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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의 시집서평【377】성찰의 자세와 자연 친화력의 시ㅡ시집 『측백나무 울타리』 2019년 송연숙, 『시와표현』
웹진 시인광장
2019. 10. 14.
성찰의 자세와 자연 친화력의 시
ㅡ송연숙의 시집 『측백나무 울타리』를 중심으로
이영춘(시인)
1.
가을이다. 학기로는 2019년 2학기다. 송연숙 시인이 철원고등학교 교감으로 첫 발령을 받아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떠나는 날, 나는 왜 그의 시, 「한 마리 흔적」이 떠올랐을까?
이 작품에는 그가 철원을 배경으로 한 “철새가 모여 드는 도래지”란 표현이 있다.
그 도래지에는 철새들이 그 어떤 ‘흔적’을 남기며 모여들기도 하고 떠나기도 할 것이다.
이삿짐 트럭을 앞세우고 또 하나의 ‘흔적’을 따라 떠나는 송시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철새들의 이동 경로가 말끔하게 발려져/ 백화白花”(「한 마리 흔적」)와 같은 흰 꽃의 흔적이었을까? 텅 빈 허공에 혼자 날고 있는 철새의 심상이었을까? 그 한 마리 ‘흔적’은 화자와의 동일시 현상 작용으로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싸-아 하게 한다.
그리고 시 속의 화자는 “내 팔을 내가 베고 자는 잠/ 손 없는 잠/손을 쓰지 않는 잠을 다녀오겠다는 뜻이다”라고 마치 타인의 말을 대신하듯 내면의 세계로 몰입한다. “헛꿈을 휘젓던 두 손/가위눌림이 가득 들어 있던 그 팔”을 베고 “비유와 상징만으로 구성된/ 시간과 공간”(「팔을 베고 잠들다」)에서 자아를 건져 올리고 있다. 그러나 정작 화자는 담담하다. “사월의 꽃잎 같은 발자국들 눈 위에 한 줄로 서서/비탈길로 난 봄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한 마리 흔적」)에서 “봄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화자에게서 희망의 은유를 받아 안을 수 있다. 그러면 “봄을 향해” 가고 있는 시인의 심상은 어떤 길인가를 따라가 보자.
2.
송연숙 시인은 사물을 깊이 있게 관찰하고 사유한다. 그리고 그의 사유에는 진리가 내재한다. 관찰은 시 쓰기의 하나의 과정이고 경로이다. 「내재율」이란 시를 비롯하여 「달팽이 시간을 굴리다」 「거울의 방」 「철봉」 「거울과 가로수」 「슈퍼문」 「구름의 심사평」 등 많은 작품에서 화자의 내면적 사유의 깊이와 성찰의 자세가 송연숙 시인을 시인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실상일까, 허상일까
수세미처럼 구겨져 아침의 벽에 매달리는 얼굴
무게를 잃는다
오목거울이 내 몸을 깎아낸다
기울어진 나를 담는다
무한량無限量의 세상을 담고도 저토록 가벼워
들어가기만 하면 말끔하게 무게를 마셔 버린다
무게 없는 육체라니, 유리벽 뒤 저 세상은
전생과 후생, 그 어느 쪽일까
그 어떤 죽음처럼 차가운 촉감이 손끝에 닿는다
칼라사진처럼 지나가는 시간의 터널
거울 밖의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보고 있는데
거울 속의 나는 거울 밖의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갈아입은 수의처럼
나를 확인하고
나를 숙주로 살아가는
저 세상으로 들어가 도화꽃잎 몇 개 피어나기도 하는
뚜껑 덮으면 사라지는
저 무변광대 無邊廣大의 세상
「거울의 방」전문
마치 이상李箱의 ‘거울’이 연상되기도 하는 시다. “거울이 아니었던들 내가 어찌 거울 속 나를 만나 보기만이라도 했겠소// 나는 지금 거울을 안 가졌소마는 거울 속에는 늘 거울 속의 내가 있소“ 李箱의 「거울」의 일부분이다.
송연숙의 「거울의 방」에서는 ”거울 밖의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보고 있는데/ 거울 속의 나는 거울 밖의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라고 이중적 구조로 역설한다. 특히 첫 연에서 ”거울 속의 나는 실상일까, 허상일까/수세미처럼 구겨져 아침의 벽에 매달리는 얼굴/무게를 잃는다“에서는 ‘존재’에 대하여 자신에게 의문을 던진다. 싸르트르의 “존재와 무” 같은 철학적 의미를 부여 한다면 현존재Dasein와 본질적 존재sein 사이에서 송연숙 시인은 자신의 존재 확인에 대하여 갈등한다. 그러므로 「거울의 방」은 그의 ‘자화상’이다. 그런데 이 ‘자화상’의 지향점은 인간이 가야할 변곡점인 죽음에까지 닿아 있다. “갈아입은 수의처럼(생략)/저 세상으로 들어가 도화꽃잎 몇 개 피어나기도 하는/뚜껑 덮으면 사라지는//저 무변광대無邊廣大의 세상”이라고 사유하듯, 혹은 체념하듯 자신을 응시한다.
시를 창작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존재 찾기의 순례”이다. 이 순례가 거듭되면서 창작자는 거기에서 희열을 느낄 수도 있고 더 비참한 절망을 맛볼 수도 있다. “절망은 절망으로 극복한다.”는 이상李箱의 말처럼 그것이 예술이고 존재 찾기의 순례인 지도 모른다.
「내재율」이란 작품 한 편을 더 감상함으로써 송연숙 시인의 심상에 동화되어 보자.'
양동이를 뒤집어 쓰고
발성 연습을 해 보았다
목소리에는 신을 키우는 메아리가 있고
노래 속에는 귀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노래가 종이처럼 구겨지는 것을
귀는 몰래 듣고 있었다
양동이는 요란한 소리를 품고
가을 내내 새들을 쫓았다
양동이에서 찌그러진 음표들이 쏟아질 때마다
새들은 마을 끝까지 휘어졌다 제 자리로 돌아오곤 하였고
양동이 속에는 여전히 새들이 남아 있었다
「내재율」 1.2연
내 안엔 내가 흐르는 운율이 있다
돌아눕다가 휘어지거나 꺾이는 몸엔 내성이 생겼다
그 어느 지점을 더듬으며
성호를 긋고 발성 연습을 한다
양동이에서 쏟아지는 내 안의 새떼들
그림자 없는 신의 발자국처럼
어지럽게 날아오른다
「내재율」 끝-4연
이 시는 얼핏 첫 행을 읽었을 때 미소를 머금게 한다. 아이들처럼 왜 양동이를 뒤집어 쓸까? 하는 동화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동이를 뒤집어쓰고 그 속에서 시인은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자신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이 역시 자아의 ‘존재 찾기’의 순례다. 양동이 속에서 울리는 소리들은 모두 ‘자아의 내면의 소리’들이다. “목소리에는 신을 키우는 메아리가 있고/노래 속에는 귀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라는 표현은 절창이다. 그 “신을 키우는 메아리”는 자기 자신에게 헌사 하는 신이기 때문에 또한 영적으로 위대하기만 하다. 그 위대함은 마지막 4연으로 이어진다. “성호를 긋고 발성 연습을 한다/양동이에서 쏟아지는 내 안의 새떼들/그림자 없는 신의 발자국처럼” 여기에서 시적 자아는 동일시 기법으로 감정이입 된 상징어는 바로 ‘새떼들’이다. 그 새떼들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통하여 시인은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 목소리가 바로 시인의 자아의식의 발로인 「내재율」이다. 자아를 바라보는 통찰력과 자성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시인이야말로 ‘도道의 길‘을 걷고자 하는 진정한 시인이다. 시는 ‘道’의 길을 찾는 작업이기 때문에.
3.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말로써 “시인은 발견의 눈krantidarsi을 가진 자,”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새로운 이미지를 지닌 언어를 창조해 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릴케는 젊은 시절 로댕으로부터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송연숙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사물에 대한 남다른 관찰과 통찰력으로 자연친화적 자세를 감지하게 된다. 송시인은 자아의 내면이나 시적 대상이 되는 사물의 몸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감각적 이미지로 표출해 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달팽이 시간을 굴리다」 「물고기 화석」 「고양이 와불」 「바뀌 날개」 「벚나무와 얼룩말」등의 작품은 관찰력을 통한 사유의 세계를 잘 살려낸 작품이다.
달팽이가 지나간 배춧잎은 텅 비어 있다
비어 있는 문양은 느린 시간의 발자국, 무형의 무늬 속으로 늦여름이 빠져 나간다 사각사각 초침들이 배추 이파리를 지날 때 점액질 흰 달은 둥글게 살이 찐다 여름의 막바지들이 겹겹으로 들어차고 막바지에 다다른 파란을 달팽이가 갉아 먹는다 파란의 흉터는 공중의 숨구멍
모든 흉터는 파란이 파란波瀾을 겪으며 걸어온 흔적이다
달팽이가 지나온 흔적 너머로 늙은 개가 하품을 하고 밀잠자리들이 고춧대 끝에서 구름의 전파를 잡는다 알밤이 툭툭 가을을 세고 수수열매 자루들마다 공중을 쓸고 있다
지금은
배추들이 겉잎을 버리는 시간
풀벌레 소리가 배춧잎으로 스며드는 시간
햇살과 바람의 끝자락이 알곡처럼 자루에 담기는 시간
오른돌이바람이 천천히 공중의 시간을 돌리고 있다
「달팽이 시간을 굴리다」 전문
버찌가 툭 떨어진다
발에 밟힌 보라가 그려 놓은 얼룩말
북도에서도 교실에서도 얼룩말이 뛰어드는 봄
흙 묻은 눈동자 속에 고여 있는
봄, 꽃, 바람을 닮은 아이들
나뭇잎 그림자는 손가락을 펴서 등을 토닥이고
물집 잡힌 땀방울이 버찌를 쓸고 있다
「벚나무와 얼룩말」 부분
「달팽이 시간을 굴리다」에서 작자는 ‘달팽이’를 통하여 무엇을 상징하려고 하였을까?
이 시는 시간적 공간적 개념으로 한 생명체가 흔적을 남기며 느리게 건너가는 생의 과정을 관통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많은 시간을 동반하는 시선으로 어프로치 approach된다. 한 계절을 건너가는 시간과 공간을 암시하기도 하고 또는 인생이 한 세상을 건너가는 삶의 한 궤적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지나간 자리는 찬란한 어떤 무늬나 문양보다는 ‘흉터’를 남기며 간다. 그게 인생이다. 화자는 “달팽이가 지나간 배춧잎은 텅 비어 있다”고 한다. 이 “텅 빈” 이미지는 상처 자국으로 남아 쓸쓸하고도 공허한 이미지로 각인된다. 또 그 “흉터는 파란이 파란波瀾을 겪으며 걸어 온 흔적이다”라고 진술한다. 그러므로 이 시는
한 생명체가 한 계절을 건너가는 과정이 아주 섬세하게 한 채의 피륙처럼 잘 짜여져 있다. 그만큼 시의 구조가 탄탄하다. 또한 시를 시답게 직조한 상징과 은유는 뛰어난 작품으로 공감대를 형성한다.
“파란의 흉터는 공중의 숨구멍”이란 표현은 이미지가 명료하다. 특히 한 생을 건너가는 시간적 과정에서 “햇살과 바람의 끝자락이 알곡처럼 자루에 담기는 시간”이란 묘사는 압권이다. 이렇게 시간을 굴리는 생명체들은 “오른돌이바람이 천천히 공중의 시간을 돌리고 있”을 것이다. 자연친화적 심상으로 한 생명체의 순환적 이미지를 잘 살려낸 수작이다.
송연숙 시인의 사유적 관찰력은 작품 편편마다 이어진다. 「벚나무와 얼룩말」에서
“버찌가 툭 떨어진다/발에 밟힌 보라가 그려 놓은 얼룩말/교실에도 복도에도 얼룩말이 뛰어드는 봄”이라고 이미지화 한다.
교정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벚나무의 열매가 터져 있는 광경을 바라보는 시각이 절묘하게 그려져 있다. 교사들은 일제日帝의 잔재란 이유로 교무회의에서 잘라내야 한다는 의견들로 분분하다. 또 아이들은 아랑곳없이 꽃잎을 손으로 받으며 ‘사랑의 꿈’을 키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버찌는 ‘얼룩말’이 되어 운동장에서 복도에서 뛰어다닌다. 툭툭 터진 버찌 자국을 ‘얼룩말’로 상징화한 이미지는 독특하고 신선하다. 송연숙 시인은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통과하는 사물의 속성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비유한다. 그의 뛰어난 관찰력과 자연친화적 사유에서만 얻을 수 있는 잠재적 자산이다.
4.
송연숙 시인은 대학 시절부터 내공을 쌓아온 시인이다. 대학 3학년 때 이미 대학에서 주최 한 백령문학상 작품공모에서 장원을 하여 그 재능을 인정받은 바 있다. 그리고 2016년 당시로는 월간문예지 <시와 표현>에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하였다. 더욱 괄목할 만한 재능을 다시 인정받은 것은 2019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을 통해서다. 이 시집의 얼굴이 된 「측백나무 울타리」라는 당선작품이 그것이다.
누가 아무도 없는 벌판에 측백나무 울타리 세워 놓았나 안쪽도 바깥도 없는 그 울타리 드나들며 나는 안쪽에서 바깥을, 또 바깥에서 안쪽을 넘겨보거나 내다보곤 했다 또 아주 오래전 허물어진 옛집을 수습해서 울타리에 기대 놓았다그럴 때면 앞마당과 뒤란이 저희들까지 순서를 정하곤 하였다 집을 품지 않은 울타리는 울타리가 아니어서 벌판에서 벌판으로 몇천리 가면 기차가 떠나는 간이역이 있고 또 어느 쪽에서 몇 시간 동안 그 기차를 타고 가면 어리둥절 할 양떼들이 있다 양들에게 측백나무 울타리에 관해 물으면 예전 자신들이 구름의 일족으로 흘러 다닐때 언뜻 본 것도 같다는 말을 하였다 측백나무 울타리에 오래전에 무너진 집을 다시 세운다 거미는 아침이슬로 기둥을 세우고 처마도 만드는데 머리가 먼저 이슬에 들어가 집을 짓는다 팔은 팔 대로 다리는 다리 대로 둥근 배마저 이슬의 방을 하나씩 차지한다 안쪽도 바깥쪽도 없는 집순서도 모서리도 신음도 만들지 않는 집 측백나무 울타리엔거울 하나 둥실 매달려 있다 「측백나무 울타리」전문
“울타리”의 원형상징은 ‘보호막’이다. 그러나 송연숙 시인의 “울타리”는 안쪽과 바깥쪽이 텅 빈 경계선이다. 이 경계선은 삶의 단면을 우회적으로 그려내려는 장치다. 더 깊이 있게 천착한다면 “측백나무 울타리”는 경계의 안과 밖, 거기에는 이분법적인 경계가 아니라 안쪽이나 바깥쪽이나 빈 공간의 단면이다. 결국 이 “울타리”는 홀로 외롭게 서 있는 단독자다. 안과 밖이 없이 단면만 유지하고 있는 한 사회나 가정의 시대상을 암시한 시로 볼 수도 있다. 그 경계에서 “안쪽과 바깥쪽도 없는 집”을 짓는 거미의 형상은 마치 키르케고르가 제시한 단독자의 외로움 혹은 생의 공허한 심상이 내재 되어 있다. 그럼에도 그 안에는 질서가 있고 희망이 있다고 화자는 진술한다.
“아주 오래전 허물어진 옛집을 수습해서/울타리에 기대 놓았다/그럴 때면 앞마당과 뒤란이/저희들끼리 순서를 정하곤 하였다”와 같이 단면에서도 순서가 있고 질서가 있는 삶이 영위된다.
그러나 단독자의 외로움은 여전히 배제 되지 않는다. “안쪽도 바깥쪽도 없는 집/순서도 모서리도 신음도 만들지 않는 집/거울 하나 둥실 매달려 있”는 집이다.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운가! 이것이 바로 안쪽도 바깥쪽도 없이 홀로 서 있는 「측백나무 울타리」이다.
5.
이쯤에서 우리는 왜 시를 쓰는가를 돌아본다. 들뢰즈는 “문학을 한다는 것, 즉 작품을 쓴다는 것은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라고 했다. 허드슨W.H.Hudson 역시 “상상의 세계에 대한 욕구”가 글쓰기의 출발이라고 했다.
송연숙 시인의 이 상상의 세계, 현실에의 초월적 세계는 낭만적 자유애愛의 ‘심상’으로 나타난다. 등단작 중의 한 편이었던 「바다로 가는 길」이 그런 사유의 결정체다.
한 줄이다
모텔의 창을 열면
해송의 우듬지에 수평선이 걸려 있다
위험 도로 끝, 이라고 쓴 이정표 아래
입을 벌린 물고기
바다로 가는 길을 묻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1」
솔잎 깃털 사이로 하얀 뼈 몇 개 삐죽 올라와 있다
눈을 감싸던 동그란 뼈,
허공을 굴리며 먼 바다로 눈길을 보내고 있다
이제 바람은 그의 날개를 가볍게 들어 올릴 것이다
망망대해를 날아
한 점, 찾을 수 없는 마음 지나는 동안
어쩌면 아침 햇살이 될 지도 모르지
「바다로 가는 길 3」부분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바다와 마주 앉는다
허공을 지우며 가는 갈매기 한 마리
바다의 발톱 한 끝이 가슴을 치고 달아난다
「바다로 가는 길 5」
광대무변한 바닷가의 정경을 배경으로 바다를 노래한다. 이 무변의 공간적 설정은 시인의 무한한 자유사상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앞에서 제시한 허드슨의 이상적 세계, 상상적 세계에 대한 욕망의 표출이다.
바다로 가는 과정에서 “입을 벌린 물고기/ 바다로 가는 길을 묻고 있다” 에서 이 ‘물고기’는 화자의 상징어로 동일화 현상이다. 화자는 “허공을 굴리며 먼 바다로 눈길을 보내고/바람은 그의 날개를 가볍게 들어 올릴 것이다/망망대해를 날아/ 한 점, 찾을 수 없는 마음 지나” "아침 햇살”(「바다로 가는 길 3」)을 갈망하는 시인의 눈! 그 심상의 발아점은 황홀하다.
그리고 드디어 화자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바다와 마주 앉는다/허공을 지우며 가는 갈매기 한 마리”(「바다로 가는 길 5」)가 되어 끝없는 침묵, 그런 명상의 자세가 한 폭의 그림처럼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
6.
송연숙의 시집, 「측백나무 울타리」가 관통하고 있는 시적 대상은 대부분 ‘자연물’이다. 이 자연물에게 시인은 자신을 감정이입 시키고 설계하면서 이상적인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현실에 대하여 불평하지도 않고 그저 담담히 세상을, 그리고 삶을 관조하듯 시적 대상을 찾아 은유하고 음미하며 창조한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을 관조하는 시선이 다양하다.
“발 닿지 않는 높이보다/ 발 닿는 높이가 더 매달리기 힘들다는 것/철봉 밑에서는/ 점점/내가 무거워진다는 것을”(「철봉」)을 통하여 깨닫는다. 또 때로는 “가벼운 것은 위로 떠오르는 속성이 있다”(「슈퍼문」)고 자신을 사물에 견주어 이성적으로 성찰하기도 한다.
“글은 곧 그 사람이다.”라는 뷔퐁Buffog의 말처럼 송연숙의 시집 「측백나무 울타리」는 그의 내면을 깊은 심연으로부터 잔잔하게 끌어 올린 그의 자화상이다. 수도修道하듯, 거울 같이 정화된 한 권의 시집 앞에서 나의 내면도 깊게 비춰 보는 아침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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