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우리 내부에서 보는 시선과 외부의 시선 만큼이나 큰 젠더 격차가 나는 불편하다. 상의 탈의 시위 (topfreedom)로 나타난 일상의 정치는 2018년 혜화역을 휩쓸었다. 상반신 탈의에 남녀 차별없이 동일한 잣대를 나는 들이댈 수 있는가? 인터넷을 통해서 세계는 통념의 탈맥락화, 동시화에 직면하고 있다. 입장을 과감히 바꾼 젠더의 통념 깨기는 여자인 나도 불편하다. 그러나 숨겨진 일상의 차별을 쉬쉬하고 싫어하며 성장을 거부할 수 없다. 상대의 입장에서 바라보기는 격차, 차별, 폭력의 해독제이다. 2004 UNESCO 성인지 감수성 매뉴얼을 빌리자면, 성인지 감수성은 남자에 대한 역차별이나 조롱, 혐오를 위함이 아니다. 성인지 감수성 교육은 여성 혹은 남성이 겪는 일상의 차별과 폭력을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고 상생하기 위함이다.
3. 이번 직위해제 조치는 헌법 제 19조, 양심의 자유, ‘윤리적 판단에 국가가 개입할 수 없는 자유’의 억압이기에, 상생과 배치된다. 영화, ‘억압받는 다수’의 프랑스 여성감독이 누리는 양심의 자유는 우리나라의 남성교사가 누리는 그것보다 크다고 보여진다. 영국 가디언지를 빌리자면, 감독은 세계 각국으로부터 학계에서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탁월한 비평부터 혐오 표현까지 받을지언정, 양심의 자유는 존중받았다. 따라서 프랑스와 한국의 현실대비는 ‘억압받는 다수’의 실사판에 다름 아니다.
4. 11분 길이 영화, ‘억압받는 다수’는 직,간접인 폭력의 일상’에서 여성들을 남성들로 바꿔치기 함으로써, 배경 지식, 인식의 틀(framework)에 의문을 던진다. “나는 사춘기 소년들이 자신들의 관점을 소녀들에게 지우려는 것을 볼 수 있다.” (“I can see that in her generation boys try to impose their point of view on girls,”) 두 남매를 둔 엄마인, 영화 감독은 ‘ 억압받는 다수’의 제작동기를 2014년 뉴욕 타임즈에서 위와 같이 밝혔다.
5. 감독의 동기를 이해한다 하더라도, 불편한 감정이 들 수 있는 영화다. 웃통을 벗은 여자가 조깅하는 장면은 여성의 복장에 대한 이중 잣대(double bind)를 직설적으로 제시한다. 상의 탈의한 여성의 조깅이 불편한 감정을 유발하는가? 만약 남성이어도 같은 감정이 드는가? ‘남성이 유모차를 끈다면?’ ‘남성이 길가에서 언어 및 신체로 성적인 위협을 받는다면?’ ‘성희롱 당한 남성의 진술을 경찰이 공감하지 않고 의심하듯 말한다면?’ ‘옷을 정숙하게 입어야 한다는 배우자의 말을 남성이 들어야 한다면?’ ‘이 사회는 평등한가?’ ‘기존에 알던 사실과 익숙치 않은 불편함은?’ ‘통념에 기반한 이중 잣대, 그리고 그 이중 잣대를 부수고 뒤집은 충돌은 어떻게 인지적으로 처리할 것인가?’
6. 볼테르가 한 말로 잘못 알려진 표현이 있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당신의 말할 권리를 위해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인용과정에서 와전된, 볼테르의 평전 문구는 개인의 표현과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는 자유주의(liberalism)와 맞닿아 있다. 배이상헌 교사가 인용했다고, 교육청이 주장하는 표현들이 절차적 정당성을 통해 소명의 기회가 없었다면, 행동하는 시민, 방관자(bystanders)가 아닌 방어자(upstanders)로서 다른 학생들의 증언이 반영되지 않았다면,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선생님의 명예를 훼손하는 우는 범하지 말길 바란다. 설사 듣기 불편한 말들이 있다하더라도, 맥락에 부합하는 수업의 핵심 혹은 추후 예방가능한 실수라면, 교육주체가 상호협력할 일이다. 수업과정에서 학습 내용의 구성과 목표 및 방식의 맥락을, 언어 사용의 적정성에 대한 기대를 서로 조정하고 당부할 일이다.
7. 사회는 다양성의 변주를 통해 발전한다. 여성이 겪는 일상의 폭력도 불편하고 남성으로 대체하여 낯설게 보는 폭력도 불편할 수 있다. 부조리를 마주하기는 불편하다. 명확히 하자. 부조리한 행위의 불편함을 마주 하게 되면서, 감독은 열린 해석의 장을 제공한다.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은 불완전함의 수용이다. 아기가 불편할 때 양육자는 모든 욕구를 바로 해결하고자 노력하나, 이 또한 완벽하지 않다. 성숙을 위한 전능감 상실의 성장통은 청소년들의 몫이다. 만약 누군가가 ‘교사로서, 한 인간으로서 완벽하냐’, ‘잘못이 있든 없든 문제에 연관되면, 품위를 위반했다.’ (‘책임도 없는데, 가상의 모호한 품위, 그 허구는 무엇인가’)라고 주장하면 나는 그들의 미성숙을 이해한다. 하지만 미성숙한 폭력의 실현은 불편하다.
8. 우리 교육행정이 교사, 미래를 살아갈 청소년의 입장을 고려하길 기대한다. 광주교육청은 ‘억압받는 다수’의 불편을, 비폭력적, 미래 지향적 관점에서 공감하는 성인지 감수성을 염두하길 바란다. UN은 지속가능한 미래 목표(The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로 성평등 (gender equality)을 제시하였다. 배이상헌 교사의 수업은 탈성적(asexual)인 관점으로 거리두기, 텍스트의 상징과 의미 해석하기, 관찰자와 텍스트의 거리두기가 요구되었다. 성과 폭력의 수치심과 불편함을 문제 삼는다면, 중고생 권장 한국 단편, 장편 소설, 이를 영화화 한 텍스트 중(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자유로운 것이 드물다. 예술은 권위주의와 반지성을 넘어 표현의 자유와 지식의 상대성을 실현한다. 배이상헌 교사의 수업을 건전한 갈등으로 승화하여, 생각 자체는 동의할 수 없어도 표현할 권리를 인정하는 자유주의, 지식의 상대성이 우리 사회에 실현되기 바란다.
덧: 무한 공유 환영합니다. 저는 평범한 초등교사입니다. 위 글의 배이상헌 교사와 개인적인 친분은 없으나, 교육의 현실, 개인이 처한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배이상헌 교사를 비롯하여, 우리 공교육, 사회의 평등, 여러분들의 행복과 평화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