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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위씨 연원]
盤古(반고)→天皇(천황)→地皇(지황)→人皇(인황)→太昊伏羲(태호복희)→炎帝神農氏(염제신농씨)→黃帝軒轅氏(황제헌원씨)
→玄囂(현효)→蟜極(교극)→帝嚳(제곡)→后稷(후직)→不窟(불줄)→公劉(공유)→慶節(경절)→皇樸(황박)→弗差(불차)→
毀喻(훼유)→公非(공비)→高圉(고어)→亞圉(아어)→叔非(숙비)→古公(고공)→季歷(계력)→周文王昌公(주문왕창공)→
(周武王發주무왕발、周公旦주공단) 畢公高(필공고) → 畢曉公(필효공,楷伯해백) →畢運公(필운공)→ 畢菜公(필채공)→
畢熊公(필웅공)→ 畢閼公(필어공)→ 畢峰公(필봉공)→ 畢肅公(필숙공) →畢密公(필밀공) → 畢通公(필통공) →畢墩公(필돈공)
→ 畢留公(필유공) → 畢鎮公(필진공)→ 畢显公(필현공)→畢萬公(필만공) → 魏犨公(위주공,武子무자) →
魏絳公(위강공,庄子장자) → 魏贏公(위영공,貞子정자) → 魏舒公(위서공,獻子헌자) → 魏取公(위취공,簡子간자) →
魏曼多公(위만다공,襄子양자) → 魏須公(위수공,桓子환자) → 魏駒公(위구공恒子항자) → 魏汝公(위여공) →
魏斯公(위사공,文侯문후) → 魏擊公(위격공,武侯무후) → 魏瑩公(위형공,魏惠王,梁惠王위혜왕, 양혜왕) →
魏赫公(위혁공, 魏,梁襄王위,양양왕) → 魏讓公(위양공,魏、梁哀王위, 양애왕) → 魏遫公(위칙공,魏、梁昭王위,양소왕)
→ 魏圉公(위어공,魏安釐王위안리왕) → 魏綸公(위윤공) → 魏萬通公(위만통공) → 魏柱公(위주공) → 魏錦秀公(위금수공)
→ 魏棟公(위동공) → 魏興元公(위흥원공) → 魏天漢公(위천한공,漢武帝時 左部侍郎한무제시 좌부시랑﹞→
魏志公(위지공,漢元帝時 侍郎한원제시 시랑﹞→ 魏世潔公(위세결공,漢哀帝時 奉議大夫 한애제시 봉의대부﹞→
魏紓公(위서공,漢光武帝時 左閣丞相 한광무제시 좌각승상﹞→ 魏洪燕公﹝위홍연공,東漢明帝時 鎮殿將軍 동한명제시 진전장군﹞
→ 魏振舜公﹝위진순공,東漢和帝時 兵部尚書 동한화제시 병부상서﹞→ 魏逵公﹝위규공,東漢順帝時 奉議大夫 동한순제시 봉의대부
﹞→ 魏良浩公﹝위량호東漢靈帝時 尚書 동한 영제시 상서﹞→ 魏權公﹝위권공,東漢獻帝時 廣州太守 동한 헌제시 광주태수﹞→
魏明穎公﹝위명과공, 總鎮 총진﹞→ 魏陞公﹝위승공,西晉惠帝時 京城守備太守 서진 혜제시 경성수비태수﹞→
魏雲登公﹝위운등공, 東晉肅宗時 兵部侍郎 동진 숙종시 병부시랑﹞→ 魏訓公(위훈공) → 魏恭彬公(위공빈공) →
魏湘公﹝위상공,東晉烈宗時 丞相 동진 열종시 승상﹞→ 魏榮盛公﹝위영성공, 東晉安帝時 京城守備太守 동진 안제시 경성태수﹞
→ 魏玉琳公﹝위옥림공, 五代南宋孝武帝時 總鎮 오대 남송 효무제시 총진﹞ → 魏典公﹝위전공, 五代南梁武帝時 尚書 남양무제시
상서﹞→ 魏金祥公(위금상공, 北齊鉅鹿下曲陽人 북제 거록 하곡양인,唐太宗元年 左部侍郎 당태종 원년 좌부시랑) →
魏徵公(위징공, 唐太宗時 侍中, 鄭國公 당태종시 시중, 정국공)→魏鏡公(위경공, 諱 奕.齡, 諡號 懷州君 AD 643年頃 韓國 東來.
新羅國 善德女王代 官 門下拾非侯 大阿飡 尙書侍中 휘호 혁, 령, 시호 회주군 AD 643경 한국 동래, 신라국 선덕여왕대 관
문하습비후 대아찬 상서시중 참고: 중국에서 파견된 학사들의 함자가 "鏡"인데 이는 당태종이 고구려에 학사를 파견할 때
만인의 거울이 되라는 의미에서 함자로 "鏡"을 하사한 것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는 당태종이 위인위경(以人爲鏡)의
인물로 함께했던 위징공에서 그 연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大韓民國 長興魏氏 始祖公 회주군(懷州君) 위경(魏鏡)
장흥위씨는 희성위씨(姬姓魏氏)로 주나라(周.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56년) 천자(天子)이신 大周 문황제(文皇帝) 폐하의 후예이다. [大周 문황제(文皇帝. 姓은 희(姬), 名은 (昌). 기원전 12세기? ~ 기원전 11세기?. 姓은 존귀하다 하여 이름과 함께 붙여 쓰지 않는다. 姓은 영원불변이며 氏는 바꿀 수 있었다 ] [ 주나라 문황제 폐하] 大周 문황제 폐하의 차자(次子)이신 大周 무황제[ 武皇帝. 姓은 희(姬), 名은 발(發). ? ~ 기원전 1043년?] 폐하께서 은(殷)의 폭군 주왕(紂王)을 토멸하실 때 大周 문황제 폐하의 15자이신 고[ 高. 姓은 희(姬), 名은 고(高) ] 공 전하께서 큰 공을 세우셨다. 이에 大周 무황제 폐하께서 천하를 평정하신 후 공을 1등 작위(爵位)인 공작(公爵)으로 봉작(封爵)하시고, 또한 기내(畿內,천자가 다스리는 사방천리 땅)의 필나라에 봉하셨다. 비로소 나라의 이름으로 씨(氏)를 필(畢)로 하시니 후세 사람들이 공을 이름하여 필공고(畢公高)라 하였다. 공은 천하(天下) 위씨(魏氏)의 비조(鼻祖)이시다. [필국(畢國)은 섬서성(峽西省) 서안(西安), 함양(咸陽) 이북 필원(畢原) 지역으로 함양의 옛 지명이 필(畢)이다.서쪽으로 섬서성 흥평현(興平縣) 동부에 이르고, 동쪽으로 섬서성 함양성 옛터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섬서성 경양현(泾陽縣) 경수(泾水) 남안에 이르고, 남쪽은 섬서성 위수(渭水)에 이른다. 함양의 옛 지명이 필(畢)인 것을 참작하면 필국의 옛 도성이 함양이 아닌가 한다. 필(畢)은 필맥(畢陌), 필원(畢原), 함양원(咸陽原)으로 불렀는데 주나라 초기에 주나라 황도(호경(鎬京), 호경 유지는 서안시 장안구(西安市 长安区) 두문가도(斗门街道) 이북,풍하(沣河) 동안)를 에워싸는 기내 지역을 10등분 하여 제일 공이 많은 주무왕의 혈육에 하사하였는데 필국을 가장 중시하여 주문왕과 주무왕이 붕어하신 후 모두 이곳에 묻히셨다.] [하은주(夏殷周)는 오등작(五等爵) 제도가 있었다. 이 오등작은 제후의 계급으로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다섯을 뜻한다. 오등작은 나라의 크기에 따라 분류하여 제후에게 작위를 주는 것이다. 고대 천자는 왕이라 부르며, 그 아래로 다섯 계층을 나누는데, 대국은 공, 중국은 후와 백, 소국은 자와 남을 하사하였다.]
[주나라 태사 필공고(畢公高) 전하] [필공은 魏氏, 畢氏, 萬氏, 馮氏, 潘氏, 王氏의 비조(鼻祖)이시다. 필공의 후손은 1억명 정도로 중국 성씨 중에 가장 많은 후손을 거느린 성씨의 시조이시다. 진나라에 위나라를 잃은 후에 필공고의 후예 위무기 공의 손자 위비자(魏卑子) 공이 산동성 태산으로 난을 피해 들어갔다. 한나라 초에 위비자 공이 조칙을 받아 임관하니 양릉군(兰陵郡. 산동성 조장시(枣庄市) 동남,난릉현(兰陵县) 서남)에 봉했다. 이로 인하여 왕가의 후손이라 하여 이 종족(宗族)을 "왕가(王家)”로 하니 이로부터 왕(王)을 성(姓)으로 하였다. (秦 魏后,后裔魏无忌之孙魏卑子逃入山东泰山,汉初,魏卑子奉诏做官,被封于兰陵郡。因其是王家之后,故称其族为“王家”,从此以王为姓.) 현재 중국 왕씨(1억)의 90%가 필공을 시조로 하기 때문에 왕씨의 정종(正宗)은 필공을 시조로 하는 왕씨로 한다. ] 필나라 건국 400여년 만에 서융(西戎)의 침범으로 위씨 선조들이 나라를 잃었으나 필공고 전하의 후손 필만(畢萬) 공 전하께서 기원전 661년에 춘추오패 중 한 나라인 중원대륙의 강국이었던 진(晉)나라의 대부가 되셔서 위지(魏地. 古魏國인 산서성 예성현(芮城縣)과 그 관할 하에 있던 산서성 운성시(運城市) 일대)에 제후로 봉해졌으며, 공의 후손은 나라의 이름으로서 씨(氏)를 취하니 필만 공 전하는 중화위씨(中華魏氏)의 태시조이시다. [필만공이 처음 봉하여 졌던 고위국의 유지(古魏遺址)는 예성현에 있는 중국 3대 도교의 총본산인 도사(道師) 여동빈(呂洞賓. 798 ~ 미상)의 사당인 영락궁(永楽宮)이 있는 곳이다. 1950년대말 삼문협 댐 건설로 본래 영락진(永楽鎭)에 있던 영락궁이 수몰 위기에 처하자 영락진에서 20km를 옮겨서 1959년 ~ 1964년까지 고위국 유지의 서문터에 영락궁을 복원하였다. 예성 정류소에 1.5km 정도 떨어져 있다.] 춘추시대에 필만(畢萬) 공 전하는 진나라로 가셔서 그곳의 관리가 되었다. 주혜왕(周惠王) 16년 기원전 661년에 진 헌공(晉獻公)은 곽(霍)나라, 경(耿)나라, 위(魏)나라 정벌에 나섰다. 이 때 필만 공 전하는 군우(軍右)가 되고, 조숙(趙夙) 공이 어자(御者)가 되어 종군하였다. 진헌공은 전승의 결과로 새로 얻은 (魏)나라 땅에는 필만 공 전하를 대부(大夫)로 봉하고, 경(耿)나라 땅에는 조숙 공을 봉했다. 시경 위풍(魏風)의 위(魏)는 이곳을 말하는데 본시 大周 무왕폐하께서 은나라를 멸한 후 주나라의 공족(公族)으로 분봉한 제후국이었다. [곽나라(霍國. 기원전 1043년? ~ 기원전 661년, 재복국 기원전 662년 이전 멸망) : 위치는 산서성 곽주 일대이다. 주무왕 때 숙처(叔處. 주문왕 8자(子))를 봉하여서 곽숙처(霍叔處)가 되었으니 이것이 곽나라의 시작이다. 기원전 661년에 진나라에 멸망하였는데 진헌공이 곽태산신(霍太山神. 곽태산은 산서성 곽현(霍县) 동남쪽에 있는 산)을 두려워하여 곽공구(霍公求)가 복국(復國)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늦어도 기원전 622년 이전에 진나라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다.] [경나라(耿国. 기원전1524년 ~ 기원전 661년) : 위치는 산서성 하진시(河津市) 동남쪽 일대이다. 은나라 때 건국되었다가 주나라 건국 시에 멸망하였는데, 주나라 왕실은 동성인(同姓人. 姬姓)으로 다시 경나라에 봉하고 복국하였다. ] 복언(卜偃. 진(晉)나라의 복관(卜官) 이름)이 말하기를 “필만의 후손은 반드시 크게 번창할 것이다. ‘만(萬)’자는 만수(滿數)이고, ‘위(魏)’자는 높고 큰 것을 의미한다. 이로 볼 때 이는 개천(開天. 건국)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천자는 억만 명의 백성을 거느린다고 하고, 제후는 만 명의 백성을 거느린다고 한다. 지금 이름의 크기가 만수(滿數)이니 반드시 많은 백성이 모일 것이다.” 하였다.
필만 공 전하의 손자 위주(魏犨) 공 전하는, 진나라에서 쫓겨나 19년 동안 유랑했던 진 문공(晉獻公. B.C.636~628년 재위)을 수행하였다. 진문공이 진나라의 군주 자리에 오르자 위주 공 전하는 군우(軍右)에 오르고 후에 다시 대부로 봉해져 위 땅을 다스렸다. 위주 공 전하의 아드님에는 위과(魏顆) 공과 위강(魏絳) 공이 있었는데 모두 위나라의 명장이었다. 위과 공은 결초보은(結草報恩)이라는 고사로 전해진다. 주정왕(周定王) 23년, 기원전 446년 위사(魏斯) 공 대왕께서 제위에 올라 안읍을 위나라의 도성으로 삼았다. 이분이 바로 전국시대 초기 100년의 천하 재패의 위업을 세우신 위문후(魏文侯) 대왕이시다. 주위열왕(周威列王) 23년 기원전 403년 한(韓)과 조(趙) 양가와 함께 주왕(周王)의 정식 책봉을 받아 제후왕의 대열에 섰다. 기원전 661년 필만 공 전하께서 처음 고위국(산서성 운성시 예성현(芮城縣. 산서성 운성시 예성현(山西省 運城市 芮城縣) )에서 위나라의 역사를 여신 후, 기원전 562년 이전에 위도자 위구(魏口) 공 전하께서 다시 곽(霍. 산서성 곽주시(山西省 霍州市) )로 옮기시고, 기원전 562년에 위장자 위강(魏降) 공 전하께서 안읍(安邑. 산서성 운성시 하현 안읍 서북 우왕성(山西省 運城市 夏縣 西北 禹王城) )으로 옮기시고, 424년 위문후(魏文侯) 대왕께서 운성시 안읍 위표성(魏豹城. 운성시 안읍 위표성(運城市 安邑 魏豹城) )으로 도성을 옮겼다. 이후 위문후 대왕 재위 시 기원전 403년 다시 하북성 위현(魏縣. 하북성 위주 위현(河北省 魏州 魏縣) )으로 천도하시고 이후 이곳을 70여년 간 위나라의 도성으로 하여 위나라 최전성기의 역사를 써내려 갔다. 기원전 331년 위혜왕(魏惠王)께서 위현에서 대량(大梁. 하남성 개봉시(河南省 開封市. 이 때부터 [위나라]를 [양(梁)나라]라고도 불렀다. 양혜왕 = 위혜왕) )로 천도하시어 기원전 225년까지 107년 동안 위나라의 도성으로 하였다. 기원전 209년 위구왕(魏咎王) 전하께서 위나라를 부흥하시고, 이어 위구왕의 아우님인 위표왕(魏豹王) 전하께서 안읍(安邑. 위표성(魏豹城)을 도성으로 복국(復國)하시었다. 이후 평양(平陽. 208?~204. 산서성 임분시(山西省 临汾市) )으로 도성을 옮기고 서위(西魏)가 되었다. [기원전 661 ~ 636 산서성 운성시 예성현 [산서성 운성시 예성현 홈페이지 주소 : http://www.rcx.gov.cn/ 기원전 ? ~ 562 산서성 곽주시 [산서성 곽주시 홈페이지 주소 : http://www.huozhou.gov.cn/ 기원전 562 ~ 424 산서성 운성시 하현 안읍 서북 우왕성 [산서성 운성시 하현 홈페이지 주소 : http://www.sxxiaxian.gov.cn/ 기원전 424 ~ 430년 산서성 운성시 안읍 위표성 [산서성 운성시 홈페이지 주소 : http://www.yuncheng.gov.cn/ 기원전 430년 ~ 331 하북성 위현 [하북성 위현 홈페이지 주소 : http://www.wei.gov.cn/index.php 기원전 331 ~ 225 하남성 개봉시 [하남성 개봉시 홈페이지 주소 : http://www.kaifeng.gov.cn/ 기원전 208? 산서성 안읍 위표성 기원전 208? ~ 204 산서성 임분시(서위)] [산서성 임분시 홈페이지 주소 : http://www.linfen.gov.cn/ [ 위씨개기시조(魏氏開基始祖) 필만 공 화상(畢萬公畵像) ] 위문후(魏文侯) 대왕께서 6국을 평정하시사 전국시대 초기 백년의 천하 쟁패의 패업을 이루었던 위나라는 건국 시조이신 필만 공 전하로부터 위표왕 전하의 서위(西魏)에 이르기까지 기원전 661년 ~ 기원전 204년까지 458년 간의 장구한 역사를 중원대륙에서 써내려갔다. 중원대륙에서의 1년의 역사는 변방에서의 역사 100년보다도 값지다 할 것으로, 후세의 임금들도 위나라의 위대한 역사를 앞다투어 계승하려 하였으니 이후의 위나라(魏國), 양나라(梁國)가 모두 전국시대 위나라의 후계국이다. [위나라 세계(魏國世系)] 위나라 대부 시기(魏國 大夫 時期)
위나라 후왕 시기(魏國 侯王 時期)
[위나라 전성기 영역] [ 통관(潼關) ] 한국(韓國) 위씨(魏氏)의 시조(始祖)는 위경(魏鏡) 공이시다. 공은 대당(大唐) 관서(關西) 홍농(弘農)인이시다. 관서(關西)란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시대에 동관진(潼關鎭) 서쪽 지역을 가르키는 것으로 홍농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영보시(靈寶市) 동북쪽이다. 지금은 영보시 중심부에서 홍농로(弘農路)라는 도로명으로 홍농의 옛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하남성 영보시 인터넷주소: http://lingbao.smx.gov.cn/) 영보시에서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면 바로 중화위씨의 발상지인 고위국(古魏國)의 도성인 산서성(山西省) 예성현(芮城縣)이다. [ 동관진(潼關鎭) ] 목차펼치기관문 이름. 사례주 홍농군(弘農郡) 화음현(華陰縣)에 속하며, 한대(漢代)에 설치된 관문이다. 지금의 섬서성 동관(潼關) 동남쪽에 있었다. 섬서 · 산서 · 하남 등 3성(三省)의 경계 지역에 해당하며, 관중(關中)으로 들어가는 정식 도로의 중요한 관문이다. 관문의 성(城)이 산기슭에 버틴 채 아래로 황하를 굽어보고 있어 그 형세가 험요하기 짝이 없다. 위경(魏鏡) 공의 동래에 관해서는 네가지 설이 있다. 위경 공의 본명은 남양방씨, 남양홍씨의 문서에는 위 혁(魏 奕)으로 기록되어 있다. 장흥위씨 상계의 300여년 간의 기록이 망실되어 위경 공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이 장흥위문에 전하지 않는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왜구의 침입으로 급히 족보를 파묻었는데 - 금서계철(옛 제왕가의 족보는 위변조를 할 수 없도록 쇠를 녹여 주물로 족보를 만들고 산화가 되지 않도록 금칠을 하였다)로 추정 - 이를 나중에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한다. 1997년 1월 15일에 발간된 ≪한민족대성보(韓民族大姓譜)≫등에 나타난 팔학사(八學士) 기록에는
"長興 魏氏 , 魏鏡 , 齡(본명) , 唐에서 신라 태종(654-660)때에 입국"으로 되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정관 8경학사설과 대광공주 배종설인데 대체로 8경학사설을 인정하고 있다.
8경학사 가문 족보중에서 카페지기가 직접 본 것은 남양방씨 족보이다. 남양방씨가 중국방씨들을 방문한 기사가 구글에서 찾아볼 수 있었는데 중국 방씨 종친회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글을 옮겨본다. 다음은 중국의 문서에 실린 [방준]에 대한 기록의 한 대목을 옮긴다.
最近,韓國南陽房氏大宗會向中華房氏網傳來了他們珍藏的家譜資料並計劃2007年組團回中國尋根。 최근, 한국남양방씨대종회가 중화방씨홈페이지에 여러 질의 진귀하게 간직해온 족보자료와 함께 2007년 단체 중국의 뿌리 찾기 탐방 계획을 보내왔다. 據其譜書記載:韓國南陽房氏傳自唐開國宰相房玄齡的二子房遺愛(字俊)。 그 족보 기재에 의하면 한국 남양방씨는 당나라 개국 재상 방현령의 2자 위애(자 준)으로부터 전한다. 貞觀十七年,經高句麗寶藏王奏請唐朝,唐太宗派遣由幾位朝廷重臣後代組成的“八學士”代表團,赴朝鮮考察並教導東方先進文物禮儀,其中包括殷開山子殷洪悅、房玄齡子房俊(遺愛)、魏征子魏奕、侄魏知古、睦倫子睦種、吉奉德子吉偉、奇男必子奇牟、奉珙子丕。为其一一建了府邸. 정관 17년, 고구려 보장왕으로부터 당나라 조정에 청하여, 당태종은 몇명의 조정 중신의 후대로 구성된 "팔학사" 대표단을 파견하게 되었는데, 도착하여 조선을 살핌과 함께 동방선진문물,예의를 가르쳐 이끌었으니, 그 중에 은개산의 자 은홍열, 방현령의 자 방준(유애), 위정(=위징)의 자 위혁, 조카 위지고, 목륜의 자 목종, 길봉덕 자 길위, 기남필의 자 기모, 봉공의 자 비가 포함되어 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관저를 건립하였다. 各學士部分在韓國留下後代。其中房遺愛第九代孫房季弘開始在南陽開基,並形成大宗。 각 학사의 일부가 한국에 남아 후대를 이어갔다. 그 중 방유애 제 9대손 방계홍이 남양에 터전을 잡기 시작하여 대종을 형성하였다. 韓國南陽房氏在明以前曾四修族譜,均為中文版。 한국 남양방씨는 명나라 이전에 일찌기 4번에 걸쳐 족보를 닦았는데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다. 明朝以後因朝鮮逐步棄用漢語為國語,故其後修訂的族譜開始中韓文混用。 명나라 이후에는 조선이 드디어 한문을 버리고 국어를 사용하므로 그 후에는 중한문 혼용으로 족보를 수정하였다. 有關戰亂、文革等原因,國內有關房玄齡直系後代的家譜資料明以前藏本尚未出現, 因此韓國版房玄齡系家譜非常具有珍貴。 전란과, 문화혁명 등이 원인이 있어, 국내에는 방현령과 관련한 직계 후손의 가보 자료가 명나라 이전의 소장본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이로 인하여 한국판 방현령계 가보는 대단히 진귀함이 있다.
다음은 [중국 홍씨 종친회 홈페이지]에 있는 남양방씨 관련 기록이다.
唐城遗址:公元643年(贞观十七年),经高句丽宝藏王奏请唐朝,唐太宗派遣由几位朝廷重臣后代组成的“八学士”代表团,赴朝鲜考察并教导东方先进文物礼仪,并为其一一建了府邸,唐城遗址即为此所留。 당성유지 : 기원후 643년 (정관 17년), 고구려 보장왕으로 부터 당나라 조정에 청하니, 당태종은 몇분의 조정중신의 후손으로 구성된 "팔학사" 대표단을 보냈는데, 도착하여 조선을 살표보고 동방의 선진문물과 풍속을 가르쳐 이끌고, 모두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관저를 건립하였는데 당성유지는 이 유적지이다. 这八学士分别是洪琇之子洪天河、殷开山之子殷世通、房玄龄之子房俊(遗爱)、魏徵侄魏知古之子魏奕、睦伦之子睦种、吉奉德之子吉伟、奇男必之子奇牟、奉珙子奉伾。 이 팔학사는 각각 홍수의 자 홍천하, 은개산의 자 은세통, 방현령의 자 방준(유애), 위징의 조카 위지고, 자 위혁, 목륜의 자 목충, 길봉덕의 자 길위, 기남필의 자 기모, 봉공의 자 봉비이다. 其中房遗爱被赐乡“南阳”,各学士在韩国均留有后代。房遗爱第九代孙房季弘开始在南阳开基,并形成大宗。八学士在经陆路前往汉城途中、渡过鸭绿江后,因一路风物殊异,曾在义州御风楼即兴联诗一首: 그 중 방유애는 남양을 본향으로 받았다. 각 학사는 한국에 남아 모두 후대를 남겼다. 방유애 제 9대손 방계홍의 남양에 터전을 열기 시작하여 대종을 이루었다. 팔학사가 육로를 거쳐 한성으로 가는 도중, 압록강을 건넌 후 이 길로부터 풍물이 다르므로 일찌기 의주 어풍루에 이르러 연시 한수를 지었다.
登登绵岳眄苍茫(房遗爱) 잇다은 봉우리 오르고 올라 창망한 천하를 보노라. 信步层岩近太阳(魏 奕) 층층한 바위를 디뎌서 태양에 가까이 가리라 믿노라. 九万北辰宜曳履(洪天河) 구만리 북진(만주)을 마땅히 끌어다 밟겠고, 三千东海可褰裳(睦 种) 삼천리 동해(한반도)를 치마걷고 건널 것이네. 西瞻庶檄燕帝京(奇 牟) 서쪽을 보니 연나라 임금의 도성에 많은 격문이 보이니, 南望将擒倭國王(殷世通) 남쪽을 바라보매 장차 왜국왕을 사로잡겠네. 领略胜区无限景(吉 伟) 빼어난 풍광의 땅 가없는 경치를 음미하려니, 凭虚拟驾大鹏翔(奉 伾) 허공에 기대어 대붕을 타고 날아 볼까 하노라. [참고. 子惠思我,褰裳涉溱 당신이 진정코 나를 사랑한다면, 치맛자락 걷어 올리고 진수(溱水)라도 건너련만. (《诗经・郑风・褰裳》] 1997년 1월 15일에 발간된 ≪한민족대성보(韓民族大姓譜)≫등에 나타난 팔학사(八學士)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長興 魏氏 , 魏鏡 , 齡(본명) , 唐에서 신라 태종(654-660)때에 입국 南陽 洪氏 , 洪鏡 , 天華 , 高句麗 營留王(618-641)때 唐나라에서 入國.(643) 南陽 房氏 , 房鏡 , 季弘 , 唐에서 高句麗 營留王(643)때 입국
위의 기록을 다시 보면 팔학사 시를 참고하면 시조공 위경은 위혁으로 남양방씨와 남양홍씨 족보의 기록과 일치한다. [ 정국공(鄭國公) 위징(魏徵) 전하 ] 그런데 중국 위징 가보를 보면 위혁이라는 분은 보이지 않는다. 위징 가보의 위징 공 부분을 옮겨보겠다.
[세계 위씨 종친회 회장 이 밝힌 거록 위씨 족보] 四十五世祖魏徵公字積善號元臣妣斐、何、陳、徐氏生四子長叔玉、次叔瑜、三叔琬、四叔璘。 45세조 위징(魏徵) 공 자(字)는 적선(積善), 호(號)는 원신(元臣) 할머니는 비(斐), 하(何), 진(陳), 서씨(徐氏)이고 네 분의 아드님을 나셨는데 장남는 숙옥(叔玉), 차남은 숙유(叔瑜), 삼남 숙완(叔琬), 사남은 숙린(叔璘)이다. 魏徵公之後傳四房子孫......『魏氏大宗譜』之『魏氏公譜乙』所載徵公→接長子叔玉→魏殷→魏明→魏馮→魏謨 ....... 위징 공은 후에 네분의 서자손을 두셨는데 [위씨대종보]의 [위씨공보을]에 위징 공의 기록을 보면- 첩 장자 숙옥(接長子叔玉)→위은(魏殷)→위명(魏明)→위빙(魏馮)→위모(魏謨) .....
위의 기록을 보면 중국의 위징 공의 후손은 첩장자로 기록된 숙옥 공의 후예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단서를 하나 유추할 수 있다. 즉 위경 공이 중국 위씨 족보에 보이지 않는 것은 위징 공의 적장자(嫡長子)일 가능성이다. 위경 공의 함자는 [奕, 齡]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대로라면 8학사가 동래한 643년은 위징 공이 붕어하신 해이다. 그리고 중국 학자가 주장하고 있는 위징 공의 족보를 보면 안리왕의 후예가 아니고 안리왕의 이복아우인 전국시대 사공자의 한 분이신 신릉군 위무기 공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는 족보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이런 결과가 있게되는 이유는 고대에는 족보를 사가(私家)에서 기록하면 사형이었다. 족보는 관청에서 기록하기 때문에 때로 착오가 있을 수 있고 탈루된 사항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즉, 족보가 후대에 기록되는 과정에서 위징 공의 적장자의 기록이 빠졌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위씨가 처음 하북성 거록에 정착하게 된 것에 대해서는 다음의 기록으로 설명을 한다.
據《新唐書‧宰相世系表》和《魏書‧列傳九二‧魏收自序》記載:魏公子無忌是魏昭王之子。魏公子無忌之孫魏無知,漢初〔公元前二○六年〕被封為高梁侯。魏無知之子是魏均。魏均的曾孫魏歆,漢成帝時〔公元前卅四年↓公元前七年〕為鉅鹿太守,初居下曲陽〔今屬河北省晉州市〕。 [신당서, 재상세계표]와 [위서, 열전 92, 위유(魏書의 편찬자, 신릉군의 손 위무지의 후예)가 스스로 쓴 서문]에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위공자(魏公子) 무기(無忌)는 위소왕(魏昭王)의 아드님이다. 위공자 무기의 손자 위무지(魏無知)는 한나라초(기원전 206년) 고량후(高梁侯)에 봉해졌다. 위무지의 자(子)는 위균(魏均)이고, 위균의 증손이 위흠(魏歆)이고, 한나라 성제(成帝. 기원전 30년~기원전 7년) 때 거록태수(鉅鹿太守)가 되었고 처음으로 거록(鉅鹿)의 하곡양(下曲陽. 하북성 평향현(平鄕縣) 西, 지금은 하북성 진주시(晉州市)에 속한다 )에 살게 되었다. 즉 위흠(魏歆) 공께서 거록의 태수가 되시면서 위씨들이 거록(鉅鹿)으로 모여들어 대종(大宗)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자료를 보면 위무지공의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였다고 한다. [하북성 거록현(河北省 巨鹿縣) 인터넷주소 : http://www.julu.gov.cn/ 그러면 위징 공에 대해 간략한 기록을 옮겨 보겠다.
[ 魏徵 ] 출생 - 사망 580 ~ 643 당나라 초기 위군(魏郡) 내황(內黃) 사람. 조적(祖籍)은 거록(鉅鹿) 곡성(曲城)인데, 관도(館陶)라고도 한다. 자는 현성(玄成)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어릴 때 가난하여 출가해 도사(道士)가 되었다. 책 읽기를 좋아했고, 자기 생각을 말로 잘 표현했다. 수나라 말 혼란기에 무양군승(武陽郡丞) 원보장(元寶藏)의 전서기(典書記)가 되었다가 원보장을 따라 이밀(李密)에게 귀순했다. 다시 이밀을 따라 당고조(唐高祖)에게 귀순하여 고조의 장자 이건성(李建成)의 측근이 되었다. 비서승(秘書丞)이 되어 여양(黎陽)에서 이적(李勣) 등에게 항복을 권했다. 두건덕(竇建德)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두건덕이 패한 뒤 당나라로 돌아와 태자세마(太子洗馬)가 되었다. 황태자 이건성이 동생 이세민(李世民)과의 경쟁에서 패했지만 그의 인격에 끌린 태종의 부름을 받아 간의대부(諫議大夫) 등의 요직을 역임한 뒤 나중에 재상으로 중용되었다. 정관(貞觀) 2년(628) 비서감으로 옮겨 조정에 참여했다. 학자를 불러 사부서(四部書)를 정리할 것을 건의했다. 7년(633) 왕규(王珪)를 대신해 시중(侍中)이 되었다. 당시 영호덕분(令狐德棻) 등이 『주서(周書)』와 『수서(隋書)』를 편찬했는데, 황명을 받아 찬정(撰定)하여 양사(良史)란 칭송을 들었다.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에 오르고 정국공(鄭國公)에 봉해졌다. 평소 담력과 지략을 가져 굽힐 줄 모르고 직간(直諫)을 거듭해 황제의 분노를 샀지만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16년(642) 태자태사(太子太師)가 되고, 문하사(門下事) 일도 그대로 맡았다. 병으로 서거하자 황제가 “무릇 구리로 거울을 만들면 의관을 단정히 할 수 있고, 옛날로 거울을 삼으면 흥망을 알 수 있으며, 사람으로 거울을 삼으면 득실을 밝힐 수 있다. 짐은 일찍이 이 세 가지를 가져 내 허물을 막을 수 있었다. 지금 위징이 세상을 떠나니, 거울 하나를 잃어버렸도다.(夫璘爲鑑 可正衣冠 以古爲鑑 可知興替 以人爲鑑 可明得失 朕嘗保此三鑑 內防己過 今魏徵逝 一鑑亡矣)”고 애석해 했다. 그가 한 말은 『정관정요(貞觀政要)』에 잘 나와 있다. 그밖에 『유례(類禮)』와 『군서치요(群書治要)』 등의 편찬에도 큰 공헌을 했다. 문집이 전한다.
당태종과 위징, 두여회, 방현령 등 당시 재상들과 국정에 관해 논한 이야기를 간추려 편찬한 책이 [정관정요(貞觀政要)]라는 책이다. 이 책에 당태종은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以古爲鏡 以史爲鑒(이고위경 이사위감)
夫璘爲鏡(부이동위경) 대저 구리로 거울을 삼으면 可以正衣冠(가이정의관) 의관을 바로 할 수 있고 以古爲鏡(이고위경) 옛일로 거울을 삼으면 可以知興替 (가이지흥체) 흥망성쇠를 알 수 있으며 以人爲鏡(이인위경) 사람으로 거울을 삼으면 可以明得失(가이명득실) 득실을 밝힐 수 있다.
朕常保此三鏡(짐상보차삼경) 짐은 항상 이 세 개의 거울로 以防己過(이방기과) 나의 과실을 예방하였는데 今魏徵殂逝(금위징조서) 지금 위징이 죽었으니 遂亡一鏡矣(수망일경의) 하나의 거울을 잃은 것이다.<貞觀政要>
간태종십사소(諫太宗十思疏)
/ 위징(魏徵)
신은 들었습니다
“나무가 크게 자라기를 바라는 자는 必固其根本(필고기근본) 나무의 뿌리를 견고하게 해주고
물이 멀리까지 흘러가기를 바라는 자는 그 물이 시작되는 곳에 도랑을 쳐주며 나라가 안정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덕과 의를 쌓아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물의 근원이 깊지 않은데 어찌 그 물의 흐름이 멀리 갈 수 있으며 뿌리가 견고하지 못한데 어찌 나무가 크게 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우둔한 사람도 덕이 없으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기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하물며 명철한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천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중임을 맡고 있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숭고하고 지극한 지위에 올라
영원히 나라의 안정을 누리려고 하면서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생각하지 않고 사치스러움을 경계하여 근검하지 않으며
덕을 깊이 쌓지 않고 마음이 욕망을 누르지 못하면 바로 나무의 뿌리를 베어 내고서 나무가 무성하기를 바라고 물의 근원을 막고서 물이 멀리까지 흐르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무릇 역대 군주께서는
하늘의 큰 사명을 받아 어려운 시기에 덕을 나타내지 않음이 없었으나 성공한 이후에 오히려 덕이 쇠락해졌습니다
처음 시작을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천하를 얻는 것은 쉽고 지키는 것이 어려워였습니까? 옛날에는 천하를 얻고도 여러 해되었는데 지금은 천하를 지키기에도 모자라니 왜 그렇겠습니까? 夫在殷憂(부재은우)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는 아래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지만 뜻을 이루고 나면 멋대로 하고 오만하여 사람들을 능멸하기 때문입니다
정성을 다하면 호나라와 월나라처럼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하나가 되고 사람들을 능멸하면
골육간이라도 남남이 되어 버립니다
비록 엄한 형벌로 바로잡고
위세와 노기로 사람을 제압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요행히 법률에 저촉되지 않으려는 생각만을 가지게 될 뿐 인의 마음은 갖지 않게 됩니다
貌恭而不心服(모공이불심복) 겉으로는 공경하는 체하지만 마음으로는 복종하지 않습니다
원한은 큰 데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며
무서워 할 것은 백성뿐입니다
물이 배를 띄울 수 있지만 배를 뒤집어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신중히 하셔야 합니다
다 썩은 수레 끈으로 빨리 달리는 수레를 부리는 격이니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군주 된 사람은
좋은 물건을 보면 족할 줄 알아 스스로 경계하여야 하고 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적당한 곳에서 그저 백성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지위가 높아지면 위험이 커질까 걱정하며
겸허하게 자기의 덕행을 쌓고
두려음이 충만해지면 바다와 강물이 냇물보다 더 낮은 곳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곳저곳을 사냥하며 놀기를 즐길 때는 반드시 세 번 이상 말을 타고 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며
나태하고 게을러질까를 두려울 때는
시작을 신중히 하고 일의 끝을 잘 감가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상하의 의견이 막힐까 걱정도리 때는 마음을 비워 신하들의 간하는 말을 들어야 하며
간사한 사람이 전언할까 걱정될 때는 자기 스스로를 단정히 하여 악한 사람을 물리쳐야 합니다
상 내리기를 좋아하면
기분이 좋아서 상을 잘못 내리지 않도록 해야 하며
벌을 내릴 때는
노여움을 발해서 벌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상 열 가지 생각을 총괄한다면
바로 옛 사람의 구덕을 넓게 펴는 것입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임용하고
훌륭한 말을 가려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총명한 사람들을 자기의 계획을 내놓을 것이고
용감한 사람은 자기의 힘을 다할 것입니다
어진 사람은 그의 사랑을 펴고
신실한 사람은 그의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문무백관이 다투어 그들이 잘 하는 바를 하고 임금과 신하 간에 평안할 것입니다
편안히 즐거움을 누릴 수 있고
적송자와 왕자교처럼 오래 살 수 있습니다
거문고를 타며 옷을 늘어뜨린 채
말하지 않아도 세상이 교화될 것입니다
어찌 노심초사하여
관리를 바꾸어 직무를 맡기고
役聰明之耳目(역총명지이목) 총명한 눈과 귀를 피곤하게 하여 무위하게 다스려지는 도를 훼손시키겠습니까?
위경 공은 당성에 도착하신 후 2년 뒤 다시 신라로 가셨다. 이 해는 645년 당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하는 해이다. 신라는 640년 당과 조공관계의 국교를 맺는다. 당태종은 위징 공이 생존시에 사돈을 맺을 것을 약속했다. 당나라의 명운이 걸린 중차대한 시기에 시조공께서 신라로 재파견 된 것은 매우 중요한 임무를 띠고 가신 것이 분명하다. 신라국 선덕여왕의 도예지사 초청으로 신라로 가신 것으로 전하나, 분명한 것은 정치적으로 큰 임무를 띠고 신라로 가신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위경 公의 벼슬이 문하습비후 대아찬상서시중(門下拾非侯 大阿飡尙書侍中. 귀화 진골)이고 훗날 고려 말에 송광사 16국사 중의 한 분이신 원감국사 충지 스님이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가 스승의 예로 청하여 가셨을 때 위경 公을 황제가 원나라의 승상으로 추증하였다는 기록이 송광사 문서에 기록하여 전하니,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위경 공의 생전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흥위씨가 전남 장흥에 세거하기 시작한 때는 대체로 신라말 중앙의 왕위 쟁탈전이 극심하였을 때 경주에서 장흥으로 이거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장흥위씨의 전남 장흥의 최초 세거지는 장흥성 내의 치소(治所)로 쓰였던 지금 장흥법원 검창청 부지이다. 이곳에서 신라 말~조선 건국 초까지 최소한 400여년 이상을 세거하였다. 장흥성은 본시 장흥위씨의 성으로 갑오년 동학농민 전쟁으로 성내의 모든 가옥이 전소되기 전까지는 옛 호족에 생활상을 옅볼 수 있었던 상당수의 고건축이 있었다고 전한다. 향후 장흥성을 복원하여 옛 문화유적으로 재건설을 도모함이 장흥위문의 과제이기도 하다. 현재의 장흥위씨 마을인 방촌리는 조선시대에 이거해 온 곳이다. (장흥위씨 시조공 사당 하산사 보러가기: 아래 인터넷 주소를 클릭해주세요) http://cafe.daum.net/yhmokpo/GZyL/1501?q=%C0%E5%C8%EF%C0%A7%BE%BE%20%C7%CF%BB%EA%BB%E7&re=1 魏氏淵源始祖畢公高至 (위씨연원, 시조 필공고에서 필만공까지) 太始祖 第一世 第二世 第三世 第四世 第五世 第六世 第七世 第八世 第九世
文王昌公→畢公高 → 畢曉公 →畢運公→ 畢菜公→ 畢熊公→ 畢閼公→ 畢峰公→ 畢肅公 →畢密公
第十世 第十一世 第十二世 第十三世 第十四世 第十五世 (下接魏氏二世祖)
畢通公 →畢墩公 → 畢留公 → 畢鎮公→ 畢显公→ 畢萬公 → 魏犨公
第二世祖畢曄公:畢公高之長子,生二子,長預、次和。 第二世祖畢魴公:畢公高之次子,生一子,素公。 第二世祖畢曉公:畢公高之三子,生一子,運公。 第三世祖畢預公:畢曄公之長子,生二子,長衡、次費。 第三世祖畢和公:畢曄公之次子。 第三世祖畢素公:畢魴公子,生二子,長願、次陳。 第三世祖畢運公:畢曉公子,生二子,長成璜、次菜。 第四世祖畢衡公:畢預公之長子,生二子,長籍、次副。 第四世祖畢費公:畢預公之次子,生一子,梁棟公。 第四世祖畢願公:畢素公之長子,生二子,長宗、次尚。 第四世祖畢陳公:畢素公之次子,生一子,惟公。 第四世祖畢成璜公:畢運公之長子,生一子,謂公。 第四世祖畢菜公:畢運公之次子,生二子,長熊、次霸。 第五世祖畢籍公:畢衡公之長子,生一子,敏公。 第五世祖畢副公:畢衡公之次子,生二子,長斐遷安邑、次棐遷治南。 第五世祖畢宗公:畢願公之長子,生二子,長贈、次村。 第五世祖畢惟公:畢陳公之長子,生二子,長御、次齊。 第五世祖畢熊公:畢菜公之長子,生一子,閼公。 第五世祖畢霸公:畢菜公之次子。 第六世祖畢閼公:畢熊公之長子,生三子,長祥為十師、次肇居鎬、三峰為將軍。 第七世祖畢峰公:畢閼公之三子,生三子,長有聲、次考為大夫、三肅。 第八世祖畢有聲公:畢峰公之長子,生二子,長銷、次檀。 第八世祖畢考公:畢峰公之次子,生二子,長銷、次檀。 第八世祖畢有聲公:畢峰公之長子,生一子,和孝公。 第八世祖畢肅公:畢峰公之三子,生一子,密公。 第九世祖畢密公:畢肅公之長子,生一子,通公。 第十世祖畢通公:畢密公之長子,生一子,墩公。 第十一世祖畢墩公:畢通公之長子,生四子,長留、次澈、三襄、四倫。 第十二世祖畢留公:畢墩公之長子,生一子,鎮公。 第十三世祖畢鎮公:畢墩公之長子,生二子,長显、次皇。 第十四世祖畢显公:畢墩公之長子,生二子,長畢萬、次畢晉。 第十五世祖畢萬公:畢显公之長子,生一子,畢犨。畢公高之十五世孫,與趙夙同事晉獻公為大夫,有戰功,封於魏,食采即現河南省北部及山西省西南部一帶。因為魏姓始祖,子孫即以國為姓,望出鉅鹿、任城。後晉獻公卒四公子爭立亂,畢萬之世彌大。 ●公元前1015年周康王命畢公高治理成周。(기원전 1015년 주강왕이 필공고에게 성주(成周)를 다스릴 것을 명하였다.) [고대 중국, 주왕조가 현재의 하남성 낙양 근처에 건설한 동도(東都). 서도(西都) 종주(宗周)가 주나라의 종묘를 둔 본거지인 반면, 동도 성주는 동방 경영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정치도시. 성왕(B.C. 11세기 말)이 동방의 반란을 평정하고 주공 ∙ 소공에게 명하여 상(商)의 유민들을 동원하여 건설함. 뒷날 한(漢)의 낙양성 장소라 하며, 서쪽 낙읍에 왕성을 건설함. 왕성은 간수 동안(東岸)에 위치하고 한대의 하남현성 바깥쪽 약 3km 사방에 성벽의 흔적이 있다. 기원전 771년 융적의 침입을 받은 주(周)가 도읍을 종주(宗周)라고 불리는 호경(鎬京)에서 성주(成周)로 옮겨, 동주(東周) 시대의 수도가 되었다.] ※太始祖畢萬公﹝畢萬公依推算應為畢公高之十五世裔孫﹞〈妣劉氏〉生一子芒季。畢高之十五世裔孫,公於晉獻公時為大夫,十八年八月因伐霍有功,封采邑於魏遂以國為姓。 ※第五世祖魏贏公字靈謚貞子〈妣周、寧氏〉生一子舒。 ※十八世祖魏安釐王魏圉諱安釐生三子長增、次經、三綸,在位卅四年。長子增公即位景愍王在位十五年,生子王假,秦滅國亡子孫投奔鉅鹿淪為庶民。 ※四十二世祖諱玉琳公謚法康﹝五代南宋孝武帝時官任總鎮﹞〈妣駱氏〉生四子長英次史三典四璋。 ※四十五世祖 魏鏡公 諱 奕. 諡號 懷州君 AD 643年頃 韓國 東來. 新羅國 善德女王代 官 門下拾非侯 大阿飡尙書侍中. |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以人爲鏡)
수나라 말기에 와강군에 들어갔던 위징(魏徵)은 나중에 당군에 들어갔으며, 황태자 이건성의 시종관으로 있을 때 진왕 이세민을 제거해야 한다고 여러 번 권유했다.
‘현무문의 변’ 이후에 누군가가 위징이 이세민을 죽이려고 했다고 고발했다. 이세민은 위징을 불러다가 따져 물었다. “그대는 어이하여 우리 형제 사이를 이간질했느냐?” 그러자 위징은 당당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만일 황태자께서 소신의 말을 들었더라면 오늘과 같은 일은 당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좌우 대신들은 위징이 죽을 말을 했다고 손에 땀을 쥐었다. 그러나 이세민은 도리어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위징의 정직함을 높이 산 이세민은 그를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임명했다.
626년에 태종이 장병을 징집할 때 한 대신이 18세가 안 되어도 키가 크고 몸이 건장한 남자라면 징집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태종은 이를 받아들여 조서를 작성했는데 위징이 그 조서를 하급 기관으로 내려보내지 않았다. 태종이 여러 번 재촉했지만 위징은 말을 듣지 않고 조서를 발송하지 않았다. 노기충천한 태종은 위징을 불러 엄하게 꾸짖었다. “짐의 조서를 깔고 앉아 발송하지 않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느냐?” 그러자 위징은 이렇게 대답했다. “신은 폐하의 조서에 찬성할 수 없사옵니다. 군대가 강대한가 강대하지 못한가는 사람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군사를 어떻게 훈련하고 어떻게 지휘하는가에 달려 있사옵니다. 이는 연못과 물고기의 관계와 같사옵니다. 연못의 물을 다 없애면 한꺼번에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지만 나중에는 잡을 물고기가 없어지게 됩니다. 지금 18세가 안 된 남자들도 모두 징집하신다면 앞으로 어디 가서 병사를 충당하시겠습니까?”
태종은 위징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았다. 그러자 위징은 좀더 언성을 높였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말씀대로 하지 않으신 것이 벌써 몇 번째입니까? 이러시면 백성들의 신뢰를 잃게 됩니다.” 태종은 말문이 막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불편한 심기를 가라앉히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으며, 18세 이하의 남자는 징집하지 않는다는 조서를 새로 내렸다.
한번은 태종이 낙양을 순시하러 가던 길에 소인궁(昭仁宮)에 머물렀는데 음식 대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크게 화를 냈다. 그것을 본 위징은 면전에서 태종에게 직언을 했다. “수 양제가 유람할 때 백성들이 바치는 음식이 좋지 않다며 화를 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늘 허덕였으며, 이로 인해 수나라가 망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이를 교훈으로 삼으셔야 합니다. 오늘의 이 같은 음식에도 만족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욕심대로 하신다면 이보다 만 배나 좋은 진수성찬을 차린다 해도 만족하시지 못할 겁니다.” 이 말을 듣고 태종은 깨달은 바가 많아 고개를 끄덕였다. “경의 말이 일리가 있네. 경이 깨우쳐주지 않았다면 큰일을 그르칠 뻔했네.”
643년, 나이 예순셋인 위징은 중병에 걸렸다. 태종은 자주 위징에 사람을 보내서 병문안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위징의 병이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은 태종은 황태자를 데리고 급히 위징의 집으로 갔다. 태종은 슬픈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경은 할 말이 없소?”위징은 꺼져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답했다. “소신은 나라의 안위가 걱정되옵니다. 지금 천하는 안정되고 나라는 창성(昌盛)하옵지만, 폐하께옵서는 이런 태평성대일수록 위태로울 때를 생각하시고 이를 대비하셔야 하옵니다.” (고사성어 ‘거안사위(居安思危)’는 여기서 유래한 말이다.) 태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꼭 명심하겠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에 위징은 세상을 떠났다.
태종은 이를 매우 비통해했으며, 자신이 직접 묘비의 비문을 썼다. 이후로도 위징을 잊지 못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는데, 하루는 조정 대신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면 의관이 바른지를 알 수 있고,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나라의 흥망성쇠의 도리를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자신의 잘잘못을 알 수 있는 법이오. 위징이 죽었으니 나는 거울을 잃어버린 것이오.” 위징의 충직한 간언과 태종의 충언을 잘 받아들이는 자세 덕분에 당나라는 큰 번영을 누렸다. 이 태평성대의 시기를 역사상에서는 ‘정관의 치(貞觀之治)’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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