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콜롬비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남. 1903년 워포드대학을 졸업하고 2년 동안 사우스캐롤라이나 조단의 공립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선교의 사명을 깨닫고 노스캐롤라이나 주 애쉬빌에서 2년간 목회하면서 1905년 4월 29일 목사 안수를 받고, 11월에 웨스턴노스캐롤라이나연회에 입회하여 애쉬빌지방에서 목회하였다.
1907년 남감리회 해외선교부 한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한국은 1907년 대부흥운동의 열기가 한창일 때였다. 그도 이 운동에 참여하여 적극적인 전도활동을 하였다. 눈물 흘리며 통회 자복하는 자의 수가 헤아릴 수 없으며 신앙의 열기는 고조되어 야간 외출을 엄금해도 아랑곳없이 빠져나가는 아내를 뒤쫓아 교회로 들어가 뒤에서 엿듣다가 통회 자복하고 신자가 된 남편도 있었다.
1907년 새해 벽두부터 타오르던 신앙부흥운동의 불길이 전국을 복음화하기 전에 한해 두해 지남에 따라 그 신앙의 열기는 가시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정경을 본 스톡스는 어떻게 해서든지 대부흥운동을 되살려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그는 개성에서 1909년 여름 남감리회 선교부 임원 몇 사람과 기도할 때와 예배할 때에 성령의 충만과 새로운 부흥운동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갬블, 리드와 스톡스 3명은 계속해서 철야기도를 하면서 통회 자복하고 충만한 성령의 은사를 받았으며 예수가 손을 뻗어 한국을 축복하는 환상을 보기도 했다. 이들은 계속 금식기도를 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갔다. 금식기도를 하던 중 이들은 한국에서 하나님의 사업이 위기에 처했으며 하나님이 이 땅에 큰 복을 내려주시려 한다는 영감을 받았다. 이들이 산에서 내려온 이튿날 한국인 전도사들이 각자의 월례 보고서를 담당 선교사들에게 제출하였다. 이때 스톡스는 자신의 구역 소속인 전도사 20명과 함께 다시 산에 올라갔다. 4일 후 이들 모두가 성령을 받고 내려왔으며 그 후 다른 25명의 전도사들도 같은 방식으로 성령을 받았다. 모두 45명의 전도사들이 성령을 받고 각자의 구역으로 돌아갔다.
스톡스는 지방전도여행을 나섰다. 전도여행에 앞서 그는 자기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의 교인들에게 5만 명의 새신자가 늘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이것이 "100만명 구령운동"의 발단이다. 때마침 1909년 9월 초순 개성에서 남감리회 제13회 선교회가 모이는데 "20만명의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전도표어가 결정되었다. 10월에 서울에서 복음주의 선교부 연합공의회가 모였을 때, 갬블, 리드, 스톡스 등이 참석하여 범 개신교회의 표어로 "금년에 100만명"으로 확정하고 전국적인 신앙부흥운동을 전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동휘 장군은 "무너져 가는 조국을 일으키려면 예수를 믿어라. 기독교인 100만이 되는 날은 곧, 독립의 날이다"라고 외쳐서 크게 환영하였다. 선교사들은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당시 한국의 정치ㆍ사회적 상황을 전도운동을 전개하기에 절호의 기회로 파악했었음을 알 수 있다.
1918년 스톡스는 춘천지방 감리사로 파송받아 지방 전도사업과 아울러 문서 전도에 관심을 가지고 1920년 1월 월간지 〈세광〉(世光)을 간행하였다. 세상의 빛이라는 뜻에서 "세광"은 기독교의 중심 사상인 구속, 칭의, 중생, 성결 등의 교리를 게재하고 신도들의 실생활과 종교교육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체계적인 글을 써서 문서선교에 앞장섰다. 1929년에는 스톡스가 발행인이 되고 김준옥이 편집인으로 〈주일학교 선생〉(Sunday School Teacher)이라는 월간지를 발행하여 주일학교 교사들이 달마다 참고할 수 있게 풍부한 내용을 실어 4년간 발행하여 종교교육에 크게 공헌하였다. 1935년 1월에는 〈성화〉(聖火)라는 신앙월간지를 초교파적으로 발행하였다. 감리교에서는 피도수, 변홍규, 조신일 등이 구원, 중생 등을 강조하며 구원의 확신을 전수하는 데 힘썼다.
안식년을 이용하여 1923년 에모리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24년 9월 제7회 남감리회 연회에서 특별부흥의 해 설정을 역설하여 선교사와 한국인 목사들을 총동원하여 다시금 대대적인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부흥운동을 조직화하기 위하여 서울에 상설 중앙전도관을 설치하고 1925년 9월 20일 그 관장에 취임하였다. 그 후 10여 년 간 이를 중심으로 조직적인 전도운동을 펼쳤고, 많은 개척교회를 설립하였다. 중앙전도관에는 상설강좌가 개설되어 총 14만 9천 4백 59명의 수강자를 배출하였고 결신자도 2만 9천 9명에 달했다.
1933년에는 애즈베리신학교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6~1927년, 1935~1936년, 두 번에 걸쳐 철원지방 감리사로 시무하면서 한국 선교 30주년을 맞아 1937년 철원읍제일교회에서 기념식을 가졌다. 철원지방에서 철원읍제일교회, 철원 역전에 제이교회, 철원지방 성경학원 설립과 3천 원을 들여 기숙사 건축, 김화읍에 석조예배당, 기타 10여 개의 교회를 신축하는 등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어 본국으로 귀환하였고 다시 1941년부터 쿠바 선교사로 7년 동안 활동하였다. 한국전쟁 중에는 미군의 한국어 통역으로 일본 등의 지역에서 종군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한국 교회 부흥을 위해 농촌이나 도시 목회 문서선교로 또는 교회 행정가로 주일학교연합회 운동 등 다방면의 풍부한 지식과 많은 기도의 능력으로 한국 선교에 크게 공헌하였다. 1968년 노스캐롤라이나 주 샤로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도 목사, 한국에서 태어난 아들 4형제를 모두 감리교회의 목사가 되게 하였다. 장남(Mack Stokes)은 신학자로 에모리대학 신학부장을 거쳐 미남감리교회 감독으로 선출되었고, 차남(James Stokes)은 North Carolina Christian Advocate의 편집인, 3남(Len Stokes)은 미연합감리교회의 중견 지도자다. 4남인 찰스 스톡스(Charles D. Stokes, 都益瑞)는 부친의 뒤를 이어 한국 선교사로 활약하였다. 그는 1947년 예일대학교에서 한국 감리교회사에 관한 논문 "History of Methodist Missions Korea"로 박사 학위(Ph.D.)를 받고 내한하여 1955년부터 대전 목원대학의 설립자 겸 이사장으로 1983년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은퇴 후 귀국하여 여생을 보내다 1997년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