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주의로 통일을: 남북한 인권 비교
이재봉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평화학 명예교수)
남한 보수세력이 진보세력에게 종종 시비 걸며 즐겨 비판하는 것 중 하나가 북한의 열악한 인권 상황에 왜 침묵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진보세력은 그러한 보수세력이 같잖다고 여기는지 대꾸하지 않거나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고요. 이와 관련해, 한국과 조선뿐만 아니라 미국과 중국도 서로 다른 인권 잣대를 적용해 저마다 상대방 인권 현황이 최악이라고 주장하는 편향적이고 왜곡된 현상을 짚어봤습니다. 박한식 조지아대학교 명예교수가 2월 초 『인권과 통일: 통일을 위한 인권 이념』을 펴내는데, 제가 “제3의 이념, 인권주의로 통일을 추구합시다”는 추천사를 쓰면서요.
요즘 남북이 전쟁으로 치닫고 있어서 전쟁 막는 게 워낙 시급하고 중대하기에, 통일을 말하는 게 시의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조선이 평화통일 포기한다고 정책.전략 수정해도 우리는 언제든 통일.평화 지향해야죠. 그리고 아래 추천사는 두어 달 전 쓴 글이라는 점도 감안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추천사: 제3의 이념, 인권주의로 통일을 추구합시다
이재봉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평화학 명예교수)
박한식 선생님의 <박한식 사랑방> 강의록을 정리한 책이 두 번째 나옵니다. 2020년 9월부터 1차로 실시한 월례강좌 20회 내용을 정리해 2022년 10월 『안보에서 평화로: 격동하는 새 세계질서와 통일』을 펴낸 데 이어, 2022년 8월부터 2차로 진행한 강좌 16회 내용을 묶어 2024년 1월 『인권과 통일: 통일을 위한 인권 이념』을 펴내는 것입니다.
2차 강좌는 두어 달 뒤 한글로 번역돼 출판될 선생님의 역저 Globalization: Blessing or Curse? (세계화: 축복인가 재앙인가?)의 주제 몇 가지를 바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50년간 미국 대학에서 영어로 강의하며 온 힘을 기울여 영어로 쓴 학술서적의 중요 내용을 우리말로 강의하는 게 좀 어려웠겠지만 큰 보람을 느꼈다고 합니다.
책의 핵심 주제가 ‘발전’이라면, 강의의 주요 주제는 ‘인권’이었습니다. 발전 (development)은 개인이든 국가든 언제 어디서든 추구하기 마련인데, 이는 ‘양적 성장 (growth)’이 아니라 질적 향상을 뜻하며, 그 목적은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요 그게 바로 인권 증진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발전의 목표는 인권 증진에 있고, 발전된 사회는 모든 종류의 인권이 선양되어 있는 곳이라는 거죠.
박한식 선생님이 이렇게 발전과 인권에 관해 연구하고 강의해온 것은 무엇보다 남북 평화통일을 머릿속과 마음속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통일을 이루려면 이질성을 줄이고 동질성을 늘려야 하는데, 남북 사이에 가장 큰 이질성은 이념입니다. 자유민주주의든 인민민주주의든,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목표는 사람이 잘 살기 위한 것으로 발전을 위한 수단일 뿐이지만, 그 목표를 추구하는 방향과 방법이 너무 다릅니다. 게다가 자본주의로 잘 된 나라도 별로 없고 사회주의가 제대로 된 나라도 거의 없습니다.
학자로서 통일을 위해 상식적이고 설득력 있으며 남북 양쪽이 받아들일 수 있고 정책적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새로운 이념을 찾아야겠다는 사명감 또는 소명의식으로 평생 고민하며 연구해온 것이 ‘인권주의’입니다.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인민민주주의에 이은 ‘제3의 이념’인 거죠. 바로 이 인권 이념으로 통일을 추구하자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한반도/조선반도가 인권주의 시발점이 되자고 호소합니다.
여기에 인권 기준이 다른 게 문제입니다. 자본주의에서는 자유를 내세우고 사회주의에서는 평등을 앞세우기 마련이거든요. 그러나 인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유엔 헌장에도 명시돼있고 인권 공부하는 사람들 모두 인정하듯, 자유권도 아니고 평등권도 아닌 생명권/생존권 (life right)입니다. 따라서 생명권/생존권을 핵심으로 삼고 자유권, 평등권, 정체성의 권리, 사랑의 권리 등을 아우르는 인권을 통일 정부의 이념으로 밀어붙이자는 게 이 책의 핵심 내용입니다.
저는 인권주의로 남북통일을 추구하자는 박한식 선생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먼저 보편적 인권에 대한 국제적 논의의 흐름과 표준을 소개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보편적 인권 (universal human rights)’을 규정하는 선언문이나 서약서 등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948년 많은 나라들이 ‘양도할 수 없는 인권에 대한 포괄적 목록 (comprehensive list of inalienable human rights)’에 동의했습니다. 이에 따라 1948년 12월 유엔 총회는 ‘인권에 대한 보편적 선언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을 결의안으로 채택했고요. 흔히 ‘세계인권선언’이라 불리는 거죠.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난다며, 그들의 ‘기본적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고 규정하는 내용입니다.
이 선언에 법적 구속력이 없고 구체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에 따라, 1966년 12월 유엔 총회는 법적 구속력을 지니고 인권을 더욱 구체화할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두 가지 국제 조약을 채택했습니다. 첫째,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International Covenant on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Rights)’으로, 줄여서 ‘사회권’ 또는 'A규약'이라 불리는데, 실질적 평등, 정의로운 분배, 일할 권리, 교육받을 권리 등 적극적 권리를 보장하라고 요구합니다. 둘째,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으로, ‘자유권’ 또는 B규약이라 불리는데, 재산 소유,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을 보장하는 소극적 권리의 보장을 요구하고요. 이 두 가지 규약을 합친 게 ‘인권에 관한 국제법안 (International Bill of Human Rights)’입니다. 우리는 ’국제인권장전‘ 또는 ’국제인권규약‘이라 부르지요.
이와 함께, 미국과 중국 그리고 한국과 조선은 서로 다른 인권 잣대를 적용해 저마다 상대방의 인권 현황이 최악이라고 주장하는 편향적이고 왜곡된 현상을 덧붙입니다.
첫째, 미국은 매년 3-4월 세계 ‘인권 보고서 (Human Rights Reports)’를 발표합니다. 국무부가 ‘1961년 대외 원조법 (Foreign Assistance Act of 1961)’에 따라 미국 원조를 받는 나라들의 인권 상황을 조사해 의회에 보고하기 시작했는데, 1970년대 말부터 미국을 제외한 세계 200여 국가들 대상으로 ‘국가별 인권 보고서 (Country Reports on Human Rights Practices)’를 만들어온 겁니다. 지난 3월 발표한 2022년 보고서엔 윤석열의 워싱턴 욕설과 관련해 정부와 여당이 MBC에 폭력적으로 대응하며 언론.표현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대목이 있군요.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세계 최악의 인권 국가엔 중국과 조선이 뽑히기 마련입니다. ‘자유권’이 전혀 없다는 거죠.
둘째, 중국은 해마다 ‘미국 인권 기록 (US Human Rights Record)’을 발표합니다. 중국 국무원이 미국 국무부의 세계 인권 보고서에 맞서 미국의 열악한 인권상황을 비판하는 보고서를 1990년대 말부터 내기 시작한 거죠. 미국이 만든 보고서엔 “중국을 포함한 190개 이상의 국가와 영토의 인권 상황에 대한 왜곡과 비난으로 가득 차 있다”며, 미국이 인권을 “다른 나라의 이미지를 훼손하고 자국의 전략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흑인을 비롯한 소수민족 차별, 끊임없는 폭력범죄와 총기사건에 따른 국민의 생명과 안전 위협 등 정작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며 타국의 인권 문제를 운운할 자격이 있느냐는 비판도 곁들입니다.
셋째, 한국은 ‘북한 인권 보고서’를 발행합니다. 2016년 박근혜 정권 때 만들어진 ‘북한 인권법’에 근거해 2017년부터 보고서를 만들었는데, 2023년 3월 윤석열 통일부가 처음으로 공개 발간했습니다. 나아가 “북한 주민의 처참한 인권 유린의 실상이 국제사회에 낱낱이 드러나야 한다”며, 전 세계에 널리 알리라는 윤석열 지시에 따라 지난 7월부터 이 보고서를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중국어, 러시아어, 아랍어 등 6개 유엔 공식 언어로 작성해 국내외 주요기관에 배포한다는군요. 정치범 수용소, 강제 노동, 감시와 고문, 공개 처형 등 세계에서 가장 끔찍한 인권 유린이 이루어진다는 내용입니다.
넷째, 조선도 인권 백서를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인권연구협회가 1948년 12월 10일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 75주년을 기념해 미국 인권을 비판하는 백서를 2023년 12월 처음으로 냈습니다. 한국은 조선을 주적으로 삼아 조선을 비난하는 인권 보고서를 만드는데, 조선은 미국을 주적으로 삼고 미국을 비난하는 인권 백서를 발표한 거죠. "세계인권선언이 강조한 인간의 존엄과 권리는 오늘 총기류 범죄와 인종차별, 경찰 폭행과 녀성 및 아동학대 등 형형색색의 사회악이 만연하는 미국과 서방 나라들에서 무참히 유린당하고 있다"는 겁니다.
참고로, 한국 언론엔 미국과 한국이 비판하는 ‘북한 인권’ 상황이 자세히 보도되지만, 중국과 조선이 지적하는 ‘미국 인권’ 상황은 거의 보도되지 않기에, 조선이 처음 발표한 인권 백서 몇 대목을 그대로 아래에 소개합니다.
“미국의 연구기관들과 언론들이 발표한 통계자료에 의하면 미국에서 지난 30년간 총기류에 의해 사망한 사람들의 수는 무려 110여만명에 달하며 2022년 한 해에만도 5,800명이 넘는 18살 이하의 미성년들이 총격으로 부상당하거나 사망하였다고 한다. 백인경찰에 의한 흑인살해 사건이 매일과 같이 련발하고 유색인종들에 대한 차별행위가 사회적 풍조로 만연되여 있는 나라도 바로 미국이다. 미국인구의 13%도 안되는 아프리카계 미국사람들은 경찰의 총에 맞아죽는 확률이 백인의 2배, 경찰의 폭력적인 법집행으로 사망하는 확률은 백인의 2.9배, 감옥에 감금되는 확률은 백인의 6배에 달한다고 한다..... 침략전쟁과 제도전복, 무력간섭 행위를 수없이 감행하여 인류의 생명권과 생존권을 유린 말살하여왔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2001년까지 지구상에서 발생한 248 차례의 크고작은 전쟁과 무장충돌 가운데서 80% 이상은 미국이 도발한 것이며 21세기에 들어와서만도 ‘반테로’와 ‘인권보호’의 미명 하에 80여개 나라에서 군사행동을 벌려 약 92만 9,000명의 민간인 사망자와 약 3,800만 명의 피난민을 초래하였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나라의 정권과 제도를 붕괴시키기 위해 '인권 문제'를 물고 늘어지며 해당 국가의 영상을 깎아내리고 악마화하려드는 것은 미국의 상투적 수법이다. 미국이 중국과 로씨야의 ‘인권문제’를 떠들어대는 것은 이 나라들의 발전을 어떻게 하나 억제하고 국제무대에서 최대한 고립시켜 저들이 주도하는 불법무법의 서방식 패권질서를 수립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우리 공화국에 대한 ‘인권’소동 역시 반제자주의 기치를 높이 들고나가는 우리 국가를 고립압살하고 사상과 제도를 전복해보려는 극악무도한 대조선 적대시정책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선택성은 이중기준을 동반한다..... 다른 나라들의 인권실상을 때없이 걸고드는 미국과 서방나라들이 최근 가자지대에서 감행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집단학살 만행에 대해서는 자위권 행사로 극구 비호 두둔하고있는 것이야말로 이중기준의 전형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미국과 중국 그리고 한국과 조선의 인권 기준이 너무 달라 ‘자유권도 아니고 평등권도 아닌 생명권/생존권’을 핵심으로 삼는 인권주의로 남북통일을 추구하자는 박한식 선생님의 지혜롭고 상식적인 주장조차 한국에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 책을 읽으며 궁리해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