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후기 #223회(걸어서답사하기) (회장님 후기)
#백사실계곡 #雨中답사(8.1일)#후기(1편)코로나 사태속에서도 세월은 흘러 어느새 8월 ㅠㅠ
매달 첫 토요일은 걸어서 답사하기입니다.
무더위를 예상하여 한양북쪽의 숲길을 걸어보는 답사로 준비하였는데 하필이면 여름장마가 겹쳐 며칠째 주구장창 비가 내립니다.
장마인지? 雨期인지? 후기를 쓰는 지금도 비가 내립니다. ㅠㅠ
그래도 답사 당일 오전에 날이 맑아지기에 집을 나섰는데 점심때가 되어 다시 빗줄기가 거세지니 참석자들 저마다 어찌해야할지? 난감해집니다.
그래서 각자의 판단에 맡기니 신청 12명중 5명이 포기하고 1명이 추가합류하여 최종 8명이 나섰습니다.
그렇게 다녀온 답사 이야기.....^^
내문답 223회 정기답사 (걸어서 답사하기)ㅇ 8. 1일, 오후 2시~
ㅇ 참석 : 강지영님, 이경희님, 천동우님, 김미영님, 김순화님, 안병애님, 박성희님, 김신묵 (8명)
ㅇ 답사코스 : (1)자하문(紫霞門) - (2)백사실(白沙室) 계곡 - (3)현통사(玄通寺) - (6)장의사(藏義寺)址 당간지주 - (5)탕춘대(蕩春臺) 터 - (4)세검정(洗劍亭) - (7)석파랑(石坡廊) - (8)이광수 별장터 - (9)홍지문(弘智門)/탕춘대성(蕩春臺城) - (10)보도각(普渡閣) 백불(白佛) - (A)뒤풀이(포방터 주꾸미)
ㅇ 자하문(紫霞門) (보물 제1881호)
원래 정식명칭은 창의문(彰義門), 한양의 북소문(北小門)이다.
한양의 4대문, 4소문중 가장 오랜 最古의 도성문(숭례문 문루가 불 타 버려 복원된 후 가장 오래된 도성 문루가 되었다.)으로 4소문중 유일하게 원형을 보존하고있어 다른 문루 복원시 고증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1396년(태조5) 처음 지어진 후 1741년(영조17)에 개축되었다. 화강석으로 내외 홍예문으로 구성된 육축을 쌓았으며, 그 위 단층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우진각 겹처마지붕이다.
태종 13년(1413)에는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이“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건의 한 것을 받아들여 두 문을 닫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 4년(1422)에는 군인들의 출입 통로로 이용할 수 있게 했고, 광해군 9년(1617)에는 궁궐 보수 작업 때 석재를 운반하기 위하여 열어 주도록 하였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당시에도 길 자체는 있었던 것 같다.
자하문(紫霞門)은 주로 민간에서 불렀는데 고개를 뜻하는 재, 자 글자 그대로 성의 의미로 쓰이면서 산마루 성문을 ‘잣문’으로, 그 아래 마을을 ‘잣동’, ‘잣골’로 불렀다. 또한 창의문 안쪽 풍광이 아름답다거나 개성 북성문 아래 자하동과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창의문(彰義門)을 장의문(藏義門, 壯義門)이라 부는 까닭은 성밖에 장의사(藏義寺)가 있었고 안쪽에 장의동(藏義洞)이 있어서 붙여진 별명으로 659년(무열왕6) 창건된 장의사에서 태조의 정비 신의왕후 한씨의 기신제를 지냈고 장의동에는 태종과 세종의 잠저가 있던 곳이다.
<답사를 시작하는 자하문 앞에서... 왼쪽부터 김신묵, 김미영님, 김순화님, 박성희님, 천동우님, 이경희님, 강지영님, 안병애님....8명이 함께 하였네요.>
문루에 올라가는것을 허락하지 않아 들어가볼수는 없었는데 (전에는 들어갈수 있었음) 그곳에는 인조반정 공신들을 새긴 현판이 걸려있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다시 역적이 되고 지워진 이름들도 있어 교훈이 된다고 하며...
자하문 성문에는 닭(을 닮은 봉황)을 새겼는데 이는 왼쪽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지맥이 독을 품은 지네를 닮아 지네와 상극인 닭을 새겼다는 속설이 있다. 그래서 자하문 밖에 맛집치킨이 몇 곳 있다는 주장(?)은 그냥 주장일뿐일테고....ㅎㅎ
뭐니뭐니해도 압권은 자하문 밖을 떡- 가로막은 인왕-북악 스카이웨이 연결 고가도로인데 개설당시에는 어쩔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지금이라도 다시 고쳐지어서 자하문 밖 정면 시야를 탁- 틔워주면 좋겠다.
<자하문 안쪽에서 바라본 풍경. 가운데 노란 원이 봉황을 새긴것이며 좌우 흰색 원은 물이 빠지는 수구(水口)를 연꽃 모양으로 멋지게 만든 것이다. 가운데 홍예(아치)문 밖의 또다른 홍예문과 꽉 막힌 축대가 인왕-북악 스카이웨이 연결 육교이다.>
자하문 밖을 나서니 새로생긴 멋진 한옥카페가 하나 있는데 벽면에 자하문의 옛모습 사진을 걸어놓아 반갑게 살펴보았다. 그래도 이런 관심을 가져주니 고맙다.
<옛 모습의 자하문. 구비구비 넘어다녔을 정겨운 모습이다.>
자하문을 넘어 김환기 미술관을 지나고 산모퉁이 카페를 지나는 완만한 오르막길을 걸어올라갔다. 산모퉁이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잔씩 하자했더니... 헐~ 8명이 앉을 자리가 없어 다시 나올수밖에... ㅠㅠ
<방송 드라마 출연으로 유명해진 산모퉁이 카페... 자가용 아베크족들로 늘 만원이다.>
백사실 계곡까지 걸아가는 동안 비는 오는듯 마는듯... 우산을 안쓰면 머리가 젖고 우산을 쓰면 불편한.... 그런 상황. 그래도 (빗줄기가 거세지지 않고) 이만큼 참아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자위하며 계속 걸어 마침내 백석동천(白石洞天) 각자(刻字)바위 앞에 도착했다.
ㅇ 백사실(白沙室) 계곡 (명승 제36호)
<백사실 계곡 초입의 백석동천(白石洞天) 각자(刻字) 바위. 백석(白石)은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백악산)을 말하며, 동천(洞天)은 신선이 사는 마을? 하늘아래 살기좋은 마을 (도교사상)을 말하니 '북악산에 있는 경치좋고 살기좋은 곳'쯤으로 해석하면 될 듯하다.>
조금 더 내려가면 백사 이항복의 별장이 있었다해서 백사실(白沙室) 계곡이라 불리우는 자리... 건물 터와 연못가 정자 터가 있는데 그 왼쪽 산 능성에 또하나의 각자(刻字) 바위가 있다. 숨겨져 있어 잘 안보이는데 알지못하면 그냥 지나친다.
<수풀에 가려 잘 안보이는데..... 月巖(월암)이라 새겨진 바위다. 달이 뜨기를 바라고 적은 것인지? 구름에 가려 보이다 안보이다하는 달을 떠올리듯 여름에 숲이 우거져 잘 안보인다.>
이곳 백사실 계곡은 도룡뇽이 살만큼 청정하여 이를 지키기위해 노인 일자리 차원(?)에서 나이드신 분들이 교대로 지키고 있는 곳이다. 이분들은 노란 조끼를 입고 2명이상이 지킴이 노릇을 하고 계시는데 아마 구청에서 소정의 수고비를 주는듯 하다.
<설악산 어디쯤인듯한 이곳.... 백사실 계곡이다. 장맛비로 물길이 풍요롭다.>
며칠 내린 비로 물이 불어난 계곡을 건너면 왼쪽 조금 높은 지형에 안채와 사랑채 터만 남아 주춧돌들이 그대로 남아있고 오른쪽은 조금 낮은 지형에 커다란 연못이 둥글게 자리잡은 끄트머리에 6각 정자의 흔적... 6개의 주춧돌과 2개의 계단석이 절반은 땅위에, 절반에 물속에 잠긴 멋진 모습으로 남아있다.
<왼쪽 조금 높은 지형에 남아있는 안채와 사랑채 흔적들... 높직한 주춧돌은 돌출된 누마루인듯....하다.>
<집터에서 조금 낮은 지형에 커다란 둥근 연못이 있다. 수생식물이 가득하여 잘 식별이 되지 않는다. 반대쪽에 6각정자 흔적이 남아있다.>
<가까이 가 본 6각 정자의 흔적, 계단석 2개와 6개의 주춧돌이 절반은 연못에 잠긴채 남아있다. 연못 주변을 좀 가꾸고 정자를 복원하면 참 멋질듯 하다.>
<1935년 7월 19일자 동아일보. 백석동천 정자 모습. 한동안 백사실 계곡의 정자를 복원한다 어쩐다 설왕설래가 있었는데 그 원형을 알수없어 창덕궁 후원의 6각정자를 본떠 짓는다는 등.... 말만 무성하다가 위 사진(동아일보 기사)이 발견되었다. 근거를 찾은셈인데 정자복원 말은 없어졌는지 감감무소식이다.??>
이곳 백사실 건물은 이항복뿐 아니라 추사 김정희가 사들였다고도 하며 한때 연암 박지원의 소유였다고도 한다.
ㅇ 현통사(玄通寺)
백사실 계곡에서 계속 진행하면 나오는, 급전직하 떨어지는 암반계곡 옆 작은 절집이다. 일설에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는 하나 최근에서야 모양을 갖춘듯하다.
백사실 계곡 탐방객들이 이쯤 지날때면 화장실이 급하게되는데 이 절집 해우소(解憂所)는 꼭꼭 숨겼는지 보이지 않는다. ㅠㅠ (모쪼록 종교단체들은 최소한 용변을 보거나 갈증해소에 필요한 물 보시정도는 하는게 좋을듯...) 결국 우리는 꾹꾹 참고 내려와 파출소에서 체온재고 연락처 적고 화장실 신세를 졌다.
<삼각산 현통사. 비가와서 암반에 물길이 폭포를 이룬다. 서울의 유일한 폭포 '동령폭포'라고 한다. 절집은 여염집 대문처럼 두짝문을 들어서야하는에 일주문 역할을 하는듯하며 금강역사가 그려져있다. 입구 직전 왼쪽 암벽에는 일붕(一鵬) 서경보 스님의 애국시(愛國詩)를 새겨놓았다.>
<일붕(一鵬) 서경보 스님의 애국시(愛國詩). 필체가 특이하여 어디서 만나도 한눈에 알아본다.>
<대문을 들어서면 급경사 계단위에 당우들이 있는데 왼쪽이 제월당(霽月堂) 현판의 月자가 누워있는것이 눈길을 끈다. 동국대 모 교수님 글씨라고 하는데 왜 누웠는지는 모르겠다. 대웅보전 앞에는 좌우로 승탑모양의 석탑을 세웠는데 실제 어느 스님의 사리탑인지? 그저 보기 좋아서 세웠는지? ㅠㅠ>
현통사 아래는 다소 어수선하게 집들이 들어서있는데 (과거 무허가 건물들이 양성화조치로 그대로 남은듯) 절집을 지나 급전직하로 내리꽂는 암벽위 물줄기가 며칠 내린 비로 물이 불어 제법 폭포 흉내를 내고 있었다.
평지로 내려오니 일붕 서경보 스님과 연관된 선원(禪院)도 보이고 그 앞, 동네 입구에 불암(佛岩)을 하나 세웠는데 사람들 무관심인지 각종 불법적치물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불암(佛岩)이라 새기고 일붕(一鵬)조사문(祖師門)이라 새긴 바위. 선원 앞에 있는데 이곳이 일붕 서경보 스님과 어떤 연고인지는 모르겠다.>
ㅇ 장의사(藏義寺)터 당간지주 (보물 제235호)
산을 내려와 큰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세검정 초등학교가 나온다. 이 자리는 신라시대때 장춘랑과 파랑, 2명의 화랑의 장렬한 죽음을 위해 태종 무열왕이 세운 장의사(藏義寺)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인데 지금은 초등학교 마당에 당간지주만 남아있다.
<보물 제235호. 장의사 터 당간지주. 코로나사태로 학교를 폐쇄해놓아서 울타리 너머로만 보고 와야했다.>
세검정 초등학교는 장의사 터이기도 하면서 조선시대 종이를 만들던 조지서(造紙署)자리이며 영조때 한양의 북방을 방어하는 군영(軍營) 총융청(摠戎廳)을 주둔시킨 곳이기도 하다. (軍營을 새로 옮겼다하여 이곳 지명이 新營동이다.)
참고로 당시 한양의 방어는 모두 5개 군영이 맡았는데 훈련도감(訓鍊都監)·어영청(御營廳)·금위영(禁衛營)은 한양 내부를, 총융청(摠戎廳)은 한양북부를 맡아 이곳에... 수어청(守禦廳)은 한양 남부를 맡아 방어하는 체제였다.
ㅇ 탕춘대(蕩春臺) 터
자하문 밖, 풍치 좋던 이곳에 연산군은 민가들을 몰아내고 자신의 사냥터, 놀이터를 만들어 화려한 건물들과 정자를 세우니 그 이름이 탕춘대(蕩春臺)이다.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높직한 곳에 세웠을 것인데 지금은 흔적도 없고 고급 빌라촌이 되어있다. (나중에 영조는 무사들을 훈련시키는 장소로 바꾸었고 연융대(鍊戎臺)라 고쳐불렀다.)
<지금은 고급빌라촌이 된 탕춘대 자리. 그 숲속에 비석(흰색 원)이 하나보여 올라가보니 宋公壽天慈善不忘碑(송공수천자선불망비)라고 씌어있다. >
宋公, 즉 송 아무개 선생이 선정을 베풀어 이를 잊지못해 세운 비석이라는 뜻인데, 그 유래를 찾아보니 송선생은 당시 광성상회 주인으로 만주에 있던 송수천씨가 사립 창의학교가 어려움에 처하자 거액을 쾌척한 것을 기려 세웠다고 한다.
ㅇ 세검정(洗劍亭) (서울특별시 시도기념물 제4호)
탕춘대터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인조반정때 반군들이 결의를 다지며 칼을 씻었다는 세검정이다.
사실 세검정은 이곳으로 옮겨온 총융청의 무관들을 위한 쉼터 정자로 건설된듯하며 1941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77년에 지금 모습으로 복원한 丁자 모양의 3칸짜리 팔작지붕 건물이다.
<옛 사진(위)을 보면, 또 옛 그림(아래, 권섭(1671~1759) 그림)을 보면 세검정은 ㄷ자 울타리를 둘러치고 일각대문을 세워 제법 엄중하게 관리한 듯 하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세검정도 정자로 오르는 작은 문은 굳게 잠겨있고 허락없이 접근시 엄벌한다는 살벌한(?) 경고문이 붙어있다.
세검정 정자 아래 커다란 너럭바위는 차일을 치고 세초를 씻어 말리는등... 여러가지 일을 하던 차일암(遮日岩)이다.
<2부 후기로....계속>