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진해는 10년 이상을 지낸 곳이니 고향이나 다름없다. 어릴 적 고향에서 9살까지, 학창시절을 보낸 대구에서 8년을 살았으니 진해는 인생에서 가장 긴 세월을 보낸 곳이다. 그러나 군인이란 언제 어디로 갈지 모르니 한 곳에 정붙이기가 힘들다. 그래서인지 진해에 살면서도 스스로 시민으로 인식하고 지낸 기억은 그다지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퇴직하면 진해나 인근에서 정착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이 도시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진해문인협회에 가입하는 일이었다. 좋아하는 시쓰기를 밑천으로 지역에 뿌리내린 분들과 교류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비록 잠깐 활동하다가 진해를 한동안 떠나있게 되었지만, 향토의 문인들이 아끼고 가꿔가는 풀뿌리문학은 순수함이 살아있어서 좋았다. 다음으로 한 것은 진해를 내 두 발로 걷는 일이었다. 자동차로 주마간산 하는 것 말고, 한 발 한 발 걸으며 진해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인터넷 지도를 보면서 코스를 계획했다. 장복산 임도를 종주하고 백일뒷산으로 내려와 조선소, 수치와 행암을 돌아오는 35km 코스였다. 막상 혼자서 하루 종일 걸으려니 머쓱하기도 하고 엄두도 나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가 날짜를 잡아서 무작정 나섰다. 2013년 9월 19일 추석날, 아내와 아이들은 시골에 가고 혼자 있으니 어차피 집에 있으면 서글플 터였다. 혼자 걷는 길에서 가장 힘든 것은 집을 나서고 동네를 벗어나는 일이다. 아침을 먹고 동상동 관사를 떠나 30분 만에 장복산 공원으로 접어들고 나니 나서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구 장복터널 가까이에 있는 임도 시작점에 접어드니 추석에 혼자 있는 쓸쓸함은 사라지고, 오전의 햇살이 따뜻하게 온 몸을 감싼다.
계획한 전체코스의 절반인 17km 정도가 임도 구간이다. 장복산 5부능선쯤에 길게 조성된 임도(드림로드)는 모두 세 구간으로 나뉜다. 출발지인 구 장복터널 입구에서 안민도로를 만나기까지는 ‘장복 하늘마루산길’로 3.8km이다. 안민도로에서 청룡사와 진해구청을 지나 만장대까지 이어진 긴 길이 ‘천자봉 해오름길’로 9.9km이다. 만장대 아래에서 웅천 백일마을까지 이어지는 마지막 코스는 ‘백일 아침고요산길’이며 3.1km이다. 왼쪽은 산, 오른쪽은 바다를 보고 걷는 기분이 상쾌하다. 청룡사를 지나갈 때쯤 다리가 아파오기 전까지는.... 진해구청 근처까지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꽤 보이다가 만장대를 지나 백일마을로 가는 길은 적막하다. 이렇게 좋은 길에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고요하다. 하지만 잠시 후 고요가 좋아진다. 평화롭다. 어릴 적 나만의 비밀장소를 발견한 느낌이랄까. 적당하게 자란 풀을 발목으로 스치며 걷는 느낌이 나쁘지 않다.
산길을 내려오고 주유소 화장실에 앉아 근심을 해결하고 나니 다시 힘이 난다. 조선소 쪽으로 접어드는 길에 천자봉 공원묘지가 있다. 아차, 오늘이 추석이지. 한복, 양복 잘 차려입은 가족성묘객들 사이로 등산복 입고 혼자 털레털레 걷기가 좀 그렇다. 얼른 지나친다. STX조선소를 지나 수치로 접어든다. 몇 해 전만 하더라도 수치는 진해에서 괜찮은 드라이브 코스였다. 나름 카페나 레스토랑도 있어 가볍게 나들이하기 좋은 곳이었다. 지금은 세를 확장한 조선소에 대부분 매각되어 공장 부지처럼 되어버린 느낌이 아쉽다. 그렇게 고갯길을 넘고 행암 부둣가 계단에 앉아 캔커피 하나 마시는 호사를 누리기도 한다. 1부두 긴 직선길을 바닷바람과 상선의 고된 작업을 보면서 걷는다. 풍호동을 지나 전에는 섬이었다가 이젠 매립되어 야산이 되어버린 소죽도를 지날 때쯤 발바닥이 따끔거린다. 오랜만에 생긴 발바닥 물집이다. 겨우 이정도 걷고 물집이라니, 훈련 다시 받아야겠다. 아참 그건 아니고...
진해루 편의점에서 주린 배를 달래고 좀 쉬다가 속천동과 공설운동장을 지나 동상동 집으로 돌아갔다. 총연장 35km, 아침 8시 출발 저녁 6시 반 도착. 10시간 반. 남은 것은 진해를 한 바퀴 걸었다는 뿌듯함과 양 발바닥에 물집 하나씩. 그리고 이렇게 걷는 것도 재밌으니 앞으로 계속 이런 걷기를 계속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퇴직하고 나면 도보여행가가 되어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걷고 쓰고 싶은 생각까지 든다. 실제 칠순이 넘은 할머니 도보여행가가 우리나라 해안 일주를 거뜬히 하는 것도 본 적이 있다.
추석날의 걷기 이후 다른 코스로 두 번을 더 걸었다. 한 번은 장복산 정상의 능선을 따라 걸었다. 터널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장복산 봉우리로 올라 천자봉까지 완주하고 만장대를 지나 내려왔다. 원래 계획은 거기서 바닷가의 같은 코스로 걸어서 복귀하는 계획이었으나, 같이 간 후배가 많이 지친 바람에 서중소류지 맞은편에서 315번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땀에 젖은 두 사람의 몰골이 가관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은 좀 더 길게 코스를 잡았다. 동상동을 출발해 경화역, 구청을 지나 웅천, 용원, 안골을 돌아 제덕과 명동 해양공원을 돌아오는 50km 코스였다. 10월 26일 토요일, 새벽 5시에 출발해서 7시 반에 돌아왔다. 14시간 반. 하루 코스로는 꽤 강행군이었다. 지난번 보다 훨씬 큰 물집이 두 발에 생겨 마지막 8km 정도는 발바닥으로 걷지 못하고 발의 바깥 모서리로 걸어야 했다. 하지만 걸으며 보았던 이른 새벽녘 대야동의 낡은 가게들, 농가 도로변에서 콩을 말리는 모습, 웅동의 박배덕 갤러리에서 감사히 먹었던 잘 익은 홍시와 뛰어난 미술작품들, 버튼을 밟으면 구성진 노래가 흘러나오는 황포돛대 노래비, 제덕만에서 캠핑하는 가족들의 웃음소리 등은 지금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걷는 것은 참 좋은 것이다. 차를 타고 다닐 때는 출발지과 목적지 외에는 없었다. 목적지까지 가는 중간과정은 단지 교통사고를 피해야 하는 스트레스였다. 하지만 걷는 것은 그런 중간과정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 어쩌면 목적지보다 걷는 행위 자체를 더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걸어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단지 운동만은 아니다. 삶을 훨씬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것이 분명히 있다.
진해를 잠시 떠나 평택으로 온지 1년이 되어간다. 바쁜 와중에 여기 평택시 포승읍 외곽을 걷는 32km 코스를 개발했다. 경기평야에 나락이 잘 익은 황금벌판을 따라 걷는 느낌이 진해와는 또 색다르다.
첫댓글 퍼 가서 계간진해에 싣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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