
구하려 들겠느냐?
높고 오묘한 학문은 알아주는 사람이 더더욱 적다. 비록 다시 그 도가 주공과 공자를 잇고, 문장이 양웅과 유향을 능가
한다고 해도 또한 알아줌을 입지 못할 것이다. 너희들은 이를 알아 잠시 연찬하는 공부를 놓아두고라도 우선 몸가짐을
바로 하는 공부에 힘써서 마치 쇳덩어리 산이 우뚝 서있는 것처럼 고요히 앉아 있는 것을 익히도록 해라.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계[示二子家誡]〉 8-18
독후엄정의 길을 버리고, 태만하고 경박함을 따른다면 아무리 훌륭한 말을 해도 아무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바른 몸가짐으로 드러나는 위의(威儀)가 있어야 사람들은 그의 말에서 힘을 느낀다.
위의가 학문의 깊은 의리에 앞서는 까닭이다.
다산은 독후엄정의 체득을 위해 자식들에게 정좌(靜坐) 공부를 통해 근기(根基)를 수립할 것을 당부했다.
제 한 몸도 옳게 추스르지 못하면서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날뛰는 무리를 다산은 깊이 경멸했다.
한편 엄정한 자기 기준을 세운 뒤에는 이러쿵 저러쿵 하는 세상의 뜬 소리에 흔들리지 말고 뚜벅뚜벅 자기 길을 갈 것을
요구했다.
위학(僞學)이란 이름을 피하려 했다면 정주(程朱)는 그 도를 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명예를 구한다는 비방을 두려워했
다면 백이와 숙제가 그 절개를 이루지 못했으리라. 곧다는 칭찬을 사려 한다는 혐의를 멀리하려 했다면 급암(汲黯)과
주운(朱雲)도 바른 말로 간쟁하지 못했을 터이다.
심지어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벼슬길에서 청렴한 것을 두고도 경박한 무리들은 모두 이름을 얻으려 하는 것이라고 의심
한다. 장차 이런 무리를 위해 악을 좇아야 하겠는가? -〈반산 정수칠에게 주는 말[爲盤山丁修七贈言]〉 7-294
걸핏하면 남을 걸고 넘어지고, 바른 행동을 보고도 본받으려 들기는커녕 색안경을 끼고 삐딱하게 본다.
이런 세상에서 학문을 닦아 제 길을 가는 것은 쉽게 비방을 부를 뿐 보람은 적다. 하지만 군자는 바탕을 다져,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면 남의 이목을 꺼리지 말고 그 길을 걸어야 옳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겠지? 이 일이 옳은 일이지만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싫다. 그러니
그저 튀지 말고 가만있는 것이 좋겠다. 이런 것은 선비의 바른 태도가 아니다. 독후엄정과는 거리가 멀다.
저 소인배들의 이목을 꺼려 그들의 눈밖에 안 나려고 바른 길을 버리고 악한 길을 뒤따른 데서야 어찌 사람의 구실을
할 수 있겠는가?
다산은 이러한 태도로 사회의 여러 병리적 현상에 대해 날카로운 메스를 가하며 쓴 말을 하고 할 말을 했다.
효자와 열녀에 대해 쓴 일련의 글에서 우리는 자칫 시비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도 조금도 빗겨 섬
없이 정면 돌파하고 있는 다산의 매서운 면모와 만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사회는 효자와 열녀 신드롬에 집착했다. 효자와 열녀가 강조되는 세상은 실은 효와 열이 땅에 떨어진 세상
이다. 충신을 표창하는 세상에는 충신이 없다. 효자비를 받기 위해 가문이 총출동해서 가짜 효자를 만들고, 열녀문을
받자고 과부가 된 며느리의 죽음을 강요하던 일이 당시에는 비일비재했다.
효자가 되려면 무엇보다 증거가 있어야 했다. 단지(斷指)와 상분(嘗糞)과 할고(割股)가 그것이다.
단지는 손가락을 잘라 숨이 넘어가는 어버이의 목에 피를 흘려 넣는 것이고, 상분은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헤아리는 것
이며, 할고는 제 넙적 다리 살을 베어 병든 어버이를 먹이는 것이다.
효자가 되려면 적어도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는 해야 했다. 문중은 증인을 세워 효자의 사적을 기록으로 만들어 올리고,
관에서는 이를 위로 상신한다.
국가는 이를 심사하여 효자문을 내렸다. 효자문이 서면 그 집안은 그 고장에서 대접받고 부역이 면제되었다.
고을 관장은 훌륭한 관리로 칭찬 받아 고과성적이 올라가며, 국가는 교화의 보람이 이토록 널리 퍼진 것을 자랑할 수
있으니, 그 어느 쪽도 손해날 일이 없는 아름다운 일이었다.
이틈을 타서 가짜 효자들이 극성을 부렸다. 손가락을 자르고 넙적 다리를 가르는 일은 아프고 상처가 남으니 상분을
했다. 직접 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을 제 눈으로 보았다고 증인을 매수해서 적었다.
그도 아니면 한 겨울에 잉어가 뛰어나오고, 눈 속에 죽순이 솟아나는 이적이 있었다고, 그러니 하늘이 낸 효자가 아니
겠느냐고 증인을 내세웠다. 손가락을 자른다고 돌아가실 부모가 살아날 것도 아니고, 똥 맛을 보는 것이 병을 낫게 할
리도 만무한데 그렇게 해야 효자가 된다고 하니 너 나 없이 따라했다. 순진하게 풍문을 믿고 한 여름에 잘 들지도 않는
식칼로 제 넙적 다리 살을 베다가 상처가 덧나 죽은 목숨은 또 한 둘이었겠는가?
연암 박지원이 〈열녀함양박씨전〉에서 예리하게 묘파했던 것처럼 남편을 향한 애틋한 그리움 때문이 아니라, 젊은
과부로 살아 이웃의 이러쿵저러쿵 하는 험한 소리를 듣고 싶지 않고 식구들에게 누가 될까봐 목을 매단 열녀들도 손
으로 꼽을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심지어는 아들이 죽었는데 며느리가 따라 죽지 않으면 온 식구가 작당해서 죽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내몰았다.
그래도 안 죽으면 아예 목 졸라 죽인 뒤에 매달아 놓고 목을 매 자살했다며 열녀문을 세워달라고 하다가 뒤늦게 살인이
들통 나 큰 사회 문제가 된 일도 실제로 있었다.
왜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따라 죽어야만 하는가? 아내가 죽었을 때 슬픔을 못 이겨 따라 죽은 남자는 어째서 하나도 없
는가? 아내가 죽으면 무덤에 풀이 마르기도 전에 옷 갈아입듯 새 아내를 얻으면서, 남편을 잃은 아내는 왜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손가락질을 받으며 반강제로 죽음의 길로 내몰려야 하는가? 어느 누구도 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시각을 바꿔 보면 효자와 열녀 문제는 확실히 조선 후기 사회의 병리적 현상의 하나였다.
머리칼 하나 훼손해도 부모에게 불효가 된다고 하던 유학의 가르침은 이제 스스로 육체를 훼손하여 인육을 다 죽어
가는 부모에게 먹이는 엽기적인 양상으로까지 변질되었다.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 것이 열녀라던 생각이 변해
반드시 따라 죽어야만 열녀의 명부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나마 열녀문을 받으려면 그저 죽기만 해서는
안 되고 얼마나 더 드라마틱하게 죽느냐가 관건이 되는 상황까지 맞게 되었다.
말이 열녀지 공공연한 묵계에 의한 사회적 살인에 더 가까운 것이 이 열녀 문제였다.
다산은 이러한 현실에 분개했다. 교화의 아름다운 증거인 마을마다 서있는 효자비 열녀문을 보며 다산은 이게 무슨
해괴한 짓이냐며 격분했다. 그가 쓴 〈효자론(孝子論)〉과 〈열부론(烈婦論)〉, 〈충신론(忠臣論)〉은 이러한 병리적
현상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신랄하게 나무란 글이다. 다산의 글을 읽어 보자.
잉어가 얼음에서 뛰쳐나오고 참새가 장막으로 날아든 효자 왕상(王祥)의 기이한 일은 우주 사이의 신령하고 기이한
특별한 자취다. 능히 집집마다 잉어를 얻고, 참새를 잡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또 어찌 저 같은 자가 이다지도
많단 말인가? 똥을 맛보는 것은 설사병이 아주 심할 때 의원이 그 맛을 살펴서 환자가 죽을지 살지를 알아보려 하는
것일 뿐 병의 치료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제 증세는 묻지도 않고 오직 다만 똥을 맛보기만 하면 효자라고 한다. (중략)
무릇 고을 사람이나 수령, 감사와 예관(禮官)도 그것이 예가 아님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마음에 두렵고 겁이 나서 감히 못하는 것은 그 명분이 효이기 때문이다. 남의 효행을 듣고 감히 비난하는 의론을
하는 것은 반드시 큰 악행이라는 이름을 뒤집어 쓸 것이 뻔하다. 남의 일에 거짓이라고 억측하는 것은 그 몸을 지혜롭지
못한 곳에 빠뜨리는 것이다. 이에 마음속으로 몰래 비웃으면서도 입으로는 비위를 맞추는 말을 하며 그 문서에 서명을
한다. 가만히 그 속임수를 욕하면서도 겉으로는 추켜세워 우뚝하고 기이한 행실이라고 한다.
아래 사람은 이것으로 윗사람을 속이고, 윗사람은 아래 사람을 거짓으로 농단하여 상하가 서로 덮어 가려 진실로 원망
하고 탓함이 없다. 예(禮)를 붙들어 이를 위해 그 거짓됨을 펴고 그 간사함을 밝혀 풍속과 교화를 바로잡으려는 군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이 같은 것은 어째서인가? 여기에 기대어 따라붙는 것이 무겁기 때문이다.
-〈효자론(孝子論)〉 5-148
공연히 평지풍파 만들어 곤란한 지경을 당할 것이 없다. 세상일은 좋은 게 좋은 것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식으로
거짓인 줄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짐짓 넘어간다. 그 집안은 존경받고 경제적 이익이 생겨 좋고, 수령은 칭찬 받고,
나라는 흐뭇하니, 간사한 것은 속으로만 생각 해야지 드러내 놓고 말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다산은 〈효자론〉을 이렇게 맺는다.
저들은 혹 이 때를 노려 세상을 진동할 이름을 훔친다.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또 사람의 기호는 같지가 않다.
대추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창포김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마름 풀을 즐기는 이도 있고, 꿀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며, 토란을 즐겨 먹는 이도 있다. 사람의 기호는 같지가 않건만 어째서 효자의 부모들은 반드시 꿩과 잉어, 노루와
자라, 또는 눈 속의 죽순만을 즐겨 찾는단 말인가? 또 호승(胡僧)이나 우객(羽客)도 아니면서 반드시 용이 내려오고 범이
그 앞에 엎드린 뒤에야 바야흐로 효자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그 부모를 빙자하여 이름을 훔치고 부역을 피하
면서 간사한 말로 꾸며 임금을 속이는 자이니, 살피지 않을 수가 없다. -〈효자론(孝子論)〉5-150
이 얼마나 매섭고 서슬 푸른 비판인가? 다산의 이 글을 보고 전국의 효자비가 선 집안에서 많이들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다산은 감히 효자야 말로 부모의 죽음을 빙자하여 이름을 도둑질하고 부역을 피하는 간사한 도둑이라고 말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위태롭기 짝이 없는 주장이 아닐 수 없었다. 효는 자식 된 자의 마땅한 도리일 뿐인데, 이런 것을 가지고
스스로 자랑하고 덩달아 칭찬하는 일을 국가가 조장하니 마침내는 본래의 의미는 퇴색되고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
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글에서는 “부모가 아무리 위독한 병에 걸렸다 해도 자식의 신체를 해쳐가면서 그 고기를 먹고 싶어 할 리가 있
겠느냐?”며 왜곡된 효도 신드롬을 나무랐다. 이런 것이 다산식의 독후엄정법이다.
열녀에 대한 다산의 비판도 매섭기 짝이 없다. 다산의 〈열부론〉은 이렇게 시작된다. 아버지가 병들어 죽거나 임금이
죽었을 때 아들이나 신하가 따라 죽는다 해서 이를 효자나 충신이라고 말하는 법은 없다. 그런데 왜 유독 남편이 죽었
을 때 아내가 따라 죽으면 열부(烈婦)라 하여 정표(旌表)를 세워주고 호역(戶役)을 면제해주는가? 남편이 죽었다고
따라 죽는 여자는 소견이 좁은 여자일 뿐 열부일 수는 없다. 왜 그런가? 다산은 그 까닭을 이렇게 적었다.
대저 천하의 흉한 일 중에 제 몸을 죽이는 것보다 심한 것은 없다. 그 몸을 죽이는 것을 어찌 취하겠는가.
다만 그 몸을 죽이더라도 의리에 합당할 때만 이를 꾀해야 한다. 지아비가 호랑이나 도적에게 핍박을 당했을 때 아내가
따라서 그를 지키려다가 죽으면 열부이다. 혹 자기가 도적이나 음탕한 자에게 핍박당해 강제로 몸을 더럽히게 되었을
때 굴하지 않고 죽었다면 열부이다. 혹 일찍 과부가 되어 그 부모나 형제가 자기의 뜻을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
내려 할 때 항거하다가 능히 맞설 수 없어 죽으면 열부다. 지아비가 원통함을 품고서 죽었는데, 아내가 이를 위해 울부
짖으며 그 정상을 환히 밝히지 못했을 경우 함께 형벌을 받다 죽으면 열부이다.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지아비가 편안하게 안방에서 타고난 수명을 마쳤는데도 아내가 따라서 죽는다.
이것은 자살한 것일 뿐이니, 자살했다고 해야지 의리에 합당한 것은 아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자살하는 것이야 말로 천하에 흉측한 일이다. (중략)
남편이 죽는 것은 집안의 불행이다. 혹 시부모가 늙었으나 봉양할 사람이 없고, 혹 여러 자녀가 어려도 젖먹이고 기를
사람이 없다. 죽은 사람의 아내 된 사람은 마땅히 그 슬픔을 참고서 살기에 힘을 써야 한다. 우러러 봉양할 사람 없는
시부모를 봉양해서, 시부모가 돌아가시면 장사지내 주고 제사를 올려야 한다. 굽어 양육해 줄 사람 없는 자식들을 길러,
성장하면 관례를 치러주고 시집 장가를 보내주는 것이 옳다. 하루아침에 표독스레 혼자 마음에 새기기를, ‘한 사람이
죽었으니 내가 시부모를 위할 것이 없다.’하고, ‘한 사람이 죽었으니 위할 자식이 없다.’라고 하며, 이에 다른 것은 돌아
보지 않고 횃대 아래 목을 늘여 매단다. 이 같은 사람이 어찌 사납고 모질고 잔인하며, 크게 불효하고 크게 자애롭지
못한 자가 아니겠는가? -〈열부론(烈婦論)〉5-151
신분도 가리지 않고 처지도 따지지 않고, 남편이 죽기만 하면 너나없이 기쁜듯이 죽음으로 내닫고 내모는 사회 풍조를
신랄하게 지적했다. 당시 세상에서 미덕으로 치던 효자와 열녀에 대한 다산의 이러한 논조는 다소 과격하기까지 하다.
그는 효자를 부모의 죽음을 빌미로 명예를 구하고 세상을 속이는 사기꾼 도둑놈이라고 말했다.
분명하게 살펴서 거짓이 드러날 경우 용서 없이 베어야 한다고까지 극언했다. 열녀를 시부모나 자식은 안중에도 없는
표독스런 여자라 하고, 자결은 가장 흉측한 일일 뿐이라고 했다. 모두 인간의 상정(常情)을 벗어난, 윤리를 파괴하고
풍속을 왜곡하는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충신론(忠臣論)〉에서는 의병의 경우만 하더라도 자기 부모와 처자를 지키고 군대에 끌려가는 것을 면하기 위해 일
으킨 경우가 허다하고, 그들이 실제 세운 공은 얼마 되지도 않았음을 들면서, 힘없이 싸워보지도 못하고 적에게 잡혀
죽은 사람을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후인들의 근거 없는 증언만으로 충신으로 표장하면 국가에 무슨 계통이 서며
어찌 떳떳함이 있겠느냐고 지적했다. 아무리 충효열의 행실을 추장하는 아름다운 일이라 해도 시시비비를 엄정하게
가려, 왜곡된 관행과 원칙 없는 선심을 바로 잡아 국가의 기강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다산은 말한다. 공부의 길에서는 옳고 그름이 있을 뿐, 좋고 나쁨은 없다. 도탑게 살피고 엄정하게 따져서 옳으면 행
하고, 그르면 내칠 뿐이다. 이 눈치 저 눈치 보고, 못 본 듯이 지나치고,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두루뭉수리로 넘어가
서는 안 된다. 잣대를 똑바로 들이대서 내 목소리를 올바로 내야 한다. 좌고우면(左顧右眄), 이리저리 눈치 보다가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사람 좋다는 소리나 들으려거든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
7-4 대조변백법(對照辨白法)
4) 대조변백법(對照辨白法) : 다른 것에 비추어 시비를 판별하라
선배가 우리 선대의 일을 기록한 것에서 간혹 차이 나는 곳이 있으면 마땅히 바로 연월을 따져 살펴 그렇지 않음
을 밝혀야 한다. 또 무릇 선조와 더불어 가깝게 지냈던 분은 반드시 그 후손을 찾아서 어느 집안인지 알아두고, 뒤에
혹 만나게 되면 곡진하게 선대의 우의를 말해주어라. 이것이 훌륭한 자손의 바른 예절이니 마땅히 힘쓰도록 해라.
-〈두 아들에게 부침[寄二兒]〉 9-16
대조변백(對照辨白)은 이것과 저것을 대조하고 꼼꼼히 살펴 자신의 견해를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개념이 엉기고 논리가 복잡해지면 의미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옳고 그름은 언제나 이것과 저것의 사이에 있다.
얻고 잃음은 여기와 저기의 중간에 있다. 세상에는 완전히 옳은 것도 없고 다 틀린 것도 없다.
옳은 것 같지만 틀린 것이 있고, 틀린 것 같은 데 맞는 것도 있다. 누가 봐도 옳고, 언제 봐도 틀린 것은 별로 없다.
항상 ‘사이’와 ‘중간’이 문제다. 눈앞의 사물은 자꾸만 우리 눈을 현혹시키고, 판단을 흐리게 한다. 겉만 보아서는 모른다.
현상의 안쪽에 숨은 본질을 꿰뚫어 보는 눈이 필요하다.
이번에는 분석의 태도를 보여주는 다산의 글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갈래를 나눠 명확히 구분하고, 이것에서 빌어 와
저것을 설명하는 대조변백법은 다산이 즐겨 사용한 방법의 하나다.
옛 사람들은 글을 배울 때 육서(六書)를 위주로 해서, 글자마다 궁구하여 상형(象形).형성(形聲).회의(會意).지사(指事)
를 각각 분명히 깨달은 뒤에 이를 엮어 문장을 지었다. 그래서 글자를 잘못 쓰지 않았다.
후세에는 전체 구절로 배우기 때문에 문체가 날로 나빠졌다. 옛 사람들은 의술을 배울 때 《본초강목》을 바탕으로 삼아
약재마다 맛보고 시험하여 그 성질과 맛과 기운과 성분을 하나하나 익힌 뒤에 조제하여 약을 만들었다.
그래서 약을 잘못 쓰는 일이 없었다. 지금 사람은 이미 만들어진 약방문을 가지고 배우는지라 의술이 나날이 졸렬해진다. -〈복암 이기양의 묘지명[茯菴李基讓墓誌銘]〉7-73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다. 같은 병이라도 증세는 같지가 않다. 이 사람에게 약이 되지만 저 사람에게는 독이 되는 약재도
있고, 이 병에는 특효가 있어도 비슷한 다른 증세에 쓰면 큰일 나는 약재도 있다.
그러니 의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어느 병에는 어떤 약방을 써야 한다는 지식이 아니라, 약재 하나하나의 성질과 효능을
익히는 일이다. 그래야만 병자의 체질이나 병세의 완급에 맞추어 강약을 조절할 수가 있다. 누구에게나 잘 듣는 약방은
없다. 어떤 병에도 다 통하는 처방도 없다.
교주고슬(膠柱鼓瑟), 즉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기러기발을 아교로 붙여 놓고 연주할 수는 없다.
이전 환자에게는 잘 통했는데, 어떤 환자에게는 약효가 전혀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같은 병에도 미묘한 저울질이
필요하다. 이것을 잘 하려면 해당 약초 하나하나의 성질을 잘 알아서 가감하고 참작하여 약의 성질을 조절해야 한다.
문장도 마찬가지다. 모든 글자는 만들어진 원리와 배경이 같지 않다. 같은 뜻이라고 해도 마구 섞어 쓰면 안 된다.
‘본다’는 단어에는 견(見)․간(看)․관(觀)․시(視)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견(見)은 눈을 뜨고 있으니 보이는 것이다.
영어로는 ‘See’쯤 된다. 간(看)은 먼데 있는 물체를 눈[目] 위에 손[手]을 얹고 보는 것이다.
‘look’이다. 관(觀)과 시(視)는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뭔가 하고 살펴보는 것이다. ‘Watch’에 해당한다. 각각의 글자가
만들어진 뿌리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겨났다. 그래서 살핀다는 말을 쓸 때는 관찰(觀察)한다고 하고, 시찰(視察)한다고
하지, 견찰(見察)이나 간찰(看察)이란 말은 쓰지 않는다. 그냥 보고 지나치는 것은 간과(看過)라 하고 관과(觀過)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관점(觀點)이나 시점(視點)이란 말은 있어도 견점(見點)이나 간점(看點)은 없다. 보는 데도 차원이 있고 수준이 있다.
글자의 뿌리를 캐어 낱낱의 뜻을 알면 이런 글자들이 들어간 조합 원리를 금세 파악할 수가 있다.
생각만 해도 그렇다. 념(念)·상(想)·사(思)·려(慮)가 모두 생각이다. 생각은 생각이지만 서로 다른 생각이다.
념(念)은 지금[今]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생각이다. 머금다[含]에서 나왔다. 마음 속에 머금고 있는 생각인 셈이다.
상(想)은 상(相) 즉 이미지로 떠오르는 생각이다. 사(思)는 머리로 따져 하는 생각이고, 려(慮)는 근심스런 생각이다.
그러니 떠오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으면 염두(念頭)가 되고, 그 생각이 바램이 될 때 염원(念願)이라 한다.
이것과 연계하여 저것이 떠오르는 것은 연상(聯想)이다.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상(空想)과 꿈같은 몽상(夢想)도 있다.
떠오른 생각이 머리 속을 맴도는 것은 상념(想念)이다. 따져 생각하고 살피는 것은 사고(思考)다.
이런 생각이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면 그것을 사상(思想)이라 말한다.
그러니 사고(思考)는 괜찮지만 염고(念考)나 상고(想考)는 안 된다. 마음속의 걱정이 심려(心慮)고, 근심스런 생각은
우려(憂慮)다. 머리에 떠나지 않는 근심은 염려(念慮)다. 깊이 따져서 생각하는 사람을 사려(思慮)가 깊다고 말한다.
이렇게 낱 글자의 개념과 형성 원리를 알면 수많은 어휘들을 단번에 익힐 수 있다. 사전적 의미는 같지만 왜 이 글자를
여기서 쓸 수 없고, 저기서는 쓸 수 있는지 금방 알 수가 있다. 의원이 어떤 약초를 어떤 때는 쓰지 않으면 안 되고,
어떤 때는 써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산은 이렇게 문장과 의술을 하나의 원리로 비교해서 잘못된 공부 태도의
원인을 명확하게 짚어냈다. 이런 것이 대조변백법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뽕나무의 뻐꾸기, 그 새끼 일곱인데, 그 거동 한결같네.”라 했습니다. 새끼가 일곱 마리인데 똑같이
먹이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신은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신포(身布)를 행해서는 안 됨을 알게 됩니다.
대저 사람은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몸뚱이가 있습니다. 누구나 지닌 몸뚱이인데, 어째서 어떤 몸에는 신포를 징수하고,
어떤 몸에는 신포를 징수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것을 양역(良役)이라고 한 것은 백성들이 양민으로 여기게 하고 천민
으로 여기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양역은 실로 괴롭기 짝이 없으니, 괴로우면 천한 것입니다.
백성은 양역 보기를 노비와 같게 여깁니다. 비록 집집마다 설명하여 양역이라고 깨우쳐 주어도 백성들은 믿지 않을 것입
니다. 이 아무개란 자가 최 아무개에게 ‘너는 내 아우다’라고 말하면, 최는 반드시 발끈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양역을 위
해서라면 거짓으로 족보를 만들고, 아비를 바꾸고 조상을 바꾸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이에 이르러 백성들의 마음
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신포에 대한 의[身布議]〉 4-147
신역(身役)은 조선시대 조세 제도 가운데 노동력을 징발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다시 군대와 관련된 군역(軍役)과
도로나 다리, 또는 성곽을 건설하고 보수하는데 노동력을 제공하는 요역(徭役)으로 나누어진다. 나중에는 신역(身役)
대신 포목을 징수하여 국가의 세수(稅收)에 충당했는데 이것이 바로 신포(身布)다. 즉 신역을 대신해서 내는 포목이
신포인 셈이다.
다산은 이 신포 시행 상의 여러 폐단을 지적하는 글을 올리면서 뜬금없이 《시경》 〈조풍(曺風)〉 〈시구(鳲鳩)〉의
첫 구절을 인용했다. 뽕나무에 둥지를 튼 뻐꾸기가 일곱 마리 새끼에게 고르게 먹이를 먹이는 모습을 노래한 시를 읽을
때마다, 신포를 폐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했다. 무슨 말일까?
양반과 중인은 신포가 면제되고, 힘없는 양민들만 신포를 냈다. 뻐꾸기는 제 새끼 일곱 마리를 모두 고르게 먹이는데,
왜 임금은 제 백성에 대해 차별을 두는가? 왜 양반은 하는 일 없이 놀고 먹는데도 신포를 안 받고, 왜 백성은 뼈가 시
도록 일만 하는데 신포를 내야 하는가?
신역(身役)을 아무리 양역(良役)이라 좋게 표현해도, 백성들은 족보를 위조해서까지 양반임을 증명하여 신포의 고통
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향안(鄕案)에 이름을 올리고, 거짓 족보를 만들며, 아예 신분을 모르는 딴 고장에 이사 가서
양반 행세를 하고, 그도 안 되면 유건(儒巾)을 쓰고 과거시험장에 드나드는 것으로 양반 행세를 한다.
백성들이 밤낮 없이 하는 궁리는 온통 양반 되는 방법뿐이다. 어쩌다 나라 꼴이 이 지경이 되었는가?
그 원인은 따져 올라가면 모두 신포(身布)에 있다.
다산은 얼핏 아무 연관 없어 보이는 《시경》시를 끌어와서 신포의 폐단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허두로 삼았다.
새도 제 새끼를 위할 줄 아는데, 나라가 제 백성을 위할 줄 모른 데서야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허울뿐인, 아무 하는 일 없는 양식만 축내는 무능력한 양반에 대한 깊은 분노가 깔려 있다. 국
가가 그들을 비호하는 한 거짓 족보, 가짜 양반의 양산은 막을 길이 없으리라는 진단이었다.
중국에 생원이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 양반이 있는 것과 한가지다. 고정림은 온 천하 사람이 다 생원이 될까봐 근심하
였다. 마치 내가 온 나라 사람이 다 양반이 될까봐 염려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양반의 폐단은 더욱 심함이 있다.
생원은 실제로 과거에 나아가서 이 호칭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양반은 문과나 무과를 하지도 않았으면서 빈이름만 차고 있다. 생원은 그래도 정한 인원이 있는데, 양반은
도대체 제한이 없다.
생원은 세대에 따라 변하기도 하나, 양반은 한번 얻으면 백세가 되어도 절대로 놓지 않는다. 하물며 생원의 폐단을 양반
은 모두 겸하여 가지고 있다. 비록 그러나 내가 바라는 바가 있다.
만약 온 나라 사람을 전부 양반이 되게 한다면, 온 나라에 양반이 없게 된다.
젊은이가 있어야 어른이 대접받게 되고, 천한 자가 있어야 귀한 이가 드러나게 된다. 진실로 모두 다 존귀하다면 이것은
존귀한 사람이 없는 셈이 된다. 관자(管子)가 말했다. “온 나라 사람을 다 존귀하게 할 수는 없다. 모두 존귀해지면 되는
일이 없고, 나라에도 이롭지가 않다.” -〈고정림의 생원론에 발함[跋顧亭林生員論]〉 6-180
명말의 학자 고염무(顧炎武)는 〈생원론(生員論)〉을 지어 관부에 들락거리며 정치를 쥐락펴락하고, 형세를 등에 업고
제 고장에서 무단을 일삼는 생원의 폐해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천하의 생원을 다 없애야 정치가 맑아지고,
백성이 곤핍에서 소생하며, 문호를 세워 끼리끼리 노는 습속을 없앨 수 있고, 세상에 쓸모 있는 인재가 나오게 될 것이
라고 했다. 그들은 이익을 위해 패거리 짓고, 하는 일 없이 백성들을 등쳐먹는 도둑놈들이라고도 했다.
다산은 그의 이 글을 읽고 속이 후련해서 위 글을 지었다. 읽을 때는 후련했지만, 막상 우리나라의 형편으로 고개를 돌
리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우리나라의 양반은 중국의 생원보다 여러 면에서 한 수 위였던 것이다.
위에서 보았듯 그들은 신포도 안 내고, 생산에도 참여하지 않으며, 한번 양반이면 영원한 양반이다.
백성들은 나라를 갉아먹는 좀벌레 같은 양반이 되기 위해 제 조상을 바꾸는 짓까지 서슴지 않을 정도로 그 특권은 대단
했다. 다산은 한 수 더 떠서 아예 전 국민을 양반으로 만들자고 주장하였다.
다 양반이 되면 양반의 값어치가 없게 되니, 그렇게 해서라도 양반이라고 하는 이 우상을 타파해야 한다고 외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 놓고 끝에 가서는 관자(管子)의 말을 슬쩍 인용하여 글을 맺음으로써 문맥을 뒤집었다.
고전 수사법으로 치면 도미법(掉尾法), 즉 끝에 가서 꼬리를 탁 치면서 글을 마무리 짓는 수법이다.
전 국민을 양반으로 만들어, 양반이 아무 값없는 세상이 되면 이런 폐단이 없어지기야 할 것이다. 하지만 관자는 이렇게
되면 되는 일도 없을 뿐 더러, 나라가 망하게 된다고 했다. 그러니 결국 다산이 하고 싶었던 주장은 고염무가 말했던 것
처럼 천하의 양반을 모두 없애버려야만 나라가 제 자리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었던 셈이다.
이렇듯 다산은 이 말을 하기 위해 저 말을 툭 던지고, 이 말을 꺼내려고 저 말을 끌고 오는 대조변백의 방식을 즐겨 썼다.
이는 논지를 강화시키고, 비교와 대조의 과정에서 의미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효과가 있었다. 일종의 성동격서(聲東
擊西) 격으로 동쪽에서 소리쳐서 주의를 그쪽으로 끌어놓고 느닷없이 서쪽을 공격하는 방식이다.
다산은 일본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들의 학술서를 열심히 읽었고, 지도 등의 각종 정보도 많이 보아, 여러 편의 관련
글을 남겼다. 이런 글에서도 행간을 읽어내는 대조변백법이 자주 눈길을 끈다.
일본 사람은 오로지 바꿔서 속이는 것을 지혜로 여긴다. 무릇 다른 나라에 전해진 그 지도나 국사에는 은어가 많다.
일찍이 일본 지도를 보았는데, 부산에서 대마도까지의 거리를 28리라 했는데, 이것은 280리이다.
대마도에서 일기도까지는 48리라 했으니, 이것은 480리다. 나머지도 모두 이것을 본떴다. 그렇다면 아란타에서 일본
까지를 12,900리라고 한 것은 또한 129,000리인 셈이다. 자료에서 홍모국은 서북쪽 끝자락의 추운 나라인데, 아란타는
그 중 한 개의 주라고 했으니, 그 땅은 구라파와 리미아의 사이에 있다.
서양배가 본토에서부터 광동에 이르자면 수로가 구불구불하여 9만리나 되고, 광동에서 일본까지의 거리가 적어도
수만리는 된다. 12,000이라 한 것은 분명히 120,000인 것임을 의심할 수 없다.
이덕무가 아란타가 서남해 바다 가운데 있다고 하며, 일본과 12,000리 떨어져 있다면 마땅히 서북의 끝자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으므로 이처럼 의심해본 것이다. -〈유영재 필기에 대한 평[柳泠齋筆記評]〉 9-164
위 글은 유득공의 《고운당필기》 속에 적힌 아란타의 위치와 풍물에 관한 기록에 대한 다산의 평이다.
다산은 일본 사람들이 지도에서 거리를 적을 때 숫자를 한 단위 낮추는 관례를 들어, 일본과 아란타의 거리가 12,900리
라고 한 유득공의 기록이 사실은 129,000리로 보아야 함을 근거 자료를 끌어다가 변백하였다.
게다가 이덕무는 이 12,900리의 기록에 근거해서 아란타가 서북쪽 끝이 아닌 서남해 바다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다는
글을 남겼으므로 이를 반박한 것이다.
이어지는 글에서 다산은 곤여도의 위도까지 살펴 거리 문제의 논거를 확실하게 매듭지었다.
또 《징비록》에서 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에 사신 가서 풍신수길을 만나고 온 기록을 보고 쓴 다음 글에서도 다산의
대조변백법은 흥미롭게 펼쳐진다.
저들이 비례(非禮)로 우리를 대접하는데도, 우리는 두려워 몸을 굽혀 땅에 엎디어 감히 한 마디를 꺼내거나, 한 번의
대화를 나누어, 임금의 명을 높이고 나라의 체통을 지키지 못 하였으니 어찌 옳다 하겠는가? 모시는 신하가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은 예를 갖출 필요가 없음을 보인 것이고, 떡 한 그릇에 탁주 두 잔이라는 것은 초나라 사신의 거친
음식이다. 예를 마치기도 전에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서 간편한 복장으로 아이를 안고 나와 시녀를 불러 맡기는 것은
우리를 노예로 취급한 것이다. 그런데도 황윤길은 한 마디도 못하고 물러나왔으니 어찌된 것인가?
-〈징비록의 사사에 대한 평[懲毖錄使事評]〉9-155
다산은 풍신수길이 우리나라 사신을 경멸하여 대접한 《징비록》의 장면을 읽고서, 황윤길이 만난 것은 풍신수길이
아니라 일개 교위를 풍신수길인 것처럼 속여 우리를 시험한 것일 뿐이었다고 단안했다.
나라의 사신으로 갔으면 교린의 예를 갖추어 이쪽의 위의를 보이지 않고, 남의 임금을 만나러 가면서 정작 해야 할
말은 한마디도 못하고 오직 교만하게 교자를 타고 입궁하고, 굳이 당에 올라가 의식을 행한 것만 자랑으로 여긴 것을
탄식했다. 이에 그들이 우리를 업신여겨 기롱한 것이니, 그들에게 속임을 당하고 와서도 이를 모른 채 귀국해서 사실
인양 보고했다. 그러니 그들이 어찌 일본의 침략을 꿈에서라도 예견할 수 있었겠느냐고 다산은 통탄했다.
다산이 《아방강역고》나 〈산행일기〉 등에서 현재의 지명을 옛 기록과 대조하여 위치를 확정하고, 고증의 근거로
삼는 장면에서도 어김없이 대조변백법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밖에 문집에 실려 있는 수많은 논변류의 글들도
하나하나의 관련 자료를 모아, 이것과 저것을 대조하고 맞추어 보아 엄정한 자기 논리를 세우고 있는 예들이다.
다산은 말한다. 주장을 세우려거든 근거를 찾아라. 모든 사실이 진실은 아니다. 덮어놓고 앞선 기록을 믿어서는 안 된다.
행간을 살펴 현상에 현혹되면 안 된다. 앞뒤를 따지고 진위를 가려서 진실을 밝혀라. 의미는 이것과 저것의 ‘사이’,
여기와 저기의 ‘중간’에 있다. 갈래를 나누고 견주고 가늠해서, 현상 속에 숨겨진 진실을 찾고, 문제의 핵심을 장악하라.
7-5 허명공평법(虛明公平法)
5) 허명공평법(虛明公平法) : 속셈 없이 공평하게 진실을 추구하라
너무 굳세게 고집을 부리는 곳에 이르러서는 또 사람으로 하여금 염려되고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게 하는군요.
허명하고 공평하여 아무 걸림 없는 것이 기쁜 것만은 같지 않습니다. -〈신재중에게 답함[答申在中]〉 8-192
맹목적 추종과 타협을 거부하라
허명공평(虛明公平)은 마음을 텅 비워 다른 속셈이나 전제를 깔지 않고 과제를 탐구하는 태도를 말한다.
가설을 세워 논거로 입증하는 것은 공부의 당연한 절차요 과정이다. 하지만 색안경을 끼고서 미리 결론을 도출해 놓고,
제게 유리한 정보만 아전인수격으로 끌어들이고, 불리한 것은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데서 항상 폐단이 생긴다.
그렇게 내린 결론은 마음 먹기 따라서는 같은 자료를 가지고 그 정반대의 논의도 가능하다.
다산은 학문에 신성불가침은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경전의 기본 텍스트만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백지 상태에서
검토하고 재단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가 당대 학자들에게 대단히 거북했던 것은 여기서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다산이 중시한 것은 텍스트의 진실일 뿐, 선학의 견해에 다시 주석을 다는 것이 아니었다. 텍스트의 진실이란 무엇인가?
읽어서 선명하게 납득되지 않을 때 누가 보더라도 억지스럽지 않게 맥락을 소연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후대의 학술이 세상에서 버림받게 된 것은 학자가 허명공평의 길을 버리고 인순고식의 추종을 일삼은 데서 말미암는
다고 다산은 믿었다.
덮어놓고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것은 위험하지만, 움직일 수 없는 객관적 논거에 기초하여 의견을 제시하는 것조차 원천
적으로 차단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다산은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다산이 보기에 당시 학자들은 추종이 아닌 맹종을 일삼는 한편으로, 세상의 기호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주견 없는 존재들이었다.
학문이 세상에서 미움 받은 지가 오래입니다. 바르게 앉아 깊이 생각할 때는 양심이 조금 드러나다가도 사람과 마주
하고 사물과 접할 때는 문득 아첨하여 용납되기만을 구하려 듭니다. 농사꾼과 만나면 농사일을 말하고, 장사치를
만나면 장사 일을 이야기 하지요. 대부분 자기를 버리고 외물을 따름을 면치 못하니, 진실로 평생의 고질이라 하겠습
니다. 이제 그대의 말은 모두 우뚝하고 시원스러워 만 명의 사내로도 빼앗기 어려운 기상이 있습니다.
이는 모든 새싹을 북돋우고 시든 잎을 소생시키기에 충분하니,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보내오신 편지에서 접어
두고 말하지 않은 곳이 있습니다. 대개 이즈음의 박잡한 병통은 스스로 박잡함에 나아간 것일 뿐입니다. 참 이상도
하지요. 일종의 풍기가 휩쓸 듯 땅에 퍼져 동서남북 할 것 없이 한데 섞여 투합하니, 또한 어찌 일찍이 다른 까닭이
있어 그런 것이겠습니까? 도의 언덕은 하늘까지 닿아 있고, 사다리의 높이는 차이가 있게 마련이니, 혹 내 소견이
미치지 못한 곳이 있으면 또한 마땅히 더 노력하고 우러를 뿐입니다. -〈방산에게 답함[答方山]〉 8-100
학문이 세상에서 대접을 못 받고, 학자가 존경은커녕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것은 주체를 굳건하게 세우지 못하고, 자꾸
바깥을 기웃거리기 때문이다. 염불보다 잿밥에 마음이 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다 사람 좋다는 말을 들으면서
세울 수 있는 큰 뜻은 없다. 세상이 다 박잡하다고 내가 박잡한 것의 변명을 삼을 수는 없다. 세상이 한 통속으로 작당
해서 박잡함으로 나아간대도 덩달아 휩쓸릴 일이 아니라 더 연찬하고 더 노력해서 깨달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공부는 맹목적인 추종과 타협을 거부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편견을 버리고 선입견을 배제하라
다음은 이재의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대저 소소한 자구의 훈고는 이렇게 보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생각이 같으면 진실로 기쁘지만,
다르다 해도 또한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인(仁)’자의 뜻에 이르러서는 성인의 도와 성인의 학문에 크게 관계
되는 핵심 강령이고, 치심양성(治心養性)하고 행기수신(行己修身)하는 근본이 되므로, 털끝만큼만 차이가 나도 마침
내는 서로 천 리 만 리나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만약 이대로 끝까지 나아가면 마침내 하나로 귀결되는 날이
없게 되겠지요. 이렇게 되면 비록 골육처럼 정답고 부부처럼 좋게 지낸다 해도 도학의 문로에서는 마침내 도를 함께
하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비록 자나 깨나 그리워하고 마음으로 굳게 맺어져 있더라도 마침내 이 같은 가리움이 없는
것만은 같지 않습니다. 이런 까닭에 저는 오직 세월이 약이 되기만 바랄 뿐입니다. 이제 감히 다시 말하지 않는 것은
마침내 절망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여홍에게 답함[答李汝弘]〉 8-162
이때 다산은 이재의와 인(仁)의 개념 및 사단(四端)과의 관계에 대해 치열한 논전을 벌이고 있었다. 다산은 이보다 앞선
편지에서 만약 인에 대한 이재의의 주장이 사의(私意)아닌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이라면 신장(腎腸)을 다 태우고 고혈
을 쥐어짜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토론을 멈추지 않겠다고 적은 바 있다.
다산이 이 토론에서 가장 못 견뎌 한 것은 상대가 대동지론(大同之論), 즉 기성 학계의 편견을 굳게 고수하면서, 여기서
조금만 벗어나면 귀를 막고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퇴계와 율곡의 주리설(主理說)과 주기설(主氣說)에 대해서도 다산은 허명공평에 입각하여 새로운 견해를 제출했다.
퇴계는 “사단(四端)은 이(理)가 발하고 기(氣)가 이를 따르며, 칠정(七情)은 기가 발하고, 이가 기를 탄다.”고 했다.
율곡은 “사단칠정은 모두 기가 발하고 이가 기를 탄다.”고 했다.
후세의 학자들은 각각 들은 바만 높여, 무리지어 어지러이 다투어 연나라와 월나라처럼 아득히 멀어져, 한 곳으로 돌아
갈 수가 없게 되었다.
내가 일찍이 두 분의 글을 취해 읽고, 꼼꼼히 그 견해가 말미암아 나뉘어진 곳을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두 분이 말한
이(理)니 기(氣)니 하는 것은 글자는 비록 같지만 가리키는 의미는 부분적인 것과 전체적인 것의 차이가 있었다.
즉 퇴계는 퇴계대로 하나의 이기를 논하였고, 율곡은 율곡대로 하나의 이기를 논한 셈이어서,
율곡이 퇴계의 이기를 취해다가 이를 어지럽힌 것이 아니었다. -〈이발기발에 대한 변증[理發氣發辨]〉 1, 5-192
퇴계는 사단(四端)만 이발(理發)이요, 칠정(七情)은 기발(氣發)이라 했고, 율곡은 사단칠정이 모두 기발이승(氣發理乘)
이라 했다. 표면적인 이 언급만으로 보면 율곡과 퇴계는 사단(四端)이 말미암아 나온 바를 두고 명백하게 견해가 갈린
것이다. 여기서 영남학파의 주리설과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기설이 갈리고, 이 두 견해는 후학들에 의해 계속 반복
되는 동안 도저히 만날 수 없는 간극이 벌어졌다.
하지만 다산은 퇴계와 율곡이 사용하고 있는 이기(理氣)의 원관념이 애초에 달랐기 때문에 생긴 오해일 뿐, 두 분의
견해가 본질에서 다른 것은 아니라고 단안하였다.
즉 퇴계의 이기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자리한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을 가리키는 협의의 개념이었고,
율곡의 이기는 사물의 근본 법칙인 형이상과 사물의 형질인 형이하를 가리키는 광의의 개념이었다는 것이다.
다산은 사단이 본연지성의 발로라는 점에서 이발(理發)이 맞다고 했다. 그렇지만 태극 이래의 이기를 총괄하여 말한
율곡의 주장이 이에 정면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말하자면 개념 적용의 층위가 다른 것을 동일선상에 놓고 논의하면서 생긴 착시현상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후대로 오면서 두 논리는 점점 더 극단화 하여 서로 합치될 수 없는 대립 양상을 빚었다.
퇴계는 일생 치심양성(治心養性) 공부에 주력하여 이발과 기발로 나눠 마음이 밝아지지 않을까만을 염려했다.
그러니 후학들이 이 뜻을 살펴 체득한다면 바로 퇴계의 충직한 문도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억탁으로 왜곡 말고 진실을 직시하라
그보다 6년 전 황산(黃山)의 모임에서 이미 여강을 이단이요 사문난적이라 하여 왕망(王莽).동탁(董卓).조조(曹操).
유유(劉裕) 등에게 견주었다니 이럴 리가 있겠습니까? 또 황산의 모임이 있기 12년 전에 우암이 이미 이기설(理氣說)을
지어 여강을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에다 난신적자(亂臣賊子)로 여겼다니, 이럴 리가 있겠습니까?
진실로 이와 같다면 앞뒤로 수십 년 사이에 우암의 언론은 한결같이 바뀐 적이 없는데, 여강을 난신적자로 여겼다가
갑자기 난신적자를 여덟 단계나 뛰어넘어 곧장 진선(進善)에 올렸다는 것은 너무도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대저 붕당이 나뉜 이래로 문자를 다 믿을 수 없는 것이 많기가 이와 같습니다. 벌써 수십 년 전에 그가 난신적자임을
알았고, 그 사람이 또한 개과천선했다는 분명한 증거도 없는데도 전형을 맡자마자 여덟 단계를 뛰어넘어 발탁해서
세자를 보도(輔導)하는 직분을 주는 것이 가당키나 합니까? -〈이여홍에게 줌[與李汝弘]〉 8-180
이번에는 기해년 예론(禮論)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벌어진 예송논쟁과 관련된 논난이다.
인조의 둘째 아들이었던 효종이 죽자 그 계모인 자의대비가 1년복을 입어야 하는 가 3년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촉발된 예송논쟁은 예의 적용을 둘러싸고 당파의 명운을 걸고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전투였다.
이 싸움의 중심에 우암 송시열과 여강 윤휴가 있었다. 1차전은 우암 쪽의 승리로 끝났고, 그 여파로 윤휴는 사문난적에
몰려 죽었다. 2차전은 남인의 대반격이 있었다. 이 논쟁은 겉으로는 예론의 해석에서 비롯되었지만 사론(士論)의 극심한
분열을 가져왔다. 예학은 공리공담(空理空談)에 흐르고, 마침내는 정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논리로 변질되고 말았다.
다산은 우연히 〈우암연보〉를 보다가 기해년 예론이 일어나기 한 해 전, 우암이 전형(銓衡)의 지위에 오르자마자 당시
9품의 말단 관리로 있던 윤휴를 무려 여덟 단계나 승진 시켜 정 4품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이란 청요직(淸要職)에
발탁한 기록을 읽게 되었다. 이는 다음 해 기해예론이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우암이 여강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와 나라 일을 함께 할 생각까지 지녔음을 확인케 해주는 명백한 근거였다.
당시 노론 쪽에서는 사실은 기해예론이 있기 십여 년 전부터 우암이 여강이 사문난적임을 익히 알아 배척했다는 주장
들이 근거도 없이 기정사실화 되고 있던 터였다. 다산은 앞뒤 정황이 이토록 명확한데 이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앞뒤
안 맞는 주장만 하고 있으니, 만일 그렇다면 우암이 줏대도 없이 이랬다저랬다 한 사람이었다는 말이냐며, 후대 기록을
신뢰할 수 없는 까닭을 하나하나 들어서 밝혔다.
모두 억탁과 선입견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진실을 외면하려 든 결과, 허명공평에서 멀어졌다고 본 것이다.
당시 노론과 소론, 남인 등으로 갈라진 붕당의 폐습은 복장까지 서로 다르게 만들어, 입은 옷의 모양만 봐도 당색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머리에 쓰는 건(巾) 조차도 노론은 홑겹의 선건(禪巾)을 쓰고 소론은 겹건(裌巾)을 썼다.
남인들은 이 두 가지가 모두 주자의 횡첩법(橫㡇法)과 다르다고 하여 아예 복건을 쓰지도 않았다.
한 조정의 신하들이 당색에 따라 서로 다른 모양의 복건을 쓰거나 아예 쓰기를 거부하는 꼴이었으니 도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쳤다. 급기야 1796년 겨울 정조가 남인들을 불러 복건을 쓰고 입궐할 것을 명하기에 이르렀다.
남인들 사이에서도 복건의 제도를 어찌할 것인가로 의견이 분분했다. 선건도 겹건도 아닌 제 3의 제도를 만들자는 주장
까지 나왔다. 이에 다산은 복건의 제도가 공자의 시대에는 있지도 않았고, 진(晉)나라 때 와서야 사대부의 복장이 되었
으며, 《주자가례》에 이르러 비로소 예복이 되었다고 하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그 근본을 궁구해 보면 도포(道袍)나 접리(接䍦) 등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미 후세에 나온 것이므로 시속을 따라도
무방합니다. 양끝을 가로로 하느냐 세로로 하느냐로 왜 굳이 괴롭게 논쟁하겠습니까? 어떤 이는 “세로로 하는 것은
옛날 중들이 하던 복건의 제도다.”라고 말합니다. 진실로 승건(僧巾)이라 하여 꺼린다면 지금 입고 있는 도포도 분명히
도사가 입던 것이니 또 어떻게 입고 나가야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어찌 승려와 도사의 사이에 또한 후박(厚薄)과 취사(取捨)의 구별할만 한 것이 있겠습니까?
-〈복암에게 답함[答茯菴]〉8-49
어차피 복식은 시대에 따라 변하니 시속을 따르면 그뿐이지 여기에 무슨 원칙이 있을 필요가 있겠느냐는 주장이다.
지금의 복건은 승건(僧巾)에서 나온 것인데 유자가 어찌 중들이 쓰던 제도를 가져다 쓰느냐는 내부의 반발도 있었다.
그러자 다산은 도포는 도사들이 입던 옷인데, 그럼 그것은 왜 입느냐고 나무랐다.
막상 왕명에 따라 복건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어, 홉과 겹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 할 때도 다산은 “속담
에 이왕 물릴 바에는 큰 호랑이에게 물리라고 했다.”는 우스개 말로 노론의 홉복건을 쓰게 했다.
적어도 복건만큼은 옳고 그름을 따질 사안이 못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소한 명분에 얽매임 없이 툭 터진 다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음을 텅 비우고 기운을 가라 앉혀라
주신 글 가운데 부동심(不動心) 대목은 맹자의 양용(養勇)의 교훈과 딱 맞아 떨어집니다.
저처럼 겁 많고 물러터진 사람이 마땅히 마음에 새겨야 할 내용입니다. 하지만 지려(智慮)가 능히 굳세지 않아 마음속에
이를 굳게 붙들어 꼼꼼하게 간직해 두지 않고, 한갓 억지로 고집하고 정체되는 것을 굳셈이라 여긴다면 또한 능히 오래
유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근래 들어 습정양졸(習靜養拙), 즉 고요함을 익히고 졸박함을 기르면서 세간의 백 천 만 가지 즐겁고 뜻에 맞는 일들이
모두 다 자기 자신이 안심하기(安心下氣), 곧 마음을 편안히 하고 기운을 차분하게 하는 것만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
습니다. 마음이 진실로 편안하고 기운이 차분해 지면 바야흐로 눈앞에 접촉하는 모든 일들이 내 마음 안의 일이 아님이
없어, 분하고 시기하고 소견 좁고 사나운 감정이 점점 소멸됨을 알게 될 것입니다. 눈도 이로 인해 밝아지고, 눈썹도
펴지며, 입술은 웃음을 머금게 됩니다. 혈맥이 화창해지며, 사지도 편안해져서, 이른바 뜻 같지 않은 일이 있다 해도 모두
기쁘게 즐길 수가 있고, 일체의 헐뜯음과 꾸짖음, 굽신거림과 옹색함이 내 마음을 흔들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뒤에는 능히 일을 당하더라도 용맹하여 도저히 막을 수가 없게 되니, 이것이 이른바 증자(曾子)의 수약(守約)입니다. -〈만계에게 답함[答蔓溪]〉 8-111
사람들은 용맹을 흔히 집체(執滯), 즉 자기 주장을 꺾지 않고 정체되어 바꾸려 들지 않는 고집과 착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목을 빼고 어깨를 올려 사나운 기세로 남을 꺾으려고만 들지, 정작 남의 정당한 얘기에 귀를 기울일 줄은
모른다. 공부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양용(養勇) 공부는 덮어놓고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습정양졸(習
靜養拙)로 안심하기(安心下氣) 하며, 자신을 낮춰 속으로 침잠하는 공부가 양용의 요법이다.
군자의 용맹은 오히려 수약(守約)에 있다. 마음을 비우고 입을 다물고 고요 속에 침잠하면 눈이 밝아지고 정신이 맑아
진다. 그리하여 외물이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역경이 내 정신을 침식하지 못한다.
맑은 정신으로 바라보니 지켜야 할 것과 바꿔야 할 것의 분간이 선명해진다.
바꿔야 할 것을 지키려 들거나, 지켜야 할 것을 바꾸려 드는 일도 없게 된다.
다산은 말한다. 허명공평의 공부는 수약(守約)에서 나온다. 마음을 텅 비워야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집착을 버려야
객관적 시선을 얻을 수가 있다. 소리 지르지 마라. 목청만 높인대서 될 일이 아니다. 편견을 버리고, 선입견을 버리고,
추종과 타협을 거부하라. 텅 빈 마음을 돌아 나와 긴 울림을 주는 진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8-1 분수득의법(分授得宜法)
8. 과정을 단축하라 -효율성을 강화하는 집체적 지식경영
1) 분수득의법(分授得宜法) : 역할을 분담하여 효율성을 확대하라
옛날 선왕들은 사물을 쓰는데 지혜가 있었다. 소경에게는 음악을 살피게 하고, 절름발이에게는 대궐문을 지키게 했다.
환관들은 궁궐을 출입하게 하고, 곱사등이나 병든 자, 불구자 등도 각각 마땅한 곳에 썼다.
이 일은 가장 우선 살펴 보아야 한다. -〈학유가 떠날 때 노자삼아 준 가계[贐學游家誡]〉8-28
작업을 분배하여 팀워크를 구축하라
분수득의(分授得宜)는 작업을 진행할 때 역량에 따라 역할을 나누어서 효율을 극대화 하는 것이다.
규모가 큰 일은 혼자서는 다 감당해낼 수가 없고, 한다 해도 시일과 노력이 너무 오래 걸린다. 이럴 때는 집체 작업이
필요하다. 특출한 개인이 각자 하는 작업보다 부족한 구성원들이 힘을 합쳐 팀워크를 이루면 작업의 효율성이 배가된다.
혼자 다 하지 않고 훈련과정을 거쳐 함께 작업을 하면 전체가 서서히 함께 향상된다.
처음에는 느려보여도 나중엔 천하무적이 된다.
역할 분담의 중요성에 대해 다산은 여러 곳에서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리고 강진 유배기의 그 엄청난 작업은 다산
혼자만의 성과가 아니라 그곳에서 길러낸 여러 제자들과의 협동작업, 집체작업의 결과였다.
이제 그 구체적인 방법과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집에 종 하나가 있는데, 너희 형제는 언제나 ‘힘이 약해 일을 맡길 수가 없다’고 투덜댄다. 이것은 너희가 매번 난장이
더러 산을 뽑아오라는 식의 일을 시키려 들기 때문에 그 힘이 약한 것을 근심하는 것이다.
집안을 다스리는 법은 위로는 바깥주인과 안주인에서부터 남녀노소, 형제와 동서에 이르기까지, 아래로 노비의 자식
까지도 무릇 다섯 살 이상이 되면 각각 맡은 일을 나눠주어 한 시각도 놀며 쉬지 않게 한다면 그 가난하고 군색함을
근심하지 않게 된다.
내가 장기(長鬐)에 있을 때 주인집의 성씨는 어린 손녀가 겨우 다섯 살인데도 이를 시켜 마당에 앉아 솔개를 쫓게 했다.
일곱 살 짜리에게는 막대를 손에 들고 참새를 쫓게 시켰다. 나머지 한솥밥을 먹는 사람도 모두 책임을 맡겼다.
이것은 본받을만 하다. 집에 노인이 있으면 칡으로 새끼를 삼고 노파는 언제나 실꾸리 하나를 잡고서 손에서 풀어 감
아야 한다. 비록 이웃 마을에 마실을 가더라도 손에서 놓아서는 안 된다. 이런 집은 반드시 남는 식량이 있어 가난을
근심하지 않는다. -〈학유가 떠날 때 노자삼아 준 가계[贐學游家誡]〉8-28
힘이 약하면 약한 대로, 어리면 어린 대로 맡을만한 일을 찾아 어느 한 식구도 그저 놀고 먹는 일이 없게 했던 성씨처럼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제각기 맡은 바 직분을 수행할 때 전체 조직이 정상적으로 가동된다. 훌륭한 조직은 리더의
탁월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구성원간의 단단한 팀워크를 통해 만들어진다.
팀워크의 힘은 리더가 없을 때 대번에 드러난다. 위기 상황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리더가 없을 때 비틀거리는 조직은
큰 일을 해낼 수가 없다. 작은 위기에도 갈팡질팡해서는 큰 시련을 견디지 못한다. 효율적인 협동을 통해 능률을 극대
화해야 한다. 리더 없이도 저절로 굴러갈 수 있도록 팀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그리고 그 구성원들이 그 과정에서 리더쉽을 기를 수 있어야 한다.
한 가지에 집중하여 역량을 드러내라
사람은 저마다 역량의 차이가 있다. 잘하는 일이 있고 못하는 일이 있다. 맹상군의 3천 식객 중에는 도둑질 잘 하는 자와
성대 묘사 잘하는 자도 있었다. 이들은 위기 상황에서 대궐 창고에서 흰여우 갖옷을 훔쳐내고, 닭 울음 소리를 흉내 내서
성문을 열게 했서 주인의 목숨을 구했다. 훌륭한 리더는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그들이 지닌 최대치를 도출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개성을 무시하고 평준화 시키는 방식은 안 된다. 부분의 합이 늘 전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상이 되려면 역량에 따라 안배하여 협동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해야 한다.
예전 서울에 있을 때 형의 시권(試券)을 보았는데, 경전의 뜻과 문사에 문맥이 통하지 않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가만히 의심했었지요. 하지만 지난번 남긴 시는 몹시 뛰어나더군요. 이제 보내온 편지의 말씀이 비록 실정
에 지나치지만, 글은 도리어 기세가 넘치고 굳셉니다. 그래서 비로소 쟁기 가는 소의 기술로 쥐를 잘 잡을 수는 없음을
알았습니다. 삼가 꾸짖어 주십시오. -〈채백륜에게 답함[答蔡伯倫]〉 8-106
채서공(蔡敍恭)이 다산의 문장을 크게 칭찬하는 편지를 보낸데 대한 답장의 한 대목이다. 과거에 제출한 시권(試券)의
글은 경전의 뜻도 정곡을 꿰뚫지 못했고, 이를 설명한 내용도 앞뒤가 잘 맞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하지만 이제 시와 편지의 문장을 보니 표현이 아름답고 기세가 대단하여 전혀 딴 사람 같았다. 그래서 소는 쟁기질에
능하고, 고양이는 쥐 잡는데 능하듯이 채서공의 역량이 과문(科文) 보다 일반 시문 쪽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하지만 다산은 이어지는 내용에서 채서공이 보낸 시에 병을 핑계로 화답하지 않았다. 또 편지의 끝에서는 구두에만
골몰하지 말고 완색(玩索) 공부에 힘쓰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충고를 얹어, 그가 바탕 공부에 주력하지 않고, 문예에만
골몰하는 것을 은근하게 지적했다.
이 《화식열전주(貨殖列傳注)》 1권은 고(故) 동산처사(東山處士) 정양흠(鄭亮欽)이 엮은 것이다. 정공은 성품이 차분
하고 두터운데다 학식이 넓고 문장이 고상했다. 공경(公卿)의 중망이 있었으나 지평산 가운데 숨어 살면서 포의로 일생
을 마쳤으므로 아는 자가 이를 애석해 한다.
돌아가신 아버님과 친하셔서 매번 들르면 대화가 끝나지 않았다. 한번은 이 책을 아버님께 보여주면서 서둘러 베껴 쓰
게 하였다. 마침 1796년 겨울에 규장각에서 교서(校書)할 때, 임금께서 널리 《사기》의 여러 가지 주해를 구하였다.
특히 〈화식전〉에 마음을 쏟으셨으므로 이 책이 마침내 드러나 쓰여졌다. 아, 선비는 진실로 한 가지 기예만 정통하더
라도 마침내 한번 드러남이 있는 법이다. 후학들은 힘쓸진저. -〈동산자의 화식전주에 발함[跋東山子貨殖傳注]〉 6-182
요컨대 이것저것 다 잘하려 들지 말고 한 우물을 파는 전문가 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정양흠이 《화식열전주》를 쓴 것은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요, 뒷날의 쓰임을 염두에 두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이 책의 내용이 재미있고, 읽다가 막힌 대목을 여기저기서 찾거나 혼자 궁리하여 풀이한 것일 뿐이다.
그때 우연히 베껴 써둔 이 책자가 훗날 이렇게 요긴하게 활용되어, 지평산 자락에서 숨어살다 세상에 이름을 알리지
못하고 죽은 한 재야선비의 이름을 오늘까지 남아 있게 했다.
한사람이 이것저것 다 잘할 수는 없다. 어느 한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자면 자신의 장점을 파악하여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해야 한다. 공연히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만 해서는 결국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만다.
훈련을 거듭하여 능력을 개발하라
다산은 처음 강진에 와서 머문 주막거리 집에서 아전의 자식 몇을 거두어 가르쳤다. 이후 다산초당으로 옮긴 뒤에는
외가인 해남윤씨 집안의 자제들을 비롯해 그 지역 양반가의 자제들을 모아 가르쳤다. 처음 이들을 가르치던 다산은
그 몰골이 하도 가증스럽고 한심해서 정약전에게 이런 편지를 쓰기까지 했다.
여기에도 내왕하는 소년이 몇 있고 배움을 청하는 어린 아이도 몇 됩니다. 모두 양미간에 잡털이 무성하고, 온몸에
뒤집어 쓴 것은 온통 모두 쇠잔한 기운뿐입니다. 비록 골육의 정이 무겁다한들 어찌 능히 깊이 사랑하겠습니까?
하늘의 운수가 이미 그러한지라 어찌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마치 이벽(李檗)이 말한 ‘독이 없어 그저 먹을 만한 물건’인
셈이니 장차 어디다 쓰겠습니까? -〈중씨께 올림[上仲氏]〉 8-218
다산초당 초기에 눈에는 초점이 하나도 없고, 머리는 헝클어져 지저분하며, 콧물을 흘리면서 맹한 표정으로 저게 무슨
말인가 하고 앉아있는 소년들의 정황이 눈에 선하다.
아무리 외가쪽 친족이라고는 해도 차마 정이 안 간다고 다산은 적었다.
그러나 이 잡털이 무성하고 온통 쇠잔한 기운뿐이던 이들이 다산의 훈도와 훈련를 거치면서 하루가 다르게 변모해갔다.
다음은 정수칠(丁修七)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다산초당에서의 공부 장면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을 살펴보니, 초고 상태로 완성되지 않아 잘못된 곳이 실로 많소. 그 중에서도 크게 놀란 곳은 다름 아닌 반곡공의
증직겸함(贈職兼銜)일세. 대저 춘추관 기주관(記注官)은 당하관의 직함인데, 예조참판과 양관제학을 어찌 기주관과
겸직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곁에서 지켜보던 여러 소년들도 모두다 선대부에게 애초에 높은 증직이 없었던 것으로
의심하였소. 아, 이것이 대체 무슨 일이오. 이것이 인편에 글을 보내 교지(敎旨)를 보자고 했던 까닭이라오.
이제 교지를 살펴보니 “통정대부 행청주목사 정 아무개는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동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
제학 예문관제학 세자좌부빈객에 추증된 자로, 만력 34년 정월에 전승에 의거하여 선무원종공신으로 추증한다.”고 적혀
있더군요. 어보(御寶)가 휘황찬란하고 묵적이 마멸되지 않았거늘 《가승(家乘)》에 기록된 것은 무엇 때문에 이처럼
착오가 생겼는지 모르겠구려. 덮씌었던 의혹이 풀리자 여러 사람의 마음도 환히 풀렸다오.
-〈반산 정수칠에게 보냄[與盤山丁修七書]〉 8-134
반곡공 정경달(丁景達)의 《가승》 기록에서 앞뒤가 전혀 맞지 않은 기록을 보고 교지와 대조해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을
적은 글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곁에서 지켜보던 여러 소년들’도 다 의심하였고, 뒤에 의혹이 풀리자 모두 상쾌해
했다는 대목이다.
처음에는 다산이 위 편지글의 앞 대목에서 묘사하고 있는대로 발을 묶어둔 꿩처럼 모이를 입에 대주어도 끝내 쪼지 못
하던 잡털 투성이의 가증스럽던 소년들이 몇 년 사이에 훌쩍 성장하여 스승과 함께 둘러앉아 토론을 하고 의견을 내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했던 것이다.
새로 검토해야 할 자료가 생기면 다산은 소년들에게 보여 그들의 의견을 물었던 모양이다.
이 또한 제자 교육의 한 방편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소년들은 자료의 신빙성에 일제히 의문을 제기하고, 이에 따라
또 다른 증빙 자료를 요구하여 확인하는 과정을 위 편지는 잘 보여준다. 질문을 던지고, 의문을 유도하여, 증거를 확보
해서 의혹을 해소하는 절차를 반복하면서 이들은 점차 복잡하고 심오한 경전 해석 작업에까지 참여하여 스승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강진 생활 초기에는 다산 혼자서 모든 작업을 감내했다. 그리고 초고가 완성되면 멀리 서울로 보내 자식에게 깨끗이
정서하여 제본해서 내려 보내게 했다. 하지만 이런 번거롭고 시일이 걸리는 작업도 제자들이 성장해 감에 따라 더 이상
불필요해졌다.
집체 작업으로 능률을 극대화하라
이후 다산초당은 집체작업에 의한 지식경영의 산실로 거듭났다. 다산의 현손인 정규영(丁奎英)이 1921년에 정리한
〈사암선생연보〉에 나오는 다음 한 대목은 다산초당에서 진행된 집체작업의 현장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 엄청나고 방대한 작업량의 비밀이 이 글을 통해 확연하게 드러난다.
공이 20년간 다산에 유폐되어 있으면서 연구와 편찬에 전념하여 여름 무더위에도 쉬지 않았고, 겨울 밤에는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제자 중에 경서와 사서(史書)를 부지런히 살피는 사람이 두어 명, 입으로 부르는 것을 받아 적어 붓을
나는 듯 내달리는 사람이 서너 명이었다.
곁에서 도와 먹으로 줄친 종이 위에 잘못 불러준 것을 고치고, 종이를 눌러 편편하게 하며, 책을 묶는 사람이 또 서너 명
이었다. 무릇 책 한 권을 저술할 때에는 먼저 저술할 책의 자료를 수집하여 서로서로 비교하고 참고하고 정리하며 정밀
하게 따졌다.
《시경》․《서경》에 관한 책을 저술할 때에는 먼저 《시경》․《서경》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춘추》를 고징할 때에는
먼저 《춘추》에 관한 자료들을 모았다. 그러므로 저술한 책의 경지(經旨)는 구름을 헤치고 햇빛을 보는 것 같지 않은
것이 없어서 조금이라도 희미하고 흐린 기운을 띤 것이 없었다.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
이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대개 이렇다. 1년 내내 초당은 풀 가동되었다. 제자들은 역량에 따라 카드 작업
하는 사람, 베껴 쓰는 사람, 교정보는 사람, 제본하는 사람 등으로 역할을 나눠 일사불란하게 작업을 진행했다.
작업 목표가 정해지면 가장 먼저 관련 정보를 수집했다. 정보가 모이면 각각의 정보를 하나하나 교차 대조했다.
정보의 우열과 정오(正誤)를 판단하고, 스승이 내려준 구체적이고도 상세한 지침에 따라 분량을 나눠 작업했다.
일단 이들의 1차 작업이 끝나면 다산이 이를 총괄하여 점검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잘못된 곳을 수정 검토했다.
《목민심서》 편찬과정을 이에 비추어 추정해보면 이렇다. 다산은 먼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목민관의 부임에서
이임까지의 과정을 12단계로 나눠 단계별로 각 6조항씩 72개 항목을 설정했다.
이 목차와 범례에 따라 다산은 중국의 23사와 우리나라 역사기록 및 역대 문집에서 목민관의 사례를 가려 뽑는 작업을
시작했다. 제자들마다 능력에 맞게 적절한 분량의 작업량이 할당되었다.
제자들은 주어진 지침에 따라 초서(鈔書) 즉 카드 작업에 돌입했다.
새소리만 적막을 깨는 초당의 여름날은 좁은 공간에 여럿이 들어앉아 이따금 책장 넘기는 소리, 한쪽에서 먹 가는 소리,
웅얼거리며 책 읽는 소리만 들려오는 기괴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계절이 바뀌고 겨울이 오는 동안 각종 서적에서
뽑아낸 작업카드는 방 한 켠에 차곡차곡 쌓여갔을 테고, 그 한편에서 다산은 끊임없이 작업을 마친 카드를 검토하며
항목의 타당성을 중간 점검하고, 전체 작업을 진두지휘 했다. 다산은 실제로 이 모든 과정을 진두지휘한 야전사령관이
었고, 총괄기획자였으며, 책임편집자였다.
실제 젊은 시절부터 집체작업은 있었다. 34세 나던 1795년 금정찰방으로 쫓겨나 있을 때, 다산은 온양 석암사에서 열흘
동안 목재 이삼환을 좌장으로 이 지역의 선비 십여 명과 함께 집체 작업으로 성호 선생의 《가례질서(家禮疾書)》를
교정하고 편집한 일이 있다. 다산의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는 이 때의 작업 과정과 공부내용을 꼼꼼히 정리한 것
이다.
다음은 그 이듬해 규영부 교서(校書)가 되었을 때의 기록이다.
병진년(1796) 겨울에 나와 이익진, 박제가가 부름을 받아 규영부로 들어가 《사기》를 교정하였다. 내고(內庫)에 소장된
여러 판본의 《사기》를 모두 내오게 하여 이동(異同)이 있는 곳마다 여러 판본에서 가려 뽑아 좋은 것을 취하라고 명하
셨다. 이에 본문을 중심으로 각주를 찾고, 각주를 바탕으로 백가의 서적을 뒤져서, 하나라도 고증할만 한 것이 있으면
문득 감히 내주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내고에 비장된 서적들을 열에 한 둘은 엿볼 수 있었다.
-〈규영부교서기(奎瀛府校書記)〉6-147
여럿이 함께 상호 점검해가며 하나하나 원문을 대조하고 주석을 확인하고, 관련 원전을 살피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집체 작업의 경험이 강진 시절의 효율적인 지식경영의 토대가 되었던 셈이다.
다산은 말한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 혼자 다 하려들지 마라. 능률은 오르지 않고 힘만 빠진다. 다만 집체 작업이 위력을
발휘하려면 구성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저마다 잘할 수 있는 일을 골라서 믿고 맡겨라.
중간중간 점검하고 체크하면서 부족한 점을 채우고 넘치는 것을 덜어내라. 그렇게 해서 한번 갖춰진 팀워크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반복해서 확대 재생산된다. 가속도가 붙게 된다.
8-2 정과실천법(定課實踐法)
2) 정과실천법(定課實踐法) : 목표량을 정해 놓고 그대로 실천하라
을묘년(1795) 겨울 내가 금정에 있을 때였다. 이웃 사람에게서 《퇴계집》 반부를 얻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세수를 마치는 대로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를 한 편씩 읽어 나갔다.
그런 뒤에야 아전 관속들의 문안 인사를 받았다. 정오 쯤 되면 그 글의 내용을 한 조목씩 부연하여 떠오르는 대로 적어,
스스로 깨우치고 반성하곤 했다. 돌아와 이를 이름 지어 《도산사숙록》이라 하였다.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9-83
계획에 따라서 목표량을 달성하라
정과실천(定課實踐)은 매일 일정한 목표를 세워놓고 계획에 따라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안일을 기뻐한다. 공부도 규칙적인 리듬을 갖지 못하면 제풀에 나가떨어지기 쉽다.
전체의 계획을 세우고 거기에 소용되는 날짜를 계산한 후, 하루에 할 수 있는 작업량을 결정하는 것까지가 정과(定課)다.
문제는 실천인데, 아이들의 방학 중 생활 계획표처럼 세워만 놓고 지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다산은 비방을 입고 금정찰방에 좌천되어 갔을 때, 이웃에서 전질도 아닌 반토막만 남은 《퇴계집》을 우연히 얻었다.
인간에 대한 환멸로 가득하던 그때 마침 펴든 대목이 퇴계의 편지를 모아둔 부분이었다.
처음엔 무료해서 한두 편 읽다가 나중에는 정신이 번쩍 들어 자세를 고쳐 앉아 하루에 한 편씩 아껴서 읽었다.
아침에 세수한 후 자세를 바로 하고 소리를 내서 편지 한 통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그리고는 오전 내내 아침에 읽은 내용을 음미했다.
점심을 물리고 나서 남들 낮잠 잘 시간에 편지글에 대한 자신의 독후감을 하나하나 메모했다.
이렇게 해서 다산은 모두 33통의 편지에 자신의 평설을 달았다.
〈도산사숙록〉이란 제목의 소책자가 만들어졌다.
제목의 의미는 퇴계 선생을 마음으로 만나 스승으로 사숙했다는 뜻이다.
하루 한편씩의 독서가 참으로 달고 고마웠던 듯, 다산은 다른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근자에 퇴계 선생의 유집을 얻어, 마음을 가라앉히고 찬찬히 음미하고 있습니다. 그 깊고 오묘함과 아마득함은
실로 후생말류가 감히 엿보아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상스럽게 정신과 기운이 편안해지고 뜻과 생각이 차분해져서 피와 살과 근육이 모두 안정되고 가라앉아,
지금까지의 조급하게 날뛰던 기운이 점점 내려갑니다.
아마도 이 낡은 책 한 권이 과연 이 사람의 병통에 약이 되는 것인지요. -〈이계수에게 답함[答李季受]〉8-53
어떤 글은 읽다 말고 기뻐 뛰고 감탄하며 무릎을 치다가,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당시 그의 처지와 내면이 그만큼 황폐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우연히 얻은 한 권의 책으로 실의의 마음을
다잡아 야금야금 곶감을 빼 먹듯 아껴가며 한편한편 읽었다.
실제 옛 선비의 기록 속에서 하루의 일과를 계획 세워 적은 글은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새벽에 잠깨면 《논어》 본문 한 편을 묵묵히 외운다. 아침에 일어나 다시 앞서 외운 《논어》 가운데 의심나는 곳을
찬찬히 살핀다. 세수하고 머리 빗은 뒤에 《주역》 〈계사(繫辭)〉의 한 장 또는 두 세 장씩을 힘닿는 대로 읽는데, 30번
씩 읽는다. 밥 먹은 뒤에는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그리고 《고증초고(考證草藁)》
를 자세히 따져가며 읽고, 몇 페이지씩 베껴 쓴다. 피곤하면 눈을 감고 고요히 앉아 있는다.
어떤 때는 《남헌집(南軒集)》을 몇 페이지 뒤적여 본다. 아침 식사 전에 읽은 횟수가 30번을 못 채웠으면, 추가로 읽어
숫자를 채운다. 저녁밥을 먹은 뒤에는 등불을 밝혀놓고 〈계사〉를 10번씩 줄줄 읽는다.
또 매일 밤마다 지금까지 읽은 것을 한데 합쳐 외우고, 날마다 읽은 것을 되풀이해 음미한다.
임성주(任聖周, 1711-1788)가 한 겨울을 옥화대(玉華臺)에서 나며 공부할 당시의 하루 일과를 적은 글이다.
책 읽기로 시작해서 책 읽기로 끝이 나는 하루였다. 같은 책을 읽고 또 읽어 나중엔 아예 통째로 외워 버렸다.
옛 선비들은 이렇게 한 겨울에는 산사를 찾거나 궁벽한 암자로 들어가 독서로 삼동을 났다.
동접(同接)의 벗들과 짝을 지어 서로 독려하며 공부하기도 했다. 이때 임성주는 한 겨울 독서의 목표를 《논어》와
《주역》 〈계사전〉, 그리고 《주자대전》에 두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한번 산속에 들어갈 때마다 독하게 사려앉아 뚝심 있게 공부했다.
여럿이 집중하여 독려하고 경쟁하라
다산은 17세 나던 1778년 화순현감으로 내려가 있던 아버지를 따라가서 그곳에 머물렀다. 그해 겨울 둘째 형 정약전과
함께 근처 동림사(東林寺)로 들어가 형은 《상서》를, 자신은 《맹자》를 읽었다. 이 때 일을 다산은 이렇게 회고했다.
마침 첫눈이 쌀가루처럼 흩뿌려 산골물이 얼려고 했다. 산림과 대나무의 빛깔은 모두 새파랗게 질려 잔뜩 움츠렸다.
아침저녁으로 소요하면 정신이 맑고 엄숙해졌다. 자고 일어나 바로 시냇물로 달려가서 양치질하고 세수 했다.
밥 때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여러 비구들과 함께 줄지어 앉아 밥을 먹었다. 저물어 별이 보일 때면 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불며 읊조렸다. 밤에는 게송과 불경을 외우는 소리를 듣고 나서 다시 책을 읽었다. 이와 같이 한 것이 무릇 40일이었다. -〈동림사독서기(東林寺讀書記)〉 6-112
구체적 정과의 내용은 보이지 않지만, 40일간 새벽에 일어나 아침밥 먹기 전까지, 아침 식사 후에 점심 때까지, 다시
식사 후 잠깐 쉬고 저녁 때까지 계속 책을 읽었다. 저녁 식사 후에는 휴식을 겸하여 절 뒤편 언덕을 산보하며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승려들의 저녁 예불이 끝나면 다시 책을 읽었다.
온 종일 형제가 마주 앉아 《상서》와 《맹자》를 읽고 또 읽었다.
옛 사람들의 독서는 다독이 기본인데, 흔히 생각하듯 여러 종류의 책을 많이 읽는 다독이 아니라, 한 종류의 책을 되풀이
해 읽는 다독이었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 즉 책을 백 번 읽으면 의미가 저절로 드러난다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다산은 이해 겨울 동림사에서 했던 독서에 대해 〈선중씨묘지명(先仲氏墓誌銘)〉에서 또 이렇게 적었다.
옛날 무술년 겨울, 아버님이 화순현감으로 계셨다. 나는 손암과 함께 동림사에서 독서했다.
40일 만에 《맹자》 한 부를 마쳤다. 미묘한 말과 의미를 인가받은 바가 많았다. 얼음 물로 양치하고 눈 덮인 집에서 잠
못들 때면 늘 요순 시절의 임금과 백성을 이루려는 뜻이 있음을 말하곤 했다. -〈선중씨묘지명(先仲氏墓誌銘)〉7-96
형제는 읽다가 막히거나 모호한 대목이 있으면 토론을 벌여, 서로를 인가했다. 가슴 속에 깊이 숨겨둔 젊은 날의 포부도
이런 독서의 과정에서 익어갔다. 뒤에 아버지가 예천군수로 옮겨가자 이번에는 그곳의 황폐한 향교에 틀어박혀 또 책을
읽었다.
한번은 겨울에 주어사(走魚寺)에 머물면서 강학하였다. 모인 사람은 김원성·권상학·이총억 등 몇 사람이었다. 녹
암(鹿菴)이 몸소 규정을 주어, 새벽에 일어나면 얼음물을 떠서 세수하고 양치한 후 〈숙야잠(夙夜箴)〉을 외게 하고,
해가 뜨면 〈경재잠(敬齋箴)〉을 외고, 정오에는 〈사물잠(四勿箴)〉을 외며, 해가 지면 〈서명(西銘)〉을 외게 하였다.
장엄하면서도 삼가고 공손하여 법도를 잃지 않았다. -〈선중씨묘지명(先仲氏墓誌銘)〉 7-89
위는 다산이 중씨인 정약전이 녹암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가 주어사에서 겨울을 나며 공부할 때의 과정을 설명한 대목
이다.
각자 책을 읽고 토론하며 공부하는 한편으로, 매일 정해진 시간에 선현의 잠명(箴銘)을 외게 하여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듯 일과를 정해 놓고 삼동을 나는 독서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동학 또는 형제가 함께 함으로써, 서로를 독려
하고 서로 경쟁하면서 학습 효과를 창출해 내는 보람이 있었다.
다산도 뒤에 곡산부사가 되었을 때 정당 건물을 짓고 남은 자재로 작은 누각을 지어 자식들을 그곳에서 공부하게 했다.
책의 향기를 맡고 먹의 맛을 맛보라고 누각 이름을 서향묵미각(書香墨味閣)이라고 붙였다.
마음을 다잡아 긴장을 놓지 마라
젊은이들만 날마다 일과를 정해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해지거나, 귀양지에서 주체할 수 없는
시간과 마주할 때도 이 정과독서는 마음을 다잡고 무절제해지기 쉬운 생활에 긴장을 주는 효과가 있었다.
예전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벼슬을 그만 두고 집에 계실 적에 《주역》을 읽으셨습니다. 하루에 한 괘씩 읽으셨는데,
이때 저는 곁에서 참관하였었지요. 오직 가락을 맞추어 기쁘게 감상하시는 것만 보았지 질문을 해보지는 못했습니다.
이것은 임진년과 계사년 사이의 일입니다.
뒤에 경의진사(經義進士)가 되어 회현방의 누산(樓山)으로 이사가 살 때 개연히 스스로를 탓하며 말했습니다.
“명색이 경의진사라면서 《주역》도 안 읽었단 말인가? 읽었다고는 해도 안 읽은 것과 같다.”
벼슬길에 나아가 내각에 소속되어서는 사서삼경을 교과로 하여 날마다 향안 앞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기뻐 스스로 하례하였다. “이제야 성인에게서 《주역》을 배울 수 있겠구나.” -〈윤외심에게 보냄[與尹畏心]〉8-126
다산은 벼슬에서 물러난 아버지가 매일 《주역》의 괘 하나씩을 일과로 삼아 독서하는 것을 보았다.
그 자신도 정조의 조정에 나아간 후 《주역》 뿐 아니라 《시경》 등을 일과로 정해 놓고 임금에게서 배웠다.
정조는 날마다 과제를 내주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신하들을 괴롭혔다.
사실 다산은 이 엄격한 훈련 과정에서 경학 연구의 바탕을 다질 수 있었다.
정조는 툭하면 다산에게 주제를 정해주고 그 주제에 대해 조사하여 짧은 시간 안에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화성 축성의 제도 및 배다리 제조와 같은 토목공학적인 과제로부터 경전이나 《사기》등의 주석에 이르기까지 내용도
다양했다.
후에 강진으로 귀양 온 뒤에는 예전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 자신도 일과를 정해 경학 연구에 몰두했다.
그것은 하루 작업의 목표량을 정한 후, 매일 매일 이것을 누적해가는 방식이었다.
다산의 방대호한한 저술은 매일 매일 정과(定課)를 실천하고, 제자들의 집체 작업에 의한 성실한 뒷받침이 있었던 결과
이지, 다산 자신의 천재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윤계진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서각 위에서 매일 새벽 맨 머리로 고문 몇 쪽을 베껴 씁니다.
참으로 즐거움은 쓴 열매에서 나오는 법이지요.”라고 적었다. 매일 새벽마다 고문을 몇 쪽씩 베껴 쓰는 것을 일과로 삼아
문장 공부를 하는 장면이다.
또 한제원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저는 근래에는 대유재(大酉齋)로 가서 교서하지 않고, 편안하게 여유당에서 초서를 하며
지냅니다. 풍차나 물레방아가 곡식이 있어도 빻고, 곡식이 없어도 빻는 것과 한 가지니, 어느 때고 수고롭지 않겠습니까.
다만 머리에 관을 쓰지 않고, 허리에 띠를 두르지 않으니 조금 쾌활할 뿐입니다.”라고 했다.
물레방아가 빻을 곡식이 있건 없건 계속 돌아가며 방아질을 하듯이, 교서관에서 일할 때나 집에서 쉴 때나 끊임없이 책을
펼쳐 필요한 대목을 카드 작업하는 다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산의 초서 작업은 이런 식이었다. 먼저 고문 중에서 《시경》의 작품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모두 모아 카드
작업을 한다. 이렇게 해서 카드가 쌓이면 이를 다시 《시경》의 차례에 따라 편차를 매겨 한 권의 자료집으로 묶는다.
그러다가 정조가 《시경》을 강의할 때 어떤 작품에 대해 질문을 하면, 미리 정리된 자료에 근거하여 조목조목 열거하여
대답했다. 하지만 어떤 카드는 임금의 질문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 한번도 못 써먹은 것도 있었다.
그러면 다산은 그것을 그냥 버리지 않고 빠진 것만 따로 모아 한권의 책으로 묶고 책 제목을 《풍아유병(風雅遺秉)》이라
달았다.
기록으로 갈무리해 목표를 달성하라
강진 유배지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목표를 정해 앞으로 나아간 결과 나중에는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지금은 기력이 점점 쇠약해져서 몇 달 사이에 빠진 이가 셋입니다.”라고 적었다.
머리카락도 다 빠져 대머리가 다 되었다. 중풍도 와서 작업에 집중할 수 없는 몽롱한 상태가 오래 지속되었다.
저절로 신경쇠약 증세도 따라왔다. 이렇게 되자 주변에서 책을 못 보도록 말렸다. 그만 쉬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다산은 마음이 급했다. 눈앞에 산적한 작업을 놓아두고 한가하게 마음 공부에만 몰입할 수가 없었다.
도인법이 틀림없이 유익한 줄은 압니다. 하지만 12년간 새벽에 일어나 밤중에 잠자리에 들면서 육경을 공부하는 일에
다급하다 보니 이것을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제 다행히 육경을 마쳤으니, 마땅히 방 하나를 깨끗이 쓸어 아침저녁
으로 노력하는 틈틈이 도인법에 뜻을 둘까 합니다. 방 가운데 한 권의 책도 없으면 더욱 좋겠지만, 다만 해묵은 습관을
버리기가 어려워 마침내는 다시 문묵을 일삼고 있을 뿐입니다. -〈중씨께 답함[答仲氏]〉
건강을 생각해서 도인법(導引法)을 하라는 형님의 편지를 받고 쓴 답장이다. 도인법은 도가에서 행하는 일종의 건강
체조다. 호흡법과 굴신운동을 통해 기의 운행을 순조롭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12년간 육경 공부에 매달리느라
한가롭게 앉아 체조나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 글 말고도 여러 편지에서 다산은 아예 방을 텅 비워놓고 마음 공부를 하려다가도 몸에 밴 정과실천(定課實踐)의 버릇
을 어쩌지 못해 어느새 책 앞에 앉아 초서하고 메모하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도 말릴 수 없다고 하는 언급을 많이 남겼다.
강진 유배 초기에 다산은 폐족이 된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여 자포자기 하려하는 자식들의 마음을 다잡아 학문에 몰두
하게 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1805년 겨울에는 큰아들 학연(學淵)이 강진으로 아버지를 찾아왔다. 다산은 이 기회에 아들을 공부시키려고 함께 보은
산방(寶恩山房)으로 가서 일과를 정해 《주역》과 《예기》를 가르쳤다.
그냥 가르치기만 한 것이 아니고, 의심스러운 곳을 반드시 선후 맥락을 갖춰 질문하게 했다. 다산은 아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이렇게 해서 모두 52칙의 문답이 정리되었다.
그러면 다산은 그것을 그냥 버리지 않고, 〈승암문답(僧菴問答)〉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로 묶어 갈무리해 두었다.
아들은 그 기록을 보고, 앞서 했던 공부의 과정을 복습하고, 현재의 공부 상태를 점검할 수 있었다.
다산은 늘 이렇게 과정을 그저 흘려버리지 않고, 기록을 통해 경험을 누적시키고 이전시켰다.
그 자신이 직접 정리한 〈서암강학기〉만 해도 도대체 녹음기도 없던 그 시절에 어떻게 그 많은 질문과 답변을 이렇게
꼼꼼하게 기록할 수 있었을까 싶을 만큼 자세한 내용이 빠짐없이 실려 있다.
날마다 규칙적으로 초서하고, 목표를 정해 공부하던 습관과 정리벽이 낳은 결과다.
다산은 말한다. 목표를 세워 전체 규모를 장악해야 한다. 목표는 하루 단위로 쪼개서 확실하게 실천하라.
달성하지도 못할 목표는 세워서는 안 된다. 작업의 방향을 정하고, 전체 작업량을 예상한 후, 가능한 일자를 가늠하면
하루에 해야 할 일의 분량이 나온다. 이것을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가야 한다. 차질 없이 밀어 붙여야 한다.
8-3 포름부절법(庖廩不絶法)
3) 포름부절법(庖廩不絶法) : 생각들을 끊임없이 조직하고 단련하라
처음 교제할 때는 마땅히 질박하고 성실함을 숭상할 뿐 다만 찬미하는 것은 제 성품에 능히 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답답하게 여기던 문제를 가려운 곳을 긁듯 해 주시니 절로 경도됨이 여기에 이름을 금하지 못하겠
습니다. 나무라지 않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한 두 가지 질문은 풀이가 별지에 있습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일깨
움을 다시 내려 주셔서 포름(庖廩)이 이어지기를 삼가 기다리며 절을 올립니다.
- 김매순, 〈또 보내온 편지[又書]〉 8-247
정당한 비판에는 흔쾌히 수긍하라
포름부절(庖廩不絶)은 계속되는 토론을 통해 문제를 심화하고, 성과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포름(庖廩)은 고기와 쌀을 가리킨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힘이 되는 양분을 여기서 얻는다.
밥과 고기를 끊이지 않고 먹어야 신체가 건강해진다. 학문의 길에서 훌륭한 토론자의 지적과 일깨움은 정신의 고기요
쌀이다.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토론을 거듭하는 동안 문제가 더욱 선명해지고, 정리가 요령을 얻으며, 논리에 힘이
붙는다. 공부에서 중요한 것은 소통이다. 소통을 거부하는 것은 학문의 일과는 관련이 없다.
귀를 막고 제 소리만 떠들어서는 곤란하다.
위 글은 김매순이 다산의 《매씨서평(梅氏書平)》을 읽고 감동한 나머지 보낸 편지의 끝부분이다.
다산은 김매순에게 자신의 《매씨서평》에 대해 꼼꼼히 읽고 잘못된 점을 지적해 달라고 부탁했고, 김매순은 내용의
진실함과 필력의 굳셈이 아무도 당해낼 자가 없을 정도여서 오직 망연자실할 뿐이었다고 하면서 부분적인 내용의 문제
를 지적하는 긴 답장을 썼다. 포름이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말은 자신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답을 주어, 자신에게 영양가
있는 가르침을 계속 내려달라는 뜻이 담긴 겸사다.
김매순은 모두 15항목을 지적했고, 다산은 또 여기에 답장을 써서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고집할 것은 고집했다.
그 중의 한 단락을 살펴보자.
김매순 : ‘그 뼈가 이미 허옇다.’ ○ 노공왕(魯共王)이 무제(武帝)의 말년을 볼 수 없었던 것은 증거가 이미 명확하고
이치가 마땅히 틀림이 없습니다. ‘그 뼈가 이미 허옇다’는 표현은 전아함이 조금 부족한 듯 합니다. ‘무덤의 나무가
이미 아름드리가 되었다’로 고치는 것이 낫겠습니다. -〈또 보내온 편지[又書]〉 8-249
다 산 : ‘그 뼈가 이미 허옇다.’는 표현은 바로 약삭빠르고 경박한 말투여서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것은 20년 전에 지은 것이니 말할 것도 없고, 지금도 또한 조금만 취하면 글을 쓸 적에 이 같은 말투를 쓰곤 합니다.
얼마 못 가서 역시 뉘우치지만, 습기(習氣)의 병통은 갑작스레 없애기가 어렵군요. ‘무덤의 나무가 이미 아름드리가
되었다.’가 좋겠습니다. -〈김덕수에게 답합[答金德叟]〉 8-240
조금 가벼워 보이는 표현을 지적하자, 다산이 전적으로 수긍하고 기꺼이 고치는 장면이다.
김매순이 지적한 15가지 사항에 대해 표현이 적절치 않거나 고증에 문제가 있는 8가지는 ‘마땅히 고치겠습니다.’로 대답
하여 수긍했고, 나머지는 ‘다시 검토해 보겠습니다.’나, ‘지금은 우선 보류하겠습니다.’ 등으로 대답하여 동의하지 않거나
좀더 생각해 보겠다는 뜻을 보였다.
정곡을 찔러서 보완을 유도하라
당시 다산의 《매씨서평》을 두고 김매순과 김기서 등이 서로 찌를 붙여가며 다산과 함께 삼각토론을 진행하고 있었다.
토론에 임하는 이들의 태도에 대해서는 이미 앞서 ‘대부상송법’을 논하는 자리에서도 살핀 바 있다.
다산은 《매씨서평》의 질정을 부탁하면서 다음 세 가지를 당부했다. 첫째,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거나 말하지
말 것. 둘째, 하자가 있는 대목은 지적하여 윗부분에 찌를 붙여 줄 것. 셋째, 내가 죽으면 초본을 가져다가 함께 의논하여
불태워 버릴 것. 이 문제가 워낙 민감하고 미묘한 쟁점이었으므로 그랬겠지만 어조가 자못 비장한 데가 있다.
김매순은 다산의 당부대로 찌를 붙여 문제를 제기하고 나서, 이 책을 자기에게 소개한 김기서에게 읽은 소감을 다음과
같이 써 보냈다.
《매씨서평》을 여러 날 마음 쏟아 겨우 한 책을 마쳤습니다. 정밀한 식견과 확고한 논리는 갈수록 사람을 놀래키니,
천지 사이에 손꼽을 만한 글이라 하겠습니다. 하늘이 이 노인을 보내신 것이 우연이 아님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훌륭한 책을 보게 해주시어 돌보아 주시는 은혜를 부지런히 하시니 더욱 깊이 감격합니다.
경계한 바 세 조항에서 첫 번째 조항은 감히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고, 두 번 째 조항은 비록 감당할 수 없지만 제 생각
을 마땅히 받들어 올리겠습니다. 세 번째 조항에 이르러서는 절대로 받들 수가 없습니다. 만에 하나 세상을 뜬 뒤에는
두백산(杜伯山)이 되어 위굉(衛宏)과 서순(徐巡)을 기다리겠습니다. - 김매순, 〈또 보내온 편지[又書]〉 8-249
《매씨상서》는 동진(東晉)의 학자 매색(梅賾)이 위찬(僞撰)한 《고문상서(古文尙書)》를 가리킨다.
이 책의 진위 여부는 당대 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큰 쟁점의 하나였다.
특히 이 가운데 인용된 “인심유위(人心有危), 도심유미(道心有微), 유정유일(惟精惟一), 윤집궐중(允執厥中).”의 16자는
이전에 주자가 이를 심정(審定)하여 인가하였으므로, 이 책을 위서로 돌릴 경우 주자의 학설을 부정하는 것으로 비칠
위험이 있었다. 다산이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말고, 자기가 죽으면 불태워 버리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김매순은 이 《매씨상서》가 위서임을 입증한 다산의 《매씨서평》을 읽고 크게 놀랐다.
다산의 세 가지 당부 중 처음 두 가지는 그대로 따르겠지만, 죽은 뒤 태워버리라는 당부만큼은 절대로 따를 수 없다고
했다. 끝의 말은 잘 보관하였다가 적임자를 찾아 후세에 전하겠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김기서도 별지를 보내왔다.
이제 이 16자는 이미 주자의 감정(勘定)을 거쳤으므로 타파하기가 쉽지 않을 겝니다. 만약 매색을 편드는 무리가 일어나
이를 공격하여 ‘겉으로는 모기령을 쓸어버린다고 칭탁하면서 속으로는 실제로 주자를 어지럽히는 것이다.’라고 한다면
장차 무슨 말로 답하시렵니까? 하지만 이 한 단락 때문에 영원히 책 상자에 숨겨두는 것 또한 몹시 가석한 일입니다.
말투를 조금 고쳐 그 말을 조금 곱게 다듬어 의심을 전하는 방법으로 한 세상에 널리 배포하여 무궁한 후세에 전해지게
한다면 어찌 사문의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이 책을 지은 것은 본래 모기령의 ‘원(寃)’이라는 한 글자로 인하여 뜻을 일으킨 것이어서, 그 이름을 ‘평(平)’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미 평이라 하고 보니, 그 글이 옥사를 다스리는 글의 문체를 많이 썼습니다.
간혹 재주를 너무 부린 곳도 있고, 혹 희극에 가깝기도 합니다. 이따금 도리어 모기령의 필의를 본뜬 것까지 있어 이것이
큰 흠결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원컨대 그대의 가슴 속에서 매색과 모기령을 쓸어버리고, 다만 경전을 바루고 이치를 밝
힌다는 마음으로, 문체는 근엄함을 좇기에 힘쓰고 말의 기운은 평정함에 가깝게 써서 별도로 《고문상서변(古文尙書辨)》
1본을 이룩하여 썩지 않을 책이 되게 하여주십시오. - 김기서, 〈또 보내온 편지[又書]〉 8-257
다산의 《매씨서평》은 매색 이후 모기령의 논설로 제기된 논란을 깨끗이 쓸어 평정하겠다는 뜻에서 《매씨상서》을
평정(平定)한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었다. 따라서 다산은 이 책의 기본 문체를 매색과 모기령의 잘못을 나무라고 추궁
하는 판결문의 논조를 사용했다. 하지만 이 점이 김매순이나 김기서가 보기에는 감정 조절이 잘 안 되고 문체가 군데
군데 과격하거나 우스꽝스러워 논리의 엄정함에도 불구하고 얼마간 생뚱맞은 느낌이 있었다.
또 악의를 가진 자들이 모기령을 비판한다면서 속으로는 주자를 반박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는 책이라고 오해할 소지도
있었다. 그래서 문체의 과격함을 누그러뜨려 평정하게 쓰고, 단정적 언사를 완곡하게 바꿔, 세상에 널리 읽히는 것이 좋
겠다고 한 것이다. 앞서 김매순이 지적한 ‘뼈가 이미 허옇다’와 같은 표현들이 바로 그런 예들이었다.
인정의 바탕 위에 비판하고 지적하라
위에서 말한 16글자를 주자는 일찍이 높여 받든 바 있다. 이 말을 특별히 강조해서 《중용》 서문에도 실었고, 〈감흥〉
시에도 인용했다. 주자는 이것을 성학(聖學)의 큰 바탕이 되는 가르침으로 중시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짜라 하여 인정하지 않으면 결국 화살이 매색이 아니라 주자 쪽으로 향하게 된다.
두 사람 모두 다산에게 해가 미칠 것을 끝까지 염려한 것이다.
두 사람의 별지를 전해 받은 다산은 다시 답장을 썼다. 먼저 김매순에게 보낸 답장의 앞 부분이다.
《매씨서평》은 귀양 간 바로 첫 해에 지은 것입니다. 그때는 습기(習氣)가 아직 제거되지 않은 데다 가슴 속에 쌓인
울분이 가라앉지 않아, 어쩌다가 마음을 격동시키는 것이 있으면 한바탕 통렬하게 나무라야만 겨우 조금 마음이 시원
해지곤 했습니다. 이것이 어찌 도를 배우는 사람의 일이겠습니까? 형께서도 또한 마땅히 패관소설처럼 보실 일이지,
사문에 갖춰두고 손꼽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적해주신 여러 깨우침은 모두 병통에 꼭 들어맞습니다.
삼가 마땅히 고쳐 다듬어, 감히 머뭇거리지 않겠습니다. -〈김덕수에게 답함[答金德叟]〉 8-238
김매순이 별지 15항목에서 거친 표현을 지적하고, 미진한 대목을 질문하며, 과격한 논의를 재검토할 것을 요청한 데
대한 답변의 일부다. 다산은 솔직하게 이 글을 쓸 당시 가슴 속의 울분 때문에 문체가 다소 과격해진 점을 인정했다.
그리고 적절한 지적에 대해선 적극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위 김기서의 별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답장했다.
《매씨상서》가 가짜임이 분명하게 밝혀졌다면, 이 16자는 절로 능히 서로 이어 하나의 글로 만들 수가 없습니다.
비록 송구함을 느끼지만 별 도리가 없습니다. 이 책으로 말하자면 살아서는 책 상자에 감춰둘 테니 와서 엿보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죽어서는 재와 먼지가 되어 저절로 날려갈 것이어서 처음부터 오래 전할 계획은 없습니다.
어찌 이리 지나치게 염려하십니까. 다만 지하에서 주자를 뵐 때 꾸짖음이 없기만 보장할 뿐, 나머지는 감히 살펴 따질
것이 못됩니다. -〈정산에게 답함[答鼎山]〉 8-141
문맥을 누그러뜨리고 핵심을 슬쩍 빗겨서서 무난하게 다듬어 다른 방식의 책으로 묶는 것이 좋겠다는 김기서의 주장에
대해 다산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맞으면 맞고 틀리면 틀리는 것이지, 주자가 인정한 글이니까 쓸데없는 논난을 피해
두루뭉수리로 넘어가는 것만큼은 하지 못하겠다고 한 것이다.
자신이 주자를 비난하려 한 것이 아님은 지하에서 주자를 만났을 때 나무람을 받지 않을 것이란 말로 대신했다.
두 사람 모두 거침없이 지적하고 비판했지만 모두 상대에 대한 깊은 존중과 인정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다산 또한 인정할 것은 망설임 없이 인정하고, 물러설 수 없는 부분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렇게 남인과 노론 학자의 당색을 뛰어넘은 학문 교류의 현장은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했다.
열린 마음으로 논리를 점검하라
다산이 큰 학문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열린 생각으로 함께 토론하고 기꺼이 비판했던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컸다. 그 중에서도 다산과 같은 시기 흑산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둘째 형님 정약전은 다산이 자신의 유일한
지기(知己)라고 말했을 만큼 학문의 동반자요, 냉정한 비판자며, 마음을 나눈 벗이었다. 다산은 하나의 저술이 완성
되면 바로 흑산도로 보내 질정을 청했다.
다산이 형님에게 보낸 여러 통의 편지는 모두 이러한 토론과 질정의 구체적 내용과 이에 임하는 두 사람의 자세를 잘
보여준다. 다산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따지고 추궁하고 반박하면서 자신의 논리를 점검하고 생각을 정돈했다.
《역전(易箋)》이 이루어지자, 공이 이를 보고 말했다. “세 분 성인의 은미한 뜻이 이제 찬연히 밝아졌다.” 뒤에 또 원고
를 고쳐서 보내자, 공이 말했다. “초고가 동쪽 하늘에 나온 샛별이었다면 이번 원고는 태양이 중천에 떠있는 것 같다.”
《예전(禮箋)》이 완성되자 공이 이를 보고 말했다. “가려운 데를 긁고 헝클어진 것을 빗질하며 양치질하고 씻어낸 것이
마치 장탕(張湯)이 옥사를 다스린 것과 같아 사물이 실정을 숨김이 없다.”
《악서(樂書)》가 이루어지자 공이 이를 보고 말했다. “2천년 긴긴 밤 동안 꿈만 꾸고 있다가, 이제 대악(大樂)이 넋이
돌아왔다. 다만 양률(陽律)과 음려(陰呂)는 마땅히 각각 짝을 가지고 해야 하니, 천(天)이 3이면, 지(地)는 2이다.
예를 들어 황종(黃鐘) 81을 셋으로 나눠 하나를 덜면 대려(大呂) 54가 되고, 태주(大蔟) 78을 셋으로 나눠 하나를 덜면
협종(夾鐘) 52가 된다. 나머지도 모두 이것을 본뜬다. 12율을 형세에 따라 서로 차례 매기게 하면 안 된다.”
내가 가만히 공의 말을 생각해 보니 참으로 확실하여 바꿀 수 없는 주장이었다. 이에 앞서의 초고를 버리고, 모든 것을
공의 말에 따랐다. 그러자 《의례(儀禮)》의 정현(庭縣)의 순서와 《주례(周禮)》의 〈고공기(考工記)〉와 〈주어(周語)〉
및 《좌전》의 의심스런 글과 맞지 않던 숫자가 모두 다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터럭만큼도 어그러짐이 없었다. -
〈선중씨묘지명(先仲氏墓誌銘)〉7-94
다산은 형님의 인정을 받아야만 그 책을 비로소 다른 사람에게 보였다. 형은 아낌없이 칭찬하고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하지만 때로 결정적인 조언을 던져줌으로써 초고의 틀을 완전히 허물어뜨리고 새로 쓰게끔 만들기도 했다.
다산은 이렇게 꼼꼼하게 살펴 정리한 모든 초고를 형님에게 보내 질정 받았다. 또 강진 시절에는 이재의와, 뒤에 서울에
온 뒤에는 김매순과 김기서, 그리고 신작 등과 자신의 저술을 놓고 찌를 붙이고 별지를 잇대가면서 토론을 주고받았다.
편지의 내용을 보면 다시는 안 볼 것처럼 과격한 말투를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끝까지 상대를 존중하며 아름다운
우정을 이어갔다. 다산의 위대성은 주변의 이런 숨은 조력자나 비판자들에 의해 더욱 굳건해질 수 있었다.
다산은 말한다. 독단에 빠지지 않으려면 남의 비판을 요구하라. 작업의 효율을 높이려면 중간 중간 방향을 점검하라.
다른 사람의 의견에 비춰볼 때 안 보이던 문제들이 드러나고, 토론의 과정에서 잘못된 부분이 분명해진다.
정당한 비판은 겸허히 수용하고, 확신이 서면 끝까지 물러서면 안 된다. 매섭게 비판해도 인간에 대한 애정마저 망각하면
안 된다. 혼자 보다는 둘이 낫고, 둘 보다는 여럿이 낫다. 남의 말에 귀를 막고만 있으면 발전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